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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차랜드의 행복한 도미닉 경-2화 (2/528)

〈 2화 〉 [1화]행복한 죽음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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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

전장의 잔혹함과 참혹함은 누구나 알 수 있지만, 이 남자만큼은 아닐 것이다.

푸석푸석한 갈색의 머리는 이미 말라붙은 적갈색의 피로 가려졌고, 그의 방패와 칼도 알 수 없는 덩어리가 뭉쳐져 날카로움과 민첩함을 잃었다.

"흐."

그러나 남자는 웃었다. 이미 한쪽 눈은 예전에 잃어 반쪽짜리 웃음이었으나, 그는 웃었다.

전쟁과는 어울리지 않는 밝은 웃음이었으나 그 내면을 바라본다면 오히려 다른 의미에서 전쟁과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흐."

그는 아주 천천히 웃었다. 그러나 그의 손은 여전히 빨라, 눈앞의 마족의 목을 내려치는 데 충분했다.

"흐."

눈앞에서 마족이 두 동강이 났다. 그럴 때마다 남자는 웃었다.

"흐."

아주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흥겨운 소리로 말이다.

"뭣들 하느냐! 당장 저놈을 막아!"

마족 중 머리 하나는 더 큰 녀석이 소리쳤다.

마족들이 덩치 큰 마족의 말을 듣고 남자에게 달려들었으나 그 소리를 들은 것은 마족 뿐만이 아니었다.

남자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피에 젖어 뺨에 기분 나쁘게 질척거리며 달라붙는 머리카락을 손등으로 대충 훔친 채, 그는 이글거리는 눈으로 소리친 마족을 바라보았다.

눈이 둘 중 하나라고 해서 내면에서 조용히 타오르는 분노, 혹은 광기가 절반이 되는 것은 아니다. 소리친 마족은 그런 생각이 문득 지나갔다.

그만큼 남자의 눈은 광기와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다, 당장 막아!"

"흐."

마족들은 동시에 두 가지 감정이 솟구쳤다.

하나는 도살자와도 같은 남자에 대한 두려움.

하나는 기분 나쁜 웃음에 대한 짜증.

다행스러운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마족들은 두려움보다는 짜증이 더 크게 다가왔고, 저 지쳐 있는 미친 남성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불운하게도 마족이 든 뼈창이 그의 갑옷 사이, 연약한 옆구리를 찌르는 데 성공하고야 말았다.

"서, 성공이­"

저 미친놈도 연약한 필멸자라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사실에 기뻐하던 마족은 턱만 남았다. 피가 얽혀 둔해진 남자의 검이 마족의 머리를 후려쳤기 때문이다.

"흐."

여전히 남자는 웃고 있었다. 그러나 마족들은 그가 처음보다 더 창백한 상태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의 손이 떨리고 있다는 사실과 함께.

마족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눈앞의 남자의 끝이 머지않았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마족들은 한 가지 사실을 잊고 있었다.

여기는 전장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페럴란트의 기사들이여! 도미닉 경을 구출하라!"

뿔피리 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저 멀리 언덕에서 갑옷을 입은 말의 머리가 나타났다. 아니, 말들의 머리가 나타났다.

말들의 위에는 찬란한 빛을 내뿜는, 그러나 수많은 이들의 피로 얼룩진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있었다.

그 앞에는 역시 찬란한 백색과 금색의 갑옷을 입은 여성이 여전히 날카로운 검을 들고 기사들에게 호령하고 있었다.

그 누가 저 여기사를 모르겠는가.

페럴란트의 적법한 후계자, 앨리스 백작 영애.

대전쟁에서 가장 큰 공훈을 세운 이들 중 하나로 알려진 그녀가 이 지친 남자를 구하러 달려온 것이다.

기사들이 돌격한다. 그리고 마족들이 도망친다.

조금 전까지 혼란했던 전장의 상황은 순식간에 정리되고 있었다.

"도미닉 경!"

앨리스 백작 영애는 엉망이 된 그를 바라보았다.

"너무 빨리 오신 것 아닙니까. 아직 삼백 마리는 더 잡을 수 있었는데. 흐."

도미닉 경이라고 불린 남자는 흐리게 웃었다.

자신만만한 그의 말과는 다르게, 그의 몸은 그렇지 않았다. 찌그러져 형태를 알아볼 수 없는 갑옷과 원래의 색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검붉은색으로 칠해진 방패. 검이라기보다는 핏덩이로 된 몽둥이라고 불러야 할 칼이 그의 상태를 대변하고 있었다.

"도미닉 경, 지금 당장 후방으로 가게. 신관들에게 치료받고 나서 다시 전장으로 나서게."

앨리스 백작 영애는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예비용으로 쉬고 있었던 말 하나가 전장을 가로질러 그의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그저 웃었다. 그의 몸 상태는 그가 가장 잘 아는 법이었다.

"지금 쉬어 버리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일어날 수 없을 겁니다. 차라리 끝날 때까지 싸우는 것이 낫습니다."

그는 방패를 든 팔을 휘두르며 자신이 멀쩡하다는 사실을 알렸다.

"보십쇼. 멀쩡하지 않습니까?"

다친 쪽은 검을 든 방향이었기에 눈앞의 영애에게 자기 상태를 속이기에는 충분하다고 여겼다.

그러나 영애는 그런 그의 상태를 꿰뚫어 보고 있었다.

그런데도 눈앞의 도미닉 경에게 다시 후방으로 가라는 말을 선뜻 하기가 어려웠다.

그의 행복해 보이는 웃음 속에 숨어 있는 열광적인 분노 역시 알아차렸으니까.

"...좋다. 하지만 휴식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니, 기사단의 뒤에 따라오면서 잔당을 소탕하도록."

도미닉 경은 불만스럽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으나 앨리스의 의지도 단호했다.

영애는 도미닉 경을 지그시 쳐다보았다. 자신이 양보했으니, 너도 양보하라는 듯이.

"좋습니다.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따라가도록 하지요."

협상은 타결되었다. 각자가 한 발짝 물러나는 형태로.

사실 영애는 도미닉 경을 확실하게 후방으로 이송시키고 싶었고, 도미닉 경은 최전방에 서고 싶었으나 전장이라는 급박한 환경 속에서 투정 부리기에는 너무 촉박하다는 사실을 서로 알고 있기에 타결될 수 있었다.

둘의 속내는 여전히 달랐지만 말이다.

"도미닉 경은 천천히 따라오도록. 이왕이면 후속부대와 같이 오면 좋겠군."

"최대한 빠르게 따라 붙겠습니다, 주군."

도미닉 경은 평소보다 두 배는 환하게 웃었다.

분명히 무언가 꾸미고 있군. 영애는 한숨을 내쉬었다.

오랜 시간 전장에서 같이 있었으니 서로에 대해서 잘 아는 까닭이다.

"기사단이여! 다시 진형을 정비하라! 적의 지휘관으로 보이는 개체까지 단숨에 돌파할 것이다!"

조금 전의 돌격으로 지친 말이 잠깐 쉬는 사이 이미 기사단은 재정비를 마쳤다.

영애의 말은 최대한 도미닉 경을 쉬게 하려는 말이었고, 비록 도미닉 경과 달리 태생이 기사 가문과 귀족 가문이었던 기사들이었으나 도미닉 경을 존중하는 의미로 최대한 천천히 다시 정비를 시작했다.

애초에 상황은 제국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제국의 압도적인 의지와 놀라운 과학으로 마족들을 궁지에 몰아넣고 있는 상황이었기에 오히려 무리하기보다는 확실하게 숨통을 끊는 전략이 좋은 상황이었다.

그러나 도미닉 경은 여전히 불만에 찬, 행복한 웃음으로 화답했다.

실실 웃던 도미닉 경은 뒤에 맨 작은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내 피를 닦았다.

끈적한 피에 비해서 손수건은 너무나도 작았기에 얼굴을 닦는데 그쳤으나, 시야가 충분히 확보되는 것만 해도 도미닉 경은 행복해졌다.

행복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았으니까.

끝없이 이어진 전투 속에서 잠시 고통을 잊었던 걸까. 도미닉 경에게 갑자기 강렬한 통증이 들이닥쳤다.

조금 전에 마족에게 찔렸던 옆구리에서부터 일어난 통증은 이내 근육과 뼈를 타고 전신을 강타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통도 잠시. 신기하게도 다시금 고통이 가셨다.

제법 위험한 통증이었으나 도미닉 경은 내색하지 않았다. 자기 주군인 앨리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저 잠깐 아팠을 뿐이라고 자신을 속이면서.

"자, 다시 돌격이다!"

도미닉 경이 잠시 몸의 이상을 느낀 사이, 기사들은 다시 돌격을 시작했다.

더 기다리기에는 시기가 너무 적절했다.

제국은 승리하는 중이었다.

더 이상 마족들은 싸울 의지를 잃고 자신들의 본거지인 마계와 연결된 포탈을 향해 도망치고 있었다.

지휘관 급으로 보이는 개체들은 발악을 시도하며 몰아치는 제국의 군세를 막아보려고 했으나 제국이 더욱 우월했다.

그리고 역사적으로 기병은, 도망치는 적에게 더욱 효과적인 병과였다.

"마지막 돌격이다! 최대한 많은 수급을 쓸어 담아! 제국의 기사들이 여전히 타의 모범이 된다는 것을 보여 줘!"

선두에 선 영애의 외침 이후에, 영애의 옆에서 달리던 기사 하나가 뿔피리를 불었다. 전속력으로 돌진하라는 신호였다.

쾅. 하고 도망치는 마족의 뒤에서 커다란 충돌이 일어났다.

마족은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고깃덩이가 되어 사방으로 비산했다.

도미닉 경은 기사들이 달린 방향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쫓아가고 있었다.

주군은 천천히 오면서 기사들이 흘린 잔당을 소탕하라고 했지만, 기사들의 무용이 얼마나 뛰어난지 그저 뛰어가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대신 도미닉 경은 전장을 살폈다.

지금까지 미친 듯이 싸운 탓에 좁아져 있던 시야가 다시 넓어지기 시작했다.

땅에서 기사들이 마족의 패잔병들을 쫓는 동안, 하늘에서 용을 탄 기수들과 비공정들도 보였다. 제국의 전통과 제국의 과학력이 손을 잡고 제국의 위엄을 온 세상에 알릴 준비하고 있었다.

검과 대포. 활과 탄환. 몇 년 전까지만 해도 공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겼던 기술들이 전쟁을 통해 발전해 왔다. 그리고 여지없이 그 기술들은 마족들을 쓸어 담는데 효과적이었다.

진작 이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도미닉 경은 행복했다.

그랬다면, 여동생이 죽을 일도 없었을 텐데.

도미닉 경은 웃었다.

그랬다면, 내가 이렇게 무언가를 죽이면서 행복할 일도 없었을 텐데.

도미닉 경은 죽고 싶지 않아 행복했다.

사색은 거의 끝났다. 전쟁도 거의 끝나가는 참이다. 승리가 머지않았다.

그러나 언제나, 비극은 안심할 때 찾아오는 법이다.

"단장님! 위험합니다!"

"너! 계집! 너라도 죽일 테다!"

시체 아래에 숨어 있던 비루한 마족이 뼈 칼을 들고 영애에게 달려들었다. 다른 기사들은 이미 잔당을 처치한다고 흩어진 상태였고, 그나마 가장 가까이 있던 기사가 구해주려고 말머리를 돌렸으나 마족의 공격이 먼저일 것 같았다.

영애는 당황했으나 침착하게 검을 들었다. 그러나 마족의 필사적인 살의가 일으킨 기적일까? 마족의 검은 바람을 타고 기묘하게 휘어 영애의 방비를 뚫고 목을 향하고 있었다.

영애는 눈을 부릅떴다. 어떻게 해서든 이 상황을 벗어나야했지만 시간이 너무 느리게 흘러 갔다. 반면 마족의 검은 불길한 색의 액체를 휘날리며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답이 없다. 영애는 눈을 질끈 감았다.

"위험합니다, 주군!"

지겹기도 하지. 그래. 당연하게도 예측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도미닉 경은 달리던 그대로 영애의 앞에 달려들었다.

방패를 앞세워 마족의 인중에 한 방 먹이기는 했으나, 그 기묘한 검은 도미닉 경이 방금 입은 옆구리의 상처를 다시 찌르고야 말았다.

아, 이번 건 확실히 죽겠구나.

도미닉 경은 생각했다.

영애는 한껏 집중했던 그대로 천천히 마족과 한 뭉치가 되어 땅에 떨어지는 도미닉 경을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게. 무슨.

영애는 순간 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내 부정했다. 그러나 곧 상황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였다.

'거 더럽게 아프네.'

도미닉 경의 마지막 말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정말 지겹고, 지루한 클리셰이긴 하다.

다만 현실이 창작물과 다른 점은, 정말 사람은 허무하게 죽을 수 있다는 점이다.

적어도 마지막 말은 제대로 남기고 싶었는데 말이다.

"흐."

나는 웃었다.

"그래서, 내 마지막을 보는 이유는 뭐요?"

내 앞에는 양복을 입은 무언가가 전자기기를 통해 무언가를 적고 있었다. 얼굴은 보이지 않는다. 보안을 위해서라나 뭐라나.

"지금부터 갈 가차랜드에서 당신의 가치를 입증하기 위해서죠."

남자일까, 여자일까? 저것의 목소리는 나누어진 것처럼, 혹은 여럿이 합쳐진 것처럼 들렸다.

"가치라."

흐. 하고 나는 웃음을 지었다.

"행복하군. 정말로."

"자, 당신의 가치를 확인했으니 이제 특전... 네. 특전을 선택할까요? 보통은 이것저것 협상하고 협박하고 그렇습니다만..."

"다른 건 바라지도 않소. 충분히 싸울 수 있다면 족해."

반대편의 양복이 잠시 침묵을 유지했다.

"그럴 리가요. 그런 사람일수록 더더욱 많은 것을 원하더군요. 진짜 원하는 바를 말하세요. 돌려 말하는 것은 먹히지 않습니다."

"정말인데."

나는 머쓱하게 머리를 긁었다.

"그런 건 욕심이 많은 녀석들이나 가지라고 하쇼. 나는 그저 잡생각조차 들지 않을 정도로 처절한 전투를 원해."

전자기기에 무언가를 적어 내리던 양복이 손을 멈추고 내 눈을 바라보았다.

뭐, 눈이 하나라 부담도 절반이지만.

나는 살짝 찔려 하지 않아도 될 말을 덧붙였다.

"그게 행복이거든. 죽을 정도로 행복해야지. 행복하지 않으면 죽을 것 같으니까."

횡설수설하는 내 말이 어느 정도 먹혔는지 양복은 한숨을 내쉬었다.

"좋습니다. 당신은 이제 가차랜드로 갈 것입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그곳에서 당신은 지휘관, 제독, 선생님, 점장이든 뭐든 그 아래로 들어가거나, 혹은 그런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게 룰이니까요."

"혼자 다니는 건 아무런 이득이 없다고 했지. 이해했소."

"그러기 위해서는 당신의 가치를 드러내야 합니다. 무엇이든 상관없어요. 혈연, 지연, 학연을 동원해도 좋고, 재능과 특기를 어필해도 좋습니다. 당신의 가치가 높아질수록, 당신이 원하는 것도 쉽게 이룰 수 있겠죠."

"마음에 드는군. 행복할 정도로."

"가챠랜드에서 죽음이란, 당신의 가치가 없어진 그 순간입니다. 그전까진 죽어도 다시 살아날 수 있습니다. 당신의 상관이 원한다면 말이죠."

"가장 처절한 죽음. 얼마나 끔찍한지."

"자, 대략적인 내용을 이해하셨다면... 여기에 서명하시면 됩니다."

전자기기... 그러니까 타블렛이라고 했던가. 그 위에 플라스틱 쪼가리로 서명한다. 이름을 적기엔 내 이름의 철자가 헷갈리기에 점 두 개와 웃는 입. 행복함의 표시다.

"좋습니다."

양복은 다시 전자기기를 거둬갔다. 그러곤 어디 이상한 부분이 없는지 다시 확인하고는 내게 손을 건넸다.

"가차랜드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도미닉 경. 부디 행복한 하루 되시길."

그리고 그 말은, 내가 여기 온 이후 가장 마음에 드는 소리였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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