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0화 〉 [269화]우리에게도 권리가 있다.
* * *
"휴. 간만에 즐거웠소."
하얀 까마귀시여, 제 일탈을 용서하소서. 도미닉 경이 속으로 그렇게 하얀 까마귀에게 기도를 올렸다.
양산박의 간부였던 것은 회색 가루가 되어 사방으로 흩어지고 있었다.
그녀가 추방이 될지, 혹은 아직 죄질이 낮아 다시 부활을 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당장은 죽은 것이 확실했다.
도미닉 경이 한 행동은 도저히 기사가 할 만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애초에 적들을 앞에 두고 기사도를 찾는 것도 이상한 일이었다.
기사도라는 것은, 싸우지 않을 때에나 빛나는 법이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속인 도미닉 경은 방패에 묻은 피를 대충 털어내고 모든 장비를 수납했다.
"미, 미쳤군. 가차랜드는 전체 이용가라고. 19세나 22세 게임이 아니란 말이야."
도미닉 경은 그 짧은 사이 홀쭉해진 마간을 바라보았다.
마간은 현재 큰 충격을 받은 상태였는데, 아무래도 도미닉 경의 잔혹함에 질린 모양이었다.
실제로 도미닉 경은 역광을 받으며 얼굴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운 상태로 기분 나쁠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기에 마간의 두려움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었다.
도미닉 경은 잠깐 말없이 마간을 뚫어져라 쳐다보더니, 이내 마간에게 다가가기 시작했다.
마간과 도미닉 경 사이의 거리는 고작 대여섯 걸음 밖에 되지 않았기에 둘의 사이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히, 히익!"
마간은 방금 전까지 얼마든지 맞을 각오를 하고 있었으나, 도미닉 경의 잔혹한 손속을 본 이상 그 모든 각오는 휴지 조각이 되었다.
가차랜드에서 죽음이란 굉장히 싸고 흔한 단어였지만, 가끔 사람들의 생존 본능은 그런 사실을 잊곤 했다.
마간은 방금 전처럼 의연하게 맞을 각오를 다지는 대신, 몸을 웅크린 채 벌벌 떨고 있었다.
그리고 눈물과 콧물을 모두 흘리며 과거의 행적을 반성하고 있었다.
도대체 과거의 마간은 생각 없이 살아서 미래의 마간을 괴롭히는가?
마간은 만일 과거로 돌아간다면 과거의 마간의 목을 졸라버리고 싶었다.
마간은 곧이어질 폭력을 생각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나 마간에게 폭력의 손길이 닿는 일은 없었다.
도미닉 경은 그저, 벌벌 떨고 있는 마간을 내려다보며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
몇십 분 전, 블랙 그룹 앞 광장 벤치.
칸쿠 무사가 도미닉 경에게 말했다.
"혹시, 내 아들을 복날 개 패듯 패줄 수 있겠소?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말이오."
도미닉 경은 말없이 칸쿠 무사를 바라보았다.
칸쿠 무사의 눈은 한없이 올곧아, 그의 말이 진심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기사였다.
아무리 곤란한 사람을 돕는 것이 기사도라지만, 그렇다고 해서 다른 사람을 해치는 일에 동조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도미닉 경은 완곡하게 거절의 의사를 말하려고 입을 열었으나, 칸쿠 무사의 말이 더 빨랐다.
"정확하게는 정말 때려달라는 말이 아니오. 그저 겁만 줘도 충분하외다."
칸쿠 무사는 도미닉 경이 거절할 것 같자 약간의 설명을 덧붙였다.
"내 아들, 마간은 아주 심약한 아이요. 너무 심약해 어렸을 때부터 오냐오냐해주며 자랐지. 그래서 이렇게 세상의 쓴맛을 모르고 제멋대로 날뛰는 거요."
물론 내 지론이오. 다른 이들의 생각은 다를 수 있소. 라며 칸쿠 무사가 덧붙였다.
"아무튼, 그 아이는 심약하니 약간만 겁을 줘도 원래대로 돌아올 거요. 그럼 내가 데려가서 사회의 쓴맛을 제대로 보여 줄 생각이외다. 내 밑에서 일을 시키며 권리에는 책임과 의무가 따른다는 것을 가르쳐 줄 생각이오."
칸쿠 무사의 말에 도미닉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저 겁만 주는 정도라면, 도미닉 경이 충분히 도와줄 수 있는 범위였다.
도미닉 경은 새롭게 바뀐 제안을 곰곰이 생각해 보더니, 이내 긍정의 답변을 내놓았다.
"좋소. 당신을 도와드리리다."
도미닉 경의 말에 칸쿠 무사의 얼굴이 환해졌다.
"감사하오. 보상은 섭섭지 않게 드리겠소."
도미닉 경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바로 칸쿠 무사의 아들, 마간을 찾으러 갈 생각이었다.
"잠깐! 가기 전에 할 말이 있소."
도미닉 경이 자리를 떠나기 전, 칸쿠 무사는 이렇게 말했다.
"내 아들은 어디선가 수상쩍은 돈을 빌린 모양이오. 그러니 그쪽에서 마간에게 접근할 수도 있소. 그때에는 반드시 아들을 개 잡듯이 패겠다고 말하시오."
"어째서요?"
"아들이 조금이라도 덜 위험하게 만들려는 작전이오. 아비인 나마저 포기했다고 하면, 아들에게 접근한 사람이 방심할지도 모르외다."
"참고하겠소."
도미닉 경은 칸쿠 무사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시위대를 향해 걸어갔다.
이것이 바로 폭력 사건과는 연관이 없을 것 같은 도미닉 경이 마간을 때리러 온 사건의 전말이었다.
...
도미닉 경은 말없이 마간을 내려다보았다.
마간은 계속해서 언제 때릴지 몰라 덜덜 떨며 웅크리고 있었다.
이래선 내가 나쁜 사람 같잖아. 라고 도미닉 경이 생각했다.
물론 주변에서 보기엔 도미닉 경은 충분히 수상하고 사악하며 그야말로 악의 화신과도 같은 모습이었으나, 아쉽게도 이 골목에는 얼굴이 비칠만한 물건이 없어 도미닉 경이 그 사실을 알 도리가 없었다.
도미닉 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마간의 옆에 붙은 떨거지는 처리했으니, 이제 마간을 칸쿠 무사에게 데려다주는 일만 남았다.
일단 말이라도 걸어볼까 싶었으나 마간의 상태가 영 말이 아니었기에, 도미닉 경은 마간을 들쳐메고 골목을 빠져나왔다.
어떻게 해서든 마간을 칸쿠 무사에게 보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여, 여기서 끝내주시면 안 될까요? 도대체 얼마나 때리시려고 자리마저 바꾸십니까?"
물론 그 사실을 모르는 마간은 도미닉 경이 그의 비밀 기지로 가 철저한 폭력을 휘두를 것이라고 착각하고 있었다.
...
"고맙소. 정말 고맙소."
칸쿠 무사는 무사히 돌아온 아들을 환영하고는 도미닉 경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마간이 사지 멀쩡히 돌아오자, 칸쿠 무사는 마간을 끌어안고 펑펑 울었다.
얼마나 잘못을 했든 간에 돌아온 것만 해도 장하다며 마간을 다독인 칸쿠 무사.
마간은 처음에 칸쿠 무사를 보고 어쩔 줄을 몰라 했지만, 이내 칸쿠 무사의 행동에 눈물이 울컥 튀어나왔다.
물론 칸쿠 무사가 용서하고말고와는 상관없이 그는 이제부터 돈의 소중함을 깨닫기 위한 고행... 아니, 일을 시작하겠지만 지금 칸쿠 무사와 마간 부자는 감격에 가득 차 있었다.
"이건 내 아들을 구해 준 사례요."
칸쿠 무사는 도미닉 경에게 종이 하나를 건넸다.
종이를 받아 든 도미닉 경은 그 자리에서 종이에 적힌 글을 보았는데, 첫 문장을 읽자마자 도미닉 경의 눈이 크게 떠졌다.
"건물? 건물을 준단 말이오?"
도미닉 경은 칸쿠 무사의 통 큰 보상에 놀라 목소리마저 떨렸다.
"애초에 그 건물은 세금 문제로 팔아야 할 상황이었소."
칸쿠 무사는 도미닉 경의 부담을 덜어 주려는 듯 그리 말했다.
"보면 알겠지만 가차랜드에 있는 건물은 아니오. 가차랜드의 건물이었더라면 비싸서 부담이 되겠지만, 여긴 땅값이 매우 싸니 부담가지지 마시오."
도미닉 경은 칸쿠 무사의 말에 좀 더 자세히 종이에 적힌 글씨를 읽어보았다.
확실히 건물이 있는 곳은 가차랜드가 아닌, 타이쿤시티라는 곳이었다.
"그쪽 건물을 관리하는 내 변호사에게 말할 테니 그가 자잘한 것들은 도와줄 거요. 개인적으로는 세를 줘서 매 분기마다 재화를 수급하는 것을 추천하외다."
칸쿠 무사는 도미닉 경에게 약간의 팁까지 전수했다.
"...그렇다고 해도 이렇게 큰 보상은 받을 수 없소."
도미닉 경은 이 커다란 보상에 순간 혹했으나, 너무나도 큰 보상이었기에 부담이 되었다.
"내 아들을 구해주셨소이다. 내 아들의 목숨값이라고 생각하면, 여기서 더 드려도 모자랄 거외다."
아들이 진 빚 3억 5000만 가차석을 갚아야 하기에 더 주지 못하는 것을 용서해 주시오. 라고 칸쿠 무사가 말했다.
"그럼 내가 도와줄 일이라도 없소? 너무 보상이 커서 마음이 안정되지를 앉는구려. 도움이라도 하나 된다면 마음이 좀 편할 것 같소."
그 말에 칸쿠 무사가 잠시 고민했다.
그리고 칸쿠 무사가 입을 열었다.
...
도미닉 경은 현재 매스 프로덕션이라는 대부업체를 찾아가는 중이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마간이 진 빚을 대신 갚으러 가는 중이었다.
얼마 전, 칸쿠 무사는 도움이 되고 싶다는 도미닉 경의 말에 한 가지만 더 도와줄 수 없겠느냐고 말했다.
도미닉 경은 이미 큰 보상을 받았기에 칸쿠 무사의 말을 흔쾌히 수락했다.
'마간은 이제부터 내 일을 도와야 하고, 나는 마간을 위한 일자리를 찾아야 해서 바쁠 것 같소. 그러니 우리 대신 돈을 갚아줄 수 있겠소?'
칸쿠 무사는 이후 무려 3억 5000만 가차석이 든 가죽 주머니를 도미닉 경에게 건네주었다.
'...내가 이 돈을 가지고 도망치면 어떻게 하려고 그러시오?'
'나는 도미닉 경을 믿소. 도미닉 경의 명성이라면, 절대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모두가 알 거요.'
도미닉 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말이 맞았던 것이다.
전투에 들어서면 광견이 되어 버리지만 평소에는 기사도에 충실한 도미닉 경은, 이 부자의 부탁을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그렇기에 도미닉 경은, 3억 5000만 가차석이 든 가죽 주머니를 들고 대부업체 매스 프로덕션을 찾아온 것이다.
도미닉 경은 매스 프로덕션이 있는 건물 앞에 서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건물의 4층에 위치한 매스 프로덕션의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잠깐 그 간판을 바라보던 도미닉 경은, 곧 매스 프로덕션의 사무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