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122. 자경단의 선택
“이제 어쩌실 생각입니까? 일을 저질렀으니 대책이 있을 거 아닙니까?”
카일이 보일을 돌아봤지만, 눈을 감고 카일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보일에게선 아무런 대답도 들을 수 없었다. 그도 막상 일을 벌이긴 했지만, 딱히 대책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겠죠. 아무런 대책이 없을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저 일만 벌이면 그뿐일 겁니다. 하긴 무슨 상관입니까? 와이번이 있으니 토벌대가 오더라도 모두 버리고 도망치면 그뿐이겠죠.”
“난… 도망가지 않는다.”
“그러시든가요. 전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이미 모든 건 제 손을 벗어 났습니다.”
카일이 단호하게 돌아섰다.
“너무 극단적인 생각이야! 사람들을 이주하면서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았고 흔적도 남지 않았다. 이곳에 마을 사람들이 숨어있다는 건 아무도 모를 거야!”
캐츠가 얼굴을 찌푸리며 말했다.
“흥! 얼마나 확신할 수 있지? 정말 아무도 와이번을 못 봤을까? 아니 이미 알고 있지만 대응하지 않는 거라면?”
“그게 무슨?”
“너만 똑똑하다고 생각하지 마라! 다핸 남작가에서 수백 명이 사라졌음에도 아직 아무런 반응이 없다. 정말 몰라서 대응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거냐?”
“설마… 알고도 대응하지 않은 거라고?”
“알 수 없지! 하지만 만약 알았다고 해도 남작가는 막을 방법이 없을 거다. 와이번을 상대할 방법이 남작가에는 없으니 말이다.”
“그럼 괜찮은 거 아닌가?”
테일의 옆에선 무트가 중얼거렸다.
“멍청아, 조용히 해. 들리겠다.”
“아니… 그렇잖아! 남작가에서 대응할 수 없으니 포기한 거 아냐?”
“흥! 영주가 영지민을 빼앗기고 포기하면 더 이상 영주가 아니다.”
카일의 말에 찔끔한 무트가 황급히 테일의 뒤로 몸을 숨겼다.
“영지민이 사라졌음에도 아무런 대응이 없는 건 기다리는 거다.”
“기다린다? 설마!”
가장 먼저 캐츠가 카일의 뜻을 알아챘는지 놀란 얼굴로 카일을 돌아봤지만 카일의 시선은 이미 다른 곳으로 향해 있었다.
“세상에! 도대체 이건!”
게이츠가 엄청난 규모의 마을을 보며 말을 잇지 못했다.
“알아보셨습니까?”
“아! 물론이네! 제아루를 통해 알아본 결과 자네 생각대로 다핸 남작령에서 어제저녁 전령이 왔었네. 동부와 중부를 어지럽혔던 와이번 무리가 다핸 남작령에 나타났다고 말이야!”
“역시!”
“내일 새벽녘 와이번 1개 편대가 다핸 남작령으로 향할 거라고 하더군. 듣자 하니 왕실기사단이 파견된다던데.”
“왕실기사단이면… 레드 와이번을 확인했단 말이군.”
“그… 그렇네! 그동안 알고 있던 블랙이 아니라 갑작스럽게 레드 와이번이 나타나면서 새로운 와이번 나이트 편대가 나타났다며… 설마 다핸 남작령에 나타났다는 와이번이….”
당황한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자경단을 보며 그때서야 다핸 남작령에 나타난 와이번의 정체를 확신한 게이츠가 경악한 얼굴로 주변을 돌아봤다.
“이건… 아니야. 이 사실이 알려지면 바런트 왕국과의 전쟁이 아니라 토벌전이 먼저 벌어질 거야. 이건 영지를 가진 귀족들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네. 귀족이라면 누구도 좌시하지 않을 거야!”
“…알고 있습니다.”
게이츠의 말에 그동안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자경단들의 얼굴도 심각해지기 시작했다. 그저 이번에도 카일과 보일이라면 아무런 문제 없이 잘 해결해 줄 거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카일이 굳은 얼굴로 주변을 돌아보다 보일과 눈이 마주쳤지만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아무런 말도 없이 마을을 벗어나기 시작했다.
“미치겠군!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게이츠가 얼굴을 찌푸리며 황급히 카일의 뒤를 쫓았다.
“어쩔 생각인가? 대책이 있는 건가?”
“일단 최대한 마을을 감춰야겠죠.”
“그거야 당연한 일이지만 언제까지 비밀로 할 수는 없어! 비밀은 언젠가 밝혀지기 마련이니 말이거든.”
“저도 알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영애께서 돌아오셔야 해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아가씨께서?”
게이츠가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자 언제 화가 났냐는 듯 카일이 빙그래 웃었다.
“지난번 필 테일 영지에 대해 들으셨을 겁니다.”
“필 테일 영지? 그야 분지형… 아!”
“파괴된 필테일 영지를 복구한다는 명분으로 당분간 외부와 단절시킨 뒤 은밀하게 영지민 들을 이주시킬 생각입니다. 아시겠지만 필 테일 영지민 일부가 유민에 섞여 장원으로 빠져나왔으니….”
“그 빈 자리를 샤론 마을 사람들로 채우겠단 말이군.”
“그럴 생각입니다. 몇 년간 외부와 단절시킨 체 차근차근 영지민들과 동화시켜 나가야겠죠.”
“들키지만 않는다면 가장 확실한 방법이군. 이 방법이라면 다핸 남작가에서도 딱히 반발 할 수도 없겠고 말이야!”
“네! 의심은 들겠지만, 함부로 분쟁을 조장하진 않을 겁니다. 계속 문제를 삼으면 우리야 그다지 나쁠것 없죠.”
카일의 말에 게이츠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결정적인 물증이 없는 이상 같은 귀족인 남작령에 대해 무조건 영지를 조사할 수도 없고, 계속해 주장만 한다면….”
“전 귀족으로서 명예를 지키기 위해 대전사 결투나 영지전을 신청하게 되겠죠.”
“하하! 다핸 남작이면 자네의 실력을 알고 있을 테니. 헌데 아까는 왜 그리 화를 낸 건가? 그만한 계획이 있다면 경고 정도 만해도 넘어갈 수 있는 일인데?”
“보셨습니까?”
“험… 내가 끼어들기엔 상황이… 좀 그래서 말이야!”
게이츠가 머릴 긁적였다.
“경각심을 심어 주려고요.”
“경각심?”
“네! 아무 생각 없이 벌인 일로 인해 어떤 일이 벌어질수 있는지 그들도 반드시 알아야 하니까요. 덤으로 또다시 무모하게 움직이는 것도 막아야 하고.”
“하긴! 자네 계획을 들었다면 또다시 일을 벌이려 할지도 모르겠군.”
게이츠가 카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이 돌아가고 보일을 비롯한 자경단원의 조장들이 요새 안으로 급하게 모여들었다. 그들도 카일과 게이츠의 말을 듣고서야 사태의 심각성을 인지한 것이다. 하지만 막상 회의실로 모여들고도 누구 하나 쉽게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딱히 답을 찾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일을… 너무 무리하게 추진한 것 같습니다.”
“당시엔 어쩔 수 없었어요. 아시잖아요.”
필론의 말에 캐츠가 반박하듯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카일과 먼저 상의 했어야 했다. 녀석도 수천의 목숨을 책임진 한 장원의 주인다. 당장 우리의 입장만 강요할 수는 없는 일이야!”
“그건… 알지만, 굳이 대장에게까지 무례하게 굴 필요는 없잖아요.”
캐츠의 말에 한쪽에서 팔짱을 낀체 이야기를 듣고있던 델프 얼굴을 찌푸렸다.
“한 장원의 주인이라면 아무리 부친이라도 잘못을 정확히 지적해야지. 부친이라고 이런 문제를 그냥 넘어가서는 안되는 일이야!”
“델프 님….”
“카일의 지적은 옳다. 우리로 인해 정원과 장원에 딸린 수천의 식구들이 위험에 빠졌으니 화를 내는 건 당연한 일이다. 더구나 우린 일만 벌였지 뚜렷한 대책도 없이 또다시 모든 걸 카일에게 맡기고 있지 않나!”
“하지만….”
“그리고 명확히 해야 할 부분도 있고.”
델프가 가볍게 캐츠의 말을 무시하며 좌중을 둘러봤다.
“조장님, 명확히라니요?”
투창 조의 조장 헬켄이 물었다.
“일전에 폴론 형제들이 말한 적이 있었지, 자신들을 카일이 받아준다면 그를 주인으로 섬기겠다고 말이야!”
“폴론 형제가 그런 말을 했습니까?”
매튜의 물음에 델프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들은 지금 대장의 명을 따르고 있잖아요. 지금도 마을 사람들을 이끌고 장원으로 오고 있다고요.”
와이번을 통래 나이많은 노인이나 아이들을 이주시켰다면 젊은 사람들은 유민으로 위장해 폴론 형제들이 이끌고 장원으로 오고 있었다.
“자경단의 가족들을 구하는 일이지 않나. 카일 역시 자경단 전부를 보일 대장에게 배속했으니 스승인 대장의 명을 듣는 건 당연 것 아니겠나?”
“그렇군요.”
무트가 고개를 숙이며 물러났다.
“그럼 델프 님께서 말씀하신 명확하게 해야 한다는 게 그럼….”
“우리의 주인이 누구냐는 것이네!”
“주인…!”
델프의 말에 조장들이 서로 의견을 주고받으며 소란스러워졌다.
쾅-
참다못한 헬켄이 탁자를 내리치며 벌떡 일어났다.
“이렇게 떠들기만 할 게 아니라 일단! 델프 님 말을 더 들어보죠.”
회의실 안이 조용해지자 헬켄이 한숨을 쉬더니 델프를 돌아봤다.
“계속 말씀 하시죠.”
헬켄의 말에 델프가 고개를 끄덕이며 좌중을 둘러봤다.
“우린 스스로를 자경단이라 부른다네. 하지만 과연 우리가 자경단이라 할 수 있겠나?”
외곽 마을의 자경단은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마을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조직이다. 그러다 보니 체계가 느슨하고, 생업과 훈련을 병행하다 보니 일반 병사들보다 무력이 떨어질 수밖에는 없었다. 반면 샤론 마을의 자경단은 보일이 오랫동안 체계적이고 전문적인 훈련을 시켰고 쭉 오크 침입을 방어하며 실전으로 다져진 정예병사나 다름이 없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끊임없이 마을로 밀려오는 몬스터와 그들을 방어하는 과정에서 부차적으로 생기는 막대한 몬스터 부산물 덕분이었다.
“그건 샤론 마을 특성상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 맞는 말이야! 막대한 몬스터 부산물, 거기서 나오는 막대한 골드가 마을을 살찌우고 자경단을 정예 병사로 만들어주었지!”
“그것과 우리가 주인을 정해야 하는 이유와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아주 깊은 관계가 있네!”
“네?”
델프가 팔짱을 낀 채 의자에 몸을 기댔다.
“내 아비는 제법 괜찮은 가죽공이었다네, 수입도 제법 괜찮아서 흉년이 들어도 때를 거르는 일도 없었어. 헌데 말이야! 난 아비의 일이 싫었네. 매일같이 썩은 오줌통에 가죽을 넣고 밟다 보니 몸에선 항상 지린내가 진동했거든. 그런데 어쩌겠나, 아비의 일을 자식이 물려받는 것이 당연한 것을….”
“왜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난 지금도 가죽공이 될 생각이 없다네! 자넨 어떤가? 평생을 무기와 창을 들고 살아왔던 우리가 이제 와 공방에서 기술을 배우고 땅을 파며 농사를 짓고 살 수 있을 것 같은가?”
“예? 무슨 말씀입니까? 우리가 왜 기술을 배우고 농사를…?”
“허허! 아직도 미명에서 벗어나지 못했군, 그럼 자넨 어떻게 가족을 먹여 살릴 건가? 지금 우리가 먹고 마시는 모든 것은 카일이 아무런 조건 없이 내어 주는 것이네. 설마 지금처럼 카일의 도움을 받으며 살 생각인가? 누군가의 밑으로 들어가기 싫다면 적어도 처자식은 혼자 힘으로 먹여 살려야 할 것 아닌가!”
“…그야, 그렇긴 하지만….”
델프의 갑작스런 말에 당황한 조장들이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들로서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왜 말이 없나?”
“사냥을… 에바크 산맥에도 많은 몬스터가 살고 있습니다. 그들을 사냥하면….”
“어림도 없는 소리!”
델프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자네들 모두가 사냥을 나간다고 해도 샤론 마을에서처럼 오크나 몬스터를 사냥할 수 있을 것 같나? 어림도 없는 소리, 숲에서 상대해야 할 몬스터들을 생각해 보게…. 방벽을 앞에 두고 싸우던 것과 달리 자경단도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할 거야!”
델프의 말에 케츠가 곧장 반박했다.
“하지만 우리에겐 와이번이 있습니다.”
“그래! 와이번이 있었지!”
테일이 손뼉을 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엔 보일을 포함해 무려 6기의 와이번이 있었다.
“허허 재밌는 말을 하는군. 그럼 내 하나 묻지, 와이번의 주인은 누구인가?”
“네? 그야 당연히….”
“왜 나와 맹약을 맺었으니 당연히 자신 거라 생각한 건가?”
델프의 말에 캐츠가 입을 굳게 닫았다.
“듣자 하니 와이번과 맹약을 맺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이라 들었네! 뛰어난 기사들도 와이번과 맹약을 맺기 위해선 천운이 있어야 한다고 하던데, 캐츠 자넨 어떻게 와이번과 맹약을 맺은 것인가?”
“그건….”
“무트 자네가 말해주겠나? 어떻게 보일 대장을 비롯해 무려 6명이 와이번과 맹약을 맺은 것인가?”
갑작스럽게 지목당한 무트가 깜짝 놀라 머뭇거렸지만, 사람들의 시선이 쏠리자 결국 어렵게 입을 열었다.
“그건… 카일 덕분에….”
“그렇습니다. 카일과 녀석을 따르는 용병들이 와이번을 유인해준 덕분입니다. 맹약석부터 모든 건 카일이 준비해준 것일 뿐 저희가 맹약을 맺기 위해 노력한 건… 솔직히 없습니다.”
매튜는 담담하게 사실대로 말했다.
“그렇군, 카일의 덕분이군! 캐츠! 다시 묻지 자네의 와이번은 자네의 것인가?”
델프의 말에 캐츠는 입술을 꽉 깨물었지만 결국 대답을 하지 못했다. 캐츠는 메튜와 필론처럼 직접 라이플을 들고 저격에도 나서지 않았다. 그저 그 현장에 미리 준비된 맹약석을 들고 서 있었기에 와이번과 맹약을 맺은 것이다.
“제가 주인이 아니라 해도 지금 와이번과 맹약을 맺은 사람은 저입니다.”
캐츠의 말에 델프가 피식 웃었다.
“그래서 와이번을 동원해 사냥을 하겠다?”
“지금으로선 그 방법 뿐이라 생각합니다.”
“멍청한 소리!”
필론이 캐츠를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마을을 전체가 먹고 살 정도면 와이번만으론 사냥을 나갈 수 없다. 자경단 상당수가 목숨을 걸고 산맥 깊숙이 원정을 가야 하는데..”
“하지만 사냥을 하려면 그 정도는 희생은….”
“캐츠! 아직 내 말이 끝나지 않았다.”
자신의 말을 끊고 들어온 캐츠를 필론이 날카롭게 쏘아보았다.
“죄, 죄송해요… 필론 형!”
필론의 화난 목소리에 캐츠가 급히 고개를 숙였다. 평소 잘 웃고 장난도 많이 치는 사람 좋은 필론이지만 한번 화가 나면 보일도 말리지 못할 정도로 엄한 사람이었다. 당장 필론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무트와 테일도 바짝 긴장한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넌 카일의 말을 듣지 못했느냐! 이미 우리가 보유한 와이번이 노출된 상황이다. 그런데도 또다시 와이번을 들먹이는 것이냐! 만약 동부에 모인 와이번 편대에게 정체가 들키기라도 한다면 카일의 말대로 장원 전체가 위험에 빠질 거다.”
“죄, 죄송해요. 제 생각이 짧았어요.”
캐츠가 필론을 향해 고개를 푹 숙였지만, 필론은 여전히 못마땅한 눈으로 캐츠를 바라보며 자리에 앉았다.
“아직 생각이 짧아서 그렇다. 캐츠도 반성하고 있을테니 그만 화 풀어.”
메튜가 필론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했다.
“저 녀석은 다 좋은데, 뒷일은 생각도 않는다고 무조건 일부터 저지르는 게 문제야! 이번일도… 휴~ 누굴 탓할 일도 아니지, 나도 이 일에 동참 했으니…. 그나저나 걱정이다. 카일 그 녀석, 한다면 정말 하는 녀석인데.”
“그래도 설마… 샤론 마을 사람들은 그 녀석과 평생을 함께한 사람인데….”
“넌 폴론 형제의 일을 벌써 잊은 거냐!”
필론의 말에 메튜의 얼굴도 굳었다. 폴론 형제는 보일의 제자들이다. 마을 사람들보다 카일과 더 많이 만났던 그들도 한순간의 실수로 카일의 손에 손목이 잘렸다.
“솔직히 카일이 우릴 거둘 이유도 의무도 없잖아. 평원 사람들이야 카일의 그늘의 아래 모여든 사람이지만 우린 솔직히….”
“이도 저도 아니지.”
무트가 자신도 모르게 내뱉은 말에 놀라 급히 입을 막았지만 이미 회의실 안의 분위기는 차갑게 내려앉았다.
그렇다. 카일에게 있어 자경단과 마을 사람들의 존재는 이도 저도 아니다. 카일의 그늘에 있는 것도 아니면서 카일의 도움을 필요로 하지만 정작 카일에겐 그들의 존재 자체가 위협이 되었다.
“결국 델프 님의 말대로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말이군.”
가만히 이야기를 듣고 있던 보일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마을 전체 회의를 열어야겠군! 각 마을의 대표와 자경단원 모두를 광장으로 불러 결정을 내리겠네!”
“만약 회의에서 카일을 주인으로 섬기길 거부하면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야 당연히… 이곳을 떠나야겠지!”
보일의 선언에 회의실에 모인 조장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