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101. 밝혀진 진실
“전쟁?”
피라네시아 장원, 급작스럽게 던져진 제루아의 말에 회의실 안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그래서 기사단장과 제정관이 급히 파티를 끝낸 것이군.”
“아마도 그럴 거예요. 저도 남부 티렐 백작가와 아서 백작가가 맞붙었단 소식을 들은 건 얼마 되지 않았거든요.”
“아서 백작가? 설마 아서 드 베지톤… 백작가를 말하는 겁니까?”
“네, 맞아요! 카일이 어떻게 아서 가문을 아는 거죠?”
카일은 물론 마크와 비터의 얼굴이 싸늘하게 굳어졌다. 베지톤 백작은 얼마 전 화이트 와이번 서식지를 습격하고 도주하다 에바크 산맥에서 카일의 손에 죽은 바런트 왕국의 귀족이기 때문이다.
“…그냥, 우연히 알게 된 겁니다. 그보다 남부에서 갑자기 왜 전쟁이 일어난 겁니까?”
“아서 가문은 바런트 왕국, 그중에서도 국왕 파의 핵심 세력 중 하나에요. 그런데 알아본 바론 백작과 그의 기사단 일부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는 말이 있어요. 그걸 티렐 백작가의 소행으로 본 거죠. 하지만 확실한 증거 같은 건 없는 것 같아요.”
“그럼… 왜 티렐 백작가의 소행으로 보는 겁니까?”
“그건 정확하진 않아요. 어떤 말론 국경 인근에서 갑자기 사라졌다는 말도 있고, 어떤 이는 모종의 이유로 본국을 찾았다가 납치당했다는 말도 있지만 모두 가설일뿐 정확하지 않아요.”
“정확하지 않은 가설 때문에 전쟁이 일어났단 말인가요?”
“맞아요. 모두 정확하진 않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죠.”
“모두 본국과 관련이 있군요.”
“네! 아서 가문으로선 티렐 백작을 압박해 백작을 돌려받으려는 거죠. 하지만 사실 여기엔 깊은 내막이 있어요.”
“당연히 그렇겠죠.”
카일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소리쳤다. 베지톤 백작과 기사들은 에바크 산맥에서 다른 누구도 아닌 카일의 손에 죽었으니 당연히 아서가의 주장은 거짓일 것이다. 하지만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제루아로선 카일의 반응이 이상해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다행히 제루아는 곧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말을 이었다.
“사실 아서 가문과 티렐 가문과의 전투는 바런트 왕국 국왕파와 귀족파의 분쟁을 누르고 시선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바런트 왕실이 아서 가문을 부추겨 일으킨 술책이라고 하더군요. 아마도 이번 전쟁은 단순히 국지전으로만 끝나지 않을 수 있어요.”
“국지전이 아니면, 설마 전면전이라도 일어난단 말입니까?”
마크가 깜짝 놀라 물었다. 국지전이 아닌 전면전으로 전장이 확대된다면 바런트 왕국과 국경을 마주한 동부 역시 전쟁에 휘말릴 수도 있다는 말이었다.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일단 쉽게 끝날 전쟁이 아닌 것만은 분명해요. 변경백인 티렐 백작가에서 남부 동원령과 함께 남부 귀족들에게 지원요청을 했거든요.”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말이군요.”
“맞아요.”
제루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부가 상당히 구체적인데, 도대체 어디서 그런 정보를 들은 거죠?”
베아트리 영애가 침착하게 물었다.
“정보에 가장 민감하고 빠른 곳은 상단이에요. 그중 에렌 공국 상단은 본국은 물론 바런트 왕국과 제국까지 삼각 무역을 하는 곳이라 왕국의 어떤 상단들보다도 정보가 아주 빠르고 정확한 곳이죠.”
“하지만 정보를 쉽게 알려주진 않을 텐데요?”
“맞아요. 상단에겐 정보가 곧 골드에요. 쉽게 정보를 내어주진 않죠.”
“결국 도자기 때문에 얻게 된 정보란 말이군요.”
최근 에렌 공국 상단 하나인 보카트 상단에서 카일 공방과 직접 거래를 위해 찾아온 적이 있었다. 바로 이 거래를 카일은 공방에 머물던 제루아에게 맡긴 것이다.
“아니! 그렇지 않아요. 티렐 백작가와 아서 가문의 전투는 백작가에서도 곧 알게 될 일이니 저희 장원엔 그다지 중요한 정보가 아니에요.”
“확실히 그렇긴 하군. 전쟁에 놀라긴 했지만 티렐 백작가의 일은 곧 용병들에게도 알려질 일이다.”
전쟁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은 다름 아닌 용병들이다. 일단 남부 일대에 동원령까지 내려질 정도로 전쟁이 커졌다면 남부뿐 아니라 왕국 전체의 용병들이 들썩일 일이었다.
“그럼 저희를 여기에 부른 정말 중요한 정보는 따로 있다는 말이군요.”
“맞아요. 정확하진 않지만, 장원과도 밀접하게 관련된 일이라 그냥 지나칠 수 없더군요.”
“흠… 좋습니다. 일단 한번 들어보겠습니다.”
카일의 말에 회의장에 보인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제루아의 입으로 향했다.
“얼마 전 바런트 왕국 동부와 남부 귀족들이 강화 마법이 인챈트 된 스피어를 대량으로 주문했다고 하군요.”
“강화 스피어?”
“네! 모두 와이번 나이트들이 사용하는 것들이죠.”
“동부와 남부가 동시에 강화 스피어를 대량 매입했단 말입니까?”
“네! 최소 수백 발에 달한다고 했어요.”
강화 스피어는 강화 마법이 인챈트 된 마법 무구로 공중전을 통해 한번 날려 보낸 뒤에는 되찾는 게 불가능에 가깝기에 가장 비싼 소모품이라 할 수 있었다. 그래서 각 영지의 경우 전쟁이 벌어지기 전까지 최소량만 보유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대량의 강화 스피어 거래는 동부와 남부 귀족 일부가 참전을 선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설마 동부나 남부 병력이 움직인 겁니까?”
“그렇지는 않은 것 같아요. 병력이 대규모로 이동했다면 상단이나 물자가 함께 이동해야 하는데, 그런 움직임은 없다고 해요.”
“와이번 나이트만 따로 움직일 거란 말씀인데, 아서 가문으로 가는 걸까요?”
베아트리 영애의 물음에 제루아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바로 그것 때문에 여러분을 부른 거예요.”
“아서 가문으로 가지 않을 거란 말이군요.”
“바런트 왕국 동부와 남부는 전통적으로 왕권에 반하는 귀족파 세력의 중추예요. 아서 가문을 돕기 위해 가장 중요한 전력 중 하나인 와이번을 지원하는 건… 글쎄요? 과연 가능할까요?”
“어렵겠군요.”
카일의 물음에 제루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와이번이 국경을 넘는다면 어느 쪽일까요?”
“아직 와이번이 단독으로 국경을 넘은 적이 없어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계곡이나 협곡을 따라 넘어올 가능성이 크겠죠.”
게이츠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에바크 산맥은 크고 깊은 산맥이 끝없이 이어진, 대륙에서도 가장 크고 넓은 곳이다. 그만큼 수많은 계곡과 협곡이 존재하고 있었다.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말이군요.”
“그래도 방비는 해야 해요.”
베아트리의 말대로 대비를 해야 한다. 가능성이 낮긴 하지만 계곡을 따라 장원 쪽으로 넘어올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결국 장원 자체 방어력을 더 높여야 한다는 말인데… 마라스 대장님, 병사들 선발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마라스 용병대는 얼마 전 정식으로 장원에 합류했다. 이미 용병대 소속 가족들이 장원에 정착했고 안정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현실적으로 다른 곳으로 떠나기도 힘들었다. 사실 마라스가 장원에 남기로 한 가장 큰 이유는 얼마 전 보일과 카일의 대련을 보면서 두 사람의 경지가 자신이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대단하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지원자의 숫자가 좀 많아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지원자가 얼마나 되는 겁니까?”
“최근 오백이 넘었습니다.”
“삼백을 뽑는데, 오백이 모였단 말입니까?”
“병사는 상당히 안정적인 직종 중 하나이니까요. 그리고 영지병보다도 대우도 좋으니 모여드는 건 당연할 겁니다.”
“…아시는 것처럼 상황이 급박해 졌습니다. 아무래도 선발을 서둘러 주셔야겠습니다.”
“최대한 서둘러보겠습니다.”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베아트리 영애를 돌아봤다.
“요새 건립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최대한 서두르면 보름 안에 완공될 겁니다.”
“다행이군요.”
“래하트 남작과 재정관의 도움이 컸어요. 석재 공급도 신속해서 공기를 단축할 수 있었어요.”
“다행이군요.”
“요새가 완공되면 남부가 뚫려도 어느 정도 방어가 가능해질 겁니다. 크로먼 백작가에서도 일정 부분 지원도 일을 거 고요.”
“하지만 대비는 해야 할 겁니다. 제루아! 은밀하게 석궁을 매입하고 싶은데, 가능하겠습니까?”
“석궁을 말인가요?”
“네, 장궁수를 양성하면 좋겠지만 당장은 어려우니 석궁을 대량으로 매입하고 싶습니다.”
“얼마나 구하려는 거죠?”
“5백 정입니다.”
“지금… 5백 정이라고 했나요?”
카일의 말에 제루아는 물론 회의실 사람들 모두가 술렁거렸다.
“언제 전면전이 벌어질지 알 수 없습니다. 병사들을 훈련 시키긴 하겠지만 정예병을 육성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텐데, 그전에 상황이 어떻게 변할지 모르니 미리 대비를 해야겠죠.”
“레하트 남작님이 좋아하진 않으실 겁니다.”
장원의 전력이 백작가의 전력을 앞서는 상황은 백작가의 안전을 책임진 레하트 남작으로선 상당히 우려할 수밖에는 없다.
“그래서 은밀하게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전 백작가의 사람이에요.”
“알고 있습니다. 원하시면 백작가에 알려도 좋습니다.”
카일의 말에 제루아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카일은 제루아에게 에렌 공국 상인과의 협상을 맡겼다. 이번 협상으로 거래가 잘 이루어진다면 대외 도자기 판매를 제루아에게 맡기겠다는 뜻을 은연중 내비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에렌 공국은 제국이나 바런트 왕국까지 넓은 상권을 가진 곳이다. 일단 도자기와 옹기 거래가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고 거래가 지속된다면 크로먼 상단이 아닌 제루아만의 독자적인 상단을 만드는 것도 꿈은 아닐 것이다.
“지금 절 시험하시는 건가요?”
“그보다는 그만큼 위기감을 느끼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아직 전면전이 일어난 것도 아니잖아요. 와이번들의 습격이 걱정이긴 하지만 아서 백작이 나타난다면 전쟁의 명분도 사라지지 곧 전쟁도 멈출 거예요.”
“만약 아서 백작이 죽었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럴 리는 없어요. 아무리 전쟁 중이라지만 주요 귀족의 경우엔 죽이지 않아요. 보통 협상을 통해 몸값을 받는 것이 일반적이거든요. 만약 본국에서 백작을 포로로 잡고 있다면 곧 협상을 통해 전쟁을 마무리할 거예요.”
“만약… 백작이 본국에서 죽었다면 어떻게 됩니까?”
“그럴 리가요? 그랬다면 정중하게 장례를 치르고 시신을 아서 가문에 보냈을 거예요.”
“그런 과정 없이 죽었다면 어떻게 되냐는 겁니다.”
“그럼 상황은 아주 복잡해져요. 가주를 잃은 아서 가문이 절대 물러나지 않을 거예요. 아마도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겠죠.”
“그렇군요.”
카일이 복잡한 생각에 잠긴 듯 얼굴을 찌푸린 채 말을 멈추자 회의실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휴… 무슨 걱정이 있는진 모르겠지만, 좋아요. 석궁은 구해 줄 수 있어요. 하지만 암흑 상단을 이용해야 해서 비용은 상당하게 들 거예요.”
“부탁드립니다.”
“대략 한 달 정도 시간이 필요할 거예요.”
“그 정도면 괜찮을 겁니다. 하지만 조건이 하나 있어요.”
“조건?”
“이번 거래가 알려지면 전 백작가나 상단에서 제제를 받게 될 수 있어요. 그만큼 제게도 큰 부담이 되는 거래란 말이죠.”
“네, 그 점에 대해선 충분히 보상해 드리겠습니다.”
카일의 말에 제루아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 금전적인 대가는 원하지 않아요. 대신 장신과 아서 백작과의 관계를 알고 싶어요.”
제루아의 말에 회의장에 남아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카일에게로 향했고, 비터와 마크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졌다.
“…무슨 말씀입니까?”
“아니라고 할 생각인가요?”
“전 백작에 대해 아는 것이 없습니다.”
카일의 말에도 제루아는 확신에 찬 눈으로 말했다.
“아니! 분명 당신과 여기 두 사람은 아서 백작에 대해 알고 있어요. 카일 당신은 그렇다 쳐도, 이 둘은 아까부터 쭉 무언가를 알고 있다는 표정이거든요.”
“우린… 모른다!”
비터가 당황한 얼굴로 버럭 소리를 질렀고 마크는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이런 멍청한 놈!”
“뭐!”
“너 때문에 다 망했다고!”
“무슨… 말이야?”
비터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자신을 죽일 듯이 노려보는 마크와 웃음기 가득한 제루아를 바라보았다.
“어때요? 이래도 아니라고 할 건가요?”
“머리가 좋군요.”
“상대를 공략하려면 주변부터 공략하라! 할아버지께서 늘 하시던 말씀이죠.”
“케프 남작이 좋은 손녀를 두셨군요.”
카일이 고개를 저으며 비터와 마크를 돌아봤다.
“더는 감추기 힘들 것 같군.”
“빌어먹을 녀석, 미끼를 던진다고 의심도 하지 않고 덥썩 무는 녀석이 어디 있어!”
“미끼…!”
그제야 자신이 속았다는 걸 알게 된 비터가 제루아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지만 이미 늦은 뒤였다.
“후… 말씀드리죠.”
“정말 백작을 알고 있었던 겁니까?”
게이츠 단장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베아트리 영애님! 기억하십니까? 지난번 장원을 찾았던 에렌 공국의 상단 말입니다.”
“설마! 보샤트 상단을 말하는 건가요?”
“맞습니다. 바로 그들이 화이트 와이번 서식지를 침입한 베지톤 백작과 기사들입니다. 그리고 그들 모두는… 에바크 산맥에서 죽었습니다.”
“지금… 아서 백작가의 가주가 죽었단 말인가요!”
제루아가 깜짝 놀라 물었다.
“그렇습니다.”
카일은 옷 속에 감춰져 있던 커다란 루비 목걸이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이어 비터와 마크 역시 황금빛 토파즈를 꺼내 탁자 위에 올렸다.
“레드 와이번!”
회의실 안의 모두가 탁자 위에 올려진 맹약석을 경악이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