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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차랜드의 행복한 도미닉 경-238화 (238/528)

〈 238화 〉 [237화]맙소사, 또 버그야?

* * *

도미닉 경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죽음을 받아들였다.

땅 아래에 잠겼으니, 질식으로 죽을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도미닉 경이 생각한 죽음은 오지 않았다.

"...어찌 된 일이지?"

도미닉 경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고 문득 자신이 말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일 여기가 땅속이라면 도미닉 경의 말은 밖으로 들리지 않아야 정상이었다.

적어도 도미닉 경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말이 나오고, 그 말이 들린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겠는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도미닉 경은 그 자리에서 슬쩍 눈을 떴다.

"...맙소사. 이건 도대체...?"

눈을 뜬 도미닉 경은 경악하고 말았다.

주변은 흙과 돌로 된 땅속이 아니라, 훤하게 사방이 뚫린 어떠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도미닉 경은 처음에 이 공간에서 멈춰버린 줄 알았으나, 이내 계속해서 낙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치 연기가 피어오르듯 마지막으로 보았던 장면이 고정되어 마치 연기처럼 흩어지고 있었...

거기까지 이해한 도미닉 경은 엄청난 어지러움과 멀미를 느꼈다.

그야말로 지금 상황은 인간의 인지를 벗어난 번쩍거림으로 가득했다.

도미닉 경은 다시 눈을 감았다.

아무래도 도미닉 경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광경에, 호기심이 생기기보단 두려움이 먼저 일어났기 때문이다.

남들보다 용감하고, 호기심 많은 도미니 경으로서도 도저히 이해와 납득이 불가능한 상황.

그러나 다행스럽게도, 이 어지러운 광경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느 순간, 도미닉 경은 탁. 하고 바닥에 착지했다.

지금처럼 허공을 밟는 느낌이 아니라, 정말 흙과 돌로 된 단단한 바닥을 밟는 느낌이었다.

내가 지금 바닥의 바닥에 닿은 건가?

그렇게 생각한 도미닉 경은 다시 한번 슬쩍 눈을 떴다.

그리고 도미닉 경의 시야에 가장 먼저 들어온 건... 벽이었다.

습기를 잔뜩 먹은 이끼 낀 돌들로 만들어진 벽.

도미닉 경은 그 제대로 된 조형물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적어도 방금 전의 그 기괴한 광경은 아니군."

그 끔찍했던 광경을 다시 떠올린 도미닉 경이 몸을 한 번 부르르 떨었다.

웬만한 것에 익숙한 도미닉 경으로서도 방금 전의 광경은 두려움을 자아낼 정도였다.

아무튼 이곳이 제대로 된 벽과 바닥이 있는 곳이라는 걸 알아낸 도미닉 경이 주변을 둘러보기 시작했는데, 도미닉 경은 문득 여기 와 가장 비슷한 곳을 기억해냈다.

바로 얼마 전 도미닉 경이 갇혔던 사법부 아래 던전이었다.

"여긴... 던전인가?"

도미닉 경은 방패와 검을 들고 조금 더 주변을 꼼꼼히 살피기 시작했다.

축축하고 이끼 낀 벽돌들은 그다지 특이할 것은 없었다.

특이한 것은 이곳의 구조였는데, 도미닉 경은 자신이 등진 벽을 제외하고는 한 치 앞을 볼 수 없을 정도로 짙은 어둠이 깔려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무래도 이 벽을 따라서 이동해야 할 것 같군."

도미닉 경은 이끼 낀 벽을 한 손으로 짚은 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끝이 보이질 않는데..."

한참을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의 벽.

어느 정도 왔을까?

도미닉 경은 문득 벽을 짚은 손에서 푹신푹신한 무언가가 만져진다는 것을 깨달았다.

손에 닿은 물체가 무엇인지 고개를 돌려 확인해 보는 도미닉 경.

"어, 음..."

도미닉 경은 아연실색한 표정으로 그 푹신푹신한 무언가의 정체를 확인했다.

"미안한데, 제 말이 들리신다면 만지작거리지만 말고 좀 도와주시겠어요?"

그것은, 히메의 여우 꼬리였다.

...

"푸하. 살았네요. 벽에 끼이는 바람에 곤란했는데 말이에요."

히메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도미닉 경에게 감사를 표했다.

히메는 어째서인지 벽에 끼인 채 하체만 도미닉 경을 향해 내밀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도미닉 경이 급한 대로 그녀의 다리를 잡고 잡아당기자, 순식간에 히메의 몸이 벽에서 빠져나왔다.

도미닉 경은 방금 전까지 히메가 박혀 있었던 벽을 바라보았으나, 그 벽에는 그 어떤 구멍도 없었다.

"도대체 왜 거기에 끼여 있었던 거요?"

도미닉 경이 히메에게 물었다.

"벽에 구멍이 없는 것 같은데, 어떻게..."

"아무래도 여긴...글리치부르크인 것 같아요. 세상에, 도시 괴담인 줄 알았는데..."

"글리치부르크(Glitchburg)?"

"네. 글리치부르크."

도미닉 경의 물음에 히메가 답했다.

"가차랜드에서... 도저히 고칠 수 없는 버그들을 격리시킨 도시죠. 이른바 버그의 쓰레기통이라고 할까요?"

히메의 말에 도미닉 경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다지 버그로 보이는 것은 없소만."

도미닉 경은 지금까지 있었던 버그들을 생각해냈다.

대부분의 버그는 시각적으로 '나 버그요.'라고 주장하는 모습으로 나타나곤 했다.

"이곳의 무서운 점이 바로 그거예요. 겉으로는 버그로 보이지 않는다는 점."

히메는 도미닉 경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답했다.

"방금 전에도 보셨겠지만, 갑자기 벽이 뚫린다던가 아니면­"

히메가 갑자기 벽을 발로 걷어차기 시작했다.

버그에 대해서 말하다 말고 갑자기 벽을 차기 시작한 히메.

도미닉 경은 그런 히메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으나, 이내 갑자기 솟구치기 시작한 히메를 놀란 눈으로 바라보았다.

히메는 손과 발이 벽에 닿지도 않은 채, 그저 발길질 만으로 벽을 타고 오른 것이다.

"이렇게 제멋대로 벽을 타고 올라간다던가 하는 일 말이에요."

"놀랍구려."

도미닉 경은 히메가 한 것처럼 벽을 발로 걷어차보았다.

그러자 도미닉 경도 순식간에 공중으로 2미터는 솟구쳐 올라가는 것이 아닌가.

다시 땅에 두 발을 디딘 도미닉 경은 어째서 여기가 버그의 쓰레기통인지 알 것 같았다.

여긴 일반적인 상식이 통하지 않는 가차랜드의 상식으로도 이해할 수 없는 곳이었으니까.

"아무래도 저희가 땅속으로 빠진 것도, 글리치부르크의 영향 때문일지도 몰라요."

히메가 조심스럽게 도미닉 경에게 말했다.

물론, 도미닉 경과 히메가 땅속으로 빠진 것은 레미가 안티 앨리어싱을 적용하지 않아 생긴 계단현상의 틈 때문이었지만, 현재로선 그럭저럭 도미닉 경과 히메가 납득할 만한 추론이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오? 여기서 한 번 죽어서 가차랜드에서 부활이라도­"

"평소라면 나쁘지 않은 제안이었겠지만, 여기선 죽는 것도 조심해야 해요. 버그 투성이라 제대로 부활될지도 의심스러우니까요."

히메는 도미닉 경에게 걱정된다는 듯 말했다.

도미닉 경은 히메의 말에 죽어보려는 시도를 접었다.

대신 문득 떠오른 의문 하나를 히메에게 물었다.

"그러고 보니 여기가 버그로 가득한 곳이라면, 왜 이 버그들을 고치지 않는 거요?"

도미닉 경은 정론을 말했다.

"방금 말했듯이 부활을 막거나 엉망으로 만들 수도 있는 버그가 있다면, 고치는 것이 당연한 게 아니겠소? 격리시키는 것보다."

"그건 복잡한 사정이 있어요."

도미닉 경의 말에 히메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아는 코더의 말에 의하면 여기 있는 버그들은 손을 댈 수 없어요. 왜냐하면, 이 버그들은 손을 댈 수 없는 버그니까요."

"...그게 무슨 소리요?"

도미닉 경은 히메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히메는 당연하다는 듯 도미닉 경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도미닉 경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을 추가했다.

"가차랜드에 적용되는 코드들은 단독으로 적용되는 것이 아닌, 서로 복잡하게 얽인 구조예요."

"그래서인지 어느 하나를 조작하면, 연결된 모든 코드들에게 영향을 미치죠."

"얼마 전에 있었던 이상 기후 사건 기억나요? 젤리가 내리고 사탕 우박이 몰아치고..."

"그 모든 건 기상 시스템이 오작동을 일으켜서였죠. 기상 시스템을 구성하는 코드가 엉망이 되자, 가차랜드 전체가 엉망이 된 거예요."

"거기까진 이해했소."

도미닉 경이 히메의 말을 끊으며 말했다.

"내 말은, 왜 저 버그들을 고치지 못하냐는 거요."

"그건, 제대로 작동하기 때문이에요."

히메는 도미닉 경의 물음에 바로 답했다.

"가차랜드의 코드들을 톱니바퀴라고 생각했을 때, 그 사이사이에 불량한 톱니바퀴가 있는 거예요. 그 불량한 톱니바퀴로 인해 모든 톱니바퀴가 제대로 돌아간다면, 과연 그 톱니바퀴를 고쳐야 할까요? 고쳤을 때 모든 톱니바퀴가 엉망이 될지도 모르는데?"

도미닉 경은 여전히 히메의 말을 이해하지는 못했으나, 어렴풋이 그 의미는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저것들을 건드리면, 가차랜드에 이상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거요?"

"그렇게 생각하면 편하겠네요."

히메도 더 이상 설명하기엔 머리가 아픈지 그녀의 여우 귀가 추욱 쳐져 있었다.

"아무튼, 건드리기엔 문제가 생길 것 같고, 그렇다고 놔두기에도 문제가 생길 것 같은 버그들은 이렇게 다른 곳에 격리한다고 해요. 예전에 처음 들었을 땐 그저 겁을 주려고 한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히메는 슬쩍 말꼬리를 흐렸다.

"...아무래도 여기 있는 것들은 웬만하면 건드리지 않는 것이 좋겠어요. 무슨 문제가 생길지 모르­"

그때였다.

도미닉 경은 갑자기 땅이 울리는 것을 느꼈다.

그 진동의 근원지는 바로 방금 전 히메와 도미닉 경이 버그를 시도한 그 벽이었는데, 그 벽은 서서히 갈라지며 또 다른 방을 생성하고 있었다.

"...이미 생겼네요. 문제."

히메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미안해요. 제가 버그를 시연하는 바람에­"

"일단, 사과는 나중에 합시다."

도미닉 경은 건너편에 생긴 방을 노려보며 칼과 방패를 들어 올렸다.

"아무래도, 지금은 무기를 들어야 할 때인 것 같소."

도미닉 경이 바라보는 그 틈 사이에는, 역시나 도미닉 경을 바라보는 기괴한 시선들이 있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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