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109. 탈취(2)
“준비 끝! 시작해도 좋다.”
통신구에서 시작을 알리는 카일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오케이!”
“넌 오케이란 뜻이 뭔지 알고 쓰는 거냐?”
통신구에서 들려온 마크의 목소리에 비터가 피식 웃었다.
“나야 당연히 모르지? 그냥 카일이 쓰니까 따라 쓰는 건데? 대충 좋다는 뜻 아니야?”
“이그, 장난치지 말고 정신 똑바로 차려! 잘못하면 죽는 수가 있어!”
“나도 그 정돈 알아! 걱정 말라고, 그럼… 간다.”
비터가 길게 한숨을 쉬며 앞을 보았다. 레드 와이번을 선두로 20마리의 골드 와이번이 유유히 편대를 이루며 협곡 사이를 날고 있었다.
“가자!”
비터가 자신의 와이번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기수를 아래로 내리고 구름 속을 빠져나와 빠르게 급강하했다.
슈아악-
날개를 접은 비터의 와이번이 빠르게 급강했지만, 네드 자작이 이끄는 와이번 편대는 아직까지 비터의 존재를 알지 못했다. 설마 이렇게 깊은 산맥 안에서 자신들을 공격할 와이번이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한 것이다.
“이런! 적이다.”
비터의 존재를 가장 먼지 인지한 것은 역시 레드 와이번의 오너인 네드 자작이었다.
“위험!”
“피해!”
네드 자작에 이어 헨치 남작도 황급히 소리쳤지만, 이미 비터의 강화 스피어가 급강하하며 얻은 가속도까지 더해 헌트와 골드 와이번의 등을 꿰뚫어 버렸다.
“크억!”
헌트는 가슴을 꿰뚫고 와이번의 등 깊숙이 박한 강화 스피어를 멍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아… 안돼!”
머릿속에서 들려오는 와이번의 고통스러운 울음소리에 헌트가 힘겹게 손을 뻗어 창대를 붙잡으려 했지만, 점점 흐려지는 시선에 결국 고개를 떨구며 와이번의 등 뒤에서 떨어져 내렸다.
끼에에엑-
그와 동시에 창대가 박힌 와이번 역시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더니 이내 협곡 아래로 빙글거리며 추락했다.
“헌트… 안돼!”
헨치 자작이 비명을 지르며 추락하는 와이번의 뒤를 쫓으려 했지만 네드 자작이 급히 와이번을 돌려 헨치 남작의 앞을 막아섰다.
“정신 차려!”
“자작님! 헌트가….”
“냉정해지게! 지금은 녀석을 죽인 와이번을 잡는 게 먼저야!”
“하지만….”
헨치 남작이 협곡 아래를 바라보며 망설였다.
“녀석을 잡아야 하네! 만약 놈을 잡지 못하고 습격 사실이 티엘 백작가에 알려지면 이번 작전은 물론 우리의 목숨까지 장담할 수 없어.”
네드 자작의 다급한 외침에 헨치 남작이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잔뜩 찌푸린 얼굴로 동쪽으로 뻗은 협곡 사이로 빠르게 빠져나가는 골드 와이번을 바라보더니 입술 꽉 깨물었다.
“녀석을 죽여 버리겠습니다.”
“아니! 녀석을 반드시 사로잡아 이곳에 있는 이유를 알아내야 해! 대신 그에 대한 신문은 자네에게 맡기지!”
네드 자작이 다급하게 말했다. 이대로 시간을 끌다간 적 와이번을 놓칠 수 있으니 서둘러야만 했다.
“하긴, 녀석에겐 편안한 죽음 자체가 온정을 베푸는 거죠. 가장 고통스럽고 처참하게 죽여주겠습니다.”
헨치 남작의 골드 와이번이 사라져 가는 골드 와이번을 빠르게 뒤쫓았고, 뒤이어 4마리의 와이번이 다급히 따라붙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네드 자작이 서둘러 남은 부하들에게 명을 내렸다.
“녀석은 아마도 티엘 백작가의 정찰 와이번이 분명하다. 이 일대에 정찰 나온 다른 와이번이 추가로 있을 테니 5인 1조로 주변을 살핀 뒤 이곳에 다시 모인다.”
“알겠습니다.”
“서둘러라!”
네드 자작이 다급히 부하 다섯을 거느리고 복잡하게 얽힌 협곡 사이를 빠르게 날았다. 얼마 전까지 아름답게만 보이던 높은 산과 협곡이 이젠 복잡하게 얽힌 미로 같아 자작의 마음을 어지럽게 만들었다.
한편 네드 자작의 기사들을 습격하고 빠르게 도주하던 비터가 뒤쫓아 오는 와이번을 힐끔 돌아보더니 조금씩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쫓아오는 와이번들이 쉽게 뒤를 쫓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놈!”
그때였다. 뒤에서 들려온 고함에 비터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헨치 남작의 와이번이 비터의 뒤를 바짝 뒤쫓아와 있었다.
“뭐야! 겁나 빠르잖아!”
비터가 깜짝 놀라 다시 와이번의 속도를 높였다. 골드 와이번 중에서도 비정상적으로 체구가 작고 날개가 긴 기형적인 와이번이 나타났다. 헨치 남작의 와이번은 이 기형적인 체구로 일반적인 골드 와이번보다 월등하게 빠르다고 알려져 있었다.
“피! 녀석도 특별한 와이번이잖아!”
비터가 투덜거리며 와이번의 속도를 높였다. 그러자 두 와이번의 거리가 조금씩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렇다. 비터의 와이번 역시 헨치 남작의 와이번 만큼이나 빠른 속도를 가진 것이다. 그렇게 잡힐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앞서가던 비터의 와이번이 갑자기 속도를 급격히 줄이기 시작했다.
“녀석 드디어 지쳤구나!”
헨치 남작이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속도에 치중한 기형적인 골드 와이번의 최대 단점은 체구가 작아 힘과 지력이 일반적인 골드 와이번보다 떨어진다는 것이다. 속도에선 적 골드 와이번이 자신의 와이번보다 빠르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힘과 지구력에선 자신의 와이번에 비할 바가 못 됐다.
“녀석을 포위해라!”
헨치 남작의 명에 뒤를 따르던 골드 와이번들이 비터의 와이번을 둥글게 포위했다.
“놈! 헌트를 죽인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해주마!”
헨치 남작이 비터를 포위한 와이번을 향해 신호를 보내자 와이번 나이트들이 안장에 걸려 있는 거대한 사슬 낫을 손에 들었다. 사슬 낫은 보통 도그 파이팅, 즉 근접전투에서 와이번이 아닌 적 와이번 나이트를 직접 공격하거나 와이번을 생포할 때 사용하는 무기였다.
차르륵-
차르륵-
사방에서 들려오는 섬뜩한 소리에 비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젠장! 이봐, 언제까지 이렇게 기다려야 하는 거야!”
비터가 사슬 낫을 위협적으로 돌리는 적 와이번 나이트를 보며 소리쳤다.
쉬익-
그때였다. 하늘 위에서 검은 화살 한 발이 높이 날아오르더니 헨치 남작의 머리 위로 뚝 떨어져 내렸다.
“헉!”
생각지도 못한 순간에 갑작스럽게 날아든 공격에 헨치 남작이 깜짝 놀라 몸을 비틀었다.
퍽-
“컥-”
헨치 남작이 몸을 비틀었지만, 화살은 정확히 헨치 남작의 정수리를 꿰뚫었다. 헨치 남작이 한마디 비명성과 함께 협곡 아래로 곤두박질쳤다.
끼아악-
맹약자를 잃은 골드 와이번이 슬픈 비명을 지르며 하늘 높이 날아올라 상공을 선회하더니 절벽 위 금빛 대궁을 든 아름다운 여인을 향해 날아들었다.
“남작님!”
뒤늦게 남작의 죽음을 확인한 와이번 나이트들이 깜짝 놀라 추락하는 남작에게 다가서려 했지만, 그보다 비터의 외침이 더 빨랐다.
“언제까지 기다릴 거야!”
갑작스럽게 비터가 소리치자 그때야 함정에 따졌단 사실을 파악한 와이번 나이트들이 다급히 소리쳤다.
“함정이다.”
“제길! 흩어져!”
와이번 나이트들이 급하게 하늘 위로 날아오르려 했지만, 그땐 이미 늦었다. 협곡을 따라 매복하고 있던 윌리스와 기사들의 라이플이 일제히 불을 뿜었다.
탕!-
탕!-
타탕!-
수십 발의 탄환이 정확히 공중에 멈춰 서있던 와이번 나이트들에게 날아들었다.
퍼버벅-
“커억-”
가슴에서 올라오는 극심한 통증에 고개를 숙인 와이번 나이트 하나가 가슴을 적셔오는 붉은 피를 손으로 막아보려는지 뻥 뚫린 가슴을 쓸어내리더니 그대로 바닥으로 추락해 버렸다. 다른 와이번 나이트 역시 약간의 시간 차가 있긴 했지만 연달아 날아든 총탄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으로 추락했다.
와이번 나이트와 기사들과의 간격은 고작해야 백여 미터도 안 되는 짧은 거리. 공중에 정지해 있는 와이번 나이트를 맞추는 건 그동안 노력한 것에 비하면 정말 아무것도 아니지만, 기사들의 얼굴과 손은 굵은 땀으로 가득했다. 그만큼 이번 저격에 쏟은 심력이 크다고 할 수 있었다.
키아악-
맹약자를 잃은 와이번들이 비명을 지르며 하늘 위를 맴돌다 천천히 하강하더니 기사들이 매복해 있던 절벽 위로 하나둘씩 내려앉았다. 매복해 있던 기사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아름다운 금빛 동체를 뽐내는 골드 와이번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을 때, 숲 한쪽에서 검은 인영이 쏜살같이 달려 나오더니 황금빛 토파즈를 높이 들고 외쳤다.
“나와 맹약을 맺자!”
“이런!”
“이건 반칙입니다.”
“너무 하십니다.”
기사들이 금빛 토파즈를 손에든 게이츠를 향해 불만을 토했지만 개이츠는 아랑곳하지 않고 빙그레 웃으며 기사들을 돌아봤다.
“멍청한 녀석들! 이 녀석들아! 인생은 스피드다. 알겠냐!”
게이츠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을 때 조금 전까지 눈앞에 있던 골드 와이번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이게….”
게이츠가 당황한 얼굴로 고개를 돌리자 윌리스가 히죽 웃으며 황금빛 토파즈 안에 잠든 골드 와이번을 흔들었다.
“감히 내 와이번을 가로채!”
“조금 전 말씀하셨지 않습니까? 인생은 스피드라고 말입니다.”
“이런 망할 놈!”
게이츠가 윌리스를 죽을 듯 노려보았다.
“뭘 멍청히 서 있는 거야! 서둘러 매복하지 않고. 조금 있으면 마크가 유인한 와이번들이 도착할 거다.”
“예! 교관님.”
기사들이 서둘러 조금 전 매복한 장소를 찾아 달려갔고 게이츠 역시 허둥지둥 숲속으로 달려가 몸을 숨겼다. 이미 잃어버린 와이번을 놓고 드잡이질하기보다는 새롭게 나타날 와이번을 노리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빌어먹을 녀석 같으니라고, 장원으로 돌아가서 보자!”
황금빛 토파즈를 보며 미친 녀석처럼 히죽히죽 웃고 있는 윌리스를 노려보던 게이츠의 고개가 더욱 바짝 숙여졌다. 멀리 마크의 와이번을 맹렬히 쫓으며 다가오는 5마리의 골드 와이번이 눈에 들온 것이다.
“이번엔 기필코!”
게이츠가 라이플의 볼트를 당겨 탄알 일발을 조심스럽게 장전했다.
철컥-
* * *
“상황은 어떻습니까?”
“하하! 당연히 대성공이다. 조금 전 비터가 마지막 녀석들을 끌고 갔으니 문제없이 마무리될 것 같다.”
마크의 말에 카일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행이네요. 그럼, 이제 제가 나설 차례인가 보군요.”
“조심해라! 네드 자작은 레드 와이번의 오너가 된 지 십수 년이 넘은 자다.”
마크가 걱정스럽게 카일을 바라보았다. 카일이 레드 와이번의 오너가 된 건 고작해야 반년도 되지 않았다. 반면 네드 자작은 벌써 수십 년 동안 레드 와이번의 오너로 군림하던 자다. 카일보다 월등히 뛰어난 공중전 능력을 보유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걱정 말거라! 카일의 옆엔 내가 함께 있을 테니 말이다.”
갑자기 들려온 보일의 목소리에 마크가 깜짝 놀라 뒤를 돌아봤다.
“대장님!”
보일이 레드 와이번 용병대 대장이 되면서 비터와 마크 모두 자연스럽게 보일을 대장이라 부르고 있었다.
“다행히 늦지 않으셨군요.”
“당연하지, 내가 이런 일에 늦을 것 같으냐? 어림도 없지!”
보일이 피식 웃으며 한걸음 물러서자 보일의 뒤에 가려져 있던 캐츠가 카일을 향해 달려왔다.
“카일!”
“캐츠, 제시간에 왔구나!”
“도대체 무슨 일이야! 마스터의 재촉에 자경단들도 내팽개치고 정신없이 달려왔잖아!”
“무슨 일이긴, 좋은 일이지. 자경단을 데려오느라 고생한 대가를 받는다고 생각하면 될 거다.”
카일이 품에서 작은 상자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선물이다. 꼭 목에 걸고 있으면 된다.”
“네게 주는 거야?”
“물론!”
카일의 말에 캐츠가 조심스럽게 상자를 열었다. 상자 안엔 기하학적인 문양이 새겨진 금빛 보석이 담겨있었다.
“이건, 보석이잖아? 난 이런 거 필요 없는데?”
캐츠가 고개를 저으며 카일에게 상자를 돌려줬다.
“하하! 이 녀석, 아직 이게 뭔지 모르나 보구나!”
“네?”
마크가 크게 웃으며 목에 걸고 있던 황금빛 맹약석을 꺼냈다.
“나도 같은 걸 가지고 있다.”
“어…?”
“곧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 알게 될 테니, 일단 가지고 있어라! 후회하지 말고.”
“이런 멍청한 녀석, 카일이 아무런 이유도 없이 이런 걸 줄 것 같으냐? 다 이유가 있으니 갖고 있어라!”
보일이 상자에서 목걸이를 꺼내 캐츠의 목에 걸어주고는 카일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 건?”
“급하시긴, 어련히 알아서 드릴까.”
카일이 또 다른 상자를 내밀었다. 상자 안엔 좀처럼 보기 힘든 커다란 루비 목걸이가 담겨있었다.
“이걸 구한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아버진 모르실 거예요.”
“하하! 녀석, 고맙다.”
보일이 크게 웃으며 루비 목걸이를 목에 걸었다.
“그럼, 가볼까요.”
“그래!”
“마크, 캐츠를 부탁할게요.”
“걱정 마라! 매튜와 필론에게 데려다주마!”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고개를 돌려 보일을 바라보았다.
“준비는 되셨죠?”
“물론! 이날만을 기다려 왔다.”
보일의 말에 피식 웃음을 지은 카일이 천천히 하늘을 올려다 봤다.
“허억! 레드 와이번!”
“녀석! 넌 복 받은 거다, 이 녀석아!”
고개를 돌려 입을 벌린 채 멍하니 멀어져 가는 레드 와이번을 바라보는 캐츠의 머리를 헝클어트린 마크가 캐츠를 보며 말했다.
“우리도 그럼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