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2. 출정(3)
“지름길입니다. 골목을 지나면 서문 쪽에서 올라오는 용병단과 마주칠 수 있을 겁니다.”
비터와 마크는 복잡하고 좁은 골목길을 거침없이 지나쳐나갔다.
“이곳에 와본 적이 있나 보군요.”
“오래전 작은 의뢰를 맡은 적이 있습니다. 그때 잠시 여길 헤매며 고생을 했지요. 덕분에 이곳 지형은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렇군요.”
마크의 말에 멀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잠시 머뭇거리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정말 이번 전쟁에 참전을 할 생각입니까?”
“그럴 생각입니다. 카일에게도 허락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상대는 제국이지 않습니까?”
“어차피 가문이 있는 곳은 제국 동부입니다. 전쟁이 커진다고 해도 동부까지 번지지는 않을 겁니다.”
“그야 그렇긴 하지만….”
“어차피 제국이든 왕국이든 전쟁은 벌어졌을 겁니다.”
“무슨 뜻입니까?”
“왕국에서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제국에서 먼저 왕국을 공격했을 거란 뜻입니다. 저희가 왕국으로 넘어오기 전부터 전쟁에 대한 이야기는 제국 사교계에서 끊임없이 흘러나왔으니까요.”
“결국 누가 벌이든 전쟁은 일어났을 거란 말이군요.”
“네, 제국이든 왕국이든 그대로 두었다간 내부에서 먼저 폭발하고 말았을 겁니다. 어차피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전쟁이니 누구의 편에서 싸우든 큰 의미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귀족들이 벌이는 전쟁의 목적은 자신들에게 돌아올 이익이었다. 땅에 속한 영지민이나 농노들에겐 그 시작이 제국이 되었든 왕국이 되었든 크게 관심이 없었다. 그저 누가 자신들의 영주가 되어 얼마나 많은 세금을 걷어 갈지가 더 중요할 뿐이었다.
“멈춰라!”
막 골목길을 벗어난 비터의 앞을 기사들이 막아섰다. 아이언 용병대를 호위(감시)하던 화이트 베어 기사단이 갑자기 골목길에서 나타난 비터와 멀린을 경계하며 포위한 것이다.
“잠시만! 이들은 저희 아이언 용병대의 사람들입니다.”
마라스가 급히 달려 나와 소리쳤다.
“아이언 용병대?”
허크 단장이 앞으로 걸어 나왔다.
“이자들이 아이언 용병대란 말이냐?”
“그렇습니다.”
마라스의 말에 마크와 비터가 용병 패를 내밀었다. 두 사람 모두 이미 아이언 용병대 소속으로 용병 패를 교체한 뒤였고 터그 형제들 역시 용병 패가 있었기에 큰 문제는 없었다.
“자네들도 용병인가?”
“저흰 마일론 가문의 사람입니다.”
“마… 일론 가문?”
“그렇습니다. 남부 크레센트에 위치한 장원입니다. 단장님이 그곳에 가주이니 이들 역시 아이언 용병대 소속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닙니다.”
“남부?”
“그렇습니다.
“좋다. 같은 가문의 사람이라고 했으니 함께 움직이도록 하지. 물러서라!”
허크의 말에 기사단들이 검을 거두고 물러나자 자연스럽게 멀린 일행도 용병단에 섞여들었다.
“흥! 용케 도착했구나!”
툴린이 다가오는 멀린을 지켜보다 얼굴을 일그러트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하하, 그동안 잘 계셨습니까?”
“이런 망할 놈, 갑자기 일을 그렇게 떠넘기고 가면 어찌하느냐!”
툴린이 멀린을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았다.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놈은?”
툴린이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며 물었다.
“다행히 백작령은 무사히 벗어났지만 합류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겁니다.”
“그러게, 뭐라 했느냐? 아무리 괴물 같은 녀석이라도 근접 경호할 호위 기사는 있어야 한다고 하지 않았느냐!”
툴린이 얼굴을 찌푸리며 투덜거렸다.
“지금 그걸 탓해 뭘 하겠습니까? 일단은 무사히 돌아오기만을 바랄 수밖에요. 그리고 제가 부탁드린 건 어떻게 되었습니까?”
“일단 드워프들에게 부탁해 각인과 마법진을 새겨넣었다. 이제 네놈이 왔으니 활성화만 시키면 된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럼 일단 실험부터 한번 해보죠.”
멀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툴린의 옆에서 걷고있는 밀런에게로 향했다.
“왜… 날 보는 겁니까?”
멀린 곁의 세인을 힐끔거리던 밀런이 자신에게 쏟아지는 뜨거운 시선을 알아채곤 화들짝 놀라 뒤로 주춤 물러났다.
“잠시만 이리 오십시오.”
멀린의 손짓에 밀런이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멀린의 옆에 섰다.
“멍청한 녀석이 겁은 많아가지고, 똑바로 서지 못해!”
언제 마부석에서 내려왔는지 툴린이 한심한 표정으로 밀런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시작은 나부터다. 알지?”
“물론입니다.”
멀린과 툴린이 밀런의 등 위, 정확히는 흉갑 위에 손을 얹었다. 그리곤 천천히 마나를 활성화 시키기 시작했다.
웅… 파지직-
“크억-!”
밀런이 비명을 지르더니 그대로 풀썩 쓰러져 게거품을 물었다.
“이런… 너무 강했다.”
툴린이 놀란 듯 말했지만 잔뜩 말려 올라간 입술만 보아도 다분히 의도적인 행동이 분명했다.
“실수… 맞습니까?”
멀린이 황당한 표정으로 물었다. 마나 집적진 중 가장 간단한 마법진을 활성화하는 단순 작업이었다. 평생 마법진을 연구한 툴린이 실수했다고는 믿기지 않았다.
“커험, 실수다, 실수!”
툴린이 괜히 헛기침을 내뱉으며 쓰러진 밀런의 흉갑에 손을 올렸다.
웅-
또다시 낮은 진동이 울리자 멀린이 고개를 저으며 흉갑에 손을 올렸다.
“프래셔(pressure)”
우웅-
멀린의 목소리와 함께 다시 낮은 진동이 울리더니 이내 잠잠해 졌다.
“어떻습니까?”
“성공이다. 마나의 집적도 깔끔하고 마법도 완벽하게 작동한다.”
“다행이군요.”
멀린이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를 지었다.
“도대체 무슨 마법을 건 겁니까?”
옆에서 지켜보던 비터가 참지 못하고 물었다. 분명 마법을 사용한 것 같은데 도저히 알 길이 없었다.
“대단한 마법은 아닙니다.”
“맞다. 대단한 마법은 아니지만 아주 중요한 마법이기도 하지. 궁금하냐?”
툴린이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비터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클클, 걱정 마라. 이 녀석에게 잠깐 실수… 를 하긴 했지만 다시는 실수하지 않을 거다.”
“아, 아닙니다. 절대 안 궁금합니다.”
비터가 급히 뒤로 물러나려 했지만 멀린이 비터의 팔을 잡았다.
“그만하시죠. 이러다간 용병들 전부 도망만 다닐 겁니다.”
“칫, 멍청한 녀석들. 겁은 많아가지고.”
툴린이 툴툴거리며 물러나자 멀린이 마법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이건 프래셔 마법입니다. 일종의 압력 마법이죠. 흉갑 안쪽 공기 압력을 낮춰 외부 공기가 안으로 스미는 것을 막아주는 마법입니다. 지속성이 중요하기에 툴린 님께서 기초적인 마나 집적진을 그려, 마나석을 사용하지 않고도 착용자의 오러와 외부의 마나로 발현하게 만든 겁니다.”
“아!”
“그러니 너무 겁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멀린의 말에 그제야 비터는 툴린이 밀런을 상대로 장난을 쳤음을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온전히 안심할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언제 어느 때 또다시 장난기가 발동해 용병들을 상대로 장난을 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시간이 없으니 이동을 하면서 최대한 활성화를 시킬 겁니다. 그러니 용병들에게 미리 알려주십시오.”
멀린이 주변을 둘러싼 용병들을 돌아보며 말한 뒤 비터에게 미소를 지었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툴린 님!”
“클클, 자 그럼… 시작해 볼까?”
툴린이 마른 손을 비비며 천천히 비터를 향해 다가왔다.
* * *
“으악!”
죽은 듯이 누워있던 카일이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카일!”
“괜찮아요?”
비명 소리에 놀란 시안느와 이엘이 황급히 달려왔다.
“헉헉헉-!”
거친 숨을 내쉰 카일이 주변을 돌아보았다. 넓은 바위 공동과 붉게 타오르는 불꽃, 이곳이 어디인지는 어렵지 않게 확인할 수 있었다.
“왜… 제가 이곳에…?”
“그보다 먼저, 마스터에 오른 걸 축하해요.”
“네?”
이엘의 말에 카일이 깜짝 놀라 급히 몸을 살폈다. 이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몸과 팔에서 느껴지는 강대한 힘으로 분명 자신의 신체가 변화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건…!”
카일이 머리를 어루만졌다. 지금껏 느껴지지 않았던 막강한 기운이 머릿속에 마치 보석처럼 뭉쳐 황금빛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동안 카일이 생각했던 모든 예상을 뒤집는 전혀 새로운 순간이었다.
카일이 손을 뻗어 오러를 끌어올리는 순간 몸 안에 잠들어 있던 6개의 황금빛 열매에서 막대한 기운이 뿜어져 나와 확장된 마나 로드를 따라 손안에 뭉쳐 들기 시작했다.
“응?”
막 손안에 잡힐 듯 응축되던 기운이 갑자기 흩어지기 시작했다. 머릿속에 자리한 황금빛 보석에서 엄청난 흡입력이 일어나 응축되기 시작한 오러를 끌어당기더니 완전히 흡수해 버렸다.
‘뭔가… 잘못되었다.’
카일은 본능적으로 머릿속에 자리한 황금빛 보석이 본래 자신의 것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카일…?”
이엘이 걱정스런 얼굴로 카일을 불렀다.
“아무래도 누군가 장난을 친 것 같습니다.”
“네? 장난이라니요?”
“머릿속에 자리한 황금빛 보석이 오러를 흡수하며 성장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누가 제게 심어놓은 것 같아요. 소드 마스터의 경지 역시 정상적으로 이루어진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카일이 천천히 새벽 수련을 떠올렸다. 동결된 마나를 풀어내고자 태극권 수련 시 발생하는 강력한 압력을 이용한 것은 맞지만 높은 밀도의 마나를 흡수할 생각은 없었다. 카일 역시 암흑마기와 신성력의 폭주를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몸 안으로 마나가 급속히 유입되더니 우려했던 대로 마기와 신성력이 폭주를 시작했고, 머릿속에 숨어있던 황금빛 기운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리고는 이제 막 상급에 오른 카일의 경지를 단번에 소드 마스터까지 상승시키더니 이젠 황금빛 열매에서 생성된 오러까지도 끊임없이 끌어당기고 있었다.
“내가 바로 숙주란 말이군.”
카일이 고심 가득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가 이내 결론을 내렸는지 고개를 들었다.
“아무래도 사하와 에밀을 만나봐야겠습니다.”
“두 사람은 지금 먹을 걸 구하러 숲에 들어갔어요. 조금만 기다리면 돌아올 거예요.”
“아닙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습니다. 당장 만나봐야겠어요.”
“자, 잠깐!”
카일이 두 사람을 찾기 위해 당장이라도 밖으로 달려 나가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펄럭-
앉아있던 두 사람의 눈앞에서 몸을 감싸고 있던 피풍의가 미끄러지듯 아래로 뚝 떨어져 내렸다. 그리곤 바위굴 안을 대낮같이 밝히며 활활 타오르는 모닥불 아래 카일의 나신이 두 사람 눈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아악-!”
바로 눈앞에서 카일의 벌거벗은 신체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시안느의 입에서 뒤늦은 비명이 터져 나왔다. 시안느가 두 눈을 가렸다.
“꺄악-!”
이엘이 귓불까지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감추려는 듯 급히 고개를 돌렸다.
“으아악-!”
카일 역시 뒤늦게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급히 피풍의로 몸을 가렸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내가 왜…?”
“바디… 체인지가 일어나면서… 옷이 모두 바스러져 버렸어요…그래서 임시로…”
시안느가 차마 카일을 돌아보지 못하고 떠듬거리며 말했다.
“그럼… 다… 본 겁니까? 사하와 에밀도…?”
“….”
시안느는 차마 두 사람이 몸까지 주물럭거렸다고는 말할 수 없어 침묵을 지켰지만, 카일은 시안느와 이엘의 침묵이 긍정을 뜻하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제, 젠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