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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차랜드의 행복한 도미닉 경-227화 (227/528)

〈 227화 〉 [226화]잠깐 동안의 휴전 그리고...

* * *

슬라톤 벡스가 정말 완벽하게 추방당한 이후, 학살자 왕과 도미닉 경은 서로 아무 말 없이 서로에 대한 공격을 멈췄다.

던전 1층은 현재 심각할 정도로 엉망인 상태였으니까.

던전 곳곳에 있던 벽과 기둥들이 조각난 채 부식되어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었고, 지금까지 슬라톤 벡스가 먹었던 경비병들의 갑옷과 메이드들의 의수, 의족이 그 사이를 나뒹굴고 있었다.

물론, 도미닉 경과 학살자 왕은 이런 상황에서도 무난히 싸움을 이어 나갈 수 있는 베테랑이오, 전투의 달인들이었으나 그들은 잠깐의 휴전을 택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서로 완벽한 상황에서 싸우고 싶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 없이 그리 생각했기 때문이다.

"다시 싸워야 하는데 말이지."

학살자 왕이 대검을 어깨에 걸치고 도미닉 경을 바라보았다.

도미닉 경은 현재 로비에서 테라스로 올라가는 계단에 걸터앉은 상태였는데, 격하게 움직여 소모된 에너지를 보충하기 위해 젤리 몇 개를 입에 집어넣은 상태였다.

"물론이오."

잠시 우물거리며 젤리를 씹어 삼킨 도미닉 경이 학살자 왕에게 말했다.

"이 감각이 식어가는 느낌이 싫소."

도미닉 경은 현재 극심한 행복을 느끼고 있었다.

물론, 스트레스로 인한 자기방어 기제 형식의 행복은 아니었다.

그보다 더 본능적인 것.

마음껏 움직이고, 마음껏 날뛴 것에 대한 만족감이 행복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물론 마족에 대해 승리했다는 것도 한몫 하기도 했고.

도미닉 경은 이 행복함을 계속해서 느끼고 싶었으나, 달아오른 육신이 식어가면서 이 행복감도 같이 식어가기 시작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의 목표를 향해 있는 힘껏 달린 후 탈진해 버리는 감각과 유사했다.

도미닉 경은 더 이상 이 행복함이 식기 전에 싸움을 재개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이래서야, 제대로 싸울 수 없지 않소."

도미닉 경이 엉망인 로비를 보며 말했다.

"그건 그렇지."

학살자 왕이 머쓱하게 투구를 긁었다.

메이드와 경비대가 있더라면 이 상황을 쉽게 해결했겠지만, 그들은 슬라톤 벡스를 잡기 위해 희생한 상태.

"혹시 죽었다가 다시 올 생각은 없나?"

학살자 왕이 도미닉 경에게 물었다.

도전자가 죽으면 던전은 리셋된다.

그럼 이 로비도 원래의 모습을 되찾을 것이었다.

"미쳤소?"

도미닉 경이 유례없이 강한 어조로 학살자 왕에게 말했다.

현재 도미닉 경은 감각이 열린 상황이었고, 그만큼 체력 소모가 심한 상태였다.

처음부터 다시 할 경우 도미닉 경은 이 감각을 잃거나, 탈진하거나 둘 중 하나가 되리라.

이 감각을 잃고 싶지도 않았고, 그렇다고 너무 오래 유지할 생각도 없었던 도미닉 경에겐 학살자 왕의 제안은 터무니없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군."

학살자 왕이 그 엄청난 거구를 움직이며 도미닉 경에게 말했다.

"지하에 내 방이 있다. 거기라도 괜찮다면, 거기서 싸우도록 하지."

도미닉 경이 학살자 왕을 바라보았다.

"그런 곳이 있는데 왜 하필 여기서 싸우려 했던 거요?"

"그야, 지하에는 날 무력화시키는 기믹이 많으니까."

학살자 왕이 떨떠름하게 말했다.

"내가 원하는 전투는 서로 모든 것을 드러내고 부딪치는 것이지, 어느 한쪽을 위해 페널티를 감수하는 싸움이 아니다."

도미닉 경이 학살자 왕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도미닉 경도 기사이자 전사였기에 그 마음을 잘 알았다.

서로의 실력이나 신체조건은 상관없었다.

그저 있는 힘껏 싸운다. 그 사실이 중요한 것이었다.

"그나저나 그런 걸 내게 알려 줘도 되는 거요?"

도미닉 경이 학살자 왕에게 말했다.

"내가 그 기믹을 쓴다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그럴 리 없다."

학살자 왕이 비밀 레버를 돌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만들었다.

"나는 네가 기사임을 믿는다. 기사라면, 감히 그 기믹을 건드리지는 않을 것이라 확신한다."

학살자 왕은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갔다.

도미닉 경도 학살자 왕을 따라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은 학살자 왕에게 맞춘 듯 그 단차가 상당히 컸는데, 도미닉 경은 거의 뛰어내리듯 계단 하나하나를 내려가야만 했다.

"만일 그 기믹을 부순다면... 내가 사람을 잘못 본 것이겠지. 그것도 내 잘못이다."

학살자 왕은 그리 말하며 걸음을 멈췄다.

그곳은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이 끝나는 지점이었는데, 그곳엔 학살자 왕이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커다란 문이 있었다.

"여기가 바로 내가 평소에 있는 곳이다."

학살자 왕이 문 앞에 있는 화분 아래에서 열쇠를 꺼내 문을 열었다.

도미닉 경은 시스템 인더스트리의 보안에 대해 떠올리며 저건 어딜 가나 같구나, 라고 생각했다.

...

도미닉 경과 학살자 왕이 지하로 내려간 그 시각.

"으엑. 여긴 왜 이래?"

엉망진창인 1층 로비의 깨진 천장.

거미줄로 된 하얀 비단을 둘러쓰고 붉은 루비 장식 여섯 개를 단 검은 머리의 창백한 거미 소녀가 거미줄을 타고 내려왔다.

메리였다.

"으, 세상에. 여기가 이렇게 엉망인 곳이었나? 좀 더 고풍스러운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메리가 역겹다는 듯 고개를 내저으며 땅에 그 쭉 뻗은 여덟 다리를 내려놓았다.

"그나저나 도미닉 경은 어디로 간 거지? 그 괴물은 어디로 간 거고?"

메리는 괜히 투덜거리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계약이 파기되지 않은 것을 보면 아직 살아 있다는 건데..."

메리가 한숨을 내쉬었다.

도미닉 경이 대체 어디에 있을까?

멀쩡하면 좋겠는데.

"젤리를 사느라 포인트를 거의 얻지 못했어. 그래. 이건 포인트를 위한 거니까... 응?"

겉과 속이 다른 말을 내뱉던 메리는 문득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의 입구를 발견했다.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

메리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 계단을 바라보았다.

"뭐, 저기가 열려 있다는 말은 도미닉 경이 지하로 내려갔다는 소리겠지?"

그렇게 말한 메리는 다시금 여덟 다리를 움직여 지하로 내려가는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

지하에 있는 학살자 왕의 방에 도착한 도미닉 경은 이 어마어마한 규모에 입을 벌린 채 말을 잊고 말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지하의 규모가 대단한 것은 아니었고, 그렇다고 어떤 놀라운 거대 시설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도미닉 경이 놀란 것은... 학살자 왕이 모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사진과 초상화, 그리고 인형들 때문이었다.

그 모든 것들은 단 한 사람의 모습만이 있었는데, 이는 도미닉 경이 아는 사람이었다.

바로, 메리였다.

"...이게 내 기믹이다."

학살자 왕이 도미닉 경에게 말했다.

"사실 이보다 다섯 배는 더 많았지만, 침입자들은 정도라는 것을 모르더군."

학살자 왕이 벽에 걸린 초상화를 들어 올렸다.

그곳엔 거미가 된 메리가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는데, 손에는 젤리가 가득했다.

초상화 구석엔 삼색의 깃털이 있었는데, 그 깃털로 도미닉 경은 이 초상화가 그려진 시기를 알아차릴 수 있었다.

도미닉 경이 메리에게 젤리를 넘겨 줬을 때였다.

"...이것들은 내 약점이다."

학살자 왕이 도미닉 경에게 등을 돌린 채 말했다.

학살자 왕은 비스크 돌로 된 메리의 인형을 쓰다듬기도 하고, 아직 완성되지 않은 초상화에 붓을 가져다 대기도 했다.

그 모든 작품에서의 메리는 인간의 모습이기도, 거미의 모습이기도 했으며 또한 도미닉 경이 보지 못했던 모습도 있었다.

모든 사진과 그림과 인형에는 S.K라는 이니셜과 '사랑하는 메리에게'라는 글귀가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 모든 것은 학살자 왕의 작품인 것 같았다.

"정확하게는 짝사랑하는 마음, 바로 나의 이 마음이 나의 약점이다."

다시 초상화를 벽에 건 학살자 왕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 도미닉 경에게 넌지시 말했다.

그의 머리 위에는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는 커다란 그림이 있었는데, 한쪽에는 질색하는 표정을 지은 채 무언가를 거부하는 인간 메리의 모습이 그려져 있었고, 반대쪽에는 갑옷을 입은 채 무릎을 꿇고 메리에게 꽃을 선물하는 한 남자가 그려져 있었다.

옆에 있던 검은 물감이 묻은 붓을 들어 갑옷을 입은 남자를 마구 지워 낸 학살자 왕.

도미닉 경은 그런 학살자 왕을 끝까지 쳐다보았다.

그림에서 남자를 지워 낸 학살자 왕.

어째서인지 그런 학살자 왕의 등은, 그 어떤 때보다도 작아 보였다.

"...페럴란트의 도미닉 경."

학살자 왕이 도미닉 경을 불렀다.

"이제 이해하겠나? 내가 왜 기믹을 건드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는지?"

학살자 왕의 말에 도미닉 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골치가 아프다는 듯 미간을 짚고 고개를 저었다.

이 방에 있는 기믹은 학살자 왕의 약점이 분명했다.

그러나 도저히 건드릴 수 있는 약점은 아니었다.

이 약점을 건드리는 순간, 학살자 왕은 분노해 이성을 잃을 것임이 틀림없었다.

도미닉 경은 왜 학살자 왕이 이 기믹을 건드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는지 마침내 이해했다.

그리고 왜 학살자 왕이 지하에서 싸우는 것을 기피하고 1층에 올라와 싸웠는지도 이해했다.

당연했다.

이렇게나 학살자 왕에게 소중한 것들이 가득한데, 어떻게 여길 난장판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

도미닉 경은 한숨을 내쉬었다.

조금이라도 더 투지를 불태우고 싶었던 도미닉 경이었으나, 지금, 이 광경을 보고 나서는 그 작은 투지마저 완전히 식어 버린 것이다.

도미닉 경의 입꼬리가 급격하게 내려갔다.

도미닉 경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대신 도미닉 경은 아주 피곤하다는 얼굴로, 학살자 왕에게 이렇게 말했다.

"...체스로 결판 내시겠소?"

도미닉 경은 도저히 이 학살자 왕의 방에서 날뛸 생각이 들지 않았다.

학살자 왕은 도미닉 경의 말에 황당하다는 듯 대검을 내려놓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좋지."

학살자 왕이 어디선가 테이블과 의자를 꺼내 앉았다.

그에게 있어서도 이 방이 어지러워지는 것보다는 보드게임으로 승부를 결정짓는 것이 더 나았기 때문이다.

도미닉 경이 반대편에 앉았다.

세상에서 가장 정적인 전투가 시작되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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