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135. 잊혀진 페네셀 왕국
“대단하군! 정말 대단해!”
네드 자작이 감탄을 연발하며 하늘을 날고 있는 AP-1수송기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놀랍습니까?”
“물론이지! 세상에 하늘을 나는 기계라니! 정말 놀라워!”
잔뜩 흥분한 네드 자작의 목소리에 카일이 피식 웃음을 지었다.
“죄송하지만, 저건 파는 물건이 아닙니다.”
“…이런, 속마음을 들켰나 보군!”
“저희도 이제 두 대가 완성되었습니다. 판매는 어렵습니다.”
“그럼… 나중에라도 어떻게 안 되겠나? 저것만 있으면 폰티 아일랜드와의 교역이 좀 더 수월할 것 같은데. 자넨 모르겠지만 폰티 아일랜드로 가려면 거친 외해를 지나야 하는데, 너무 거칠어서 파괴되는 상선도 적지 않다네.”
“그게… 안타까운 일이지만 쉽지 않습니다. 마나석도 많이 들고… 또 다수의 고위급 마법이 포함되어 있어….”
“마나석! 그건 걱정말게, 앞으로 도자기 대금 전체를 아예 마나석으로 주겠네, 시간도 충분히 줄 테니 꼭 부탁하겠네! 값도 넉넉히 쳐주지. 아예 대형상선 한 척 값으로 주겠네!”
대형상선 한 척이면 작은 영지와 맞먹을 만큼 엄청난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이거 참… 난감한 제안인데…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하! 고맙네!”
네드 자작이 환하게 웃었다. 그리곤 즐거운 마음으로 협곡 아래쪽 반쯤 무너진 고성을 가리켰다.
“저기가 중간 기착지네! 비행기는 저쪽 라멜라 강을 따라 착륙하면 될 거야!”
“제법 험준한 협곡이군요.”
카일이 기수를 내려 고성 쪽으로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내려갔다.
“베카 협곡이네! 안티레논 산맥을 통과할 수 있는 유일한 협곡이지!”
“대단하군요. 저곳만 막으면 중부와 남부를 완전히 분리할 수 있겠어요.”
“하하! 맞아, 이 무너진 고성이 오래전엔 이곳 남부의 페네셀 왕국을 지켰던 난공불락의 요새, 베카성이지.”
“그렇군요. 산 뒤쪽으론 라발라 강이 흐르고 앞으론 험준한 절벽에 외길이 있으니….”
“그럼 뭐하나! 와이번이 등장하면서 더 이상 요새의 의미가 사라졌는데….”
공략이 어려운 난공불락의 요새는 달리 말하면 내부에서도 외부로 나오기 힘들다는 뜻이다. 밖을 철저히 포위당한 채 와이번을 통한 지상공격이 이어진다면 성안에 고립된 병사들은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는 없을 것이다.
“그렇군요.”
“우리 남부인들이 왜 무역에 목을 매는지 아나?”
갑작스런 네드 자작의 물음에 카일이 뒤를 돌아봤다.
“남부인들 대부분은 페네셀 왕국의 귀족 출신이지. 원래는 신의 장벽인 안티레논 산맥 안쪽 대평원을 바탕으로 살았지만, 페네셀 왕국이 무너진 뒤 모두 척박한 해안가로 밀려나 버렸지, 그리고 막대한 곡물을 생산하던 평원 대부분은 바런트 왕실의 직영지가 되었다네. 그리고 여기다 병력을 배치해 남부인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니 어쩌겠나…. 우리 남부인이 할 수 있는 건 무역밖에 없었다네.”
“이제 보니 네드 자작님도 페네셀 왕국 사람이셨군요.”
“이런 말 하긴 좀 그렇지만 이래 봬도 왕족이었다네!”
네드 자작의 대답에 카일의 눈이 더없이 커졌다.
“왕족! 이거 제가 그동안 너무 무례를 했군요.”
카일이 놀란 얼굴로 뒤쪽 안장에 앉은 자작을 돌아봤다.
“하하! 왕족은 과거의 일일 뿐이야! 지금은 그저 페네시스가를 이끄는 주인일 뿐이지!”
네드 자작이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베카 요새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그때 만약 베카 계곡을 지켜냈다면, 아마도 그는 지금 페네셀 왕국의 국왕이 되어 있을 것이다.
카일을 비롯한 호위 기사들과 자경단이 베카성으로 착륙했다. 두 대의 비행기는 잔잔한 라발라 강 위로 내려앉았고, 카일은 안티레논 산맥 아래 그늘진 곳에 비행기를 숨겼다. 이곳에서 저녁까지 숨어 지내야 했다.
“자작님은… 다시 페네셀 왕국을 일으킬 생각은 없습니까?”
“하하! 나더러 반역을 하란 말인가? 어림없는 소리! 평원에 자리 잡은 왕실 병력을 어찌어찌 상대 한다 해도 협곡을 넘어올 대군과 와이번 편대를 우리 남부 힘으로 막는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야.”
“내일이면 전면전을 선언한 크로노스 왕국이 대병을 이끌고 바런트 왕국의 북서부와 서남부 두 곳 국경을 넘어 진군할 겁니다. 페네셀 귀족으로선 지금이 바로 독립하기엔 최상의 조건이 아닙니까?”
“자넨, 크로노스 왕국이 바런트 왕국을 이길 수 있을 것 같나?”
“어차피 두 왕국의 국력은 비슷합니다. 아니 국력이나 영토의 규모만 따지면 크로노스 왕국이 이기지 못할 이유도 없을 겁니다.”
카일의 말에 자작이 고개를 저었다.
“그건 자네가 착각한 거야! 이미 바런트 왕국의 전력은 크로노스 왕국을 넘어섰다네! 바런트 왕국의 국왕이 왜 아서 가문을 부추겨 도발하고 와이번과 기병대를 투입했다고 생각하나? 다 이유가 있어서야! 난 그저 그사이에 작은 이득을 취하려 참전한 거고.”
“이런 말씀은 전혀 뜻밖이군요.”
“자네도 잘 생각하게, 이건 자네를 좋게 봐서 하는 충고야!”
네드 자작이 모닥불을 뒤적이며 굳은 얼굴로 말했다.
“흠… 그럼 이건 어떻습니까? 제가 전쟁에 전면으로 나서도 질까요?”
카일의 손 위로 청백색의 투명한 검이 삐죽 솟았다.
“마, 마스터! 허허, 자네는 날 정말 놀라게 하는군! 마스터라면 전쟁의 판도를 바꿀 수 있지! 하지만 때론 마스터가 참전해도 이길 수 없는 전쟁이 있네, 난 이번 전쟁이 그렇다고 생각한다네, 그래도 안심은 되는군. 자네의 장원이 공격받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적어도 자네 사람들은 지킬 수 있겠어!”
“이건 정말 예상치 못한 곤란한 말씀이군요.”
카일은 이미 공주를 도와 전쟁에 참전하기로 했고, 전쟁에 대비해 마크와 비터를 북부 아이스 랜드로 보내 마나석 채굴을 시작한, 한편 타바트 백작이 순차적으로 보내오는 서북부 예비군을 은밀히 필 테일 영지에 집결시켜 강도 높게 훈련을 시키고 있었다.
자작이 페네셀 왕국의 왕족이란 말에 은근히 떠본 것도 이번 전쟁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곤란하다… 그 말은 참전을 결심했단 말로 들리는데, 맞나?”
“안타깝지만, 그렇습니다.”
“…음.”
자작이 짧은 신음을 내뱉으며 고민에 빠지더니 한숨은 내쉬며 말을 이었다.
“…내가 자네에게 빠지긴 빠졌나 보군, 이런 말까지 할 줄이야….”
자작기 잠시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와이번의 부화에 대해서 아나?”
“예! 듣긴 했습니다. 와이번 알의 인공 부화를 시도하다간 와이번의 분노를 받게 된다고….”
“그럼 바런트 왕국이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부화에 성공한 것도 아나?”
“화이트 와이번 알 사건을 말하시는 겁니까? 아이스 랜드 침입 사건요.”
“맞아! 자네가 죽인 베지톤 백작이 이 일을 맡았지, 하지만 생각해보게, 바런트 왕국이 과연 화이트 와이번의 알만 노렸을까? 아니야! 자네가 상상한 것 이상의 수많은 알 들이 지금 부화를 했고, 예비 와이번 나이트들이 어린 와이번들을 키우고 있다네, 아마도 지금쯤이면 본격적으로 성체 와이번과의 계약을 진행하고 있을 거야!”
“거기까진 미처 생각지 못했군요. 하지만 그러니 이번에야 말로 더더욱 바런트 왕국을 제압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크로노스 왕국도 언젠가는 바런트 왕국에 무너지고 말 겁니다.”
“그건 그렇지만…휴 이미 결정을 했고, 생각도 확고하니…조심하란 말밖엔 할 수가 없겠군.”
“알겠습니다. 그리고 중요한 정보를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대응책을 고민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대응책?”
“와이번을 막을 수 있는 게 꼭 와이번 만은 아닐 것 같아서요.”
카일의 뜻을 이해한 자작이 놀란 눈 크게 떴지만 그뿐이다. 페네시스 가문은 어차피 이번 전쟁과는 큰 상관이 없는, 전장과는 한참이나 떨어진 남부 영지의 주인이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카일에게 중요한 정보 하나를 넘긴 것도 자작 본인과 이번 전쟁은 큰 상관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그의 생각이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 가문으로 돌아와서야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이게… 어떻게 된 것이냐!”
영지로 들어선 네드 자작이 여기저기 부서진 건물과 울부짖는 영지민들을 돌아보더니 피를 토하듯 소리치며 영주성으로 달려갔다.
“누구… 영, 영주님!”
“영주님이 살아 돌아오셨다. 영주님이다. 어서 성문을 열어라!”
영지병들이 서둘러 성문을 열었다.
“아버지!”
검은 상복을 입은 젊은 여인이 달려와 네드 자작에게 안겼다.
“아네드! 이게 어떻게 된 거냐!”
“돌아가신 줄 알았어요. 왕실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알리더니 왕명이라며 영지민을 강제로 징집해 갔어요. 저희뿐 아니라 남부 귀족 전체가 당했어요!”
“징집이라니! 영지민은 영주의 고유 자산이다. 감히… 첸들러는 어디 있느냐! 그걸 가만히 지켜봤다는 말이냐!”
첸들러는 네드 자작의 아들로 자작의 후계자다.
“‘남부 귀족은 영주나 후계자 중 반드시 한 명은 참전해야 한다’라는 왕명과 함께 왕실 기사들이 아버지을 대신해 오라버니를 끌고 갔어요.”
“반역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한 인질 겸….”
“성장하는 남부 귀족 세력을 축소 시키려는 비열한 간계겠지! 비… 빌어먹을!”
그동안 남부 귀족들이 많은 차별을 받긴 했지만, 이번 조치는 너무 과했다. 남부 귀족의 정신적 지주인 네드 자작이 행방불명되자, 이때를 기점으로 남부 세력을 전체를 약화시키려는 게 분명했다. 더불어 페네셀 왕족인 네드 자작에 이어 후계자인 첸들러까지 이번 전쟁에서 죽는다면 사실상 페네셀 왕실의 대는 끊어지고 남부 귀족의 구심점은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리고 약화된 남부 귀족을 대신해 바런트 왕실과 귀족들이 그 자릴 차지하게 될 것이다.
“이번에 끌려간 남부 귀족과 후계자들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겁니다.”
남부 귀족들은 아마도 가장 위험한 전투에서 가장 선봉에 서서 전투를 치를 것이다. 설령 이 모든 전투에서 살아남는다고 해도 바런트 왕실이나 귀족들은 절대 남부 귀족을 살려서 돌려보내진 않을 것이다.
카일이 잠시 고민하더니 아네드 영애를 보며 물었다.
“…첸들러 소영주와 남부 귀족들이 끌려간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갑작스럽게 물어오는 카일의 물음에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네드 자작이 아무 말 없자 아네드 영애가 솔직히 답했다.
“오늘 아침이에요.”
“지금 쫓아가도 늦지 않을 겁니다.”
카일이 자작을 돌아봤다.
“결정은 자작님 몫입니다.”
카일의 물음이 무슨 뜻인지 모를 자작이 아니다. 굳은 얼굴의 자작이 카일을 보며 되물었다.
“자넨 정말 가능할 거라 생각하나?”
“자작님 혼자라면 불가능하지만, 제가 도와드리면 다를 겁니다. 제겐 1만 정병을 남부로 투입할 방법이 있습니다. 물론 시간이 걸리겠지만요.”
“자네에게 말인가?”
“대신 왕국이 아니라 공왕이 되셔야 할 겁니다.”
“…크로노스 왕가를 섬기란 말이군!”
“그렇습니다. 그리고 아실 겁니다. 이제 안이 절대 자작님과 남부 귀족에게 나쁜 제안이 아니라는 걸 말입니다.”
카일의 말에 눈을 지그시 감은 네드 자작이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바란트 왕실이 선을 넘었다면 자작으로서도 모든 걸 걸고 발악할 수밖에는 없었다.
“좋아! 하지만 난 크로노스 왕실은 믿지 않네! 권력자의 허황 된 약속은 더더욱 믿지 않아!”
“그럼….”
“가장 확실한 동맹을 원하네! 바로 자네와!”
네드 자작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게… 무슨?”
고작 남작에 불과한 자신과 확실한 동맹을 맺겠다니….
“자네와 혼인 동맹을 원하네!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난 자네 말을 믿고 남부 귀족을 몰아 곧장 안티레논 대평원으로 병력을 몰아 걸 거야! 하지만 자네가 거절한다면 자네의 제안은 못 들은 것으로 하겠네!”
“자작님!”
“난 이번 일에 가문의 운명뿐 아니라 남부 귀족들의 생사까지 모든 것을 걸었네! 그러니 자네도 네게 명확한 믿을 보여 줘야 하지 않겠나?”
“그… 음.”
“시간이 없네! 베아트리 영애 때문이라면… 혼인 이후 이 아일 이곳에 남겨놓아도 좋네! 딸아이에겐 못 할 짓이지만, 들은 데로 난 자네에게 모든 걸 걸었네!”
“그런….”
“난 말했네! 모든 걸 걸었다고…!”
네드 자작의 목소리가 높아졌지만, 카일은 여전히 결정을 못 하고 망설이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아네드가 다가와 고개를 숙였다.
“전 상관없으니 부디… 영지민과 오라버니, 그리고 남부를 구해주세요.”
아네드의 절실한 말에 잠시 얼굴을 찌푸린 카일이 자작을 돌아봤다.
“일단… 끌려간 사람부터… 구하겠습니다.”
카일의 말에 네드 자작의 얼굴이 밝아졌다. 일단 카일이 나선 이상 자신의 조건을 받아들인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카일은 얼마 전 남작가의 기서로 서임 된 매튜를 급히 불렀다.
“곧장 남부 귀족을 구하러 가겠다. 매튜 경은 곧장 돌아가 아버지께 이곳 상황을 전하고, 벨에게도 생산을 독촉해 주게!”
“알겠습니다.”
“자작님! 마나석을 최대한 모아 주실 수 있겠습니까?”
“마나석?”
“네! 와이번 나이트를 상대하려면 최대한 많은 마나석이 필요합니다.”
“아! 알겠네! 최대한 모아보겠네!”
자작이 고개를 끄덕이자 카일은 추가로 몇 가지 부탁을 남기곤 급히 기사들을 이끌고 성을 벗어났다.
“아버님!”
아네드가 멀어지는 카일과 기사들을 걱정스런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런 딸의 모습을 네드 자작이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미안하다. 아네드, 널 이렇게 팔아치우듯 혼인을 결정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아니에요. 제가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었던 건 모두 가문과 영지민 덕분인걸요. 전 괜찮아요. 그리고 남부 전체를 구해줄 분이라면… 일대의 영웅이라 할 수 있잖아요. 그런 분을 부군으로 맞이할 수 있으니 오히려 기쁜걸요. ”
“그리 말해주니 고맙구나!”
“아버님! 서둘러 전령을 보내 남부 귀족들에게 소집령을 내려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 소집령! 이제 그동안 감춰 왔던 왕실 인장을 다시 사용해야 할 것 같구나!”
네드 자작이 아네드 영애와 함께 서둘러 내성으로 향했다. 바야흐로 백여 년 전 사라졌던 페네셀 왕가의 인장과 함께 바런트 왕국 남부에 새로운 공국의 탄생을 알리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