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27화]바론&바로네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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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미닉 경은 가게 안을 둘러보았다.
목재로 마감되어 따뜻한 분위기.
벽난로에서 나오는 은은한 빛이 더해져 더욱 편안한 느낌이 든다.
벽에는 곰과 사슴 머리가 박제되어 있었는데, 그 아래에는 날짜가 적혀져 있어 언제 사냥한 동물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박제 아래에는 마네킹들이 몇 개 늘어서 있었는데, 공주들이나 입을 법한 하늘하늘한 드레스부터 굳센 기상을 자랑하는 외교관의 예복까지 구김없이 걸려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이 가게의 특징을 잘 알 수 있었으나, 정작 도미닉 경의 관심은 다른 데 있었다.
벽에 걸린 거대한 칼.
도미닉 경의 키는 물론이요, 웬만한 키 큰 장정보다 더 큰 대검이 벽에 걸려있었다.
"고지대의 용맹한 전사들이 쓰는 검이지."
굳센 턱을 가진 노인은 도미닉 경이 대검에 관심을 가지자 나름 기분이 좋아졌는지 설명을 시작했다.
"검에 휘둘리는 검사는 삼류라고 하지만 저 검만큼은 예외로 검이 휘두르는 대로 휘둘려야 제대로 된 검사 취급받는다오."
노인이 자리에서 일어나 도미닉 경에게 악수를 청했다.
"휘슬 바론 남작이오. 그냥 남작이라고 부르시오."
자신을 남작이라고 소개한 이는 입에 담배 파이프를 물었다.
낡았지만, 상아로 마감된 자단나무 파이프는 그 자체로 예술품처럼 보였다.
도미닉 경은 빠르게 그의 외관을 훑었다.
이는 기사의 본능이었다.
강한 전사를 마주하면 상대를 탐색하려고 하는 본능.
노인은 커다란 빵모자를 쓰고 있었으며, 복슬복슬한 스웨터와 치마를 입고 있었는데, 그 위에 앞치마와 휘장을 걸치고 망토를 두르고 있었다.
빵모자에는 은색 실로 엮인 끈이 흘러내려왔는데, 전체적으로 보라색, 연보라색, 그리고 진한 보라색의 체크무늬가 인상적이었다.
문득 도미닉 경은 상대가 자신을 소개했음에도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는 기사에게 굉장한 결례였다.
그 사실을 알아차린 도미닉 경은 오른 주먹을 왼쪽 가슴에다 대고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페럴란트의 도미닉 경입니다. 기사로 임명 받았을 뿐, 작위는 없습니다."
"도미닉 경이라. 페럴란트의 도미닉 경."
노인은 파이프 담배를 뻐끔거리며 도미닉 경을 보았다.
노인 역시 한때는 기사였기에, 도미닉 경을 탐색하는 것이다.
거친 전장을 겪은 듯 푸석한 머리. 분명히 강자와 대적하다 상처 입은 것이 분명한 외눈. 그리고 무엇보다 관리가 잘되어 있는 검과 방패.
"마음에 드는군. 부인이 오랜만에 기인을 만났다고 자랑할 만해."
"부인께서 제 이야기를 하셨습니까?"
도미닉 경은 놀란 눈으로 남작을 쳐다보았다.
"그럼. 물론이지. 살면서 그렇게 매력적인 기사를 본 적은 없다고 말했는데."
"세상에, '당신을 제외하면' 이라고 덧붙인건 왜 빼먹으시나용?"
남작 부인은 기분 나쁘다는 듯 콧소리를 내며 고개를 돌렸다.
"이런, 부인. 그럴 생각은 없었소. 그저 당신이 나를 최고로 생각한다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다 보니 그랬나보오."
"아이 참, 그렇게 말하시면 부끄럽잖아용."
남작과 남작 부인은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데도 아직 사랑이 넘쳐나는 모양이었다.
"그나저나 여기 왔다는 것은 새로운 스킨을 얻기 위함인가용?"
남작 부인은 깨가 떨어지는 상황에서도 본질을 꿰뚫었다.
"어떻게 아셨는지?"
도미닉 경은 순간 놀랐으나, 이어지는 남작 부인의 말에 수긍하고 말았다.
"그야, 저번에 입었던 멋진 기사복이 아니라 이렇게 촌스러운 티셔츠를 입고 찾아왔다면 당연히 유추할 만하죵."
남작 부인은 콧소리를 흥얼거리며 웃었다.
도미닉 경은 자신의 티셔츠를 보았다.
여전히 눈부신 하얀 천에 '이건 티셔츠야'라고 적힌 문구.
도미닉 경은 천의 재질이 마음에 들었기에 이게 그렇게나 촌스러운가에 대한 고찰을 시작했다.
"잘 찾아오셨어용. 중세풍 예복에 대해서는 우리 남편과 저만큼 정통한 사람들도 없거든용."
"정확히는 부인, 당신이겠지. 나는 예전 같지가 않아."
"그렇지 않아용, 내 사랑. 전 아직도 당신이 만든 옷을 보면 가슴이 설레 잠을 못 자는걸용!"
정말 눈꼴시려운 상황이었으나, 도미닉 경은 두 사람의 사랑을 보며 진정한 사랑이란 저런 것이지. 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페럴란트의 상식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도미닉 경이 보기엔 정말 아름다운 사랑이었으니까.
"아무튼, 옷을 만들러 왔다고 했으니 일단 예산을 볼까용? 도미닉 경은 제가 유심히 보는 사람이니 어느 정도 감안 할 순 있어용."
"그게, 1280 가차석밖에 없습니다."
도미닉 경은 인벤토리에서 가차석을 모두 꺼냈다.
"오면서 마음에 드는 것은 대개 2000 가차석은 하더군요. 이 정도로 충분할지..."
"충분하고 말구용!"
남작 부인은 도미닉 경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다.
"애초에 저희가 파는 가격은 890 가차석 정도라구용. 1280 가차석이면 할인을 감안해도 2배는 멋진 옷을 만들 수 있을 거에용."
"일단 난 백파이프를 가져오리다."
남작과 남작부인은 예산을 듣자마자 환한 미소를 지었다.
고급스러운 옷 한 벌 짓기에는 꽤 큰돈이었으니까.
남작이 백파이프를 가지러 가게 뒤편으로 간 동안, 도미닉 경은 남작 부인에게 궁금한 점을 물었다.
"그, 남작께서는 어째서 치마를 입고 계시는지?"
"스코트리 차원의 전통 의상이에용. 척박한 지역이라 전통에 대한 자부심이 매우 강한 사람이죵. 그만큼 강하고 매력적인 사람이기도 하답니당!"
남작 부인은 콧소리를 흥얼거리며 재봉틀을 꺼냈다.
"그거 아시나용? 내 사랑 남작이 한때 굉장한 기사였다는 사실을? 대검을 휘두르면 산꼭대기의 얼음이 눈사태가 되어 흘러내렸죵."
"실없는 소릴."
남작 부인이 남작에 대한 자랑을 시작할 때 마침 남작이 가게 뒤편의 문을 열고 백파이프를 안고 들어왔다.
"당신의 백파이프를 듣는 건 오랜만이군용."
"너무 오랜만이라 이거 제대로 될지는 모르겠는데."
"걱정 하지마세용, 자기. 당신의 연주는 언제 들어도 행복하답니당."
도미닉 경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도대체 옷을 만드는데 왜 백파이프가 필요하단 말인가?
결국,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도미닉 경은 남작에게 질문을 건넸다.
"그 백파이프는 어디에 쓰이는 겁니까?"
도미닉 경의 물음에 남작은 의아한 듯 도미닉 경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이내 도미닉 경이 아직 옷 한 벌 제대로 산 적이 없는 초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궁금할 만하겠구만."
남작은 백파이프를 연습하기 위해 한껏 들이쉰 숨을 내쉬며 말했다.
"옷을 만드는 것까지는 괜찮지만, 옷을 만들어 팔기 위해선 사운드와 이펙트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를 수도 있지."
남작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사실 요즘 대부분의 상인들이 신경 쓰지 않는 부분이었으나, 정식으로 물건을 팔 때에는 반드시 그에 걸맞은 효과가 필요했다.
행정부에서 약식도 인정한다고 발표한 이후 대부분은 전용 대사만 뱉거나 단순한 결과만 보여주었으나, 전통을 중시하는 남작으로선 여전히 구 시대의 규율을 지키는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정성을 들여야 사람들이 더 애정을 가질 것이 아닌가. 그저 파니까 사는 건 용납할 수 없네."
"이해해 줘용. 예전에 제멋대로 구는 손님에게 크게 데인 적이 많아서 말이죵."
남작 부인은 이제 아주 큰 저울을 꺼냈다.
한쪽엔 아무것도 입혀지지 않은 마네킹이, 반대편에는 비어 있는 가마솥이 있었다.
"자, 이제 여기에 가차석을 필요한 만큼 부어넣으면 그에 걸맞은 옷을 만들 거에용. 첫 구매이기도하고 제가 눈여겨 보는 손님이기도 하니깡 여기 카탈로그에서 20% 할인이 들어가용."
남작 부인은 카탈로그를 보여 주었다.
590 가차석 = 최소 레어 이상.
890 가차석 = 최소 유니크 이상.
1380 가차석 = 최소 에픽 이상.
대략 그렇게 적힌 문구를 보며, 다른 가게에 적혀 있던 가격표를 생각했다.
최저가가 1880 가차석이었던 에픽 등급.
"다른 가게는 1880 가차석이던데, 그건 뭐요?"
도미닉 경은 또다시 의문을 해결하기 위해 바로 말을 꺼냈다.
"그런 건 미끼 상품이야."
남작이 갑자기 분통을 터뜨렸다.
"엉망인 것들을 섞어서 최대한 팔아먹으려는 비열한 상술이지. 대체적으로 그런 곳은 10연차가 기준이야. 그리고 일부러 가장 좋은 옷을 두 배 이상 가격을 매겨 따로 사는 것보다 뽑기로 뽑는 게 더 이득이라고 생각하게끔 만들지."
남작은 백파이프의 소리를 조율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분노가 가라앉지 않아 백파이프로 감정을 가라앉히려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원가 생각하면 우리도 제법 많이 받는 편이지만, 그대로 우린 월세와 생활비를 벌 정도만 더 받는다고."
"진정하세용, 자기. 저번에 고혈압 판정받았잖아용. 화는 혈압에 나쁘다구용."
남작 부인의 필사적인 부탁에 남작은 겨우 분노를 진정시킬 수 있었다.
"조금 더 진정할 겸, '스코트리의 애처가'를 연주해 줄 수 있을까용? 부탁해용."
"아하! 내가 가장 잘 연주할 수 있는 곡이지."
남작은 숨을 크게 들이쉬더니 백파이프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잔잔하면서도 애정이 넘치는 음악이 가게 안에 울려 퍼졌다.
"이제 저도 준비해야겠군용. 일단 여기에 가차석을 넣어 주세용. 기준치 이상으로 남은 건 자동으로 반환되니까 걱정 마시구용."
도미닉 경은 아름다운 음색을 배경으로 가마솥에 1280 가차석을 집어넣었다.
그러자, 가마솥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왔다.
처음엔 그저 하얀색이던 빛은 청동색, 은색을 거쳐 은은한 금색으로 변했다.
"이제 저도 준비해야겠군용."
남작 부인은 그 은은한 빛을 바라보며 심호흡했다.
"샬라가둘라 멘치카 불라"
갑자기 남작 부인의 등에서 나비의 날개 같은 것이 돋아났다.
손에는 언제 쥐어졌는지 끝에 별이 달린 나뭇가지가 반짝이는 가루를 가마솥 안으로 뿌리고 있었다.
한참을 가마솥 위에서 지팡이를 뱅글뱅글 돌리며 계속 가루를 뿌리던 남작 부인은 순간 눈을 부릅 뜨고 가마솥을 향해 지팡이를 크게 휘둘렀다.
"비비디 바비디 부!"
가마솥에서 엄청난 빛이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얼마나 찬란한 빛이던지, 도미닉 경은 하나밖에 없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윽고 빛이 가라앉자, 가마솥은 다시 비어 있었고, 저울의 반대편에 있던 마네킹에 옷이 하나 걸쳐져 있었다.
"역시, 부인 실력은 어디 가지 않았구만."
"이래 봬도 공주들에게 대모라고 불리던 사람인걸용. 아직 실력이 죽지 않아서 다행이네용."
금줄로 마감이 된, 아주 멋진 기사의 예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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