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 100. 대련(2)
“…흠!”
연무장에 도착한 카일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연무장엔 기사단은 물론 파티에 참석한 귀빈의 수까지 맞춰 의자가 놓여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미 대련을 염두하고 준비해둔 것이 분명했다.
“너무 기분 나빠 하지는 말게. 아마도 자네가 올 줄 알고 기사단에서 미리 준비한 것 같으니 말이야. 믿을진 모르지만 이런 일이 자주 있었거든!”
케프 남작의 말이 끝나자 아톱스가 다가와 다시 한번 사과를 했다. 케프 남작의 말처럼 사과하는 모습이 매우 익숙해 보였다.
“이거 된통 걸린 것 같은데, 괜찮겠어?”
마크와 비터, 그리고 마라스까지 카일의 옆으로 다가와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기분이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괜찮습니다.”
카일의 얼굴은 분명 웃고 있었지만, 눈가에는 싸늘한 한기가 맺혀 있었다.
“…하하! 그래도, 제발 죽이진 마라! 넌 몰라도 우린 기사 하나 상대하기도 버겁다.”
비터가 카일의 옆으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상황을 봐가며 결정하죠.”
“걱정 마라! 카일이 알아서 할 거다.”
마크가 웃으며 카일의 어깨를 두들겼다. 카일은 셋을 뒤로하고 천천히 연무장으로 향했다. 이번 파티의 목적이 용병 가문 개설과 기사서임이기에 격식에 맞는 레더 아머에 보호구를 착용하고 있어 따로 준비가 필요 없었다. 다만 의식 전 맡겨 놓은 무기들만 없을 뿐이었다.
그마저도 곧 기사 한 명이 맡겨 놓은 무기를 가져왔지만 카일은 검과 도를 마크에게 맡기고는 연병장 한쪽 거치대에 놓인 헐버드를 집었다. 길이는 대략 2m에 창대 뒤쪽으로 무게 중심을 맞추기 위한 둥근 추가 달린 독특한 형태의 도끼 창이었다. 카일은 묵직한 할버드를 몇 번 휘둘러 보더니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연무장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설마… 훈련용 도끼 창으로 절 상대하겠단 말입니까?”
아톱스가 차가운 눈으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헐버드는 일반 창보다도 무거운 장병기로 병사들 중에서도 힘이 좋은 정예병이 사용하는 무기다. 하지만 오러를 다루는 정통 기사들이나 용병들에겐 불필요한 무기이기도 했다.
“마침 괜찮은 무기 같아서요. 이해를 부탁해도 되겠습니까?”
카일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양해를 구했지만 받아들이는 아톱스로선 전혀 그렇지 않았다. 마치 너 정도는 병사들이나 쓰는 도끼 창으로도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다는 말과 같아 아톱스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제 검은 상당히 빠르답니다. 자칫 다칠 수도 있을 텐데, 괜찮겠습니까?”
“빠름이라면 저도 만만치 않으니 걱정 마십시오.”
“허….”
진중하던 아톱스의 얼굴에 결국 균열이 생겼다. 무거운 장병기인 할버드를 들고 빠름을 논한다는 건 사실상 아톱스를 무시하는 행동이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었다.
“후회하지 마십시오.”
“그럴 리가요.”
“좋습니다. 그럼 시작할까요? 장병기를 드셨으니 선공은 제가 양보하죠.”
“거부하진 않겠습니다.”
카일이 피식 웃으며 아톱스를 향해 가볍게 할버드를 찔러 넣었다. 일반적인 검보다 훨씬 긴 피치에서 생각보다 빠르게 다가오는 할버드에 아톱스가 급히 뒤로 물러섰지만 카일도 그만큼 빠르게 다가서며 아톱스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카일은 훨씬 긴 피치와 보폭을 가지고 있기에 뒷걸음질 치는 아톱스로선 단순한 찌르기 공격조차 피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아톱스 역시 노련한 검수였다. 황급히 물러나던 아톱스가 몸을 회전시키며 창대를 따라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장병기인 할버드를 피해 카일을 직접 공격할 방법은 할버드 간격 안으로 파고들며 근접전을 펼치는 것뿐이었다.
카일은 안쪽으로 접근하며 찔러오는 검을 창대로 튕겨 쳐내는 것과 동시에 빠르게 물러서며 할버드를 횡으로 휘둘렀다. 카일에게 따라붙으려던 아톱스가 깜짝 놀라 검을 급하게 세우며 카일의 할버드를 막았다.
쾅!-
검과 할버드가 부딪히며 굉음을 냈다. 동시에 뒤로 물러난 아톱스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검을 막아가던 자세가 다소 불안정했지만 노련한 기사인 아톱스는 그 와중에도 할버드를 완벽히 막아냈다. 그럼에도 뒤로 다섯 걸음이나 물러났으니, 명백한 힘의 차이가 나타난 것이다.
“…흡!”
아톱스가 숨을 깊게 들여 마시며 충격이 가시지 않아 떨리는 손을 지그시 눌렀다. 오러는 신체를 더욱 빠르고 강하게 만들어 주지만 역설적이게도 힘에서 밀렸다는 건 다른 말로 오러에서 밀렸다는 말과도 같기에 이 상황이 아톱스의 마음을 더더욱 불편하게 만들었다.
“이만하면 서로의 기량은 충분히 확인한 듯합니다. 대련은 이만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카일이 할버드를 천천히 내리며 물었다. 하지만 일방적으로 뒤로 밀렸다고 생각한 아톱스가 이를 받아들이기는 쉽지 않았다.
“글쎄요? 아직 제 기량은 온전히 보여드리지 못한 것 같은데, 이번엔 제가 선공을 해 볼까 합니다만.”
“부단장께서 원하신다면… 그렇게 하시죠.”
카일이 고개를 저으며 할버드를 들어 올렸다. 적당히 힘을 보여준다면 물러날 거라 생각에 아톱스를 몰아붙였지만, 오히려 그의 승부욕을 자극하고 만 것이다.
“조심하십시오. 이번엔 조금 전과는 다를 겁니다.”
“기대하죠.”
카일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아톱스가 폭발적인 속도로 카일을 향해 뛰어들었다.
“흡!”
아톱스의 갑작스런 공격에 숨을 급히 들여 마신 카일이 급히 한발 뒤로 물러나며 빠르게 할버드를 찔러 넣었다. 하지만 아톱스는 이미 예상을 한 듯 몸을 깊이 낮추며 안쪽으로 깊숙이 파고들어 아래에서 위로 검을 빠르게 찔렀다.
팡-
대경한 카일은 말아쥔 주먹으로 아톱스의 검면을 때려 검을 튕겨냈다. 그리곤 뒤로 두 걸음 물러나며 할버드를 반 바퀴 회전시켜 아톱스의 머리 위로 내리쳤다.
“이런!”
아톱스가 급히 허리를 튕겨 도끼 창을 피하며 창대를 잡은 카일의 왼손을 향해 검을 횡으로 그었다. 카일은 급히 왼손을 놓는 동시에 창대를 높이 들어 사선으로 검을 막았다.
끼이익-
사선을 따라 아래로 향하는 아톱스의 검을 튕겨내며 카일이 몸을 뒤틀어 창대 끝을 잡고 강하게 내려쳤다.
“헉!”
아톱스는 거대한 원형을 그리며 아래로 떨어지는 카일의 할버드에 깜짝 놀라 급히 바닥을 굴러 도끼 창을 피했다.
꽈앙-
연무장을 파괴하며 깊숙이 박힌 할버드를 보고 아톱스는 이마 위로 흐르는 굵은 땀을 닦았다. 이번 공격은 지금까지의 어떤 공격보다도 파괴적이고 위력적이어서 검을 들어 막았다고 해도 적지 않은 부상은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와아!”
“최고다!”
기사들과 관람을 지켜보던 가신들 사이에서 환호가 터져 나왔다. 쉽게 볼 수 없는 실력자들의 손에 땀을 쥐는 격렬한 대련에 환호하기 시작한 것이다.
“휴~ 대단하군요. 설마 체술까지 하실 줄은 몰랐습니다.”
“제가 가진 비장의 무기였는데, 이렇게 알려질 줄은 몰랐습니다.”
카일의 말에 아톱스가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글쎄요? 과연 비장의 무기가 하나뿐인지 궁금하군요.”
“그럼… 한번 알아보시겠습니까?”
“하하! 좋습니다. 그럼 다시 시작해 보시죠.”
아톱스가 다시 검을 들어 카일을 향해 달려들었다.
“허! 놀랍군, 놀라워!”
래하트 남작은 박빙으로 이어지는 대결을 보면서 연신 놀랍다는 말만을 내뱉고 있었다.
“그만큼 실전을 많이 겪었던 말이겠죠. 듣자 하니 카일은 어렸을 적부터 꾸준히 오크를 통해 실력을 쌓았다고 하더군요.”
케프 남작 역시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를 표하자 래하트 남작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닙니다. 물론 저 카일이라는 아이는 분명 대단한 청년입니다만, 제가 놀랍다고 한 건 바로 그가 사용하는 창술에 있습니다.”
래하트 남작의 말에 케프 남작이 의문 가득한 모습으로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인지?”
“지금 카일 경의 창술이 어떠합니까?”
“글쎄요! 전 그저 단조롭게만 보입니다.”
“정확합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상하지 않습니까? 저 단조로운 공격 패턴을 왜 아톱스가 파악하지 못하는 걸까요? 자식 자랑 같지만 아톱스 역시 어디에 내놓아도 뒤지지 않을 기사라고 자부합니다. 똑같은 패턴의 공격을 전혀 뚫지 못할 정도로 약하게 키우지 않았습니다.”
래하트 남작의 말에 케프 남작이 다시 연무장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하게 5가지 동작입니다. 지금 카일 경이 사용하는 검술은 딱 다섯 가지 동작이 전부란 말입니다. 나머지 동작은 기본적인 동작에서 파생된 변칙일 뿐이죠!”
래하트 남작의 설명에 카일의 동작을 유심히 살핀 케프 남작 역시 감탄을 터트렸다.
그러나 카일의 동작에는 래하트 남작도 알지 못하는 비밀이 있었는데, 바로 끊임없이 변화하는 창대를 잡은 카일의 손과 자유롭게 부드럽게 움직이는 카일의 스탭이었다.
이러한 변화는 너무나 자연스러웠고 기존에 알려진 대륙의 검술과도 그 체계에 큰 차이를 보여 상급 엑스퍼트에 오른 래하트 남작도 미처 파악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건 따로 있습니다.”
“허허! 그사이 또 다른 것을 발견하셨단 말입니까?”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가문에 새로운 무장세력이 들어왔으니 기사단장으로서 그들을 자세히 살피는 것 역시 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도 그렇군요. 그럼 어디 얼마나 대단한 것을 발견하셨는지 볼까요?”
케프 남작의 물음에 래하트 남작이 연무장이 아닌 남작의 뒤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기 용병이 보입니까? 카일 경과 함께 참석한 비터라는 용병입니다. 저자의 허리를 잘 보세요.”
래하트 남작의 말에 케프 남작의 눈이 자연스럽게 비터의 허리로 향했다.
“저건 단봉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단봉이야 용병들이 심심치 않게 가지고 다니는 무기가 아닙니까?”
“저 역시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지요. 하지만 카일 경의 창술을 보다 보니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무슨 말씀인지?”
“카일의 창술은 단순하지만, 일정한 체계를 갖췄습니다. 어떻습니까? 떠오르는 것이 없습니까?”
“저것이 보급용 창술이란 말입니까?”
케프 남작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단순하긴 하지만 아톱스를 몰아붙일 수 있을 정도로 안정적이면서도 약점을 찾기 힘든 창술이었다. 만약 이런 창술을 용병대 전체가 익힌다면 무시할 수 없는 전력을 만들 수 있을 것이다.
“글쎄요. 굳이 창술이라 한정 지을 순 없지만, 그렇다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단 저 비터란 용병과 그와 함께 있는 용병들 모두 단봉을 가지고 있더군요.”
“제가 아무리 검을 놓은 지 오래라고 해도 단봉과 창까지 구분하지 못할 정도는 아니랍니다.”
“하하, 맞습니다. 단봉과 창이 같을 순 없죠, 하지만 만약 단봉과 검을 연결한다면 어떨 것 같습니까?”
“단봉과 검을 연결한다?”
“그렇습니다. 저기 용병들을 보십시오. 검이 좀 특이하지 않습니까?”
“그러고 보니 그립 부분이 비상식적으로 길군요.”
“저기에 단봉까지 연결하면, 아마도 숏 스피어 못지않은 길이가 나올 겁니다.”
“허허, 독특하군요. 단장님의 말씀이 맞다면 장병기를 주력으로 한 용병대가 탄생할 거란 말인데, 왜 굳이 검이 아닌 장병기를 주력으로 한 걸까요?”
용병이 특이하고 기괴한 무기를 사용하긴 하지만 장병기를 사용하는 경우는 드물다. 일단 휴대성과 범용성에서 떨어질 뿐 아니라 긴 장병기의 특성상 오러를 발현하기도 힘들기 때문이다.
“아마도 용병대의 주축이 하급 용병대이기 때문일 겁니다.”
“전력을 빠른 시간에 올리기 위해 검술보다 상대적으로 배우기 쉬운 장병기를 택했단 말입니까?”
“잘 보셨습니다.”
“확실히 일리가 있군요.”
래하트 남작의 말에 고개를 끄덕인 케프 남작이 연무장 중앙에서 맹렬하게 몰아붙이고 있는 아톱스와 제자리에서 할버드를 능수능란하게 움직이며 방어에 전념하는 카일의 모습을 다시금 관찰했다.
“확실히 흥미로운 대련이군요.”
케프 남작이 감탄했다.
“창술을 제대로 익힌 소드 유저 두셋이 합공한다면 엑스퍼트 급 기사도 상대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설마 그렇게까지…?”
“물론 합공이란 게 쉽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서 말입니다.”
“확실히!”
케프 남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연무장으로 빠르게 기사 하나가 빠르게 달려와 래하트 남작 앞에 부복했다.
“단장님!”
“자넨 남문 담당이 아닌가?”
“예! 급한 전갈이 도착해 이렇게 달려왔습니다.”
기사가 급히 인장이 찍힌 서신을 래하트 남작에게 내밀었다.
“급보?”
“어서 받아 보시죠. 아무래도 보통 일은 아닌 듯합니다.”
“흠….”
급히 인장을 뜯어 서신을 살피던 래하트 남작의 얼굴이 차갑게 굳어졌다.
“심각한 일입니까?”
“재정관께서도 살펴보시죠.”
남작이 서신을 케프 남작에게 넘겼다.
“이런…!”
“아무래도 대련은 이쯤에서 중단시켜야겠습니다.”
래하트 남작이 고개를 저으며 연무장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허허! 결국 일이 터지고 말았군. 이를 어쩐다….”
케프 남작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남쪽 하늘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