〈 274화 〉 [273화]상환
* * *
"바로 저기가 양산박의 기지요. 내가 있을 때와 바뀌지 않았다면 말이오."
도미닉 경은 미스터 왕이 손가락으로 가리킨 방향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거대한 구덩이가 있었는데, 구덩이의 가운데에는 금속과 화강암으로 지어진 높은 건축물이 있었고 그 건축물의 외곽에는 용암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용암은 경사진 틀에 담겨 해자처럼 건물을 돌고 있었는데, 중간중간 창문이 열리며 어째서인지 CD나 하드웨어가 튀어나와 용암에 삼켜졌다.
그렇게 온갖 것들을 삼킨 용암은 건물의 가장 최하단부에 뚫린 구멍으로 흘러들어갔는데, 구멍의 반대편에는 증기를 배출하는 높고 커다란 배기구들이 있었고 그 배기구들 사이를 오르내리는 엘리베이터들이 존재했다.
엘리베이터들은 엄청난 양의 CD와 데이터를 옮기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저 용암을 재활용해 무언가를 만드는 모양이었다.
도미닉 경은 그 장엄한 광경에 혀를 내둘렀다.
"대단한 곳이로군. 지금까지 들키지 않았다라는 게 신기할 정도요."
"당연한 일이오. 초창기 양산박의 기술력이 그대로 들어간 그야말로 오파츠, 오버 테크놀로지니까."
미스터 왕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초창기 양산박은 지금처럼 범죄 조직은 아니었소. 그저 세계 최고의 기술력을 가진 시스템 인더스트리를 따라잡겠다고 생각하며 짝퉁이나 만들던 모임이었지. 그러나 그 신념이 삐뚤어지면서 양산된 것들을 범죄에 쓰기 시작한 거요. 그게 가장 확실하고, 편하게 자금을 버는 방법이었으니까."
미스터 왕은 구 양산박에 대해서 생각하는 듯 아련한 표정으로 그리 말했다.
도미닉 경이 물끄러미 미스터 왕을 바라보자, 미스터 왕은 멋쩍은 듯 헛기침했다.
"물론, 나도 그 범죄자들 중 하나였다는 사실은 부정하지 않겠소. 다 변명일 뿐이지."
미스터 왕은 그리 말하며 도미닉 경을 구석진 곳으로 인도했다.
"양산박의 기지는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정해져 있소. 다만 아직 개수가 되지 않았더라면 비밀 통로로 안에 들어갈 수 있을 거요."
미스터 왕이 구석진 벽면에 그려진 별자리 중 몇 군데를 손가락으로 찌르자 어디선가 쿠르릉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제대로 작동하는군. 이제 가 봅시다."
도미닉 경은 미스터 왕의 인도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곳에는, 굉장히 지적인 디자인의 통로가 있었다.
옆으로 밀려난 바위로 보아, 아마 저 바위로 입구가 가려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여기로 가면 양산박의 최하단으로 갈 거요. 물론, 추가로 증축하지 않았다는 가정하에."
미스터 왕은 그렇게 말하면서 다시 도미닉 경에게 경고했다.
"여기를 넘어가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소. 그래도 따라 오시겠소?"
"물론이오."
도미닉 경은 미스터 왕의 말에 즉답했다.
"언제나 문제가 일어나면, 그 배후는 양산박이었소. ...대개는. 언제나 내가 먼저 당했었으니, 이제 저들이 먼저 당할 차례인 것이 당연한 것 아니겠소."
도미닉 경은 그리 말하며 검으로 방패를 두드렸다.
그건 일종의 자신감의 또 다른 표현법이었다.
"좋소. 그럼 당장 이곳을 지나갑시다."
도미닉 경의 확고한 의지를 확인한 미스터 왕은 옷 소매를 펄럭이며 앞장섰다.
"그 전에 잠시."
도미닉 경은 미스터 왕을 먼저 보내고는 어디론가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군데에 문자를 돌린 도미닉 경은, 이내 미스터 왕이 지나간 통로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도미닉 경의 말대로, 이제는 도미닉 경이 먼저 공격할 차례가 다가오고 있었다.
지금까지 도미닉 경이 받은 것들을 이자까지 쳐서 상환할 시간이.
...
도미닉 경은 지금 양산박의 비밀 기지 안쪽, 환풍기 통로를 기어가고 있었다.
보통의 환풍기라면 좁아서 움직이지도 못하겠지만, 이 비밀기지는 지하에 위치해서인지 환풍기를 크고 넓게 뚫어놓아 가능한 일이었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여기서 길이 좀 헷갈리는군."
미스터 왕은 환풍구의 갈림길에서 잠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가 양산박을 나온 지도 꽤 오래되었으니 기억이 가물가물한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안 되겠군. 지도 앱을 켜야겠어."
미스터 왕은 휴대폰을 켜 지도 앱을 열었다.
어째서인지 지하임에도 신호는 제대로 잘 잡히고 있었다.
"그거 지도 앱으로 볼 수 있는 거였소?"
도미닉 경이 황당하다는 듯 미스터 왕에게 말했다.
"구 양산박의 간부들은 다들 머리가 나빠서 말이오. 탈출용 비밀통로가 보통 복잡한 것이 아니다 보니 이렇게 지도에 등록되어 있소."
물론, 지금의 양산박 간부들은 절대 모를 거요. 알고 있는 사람들은 이제 나 말곤 없으니. 미스터 왕은 조금 입맛이 쓴 듯 착찹한 표정으로 말했다.
"일단 길을 확인해 볼 테니 잠시 기다리시오. 잠깐이면 되오."
도미닉 경은 미스터 왕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문득 어디선가 두 사람의 말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바로 아래에서 나는 소리였는데, 도미닉 경은 옆에 뚫린 배기구를 통해 대화를 나누는 이들을 볼 수 있었다.
"나 오늘도 야근이다?"
"세상에. 네 상사는 왜 그런데? 이번 달만 해도 22번째 야근 아니냐?"
"몰라. 자기 남동생 닮았다면서 괴롭히는 데 죽을 맛이다."
"남동생이 좀 많이 못생겼나보다. 너랑 닮았다는 거 보면."
"이 사람이."
"농담이야. 아, 그나저나 어디서 야근하는데?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제 2 창고. 9시까지 준비해야 해. 12시간 근무라더라."
"...그럼 지금 가야겠는데? 9시까지 10분 남았어."
"뭐? 야, 고맙다. 지금 빨리 가야겠네."
"뭘. 야간에 심심할 것 같으면 내가 간식 들고 찾아갈게!"
"고맙다! 아, 혹시라도 왔을 때 내가 자고 있으면 깨워줘!"
"알았다!"
도미닉 경은 두 사람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둘을 바라보았다.
그때, 마침 타이밍 좋게 미스터 왕이 말을 걸었다.
"길을 찾았소. 그런데 문제가 있소. 길이 세 군데라오. 하나는 최하층 여자 화장실로 향하는 곳이고, 또 하나는 최하층의 제련소로 가는 길이오. 그리고 마지막은 제 2 창고로 가는 길이지. 각자 장단점이 있소."
세상에. 이런 우연이 있을 수 있나.
도미닉 경은 갑자기 세상이 도와주는 기분이 들었다.
"제 2창고로 갑시다. 방금 전에 여기 사람들의 대화를 엿들었는데, 제2창고에서 야근하는 사람이 최근 잦은 야근으로 피곤한 모양이더군. 그쪽으로 가면 무난할 것 같소."
"음."
미스터 왕은 도미닉 경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정보란, 가장 신선할 때 가치가 있는 법이다.
"그렇다면 제 2 창고로 가겠소. 잘 따라오시오."
도미닉 경과 미스터 왕은 환풍구를 따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 2 창고를 향해서.
...
"일단 내가 먼저 내려가서 상황을 보겠소. 천천히 내려오시오."
미스터 왕은 그렇게 말하며 환풍구 아래로 훌쩍 뛰어내렸다.
한 때 간부 출신이었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었던 듯, 그는 고양이처럼 은밀하고 조용한 발걸음으로 제 2 창고를 한 바퀴 둘러보았다.
"정말 자고 있군. 내려오시오. 문제 없소."
도미닉 경은 미스터 왕의 말에 환풍구 아래로 내려왔다.
미스터 왕의 앞에는 창고의 물건에 기댄 채 깊은 잠에 빠진 사람이 있었는데, 얼마나 깊게 잠이 들었는지 도미닉 경이 바로 앞에 있는데도 모를 정도였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오?"
도미닉 경이 폰을 꺼내 방금 전에 온 메시지를 확인하며 미스터 왕에게 물었다.
"일단 나는 이곳의 관리자... 그러니까 최고 간부와 이야기해 보려고 하오. 최고 간부라면 내 아들에 대해서 알고 있을 수 있으니."
도미닉 경은 메시지에 답장을 보낸 후,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거 좋은 생각이오. 한 방 먹이기엔 충분하겠군."
도미닉 경은 사실 양산박에게 한 방 먹이겠다는 생각만 했었지, 세세한 계획을 세우지는 않았다.
사실 이는 도미닉 경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특징이었다.
전장에서는 아무리 좋은 계획과 전략을 짜도 정작 싸우기 시작하면 종이 쪼가리가 되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니 임기응변에 익숙해진 대신, 세세한 계획에 약해진 것이다.
"잠시만 기다리시오. 아마 여기서부턴 업데이트 버전이 있을 거요."
"...양산박은 멍청이들만 모이는 곳이오?"
도미닉 경은 비밀기지의 지도가 지도 앱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놀라운데, 업데이트까지 되고 있다는 사실에 두 번 놀랐다.
도대체 얼마나 미로같으면 그럴까라는 생각하며, 도미닉 경은 미스터 왕이 지도를 완전히 읽기만을 기다렸다.
"음. 아무래도 최고 간부가 머무르는 곳은 두 곳 중 하나인 모양이오. 하나는 집무실, 하나는 개인실이오."
미스터 왕은 도미닉 경에게 선택권을 넘겼다.
아무래도 늙은 자기 감보단, 도미닉 경의 감이 더 날카롭고 정확하지 않을까라는 기대감이 있었다.
"...내가 고르라는 거요?"
"그렇소이다. 하나 골라보시오."
도미닉 경이 머뭇거리자, 미스터 왕은 지도앱을 보여 주며 집무실과 개인실, 그리고 지금 있는 위치를 번갈아 가며 보여 주었다.
두 곳은 제법 멀리 떨어져 있기에, 도미닉 경은 확실하게 한 곳을 선택해야만 했다.
그리고 도미닉 경이 선택한 곳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