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306화 (306/404)

외전 - 40. 차와 무쇠솥

새벽녘, 잠에서 깬 카일의 귓가로 귀에 익은 소리가 들려왔다.

그그극-

카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소리가 들려온 곳으로 향했다. 그곳에는 쓰러질 듯 비틀거리면서도 절벽을 향해 검격을 날리는 마크가 서 있었다.

“대단한 근성이지 않나?”

“경지를 넘으려면 어쩔 수 없이 감수해야만 하죠.”

뒤에서 들려온 갑작스러운 목소리에도 카일은 놀라지 않고 담담히 말했다. 이어서 재만 남은 모닥불을 뒤적여 작은 불씨 하나를 찾아내는 카일을 가만히 바라보던 코퍼가 무겁게 입을 열었다.

“저것이… 자네 가문이 경지를 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인가?”

갑작스러운 물음에 카일이 고개를 들어 코퍼를 바라보더니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제게 제법 괜찮은 차가 있습니다. 한잔하겠습니까?”

“준다면… 거절하진 않겠네.”

코퍼의 말에 가방 안쪽에서 작은 솥을 꺼낸 카일이 물을 가득 담아 모닥불 위로 올렸다. 그리곤 마른 버섯 조각 하나를 던져 넣었다.

“아시겠지만, 경지를 넘는 방법은 각 가문의 비전입니다. 그걸 묻는 건 금기라는 걸 아실 텐데요.”

“물론,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저 둘, 오래전부터 우리 코퍼 용병대에 들이려 했던 용병들이네. 나로선 자네의 도움에 대해 묻지 않을 수 없었네.”

“흠…. 그랬군요.”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갈색 옹기 찻잔을 가방에서 꺼내 황금빛 찻물을 천천히 따랐다.

“땅속에서 자라는 차가버섯 차입니다.”

“버섯 차에 대해선 잘 모르긴 하지만, 처음 들어본 버섯이군.”

코퍼가 손에 든 찻잔을 살피며 물었다.

“워낙 찾기 힘든 버섯이라 다른 곳에선 맛보기 힘들 겁니다.”

“귀한 차란 말이군.”

코퍼가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기울여 황금빛 차를 조심스럽게 마셨다.

“……확실히 일반적인 버섯 차와 다르군.”

“향이 조금 더 깊다고 할 수 있죠.”

카일이 웃으며 말을 이었다.

“마크와 비터 님을 영입하려 했다고 하셨는데, 왜 아직 함께하지 못한 겁니까?”

“몇 번 제안은 했지만 모두 거절했네, 아직은 어느 곳에 속하고 싶지 않다고 하더군. 당시엔 녀석들이 심각한 정체기를 겪을 때였으니 더는 제안하지 못했네.”

“흠…. 이해할 수 없군요. 코퍼 님의 조언으로도 충분히 정체기를 극복할 수 있었을 것 같은데요?”

카일의 의문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코퍼의 경지는 이미 중급에 근접했다. 엑스퍼트에 올랐을 당시의 경험을 공유한다면 비터와 마크가 코퍼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더구나 지금까지 두 사람의 고심을 외면했던 코퍼가 갑자기 카일의 의도를 의심하며 묻는 것 역시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난… 당시의 기억이 없다.”

“…네?”

카일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내가 기억하는 건 생사를 건 전투에서 겨우 살아남았을 때 이미 엑스퍼트에 올랐다는 것뿐, 그 과정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음….”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생명이 위협받는 전투에서 무아지경에 빠져 검을 휘둘렀다면 코퍼 자신도 모르는 사이 경지를 넘었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리고 코퍼가 카일에게 다가온 이유도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었다.

“단지 비터와 마크 때문에 제게 오신 건 아니었군요.”

카일의 말에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던 코퍼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부인하지 않겠다.”

“그래서 마크의 수련을 따라 해보려는 겁니까?”

“용병대 단원 중 하나가 심각한 정체를 겪고 있다. 녀석을 돕기 위해 생사를 건 전투를 수없이 찾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정체기가 찾아온 건 언제였습니까?”

“대략 1년 정도 지났다.”

한동안 말없이 생각에 잠긴 듯 습관적으로 거칠한 찻잔을 문지르던 카일이 고개를 들어 코퍼를 바라보았다.

“일단, 지금 마크의 수련법은 가문의 비전이 아닙니다.”

“그럼…!”

싸늘하게 굳어져 가는 코퍼의 모습에 카일이 급히 손을 저으며 말을 이었다.

“아! 그렇다고 마크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건 아닙니다. 단지 어렵고 힘들 뿐이죠.”

“그럼, 저 수련법으로도 경지를 넘을 수 있단 말이냐?”

밝아진 얼굴로 물었지만, 이어진 카일의 대답에 코퍼의 얼굴이 곧 침울해졌다.

“마크의 경우라면… 예, 가능합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이라면, 글쎄요. 도움이 될지 알 수는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잘 아실 겁니다. 엑스퍼트가 되면 소드 유저일 때보다 오러의 밀도가 더 높아지고 강해집니다. 정체기란 바로 이런 오러의 변화가 일어나는 시기죠.”

“그 정도는 나 역시 알고 있다.”

“그럼 묻죠, 오러의 밀도가 높아지고 강해진다면 모두가 엑스퍼트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그야 당연히….”

카일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려던 코퍼가 이내 얼굴을 찌푸렸다. 오러가 강해지면 엑스퍼트가 된다. 대중적으로 가장 널리 알려진 사실을 카일이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런 질문을 한다는 건 엑스퍼트가 되기 위해선 이것 이외의 또 다른 중요한 무엇인가가 필요하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한참을 고심하던 코퍼는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고민을 해 봐도 답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차가 식었군요.”

갑작스러운 카일의 말에 상념에서 깨어난 코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한쪽에 내려놓았던 작은 무쇠솥을 향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뜨겁게 달아올라 두꺼운 가죽 천을 써야만 들어 올릴 수 있었던 무쇠솥이 싸늘한 새벽 공기에 차갑게 식어 있었다.

“흐음….”

모닥불 위에 올려진 무쇠솥을 가만히 바라보는 코퍼를 향해 카일이 입을 열었다.

“이 무쇠솥은 제가 직접 휴대하기 쉽게 만든 겁니다.”

“이걸 말인가?”

코퍼가 놀란 얼굴로 카일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검술에만 집중하기도 힘들었을 텐데 대장장이 기술까지 익히다니… 정말 대단하군.”

“대장장이 기술이라 해도 합금법에 대해선 전혀 배운 것이 없습니다. 그저 불과 망치 다루는 법을 조금 배웠을 뿐이죠.”

“정확히는 모르지만, 무쇠솥이 조금 배웠다고 만들 수 있는 물건은 아닐 거라 생각하네.”

카일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쉽게 만든 건 아닙니다. 이 작은 솥 하나 만드는 데도 수십 번 실패를 거듭했으니까요.”

코퍼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모닥불 위에 올려진 작은 무쇠솥으로 향했다. 쉽게 만들 수 없을 거란 생각은 했지만 수십 번이나 실패를 반복하며 만들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무쇠솥이 그렇게 어렵게 만들어진 물건인 줄은 몰랐군.”

“하하! 물론 어렵게 만들어지긴 하지만 그렇다고 저처럼 수십 번이나 다시 만들지는 않습니다. 사용에 지장 없는 아주 미세한 작은 흠결 정도는 그냥 넘어가니까요.”

“흠…. 무슨 뜻인진 알겠다만 그것에 의미가 있느냐?”

미세한 흠집까지 놓치지 않는 완벽함도 좋지만, 굳이 작은 흠집 하나로 어렵게 만든 무쇠솥을 폐기하고 다시 만들어야 했는지는 코퍼로서도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코퍼의 물음에 카일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어렸다. 카일이 코퍼에게 바랐던 물음이 바로 이것이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전, 차 맛이 어땠습니까?”

코퍼가 잠시 이해할 수 없는 표정으로 카일을 바라보았지만, 이내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훌륭했네.”

“그렇습니다. 아주 잘 끓인 차였습니다. 그럼 이렇게 훌륭한 차 맛이 과연 버섯이나 물 때문만일까요?”

“그게… 무슨 뜻인가?”

“사람들은 차를 끓일 때, 물을 끓이는 용기보단 어떤 차와 물을 썼는지만 관심이 있죠. 정작 어떤 용기에 차를 끓이는가에 따라 차의 맛과 향이 달라지는데도 말입니다.”

“…용기?”

“용기의 재질과 온도, 압력에 따라 차의 맛과 향이 미세하게 달라집니다. 이건 요리를 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용에는 지장이 없어도 무쇠솥의 두께와 작은 실금하나에 내부 열과 압력이 달라지고 맛이 변하죠.”

깊은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지나치려던 코퍼의 머릿속으로 어떤 생각이 스치듯 지났다. 코퍼가 눈을 크게 뜨곤 급히 카일을 향해 물었다.

“자네 말은… 그러니까! 엑스퍼트가 되기 위해선 강한 오러를 담아낼 질기고 단단한 신체가 필요하단 말인가?”

“글쎄요. 전 단지 무쇠솥과 차에 대해 말씀드린 것뿐입니다만….”

“아!”

코퍼가 낮은 탄성을 터트렸다. 카일이 비록 어떠한 단서도 말하지 않았지만 코퍼가 유추할 수 있게, 유도한 것은 분명했다. 물론 단순히 신체를 단련한다고 엑스퍼트에 오를 수 있는 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코퍼에겐 방향 없이 헤매던 길 위에 뚜렷한 목표가 보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말씀드리면, 차를 끓일 때 무조건 뜨겁게 끓인다고 좋은 것은 아닙니다. 좋은 향과 맛을 낼 수 있는 적당한 온도를 찾아야만 합니다.”

“…조화가 필요하단 말이냐?”

“조화만이 아니라 균형도 필요하단 말입니다.”

“이것 역시 차에 대한 조언이겠지?”

“물론입니다.”

카일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다. 오늘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다.”

“은혜라니요? 앞서 말했듯, 전 차에 대해 말했을 뿐입니다.”

“하하! 좋다. 기회가 된다면 차에 대해 제대로 배워 보마.”

“그러시죠. 아마도 큰 도움이 될 겁니다.”

카일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으윽-

그때였다. 절벽을 향해 힘겹게 검을 날리던 마크의 검격에서 이전과 확연히 다른 음향이 들려왔다.

“생각보다 빠르군요. 적어도 하루는 더 수련이 필요할 것 같았는데.”

카일이 따뜻하게 데워진 찻물을 마시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 * *

“으음….”

“정신이 드냐?”

힘겹게 눈을 뜬 마크에게 침울한 얼굴의 비터가 보였다.

“곧 출발할 거다. 먹어라!”

스프가 가득 담긴 그릇과 빵을 내려다본 마크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비터를 바라보았다.

“어떻게 된 일이야? 내가 왜 여기에….”

“쓰러진 널 카일이 옮겨왔다.”

마크의 시선이 카일이 머물렀던 장소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은 이미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카일은 숲에 갔다. 아침 수련을 한다나…. 아무튼 시간이 제법 지났으니 곧 올 거다.”

투덜거리는 비터를 마크가 의아한 얼굴로 살폈다. 깨어난 직후 자신을 대하는 비터의 모습이 이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무슨 일 있었냐? 갑자기 왜 이렇게 날이 서 있어?”

“그건….”

마크를 바라보던 비터가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한층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휴…. 네 말이 맞았다.”

“무슨 말이냐? 갑자기?”

“절벽에 남긴 검흔, 네 말대로 몸으로 부딪쳐 수련했어야 한다는 말이다.”

“아!”

자신의 수련이 틀리지 않았다는 비터의 말에 마크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그런데 정말 어떠냐?”

“응?”

“엑스퍼트에 올랐잖아? 기분이 어떠냐고.”

“에, 엑스퍼트라니…?”

마크가 깜짝 놀라 되물었다.

“카일이 그랬다. 경지를 넘었다고…. 당장 실력을 확인해 보고 싶겠지만, 변화된 오러가 안정되려면 하루 이틀 시간이 필요할 테니 잠시 참는 게 좋다더군.”

비터의 말에, 마크는 밤을 새워 단단한 화강석을 가르며 쌓였던 충격과 피로가 말끔히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게다가 몸 전체로 퍼져가는 강인한 오러의 기운 역시도 느낄 수 있었다.

“크윽-”

마크가 손바닥에서 전해진 쓰라린 통증에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멍청한 놈, 찢어진 손바닥을 그렇게 말아쥐면 어쩌자는 거냐!”

비터의 말에 마크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손바닥을 향했다. 손바닥은 이미 누군가 약 바르고 천을 감아 깔끔하게 치료된 상태였다.

“카일이 가지고 있던 약과 천으로 치료했다. 상처가 심해 적어도 사흘은 지나야 아물 거란다. 이건 카일에게서 받은 약이다.”

비터가 조그만 철합을 내밀었다.

“이건… 받을 수 없다. 이미 녀석에게 받은 은혜만 해도 갚지 못할 정도다. 귀한 치료약 까지….”

“칫, 어차피 갚아야 할 은혜가 많은데, 이런 약 하나 더한다고 큰 차이가 있냐? 받아둬, 상처가 빨리 나아야 은혜를 갚든 말든 할 것 아니야!”

비터가 철합을 마크의 손에 던지듯 건네더니 뒤 돌아 터벅거리며 멀어져 가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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