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305화 (305/404)

외전 - 39. 부러진 검(2)

“제게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까?”

갑작스러운 카일의 물음에 마크가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검술에 대해 몇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다.”

“물어보십시오.”

카일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놀라지 않는구나?”

“마크 님이 찾아올 거란 예상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럼….”

“예, 가문의 검술만 아니라면 알려드릴 수 있습니다.”

카일의 대답에 마크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비터와 마크가 처음 만난 건 몇 년 전 있었던 서북부 영지의 대규모 몬스터 토벌에서였다. 처음엔 자존심과 고집이 센 비터로 인해 티격태격 싸우기도 했지만, 첫인상과는 달리 의외로 마음도 잘 맞고 실력도 비슷해 지금까지 함께하고 있었다. 덕분에 비터에 대해 잘 안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그런 비터가 스스로 패배를 자인할 정도로 카일의 검술은 대단했고 무엇보다 체계적이었다. 대륙 여기저길 떠돌며 푼돈 몇 개에 얻어 배운 싸구려 검식과는 차원이 달랐다. 그런 만큼 카일에게서 지금 자신이 겪고 있는 심각한 고민에 대한 작은 실마리를 잡고 싶었다.

“지금… 내 검술은 정체되어 있다.”

조금 전까지 밝았던 마크가 무겁게 입을 열자, 비터의 얼굴까지 점점 어두워졌다. 마크와 마찬가지로 비터 역시 검술이 점차 정체, 아니, 점점 퇴보되어 가는 걸 느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마크는 아직도 검술에서 해답을 찾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반면 비터는 검술이 아닌 무기, 즉 좋은 검을 통해 검술의 퇴보를 해결하려 한 것이다.

“지난 2년간 수련에 매진한 것은 물론이고 수많은 생사를 가르는 전투에도 참여했었다. 하지만 지금껏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제게 정체된 검술을 해결할 방법을 알려 달라는 겁니까?”

“어려운 부탁이란 걸 알고 있다. 하지만, 아주 작은 단서라도 좋으니… 부탁한다.”

마크가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카일이 잠시 생각에 잠긴 듯 팔짱을 낀 채 오랜 침묵에 빠져들었다. 겨우 살려놓은 모닥불의 불꽃이 다시 사그라들 때쯤, 눈을 뜬 카일이 깊은 한숨과 함께 사그라드는 모닥불 위로 마른 나뭇가지를 던져넣었다.

“손!”

당황한 표정으로 카일을 바라보던 마크가 급히 자신의 손을 내밀었다. 거친 손등과 곳곳에 박인 굳은살은 그가 검술을 익히기 위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해왔는지 알려주고 있었다. 카일은 마크의 손을 마주 잡은 뒤 그를 향해 입을 열었다.

“절대 움직여서도, 말을 해서도 안 됩니다.”

“아, 알겠다. 걱정 마라!”

마크의 대답을 들은 카일이 눈을 감고 천천히 맞잡은 손바닥으로 오러를 밀어 넣기 시작했다.

“흡!”

카일의 손바닥에서 시작된 부드럽고 차가운 기운에 비명을 겨우 참아낸 마크가 부릅뜬 눈으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오러를 자유롭게 움직여 타인의 몸 안으로 밀어 넣을 수 있다는 사실은 지금껏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였다.

카일은 마크의 놀란 시선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마크가 개척해 놓은 거칠고 투박한 마나로드를 따라 천천히 오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생각대로 엑스퍼트를 목전에 두고 있군.’

소드 유저에서 엑스퍼트로 올라서기 전, 오러는 큰 변화를 겪는다. 오러가 더욱 압축되며 오러의 특성이나 성질이 변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일시적인 정체를 겪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엑스퍼트에 오르는 건 아니다. 불안정한 검술이나 마나로드로 인해 결정적인 순간 경지를 넘지 못하고 평생 소드 유저에 머무는 경우가 허다했다.

“휴~”

카일이 깊은 한숨을 내쉬고는 마크의 손을 놓으며 감았던 눈을 떴다.

“왜… 그러느냐?”

깊은 고심에 빠진 카일의 모습에 마크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 이름 높은 기사 가문이나 전통이 깊은 용병 가문에서 엑스퍼트를 많이 배출하는 이유를 아십니까?”

“그야, 그들은 체계적이고 뛰어난 검술을 익히고 있기 때문이 아니냐?”

“맞습니다. 뛰어난 검술과 체계라면 좀 더 빠르게 엑스퍼트에 오를 수 있죠. 하지만 단지 검술 때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건 오산입니다.”

“그럼… 다른 이유가 있단 말이냐?”

“소위 비전이란 것이 있습니다. 오랜 시간 가문의 사람들이 경지를 넘으며 겪은 과정을 남겨 후대가 조금 더 편하게 경지를 넘을 수 있게 하지요. 각 가문은 이것을 검술만큼이나 귀하게 여기며 외부의 유출을 철저하게 차단하죠.”

카일 역시 오래전 증조부 때부터 각 경지를 넘으며 겪은 변화를 기록한 일지를 본 기억이 있었다. 물론 카일의 겨우 타고난 신체와 태극권을 통한 마나연공 덕분에 쉽게 경지를 넘었지만 말이다.

“그럼… 내가 겪는 정체가…!”

“이미 짐작했겠지만, 엑스퍼트에 오르기 전 오러의 변화가 일어난 겁니다.”

엑스퍼트, 대륙을 떠돌며 여기저기 싸구려 검술을 얻어 익히며 살아온 마크에겐 정말 꿈과도 같은 경지였다. 하지만 마크는 기뻐하지 않았다. 카일의 말에서 엑스퍼트에 오르기 위해선 소위 비전이란 것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혹시….”

비터가 어렵게 입을 열었지만, 마크가 급히 비터의 팔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비전은 가문의 보물이라고 했다. 가문의 사람도 아닌, 만난 지 고작 하루도 되지 않은 용병에게 가문의 비전을 알려줄 정도로 카일이 멍청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난 검술이 정체된 이유를 안 것만으로도 족하다. 적어도 지금까지 내가 노력한 모든 것이 헛되지 않았음을 알았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번이 엑스퍼트에 오를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아니, 난 절대 포기하지 않아. 이번이 아니라도 언젠간 반드시 지금의 경지를 뛰어넘을 거다.”

마크의 단호한 말에 비터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하하! 역시 좌절을 모르는 마크로군. 좋아, 나도 언젠간 반드시 너와 마찬가지로 경지를 넘어설 거다.”

비터가 화통하게 웃으며 마크와 손을 마주 잡았다.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카일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전까진 아니지만… 한가지 도움이 될만한 걸 보여드리죠.”

“보여주다니?”

비터가 놀란 얼굴로 물었지만 카일은 아무런 대답 없이 절벽 한쪽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절벽은 작은 균열 하나 없는 매끈하고 단단한 화감암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휴-”

천천히 호흡을 고르며 자세를 낮췄다. 왼손으로 환도를 말아쥐곤 몸을 사선으로 비튼 카일이 절벽을 향해 검을 뽑았다.

쉬익-

허리에서 시작된 아름다운 은빛 궤적이 단단한 화강석 위를 수평으로 가르며 긴 검흔을 남겼다.

철컥-

카일이 검이 부드럽게 검집으로 사라졌다. 그가 뒤로 물러나자 비터와 마크가 황급히 달려가 절벽에 남은 흔적을 살폈다.

“대단하구나…!”

매끈한 화강석 위로 선명하게 새겨진 검흔을 매만진 마크가 놀란 얼굴로 중얼거렸다. 카일의 검격은 그리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는데, 심지어는 오러의 기운도 느끼지 못할 만큼 단순하고 평범하게만 보였다. 하지만 화강석 위에 남겨진 깊은 검흔은 조금 전 카일이 펼친 검격의 대단함을 알려주고 있었다.

“오러를 사용하지 않고 어떻게 단단한 화강석에 검흔을 남긴 거지?.”

마크가 카일을 돌아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카일은 고개를 저었다.

“중요한 건 절벽에 어떻게 검흔을 남겼냐가 아닙니다. 검흔 자체를 보십시오.”

카일의 말에 마크가 다시 검흔을 자세히 살폈지만, 얼굴엔 여전히 아리송한 표정만이 떠올라 있었다.

“휴~ 좋습니다. 그럼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보여드리지요.”

카일이 절벽 앞으로 다가서자, 비타와 마크가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카일이 선명하게 새겨진 검흔을 가만히 바라봤다.

스르릉-

검이 뽑히는 낮은 금속음과 동시에, 카일이 한 발 앞으로 나서며 또다시 검을 수평으로 휘 들렀다.

쉬익-

은빛 검광이 눈 깜짝할 사이에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철컥-

카일이 말없이 납검하고는 두 사람을 지나쳐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버렸다. 더 이상 두 사람에게 알려줄 것이 없음을 분명히 한 것이다.

“이건…!”

황급히 달려간 마크가 절벽에 남겨진 흔적을 살피고는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절벽에는 어느 쪽이 먼저 새겨진 검흔인지 확인할 수 없을 만큼 똑같은 깊이와 길이의 흔적이 나란히 새겨져 있었다.

“세상에, 이걸 어떻게…?”

검흔을 살핀 비터가 이제 막 모닥불가에 자리를 잡고 누운 카일을 바라보며 말했다. 비터 역시 용병으로 십수 년을 떠돌았지만 이렇게 길이와 깊이까지 동일한 검흔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아마도 첫 검식과 두 번째 검식의 동작과 힘, 절벽과의 간격까지 정확히 일치했다는 뜻이겠지.”

“그건…나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지?”

비터가 얼굴을 찌푸리며 마크를 돌아보았지만, 그 역시 굳은 얼굴로 검흔을 살필 뿐 엑스퍼트에 오를 수 있는 어떠한 단서도 찾지 못하고 있었다.

“단서를 찾을 수 없다면… 직접 부딪혀 봐야지.”

“무슨 소리야? 직접 부딪히겠다니?”

마크의 대답을 이해하지 못한 비터가 고개를 돌렸을 때, 비터는 마크가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스르릉-

“너…! 설마 카일을 따라 하겠다는 거냐?”

“다른 방법이 없잖아.”

마크가 비터를 밀어내고는, 조금 전 카일이 검술을 펼치며 바닥 깊숙이 새겨진 발자국 위에 올라섰다.

“휴….”

마크가 길게 숨을 늘어트리며 카일이 남겨 놓은 두 개의 검흔을 바라보았다.

“저건 단단한 화강석이다, 무턱대고 카일을 따라 했다간 검이 부러지고 말 거다.”

“나도 알아. 하지만 엑스퍼트에 오를 수 있다면 검이 부러지는 건 전혀 아깝지 않다.”

“검만 부러지는 게 아니잖아!”

비터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덕분에 각자 자리를 잡고 잠을 청하던 용병들의 시선까지 마크과 비터에게로 향했다.

“너도 다칠 수 있다. 정말 해야겠냐?”

“이번이 엑스퍼트에 오를 수 있는 마지막 기회다. 이건 네가 말한 거다.”

“그건 그렇지만….”

“정말 안 된다면 포기할 수 있다. 하지만 해보지 않고 포기할 수는 없어.”

마크가 비터를 향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젠장, 그렇게 말하면… 내가 널 말릴 수가 없잖아.”

비터가 마크를 향해 투덜거리더니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고맙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다치지나 마라!”

“알았다. 걱정 마라!”

마크가 비터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고개를 돌려 절벽에 남겨진 검흔을 한동안 미동도 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카일과 마찬가지로 한발을 앞으로 내디디며 절벽을 향해 검을 횡으로 내리그었다.

그그극-

마크의 검이 단단한 화강석을 긁으며 지나갔다.

텅-

화강암을 가르던 검이 마크의 손을 떠나 바닥으로 떨어졌다. 검이 화강석을 가르며 일어난 강한 반발력을 버티지 못하고 마크가 검을 놓치고 만 것이다.

“크윽-”

마크 짧은 신음과 함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다행히 상처는 없었지만, 화강암을 가를 때 느꼈던 강한 저항감과 반발력이 그대로 손바닥으로 전해져 왔다.

“마크! 괜찮아?”

비터가 황급히 다가와 물었다.

“난 괜찮다.”

마크가 아무렇지도 않게 바닥에 떨어진 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곤 절벽으로 다가가 검흔을 살폈다.

“음….”

자신이 남긴 검흔을 유심히 살핀 마크가 고개를 저었다. 카일의 검흔과 달리 자신이 남긴 검흔은 깊이도 얕았고 길이 역시 카일이 남긴 검흔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했다.

“그리고, 너무 거칠군.”

마크가 검흔을 살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다시 절벽을 마주 보고 섰다.

“이번엔 반드시….”

마크가 다시 횡으로 검을 그었다.

그그극-

“다시!”

또 다시 검을 놓친 마크가 고개를 흔들더니 검을 들어 다시 절벽을 향해 휘둘렀다.

그그극-

그렇게 정신없이 검을 휘두르길 수십, 수백 번. 처음 마크의 근성에 감탄하며 주변으로 모여들었던 용병들이 하나둘 돌아가 잠을 청했지만, 마크는 멈추지 않았다. 손바닥이 찢어져 핏물이 흘러나왔지만, 마크는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일어나 절벽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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