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화 〉 [26화]가차랜드의 본질
* * *
"여기. 복사본이야. 심사할 때 쓰라고."
돈 카스텔로는 홍보영상 겸 인트로를 담은 USB를 도미닉 경에게 건넸다.
"행정부 놈들은 예산을 어디다 쓰는지 모르겠지만, 매년 연말만 되면 심사 규정을 갈아치운단 말이지."
차라리 하늘 도로나 정비할 것이지. 매번 비공정이 늦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돈 카스텔로가 투덜거렸으나, 도미닉 경은 마침내 2성 심사를 통과할 수 있겠다는 생각뿐이었다.
도미닉 경은 계속해서 이 은색 빛이 감도는 금속 조각을 만지작거렸다.
"그나저나, 이런 말 실례일 수도 있는데..."
돈 카스텔로는 조심스럽게 도미닉 경에게 지금까지 했던 생각을 말했다.
"너, 냄새나. 옷 언제 갈아입었냐?"
잊었을 수도 있으나, 돈 카스텔로는 빌런이었다.
사람을 상처 입히는 데 아무 거리낌이 없다는 뜻이다.
도미닉 경은 그 말에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 자기 냄새에 태클을 거는 사람이 없었기에 더 큰 충격이었다.
"그렇게 냄새가 나오?"
도나텔로 씨는 아무 말 안 하던데. 도미닉 경이 옷소매를 코에다 가져다 대고 킁킁 거렸다.
"그건 도나텔로가 드워프라서 그렇고."
드워프는 상남자들이라 냄새 따윈 신경 쓰지 않는다나 뭐라나. 돈 카스텔로가 투덜거렸다.
도미닉 경은 자신이 언제 옷을 갈아입고, 언제 씻었는가에 대해 고민했다.
그렇다. 무려 고민했다.
그만큼 도미닉 경이 위생에 신경을 쓴 지 오래되었다는 말이다.
이내 도미닉 경은 한 달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도 옷을 갈아입은 기억이 없자, 그냥 신경을 끄기로 마음먹었다.
"한 달치곤 그래도 좀 나은 편이네."
돈 카스텔로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하지만 한 달이나 입었으면 옷이 다 삭았겠어. 이제 자네도 2성급이 되면, 그만한 격식은 갖춰야지. 안 그래?"
돈 카스텔로는 사람 좋게 웃으며 의상 전문점이 모여 있는 거리를 소개해주었다.
"대충 마음에 드는 곳에 들어가면 알아서 해줄 거야. 아, 맞아. 가차석은 충분해? 적어도 500 가차석 이상은 필요할 텐데."
다행스럽게도 도미닉 경은 점검 보상과 버그를 막아 내고 받은 상여급이 조금 있었다.
"다행이네. 이왕 추천한 김에 충고를 좀 하자면, 점포 하나를 고르면 웬만해선 끝까지 단골로 남는 것이 좋아. 이미지가 달라지면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거든."
"명심하겠소."
도미닉 경은 돈 카스텔로의 조언이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했으나 가차랜드에서의 조언은 언제나 가슴에 새겨두는 것이 좋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좋아. 그럼 다음에 더 좋은 일로 보면 좋겠군."
돈 빌려달라거나 보증 서달라는 일만 아니면, 언제라도 놀러 와도 좋아. 라고 말한 돈 카스텔로는 동아리 방 안으로 들어갔다.
도미닉 경은 그 자리에 서서 자기 영상이 담긴 이 은색 금속 조각을 만지작거렸다.
"그렇게나 심한가?"
도미닉 경은 뜻밖에 냄새난다는 사실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
"이제 옷을 사면 될 것 같은데..."
도미닉 경은 목욕탕에서 나오며 중얼거렸다.
가차랜드의 목욕탕은 물의 종류와 버튼이 너무 많았다.
페럴란트에선 그저 양동이와 강만 있으면 목욕할 수 있었는데 말이다.
어찌어찌 목욕을 끝마친 도미닉 경은 낡은 옷 대신 인벤토리 구석에 임시 의상이라고 적힌 옷을 꺼내 입었다.
빳빳하고 뽀송한 하얀색 티셔츠에는 '이건 티셔츠야.'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기에 도미닉 경도 티셔츠라고 부르기로 했다.
깨끗한 몸과 정신, 그리고 의복을 입고 나니 확실히 돈 카스텔로의 말이 옳았다.
옷에서 늪지대에서나 맡을 수 있었던 비린내 찌든 흙 냄새가 나던 것이다.
"돈 카스텔로 씨가 아니었다면, 무례를 모른 채 살아갈 뻔했군."
도미닉 경은 내심 돈 카스텔로에게 감사했다.
예전 옷을 인벤토리에 넣은 도미닉 경은 검과 방패를 착용하고 앞으로 나섰다.
이제 몸을 정갈히 했으니, 새로운 옷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여기쯤인듯한데..."
도미닉 경은 가차랜드에서 가장 큰 상업지구의 입구에 들어섰다.
세상의 모든 것을 사고파는 곳!
거래의 본분에 충실한 곳!
그러나 가끔은 엉망진창인 가성비를 자랑하는 곳!
상업지구에 들어서자 도미닉 경을 반겨 주는 것은 눈으로 다 담을 수 없는 상품들의 행렬이었다.
"자, 쌉니다, 싸요! 사과 룰렛 1회에 고작 20크레딧! 신선한 사과는 무려 1.3% 확률로 나옵니다!"
"약초 팝니다! 10번 돌리면 하나 더 끼워드려요! 확률표는 여기 옆을 참조하세요!"
세상에. 상품을 뽑기로 판다고?
도미닉 경은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뽑기로만 팔았더라면 그저 가차랜드의 특징이구나 라고 생각했겠지만...
"이 사과 얼만가요?"
"아, 단품으로 사시면 25크레딧에 드리지! 대신 뽑기로 사면 무려 5크레딧 이득이야!"
"확률은요?"
"신선한 사과 1.3%! 그냥 사과 22.7%! 못생긴 사과 59%에 나머진 썩은 사과야. 우리라고 땅 파서 가챠 돌리는 게 아니라고."
도미닉 경은 수학에 약했으나, 단순한 덧셈과 뺄셈 정도는 할 줄 알았다.
그런 도미닉 경의 짧은 지식으로도 저게 얼마나 황당한 상술인지 알 수 있을 정도였다.
그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사과를 사려던 사람은 확률에 대해서 한참을 고민하더니, 밝은 얼굴로 말했다.
"그 정도면 혜잔데?"
도미닉 경은 입을 틀어막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도대체 왜 저 사람은 손해를 볼 것이 뻔한 방식으로 사과를 사려고 한단 말인가?
마침내 사과를 산 사람은 10번 뽑기를 돌려 10개의 사과받았다.
그중 신선한 사과는 하나도 없었으나, 그 사람은 상인에게 화를 내거나 다른 곳으로 가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아, 아쉽네. 이거 보정은 얼마나 들어가요?"
"100개 사면 신선한 사과 확정으로 주지."
"이야, 옆집 청과상은 200번이던데, 역시 여기가 가장 혜자라니까."
사내는 뽑은 사과 중 그나마 멀쩡한 사과를 씹어먹으며 청과상에게 돈을 건넸다.
그리고 소위 천장을 칠 때까지 신선한 사과는 나오지 않았다.
"운이 없었네 그려. 다음엔 꼭 10번 안에 나와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랑할 수 있을 거야!"
"고마워요. 젠장. 이번 달은 사과만 먹어야겠네."
도미닉 경은 이 혼란한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으나, 기사다운 침착함으로 나름의 상황을 유추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가차랜드의 사람들은 거래의 방식이 조금 다른 모양이다. 라고 말이다.
도미닉 경은 이 혼란스러운 시장 바닥에 오래 있을 생각이 사라졌다.
대신 그는 돈 카스텔로가 말했던 의복 전문점 거리를 찾아 더 깊은 곳으로 향했다.
다행스럽게도 도미닉 경은 원하는 거리를 바로 찾을 수 있었다.
스마트폰에 깔린 지도 앱이 제법 정확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마음에 드는 곳을 찾으라고 했지."
도미닉 경은 일단 외부에서 가게를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다.
[신년맞이 스킨 전문점 해피 뉴 이어]
[바니걸 장인 막시무스 매거지누스의 토끼굴]
[이종족 평상복 전문점 이세카이야]
이 가게들은 사람의 외관을 책임지는 가게들답게 외부에서부터 그 모습이 남달랐다.
어떤 가게는 깜빡거리는 네온사인으로 이름만 써놓은 곳도 있었고, 어떤 가게는 평범한 목재에 페인트로 동화풍 그림을 그린 곳도 있었다.
도미닉 경은 마음에 드는 가게를 찾으라는 돈 카스텔로의 조언을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게나 특색이 강하니, 당연히 마음에 드는 가게도 있을 법 하지."
도미닉 경은 투명한 유리 너머로 전시된 의상을 하나하나 구경하며 거리를 걸었다.
마음에 드는 옷이 간혹 보였지만, 자세히 보면 아직 도미닉 경이 가진 가차석으로는 사지 못할 정도로 비싼 가격을 자랑했다.
에픽, 에픽, 레전드, 에픽.
뜻밖에 도미닉 경의 눈이 높았던 것일까?
도미닉 경은 마음에 드는 옷마다 그런 등급과 함께 최소 2000 가차석부터 시작하는 가격을 보았다.
가끔은 1888 가차석짜리 옷도 있었으나 비싼 것은 마찬가지였다.
"이거참, 눈을 낮춰야 하나."
도미닉 경은 급격하게 피곤해져서 다른 옷으로 눈을 돌렸지만, 아무리 봐도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었다.
그저 양털을 뭉쳐 놓은 듯 뭉실뭉실한 옷부터 실크 재질의 분홍색 잠옷, 그리고 가장 싼 의상에 색깔만 바꾼 옷들.
도대체 왜 파는지 모를 질 나쁜 옷들의 향연에 도미닉 경은 일단 더 찾아보자고 다짐했다.
얼마나 더 걸었을까?
도미닉 경은 마치 세 시간 동안 마족과 싸운 것같이 지쳐 버렸다.
가벼운 마음으로 옷을 사러 온 것뿐이었으나, 이젠 차라리 빨래를 하는 것이 더 빨랐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도미닉 경의 몸과 마음 모두 지친 그때에
[중세풍 전문점 바론&바로네스]
"바론 앤 바로네스?"
도미닉 경은 피곤한 와중에도 옛 기억이 떠올랐다.
'그냥 남작 부인이라고 부르세용. 남편 성이 바론이라 합치면 남작 남작 부인이 되어 버리거든용.'
그래. 2지역 3스테이지에서 만난 남작 부인의 성이 바론이었지.
도미닉 경은 그 간판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중세풍이라는 말도 그렇고, 남작 부인의 성이 바론이라는 것을 기억한 순간 이미 마음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도미닉 경은 홀린 듯 가게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딸랑. 하는 풍경 소리와 함께, 벽난로 옆에서 차를 마시고 있던 두 사람이 도미닉 경을 바라보았다.
"어서 오세용, 바론 앤 바로네스... 어머, 세상에. 도미닉 경이군요?"
"어서 오슈."
저번에 보았던 남작 부인과, 굳센 턱이 인상적인 사나운 인상의 노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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