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6화 〉 [225화]도미닉 경 VS 슬라톤 벡스 VS 학살자 왕
* * *
도미닉 경, 슬라톤 벡스, 그리고 학살자 왕.
서로는 서로가 만만치 않은 상대임을 알아차렸다.
현재 가장 덩치가 큰 슬라톤 벡스는 그 덩치만큼 가장 쉽게 표적이 되긴 했으나, 무시무시할 정도의 재생력과 부정형의 육체에서 나오는 예상치 못한 공격은 무시할 수 없는 것이었다.
학살자 왕은 이 셋 중 가장 밸런스가 잘 잡힌 이였는데, 최종 보스다운 체력과 피해량, 대검을 휘두를 때의 엄청난 공격 범위 등이 겹쳐 그야말로 최종 보스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었다.
도미닉 경은 겉으로 보기엔 셋 중 가장 작고 보잘것 없어 보였다.
그러나 가차랜드에서 크기는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흐."
"저 눈! 저 입! 찢어 버리고 싶다!"
슬라톤 벡스가 도미닉 경을 보며 발작했다.
도미닉 경은 현재 도저히 인간의 모습으로는 보이지 않을 정도로 환하게 웃고 있었는데, 길게 호선을 그리는 눈과 얇게 광대까지 찢어진 입은 마족의 눈으로도 충분히 기괴하고 흉악한 것이었다.
슬라톤 벡스가 도저히 도미닉 경의 미소를 참지 못하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이제는 익숙하다는 듯 방패로 슬라톤 벡스의 거구를 뒤로 넘겼다.
마치 투우사가 황소를 다루는 것 같은 모습.
그러나 슬라톤 벡스가 아무리 이성을 잃고 있다고는 해도 똑같은 기술에 세 번 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슬라톤 벡스는 날아가는 그대로 벽을 짚었다.
철벅. 하는 소리와 함께 살점이 벽에 들러붙는 끔찍한 소리가 났으나, 이내 슬라톤 벡스는 벽을 박차고 도미닉 경에게 다시 날아갔다.
슬라톤 벡스는 도미닉 경보다 수천 배는 더 큰 살점 덩어리였고, 그 톤 단위의 몸무게로 도미닉 경을 짓누를 생각이었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이렇게 힘과 체급으로 싸우는 마족들에게 익숙했다.
도미닉 경은 오히려 잘되었다는 듯 검을 집어넣고 방패를 양손으로 잡았다.
그리고 날아오는 슬라톤 벡스를 빗겨내 충격을 최대한 흡수하더니, 이내 한 모서리를 땅에 찍고 그대로 반대편으로 밀어 버렸다.
슬라톤 벡스의 돌진 궤도가 거의 90도 가까이 꺾이며 벽에 처박혔다.
"네놈!"
슬라톤 벡스가 다시금 주변의 생명체들을 잡아먹으며 도미닉 경을 노려보았다.
"가차랜드에서는 장비가 파괴되지 않아서 좋군."
도미닉 경이 방패를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본래라면 방패를 일곱 번은 바꿔야 했을 충격에 팔이 살짝 저려왔다.
"죽일 거다! 죽일 거야! 죽어서도 실실 웃을 수 있는지 보자!"
슬라톤 벡스가 다시금 도미닉 경에게 도약했다.
그러나 슬라톤 벡스의 분노와 공격은 도미닉 경에게 닿지 못했다.
"날 무시하는 건가?"
학살자 왕이 슬라톤 벡스의 경로에 대검을 내밀었다.
슬라톤 벡스는 갑자기 나타난 대검에 기겁하며 땅을 박차 천장으로 뛰쳐올랐다.
"덩치에 맞지 않게 민첩하구나."
학살자 왕이 슬라톤 벡스의 민첩함에 찬사를 보냈다.
"하지만 생각보다는 약하군. 마구 덩치를 불린 이들에게서 나타나는 현상이지."
학살자 왕이 대검을 내밀던 자세 그대로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대검에서 눈에 보일 정도로 압축된 바람이 슬라톤 벡스를 향해 날아갔다.
"힘을 집중하지도 못하고, 그저 휘두르는 게 전부라면... 실망이다."
슬라톤 벡스가 또 한 번 천장을 박차고 도망쳤다.
그러나 날아오는 바람을 완전히 피하지 못한 채, 또 신체의 일부가 잘리고 말았다.
슬라톤 벡스는 본능적으로 다시금 생명체들을 우적우적 씹어먹었다.
또다시 그 자리를 다른 이들이 채워 넣었다.
"...귀찮군."
학살자 왕의 표정은 투구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으나, 만일 표정이 보였더라면 분명 짜증이 가득했을 것이다.
"일단 저 재생력을 먼저 막아야 한다는 말인데..."
학살자 왕이 잠시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나지막한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캐서린, 덱스터. 여기서 죽어 줘야겠다."
학살자 왕이라는 별명대로일까?
그의 명령은 잔혹했다.
"전하의 명령대로."
캐서린이 허벅지에서 단검을 꺼내 자기 목을 그었다.
2층의 보스, 유모 캐서린이 죽음으로서 2층의 병력인 메이드들이 사라졌다.
"전하께서 말씀하셨다! 모두 목숨을 버려 전하에 대한 충성심을 증명하라!"
경비병들이 각자의 무기를 들어 서로의 목숨을 끊었다.
순식간에 모든 경비병들이 사라지고 나자, 마지막까지 테라스에서 명령을 내리던 경비 대장이 관자놀이에 권총을 가져다 대고 발사했다.
1층의 보스, 아마 그 이름이 덱스터였을 경비대장이 경비병들과 함께 사라졌다.
"체크 메이트."
학살자 왕이 팔을 들어 조금은 이른 타이밍에 승리를 선언했다.
"이제 너의 그 잘난 재생력은 무력화되었다. 넌 이제 아무것도 아니지."
"큭. 오만하긴."
슬라톤 벡스가 학살자 왕의 오만함에 이를 갈았다.
그러나 슬라톤 벡스는 학살자 왕의 말이 사실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슬라톤 벡스의 강점은 재생력이었다.
진명을 불렸음에도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던 건, 그가 가진 놀라울 정도의 재생력 덕분이었는데, 재생을 위해선 그만큼의 에너지가 필요했다.
지금까진 그 에너지를 주변의 생명체들을 잡아먹는 것으로 대체했으나, 이젠 그마저도 막혀 버린 것이다.
물론 슬라톤 벡스의 강점은 재생력만 있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가 가진 힘과 덩치는 도미닉 경과 학살자 왕의 전투 기술 앞에선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슬라톤 벡스는 자기 패배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좋다. 아무래도 내가 이길 확률은 거의 0에 수렴하는 모양이군."
"아아, 더 먹을 것이 없다!"
"부족하다! 부족해!"
슬라톤 벡스의 모든 입이 패배를 직감하고 아우성쳤다.
"부탁이 있다."
슬라톤 벡스의 가장 큰 얼굴이 말했다.
"이왕이면, 단번에 여기를 찔러 죽여다오."
슬라톤 벡스의 살점이 뭉글뭉글하게 갈라지며 검붉은 보석이 튀어나왔다.
그 보석은 마치 살아 있는 심장처럼 펄떡펄떡 뛰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것이 슬라톤 벡스의 심장인 모양이었다.
"마지막까지 싸운 이에게 그 정도 자비는 베풀 수 있겠지?"
"...좋다."
학살자 왕이 대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그 대검은 곧 누군가의 외침에 막혀 버렸다.
"그만! 저 말을 듣지 마시오, 학살자 왕!"
학살자 왕은 고개를 돌려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엔 도미닉 경이 목에 핏줄을 세운 채, 있는 힘껏 학살자 왕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당장 그만두시오!"
도미닉 경이 다시금 소리쳤다.
"지금 저 마족은 당신의 던전의 일부를 먹은 상태요!"
"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
학살자 왕이 도미닉 경에게 물었다.
"어차피 던전은 복구된다. 침입자가 사라지는 그때에."
"그게 문제가 아니오!"
도미닉 경이 학살자 왕에게 소리쳤다.
"지금 저 핵을 부숴 슬라톤 벡스를 죽이면 슬라톤 벡스는 바로 추방될 거요! 당신의 던전 일부를 가진 채!"
그럼 더 이상 복구가 안 될 수도 있소! 라고 도미닉 경이 외쳤다.
"...뭐라고?"
학살자 왕은 지금 도미닉 경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 작은 기사가 도대체 뭘 말하고자 하는 것일까?
"슬라톤 벡스! 슬라톤 벡스! 슬라톤 벡스!"
도미닉 경은 학살자 왕의 의문을 말로 해결하는 대신,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도미닉 경이 계속해서 슬라톤 벡스의 진명을 외치자, 슬라톤 벡스가 가진 보석 심장이 점점 검게 변해 갔다.
"그만! 이 필멸 그만! 내 이름을 그만! 건방진 것, 네가 그만!"
슬라톤 벡스는 도미닉 경이 이름을 부르는 것을 방해하려고 계속 말을 걸었으나, 진명이 불릴 때마다 슬라톤 벡스가 할 수 있는 것은 그만하라며 울부짖는 것뿐이었다.
"슬라톤 벡스!"
대략 서른 하고도 다섯 번의 진명이 불리자, 슬라톤 벡스는 그 속에 들어 있던 온갖 것들을 토사물의 형태로 쏟아 내었다.
"...으아! 이건 너무 역하다!"
"먹고 싶지 않아. 먹고 싶지 않아!"
그중에는 5층의 보스 앙트레와 앤트리도 있었고,
"...이렇게라도 보니 반갑네."
"꼴이 말이 아니지만 말이야."
3층과 4층의 보스 존 도우와 제인 도우도 있었다.
"아직 모자라오! 도움이 필요하오!"
도미닉 경이 지나치게 소리를 지른 탓인지 숨을 헐떡이며 학살자 왕에게 말했다.
"대검으로 저 사악한 마족을 두드리시오! 더 이상 무언가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그, 그만! 그만해! 감히 필멸자들 따위가 웩!"
"슬라톤 벡스!"
도미닉 경이 다시금 진명을 외쳐 슬라톤 벡스의 말을 막았다.
학살자 왕은 슬라톤 벡스에게서 흘러나오는 온갖 종류의 던전 구조물과 생명체들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침묵을 지켰다.
그리고 마침내, 도미닉 경의 제안대로 대검을 들어 올린 학살자 왕.
"이 굴욕, 잊지 않겠! 컥!"
슬라톤 벡스의 거대한 몸이 대검의 검 면을 맞고 납작해졌다.
슬라톤 벡스의 목구멍에 걸려 있던 던전의 기둥 하나가 툭 튀어나왔다.
"머, 먹어야 해. 다시 먹어야 해..."
슬라톤 벡스가 기괴한쪽 팔을 마구 휘둘러 뱉어낸 것들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그것들을 입에 가져다 대기도 전에 대검이 슬라톤 벡스의 팔을 잘랐다.
더 이상 뱉어낸 것들을 집어 먹을 팔이 사라지자, 슬라톤 벡스는 차마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건 장이 끊어지고, 위가 녹아내리며, 폐와 심장이 뒤틀리는 느낌이었다.
물론 이는 슬라톤 벡스의 본능, 무언가를 잡아먹는다는 그 본능이 내뱉는 비명일수도 있겠으나
"슬라톤 벡스! 그 저주받은 탐욕이여! 레기온에게 가서 자비나 구하라!"
도미닉 경이 슬라톤 벡스를 저주하며 내뱉은 말 때문이었다.
마침내 슬라톤 벡스의 검붉은 심장이 완전히 검게 변해 마치 석탄처럼 변해 버린 것을 본 도미닉 경이 학살자 왕에게 소리쳤다.
"이제 죽이시오!"
"...감히 왕에게 명령한 건 탐탁지 않다만, 이번만큼은 자네의 말을 들어 주지."
학살자 왕이 대검을 양손으로 들어 올려 역수로 잡았다.
그리고 검 끝을 아래로 한 채, 그대로 슬라톤 벡스의 검은 심장에 내려찍었다.
퍼석. 하는 소리와 함께 석탄처럼 되어 버린 심장이 마치 석탄 뭉개지듯 가루가 되었다.
"안 돼! 안 돼!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 이렇게 추방될 수는 없어!"
슬라톤 벡스 아래, 그의 그림자가 수많은 그림자 팔이 되어 슬라톤 벡스를 움직이지 못하게 잡았다.
그리고 마치 슬라톤 벡스를 그림자에 집어넣으려는 것처럼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도미닉 경, 도미닉 경! 저주받으라! 내 한, 고통, 절망, 슬픔, 분노, 어둠이 너에게 닿아 저주받으리라!"
슬라톤 벡스 완전히 그림자에게 먹히기 전, 도미닉 경에게 있는 힘껏 저주를 날렸다.
"그거 마음에 드는구려, 슬라톤 벡스."
도미닉 경이 히죽히죽 웃으며 슬라톤 벡스를 바라보았다.
"아, 그러고 보니 내가 가차랜드에 오면서 받은 지식 중 이런 것이 있었소."
도미닉 경이 슬라톤 벡스를 향해 다가 갔다.
"같은 시민에게 하면 기분이 나빠지니 웬만하면 하지 말라고 했지만, 마족이라면 상관없지 않겠소?"
도미닉 경이 마침내 눈 하나만을 남기고 그림자에 삼켜진 슬라톤 벡스를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빠르게 앉았다 일어섰다하며 슬라톤 벡스의 위를 지나갔다.
"허."
학살자 왕이 도미닉 경의 행동에 감탄사를 터뜨렸다.
도미닉 경의 행동은 학살자 왕이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완벽한 티배깅이었다.
슬라톤 벡스는 이미 그림자에 삼켜진 상태였기에, 도미닉 경의 행동을 그저 바라만 볼 수밖에 없었다.
슬라톤 벡스는 입이 없다. 그러나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