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9화 〉 [238화]맙소사, 또 버그야?
* * *
도미닉 경은 방패를 들어 올린 채, 방패의 시야 구멍 사이로 틈새 건너편을 노려보았다.
틈새 건너편 있는 기분 나쁜 시선들은 어둠 속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글리치부르크 전체에 내려앉은 어둠 때문인지 아니면 그저 도미닉 경의 시야가 좋지 않기 때문인지, 혹은 둘 다인지는 모르겠지만 도미닉 경은 도저히 그 시선들의 패턴을 알아차릴 수 없었는데, 이 사실을 알아차렸는지 히메가 인벤토리에서 조명탄을 꺼내 들었다.
"이거면 도움이 될 거예요."
히메는 있는 힘껏 틈새의 건너편을 향해 조명탄을 던졌다.
타닥타닥거리며 타오르기 시작한 조명탄의 붉은 불빛은 순식간에 틈새 너머를 밝히기 시작했는데, 그 덕분에 도미닉 경과 히메는 건너편의 상황을 정확히 알아볼 수 있었다.
"...이게 다 뭐요?"
"모르겠어요. 아무래도... 버그들 같은데..."
도미닉 경과 히메는 충격을 감추지 못한 채 눈을 깜빡거렸다.
그곳에는 마네킹이 가득한 곳이었는데, 어떤 마네킹은 걸음을 걸을 때마다 순간 이동을 하듯 사라졌다가 몇 걸음 앞에서 나타나거나, 혹은 몇 걸음 뒤에서 나타났다.
어떤 마네킹은 0.5초 간격으로 똑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는데, 마치 처음과 끝은 있지만 중간은 없다는 듯 뚝뚝 끊겨서 보였다.
어떤 마네킹은 그저 T자로 팔을 벌리고 서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고, 어떤 마네킹은 거꾸로 매달린 채 T자로 팔을 벌리고 머리를 천천히 360도 돌리고 있었다.
그야말로 인간의 인지를 벗어난 장면이었으나, 도미닉 경과 히메는 조금 놀랐을 뿐 다시 평정심을 되찾았다.
"아무래도 이것들은 공격성이 없는 모양이오."
도미닉 경이 성큼성큼 틈새 사이로 들어가 마네킹들을 건드려보았다.
그러나 마네킹들은 마치 주입된 명령만 수행한다는 듯 지금까지 해온 행동들만 계속해서 반복할 뿐, 도미닉 경의 행동에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래도 좀 소름 끼치네요."
히메도 틈새 너머로 넘어와 마네킹들을 바라보았다.
조명탄의 붉은 불빛 때문인지 제법 섬뜩하게 보이는 마네킹들.
마네킹들의 얼굴은 코와 입이 없었으나 눈만큼은 달려 있었는데, 아무래도 방금 전 어둠 속에서 빛나던 눈들이 바로 이것들인 모양이었다.
"어째서인지 불쾌한 느낌도 들구요."
마네킹들의 눈은 미묘하게 현실적으로 생겼는데, 유리로 된 듯 반짝거리면서도 무기질적으로 고정된 홍채를 바라보면 그 누구라도 섬뜩함을 느낄 것만 같았다.
"여긴 그다지 위험하지는 않은 모양이오."
도미닉 경이 몇 번 더 마네킹들을 건드려보다가 검을 집어넣었다.
마네킹들은 자기 할 일만 하고 있었을 뿐 도저히 위협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빨리 여기를 벗어나고 싶어요."
히메가 소름 돋는다는 듯 팔을 감싸 쥐었다.
그녀의 꼬리가 털이 바짝 선 채 뻗뻗하게 굳어 있었다.
"어째서인지... 무섭네요."
히메의 말에 도미닉 경도 고개를 끄덕였다.
도미닉 경도 이 장소가 찝찝하긴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좋소. 그럼 이동합시다. 혹시 남은 조명탄이 있소?"
"조명탄은 없지만, 횃불을 만들 순 있을 거예요. 천과 기름과 각목이 있거든요."
"...그런 건 왜들고 다니시오?"
"아, 얼마 전에 임무에서... 아니에요. 그냥 인벤토리에 집어넣고 깜빡한 것들이에요."
히메는 자연스럽게 얼마 전 적대적인 닌자 세력을 몰락시킨 이야기할 뻔했다가 입을 닫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도미닉 경의 호감을 살 만한 이야기는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대신 히메는 말을 돌리려는 듯 인벤토리에서 천과 기름과 각목을 꺼내 간이 횃불들을 만들었다.
그리고 아직 타들어 가는 조명탄의 불꽃에 횃불을 가져다 대자, 횃불은 적당한 빛을 내며 타들어 가기 시작했다.
여전히 도미닉 경과 히메의 시야는 좁았지만, 적어도 방금 전보다는 확실히 나은 상황.
도미닉 경은 이 정도로 충분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히메에게 말했다.
"이 정도면 충분한 것 같소. 그럼 조명 문제도 해결 되었겠다, 출구를 찾아봅시다."
도미닉 경은 다시금 방패를 들어 올리며 앞으로 나섰다.
히메는 횃불을 높이 든 채 도미닉 경의 뒤를 따랐다.
"...응?"
히메는 어째서인지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섬뜩함에 고개를 돌려 마네킹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마네킹들은 여전히 자기 할 일만 계속 수행할 뿐, 별다른 이상은 없었다.
"이상하네. 감이 틀릴 리가 없는데...?"
히메는 잠시 마네킹들을 빤히 쳐다보았다.
여전히 마네킹들에게서는 이상한 점을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한참을 마네킹들을 빤히 쳐다보던 히메는 고개를 갸웃하며 다시금 몸을 돌려 도미닉 경의 뒤를 따랐다.
아무래도 오늘따라 감각이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
도미닉 경과 히메는 한참 동안 어둠 속을 걸어 다녔다.
현재 도미닉 경이 걷는 곳은 바닥에 커다란 털보 아저씨의 사진이 프린트 된 곳이었는데, 근처에 박혀 있는 팻말엔 '이스터에그 #2를 찾으셨군요! 다음엔 이스터에그 #4를 찾아보세요.'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이곳은 아무리 봐도 적응이 되질 않소."
도미닉 경은 이 자기만족의 끝판왕처럼 보이는 거대한 사진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사진 속 남자는 어정쩡한 느낌으로 환하게 웃고 있었는데, 그의 눈은 어느 한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끔 코더들이 장난으로 자기 사진이나 이름을 여기저기 남긴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설마 글리치부르크에도 그런 것이 있을 줄은 몰랐네요."
히메도 이 건 정말 아니라고 생각했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2번 다음엔 3번 아닐까요? 어째서 4번을 찾으라고 하는지 이해되질 않네요."
"그러니 글리치부르크에 있을 수도. 버그일 수도 있지 않겠소?"
"그럴지도 모르겠네요."
히메는 괜히 팻말 뒤편에 있는 수도꼭지를 꼭 잠갔다.
어째서 수도꼭지가 팻말 뒤에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도미닉 경도 히메도 그 사실을 지적하지는 않았다.
여긴 글리치부르크였고,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곳이었으니까.
"아무튼, 우리가 가는 길을 확인할 이정표로는 쓸 수 있겠네요."
히메가 팻말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렇겠구려. 방금 전에 있었던 마네킹들이나 녹색 천들로 된 미로같이 기준점이 될 수도 있겠구려."
도미닉 경이 히메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도미닉 경과 히메는 지금 방향감각을 조금씩 상실하고 있었다.
글리치 부르크의 벽 너머는 심각할 정도로 큰 공간이 존재했는데, 얼마나 큰지 아무리 걸어도 사방이 뻥 뚫려 있는 상태였다.
지금 어디를 걷고 있고, 어디를 가고 있는지 조차 점점 헷갈릴 정도로 어둡고 큰 공간 속에서 그나마 도미닉 경과 히메가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건 바로 중간중간에 나오는 이런 오류와 이스터에그들 덕분이었다.
"여기서 어디로 갈지 정해야 하오."
"뭐, 고민할 거 있겠어요? 마침 저 사진의 시선이 저쪽을 향하고 있잖아요. 그쪽으로 가죠."
도미닉 경은 히메의 제안에 잠시 고민했다.
사실 고민할 필요도 없는 일이었으나, 어째서인지 도미닉 경은 사진의 시선이 마음에 걸렸다.
"어째서인지 덧대어 그린 것 같은데... 횃불 좀 줘 보시겠소?"
도미닉 경이 히메에게서 횃불을 받아 사진의 눈을 확인했다.
눈 부분은 상당히 위화감 없이 정교하게 되어 있었으나, 도미닉 경은 그것이 유화로 덧칠된 부분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주변의 사진은 화질 문제로 살짝 화소가 깨진 상태였지만, 눈 부분은 덧칠된 듯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여기에 우리 말고 또 다른 이들이 있는 것 같소. 아니면, 물감이 안 마르는 버그가 있거나."
도미닉 경은 눈이 있는 부분을 손가락으로 찍어 확인해 보았다.
아직 물감이 채 마르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곳에 도미닉 경과 히메를 제외한 다른 이가 있을지도 몰랐다.
"그럼 오히려 잘 된 것 아닐까요? 서로 도울 수도 있으니까요."
"음."
"만일 우리와 적대적이라고 해도, 우리가 질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무엇보다, 제 눈앞에 있는 건... 제가 가장 믿는 도미닉 경이니까요."
히메가 은근슬쩍 속에 있는 말을 드러내고는 얼굴을 붉혔다.
그러나 히메의 홍조를 횃불의 일렁거림이라고 생각하고 넘겨 버린 도미닉 경은, 이내 히메의 말이 그럴싸 하다는 걸 깨달았다.
"좋소. 그럼 히메 공의 말대로 이 시선을 따라 움직입시다. 운이 좋다면... 우리를 도와줄 수 있는 이를 만나겠지."
도미닉 경은 다시 히메에게 횃불을 넘긴 뒤 사진의 시선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횃불을 건네받은 히메도 도미닉 경의 뒤를 따라 한 발자국 움직였는데, 문득 뒤에서 기척이 느껴진 듯 갑자기 고개를 홱 돌렸다.
그러나 그곳에는 여전히 꽉 잠긴 수도꼭지가 달린 팻말 만이 있을 뿐이었다.
"...조금 예민해진 건가?"
히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금 도미닉 경의 뒤를 따라갔다.
아무래도 글리치부르크에 익숙하지 않아 조금 예민해진 것으로 생각하면서 말이다.
...
도미닉 경과 히메가 사라진 어둠 속.
도미닉 경과 히메가 걸어온 방향에서 한 실루엣이 나타나 사진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눈 부분에 찍힌 지문을 보고 눈살을 찌푸리더니, 이윽고 어디선가 가져온 붓과 물감으로 사진의 눈 부분을 다시 고치기 시작했다.
사진의 눈은 방금 전까지 왼쪽을 바라보고 있었으나, 새롭게 고친 사진의 눈은 오른쪽을 보고 있었다.
한참 동안 그림을 고친 실루엣은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윽고 도미닉 경과 히메가 사라진 방향도, 새롭게 그려진 시선의 방향도 아닌 제 3의 방향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어째서인지 무기질적인 시선을 도미닉 경과 히메가 간 방향으로 고정시킨 채 말이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