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1. 출정(2)
”빌어먹을 놈들! 여기까지 오라고 할 때는 언제고, 왜 우릴 못 들여보내겠다는 거야”
마부석에 앉아 두터운 로브를 깊게 뒤집어쓴 툴린이 굳게 닫힌 성문을 보며 분통을 터트렸다. 이제 막 겨울이 지났다고는 하지만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아직도 차갑고 매서워 용병들 모두 바람을 피해 성벽 아래 자리를 잡고 허락이 떨어질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려 보면 곧 오겠죠. 흐흐.”
툴린보다 먼저 욕 한 바가지를 쏟아냈을 밀런이 대수롭지 않은 듯 얼어붙은 차가운 바닥에 대충 자리를 잡고 앉아 말했다.
“젠장맞을 녀석 같으니라고, 그게 그리 좋으냐?”
“흐흐, 좋고 말고요. 귀족들도 구하기 힘든 운석으로 만든 것 아닙니까! 그것도 흉갑에다 검과 단검까지 풀세트로 말입니다. 아마 이것만 팔아도 평생 먹고살 겁니다.”
밀런이 입고 있는 강철 흉갑에 검과 단검은 아이언 용병단의 기본 무장으로, 모두 드워프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무구들 이었다.
“멍청한 녀석 같으니라고, 운석이 아니라 강철이라 몇 번을 말해야 하는 것이냐!”
툴린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강철이면 어떻고 운석이면 어떻습니까? 어차피 검을 보면 다들 운석으로 만든 것이라 믿을 겁니다. 그럼 그게 곧 운석이죠. 사람들이야 눈에 보이는 건 쉽게 믿으니까요.”
“허, 그놈 참, 그럼 그걸 가지고 도망이나 칠 것이지 왜 여기까지 따라왔느냐? 그것만 팔아도 평생 먹고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지 않았느냐?”
“그건…”
툴린의 말에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짓던 밀런이 히죽 웃었다.
“도망이라니… 제가 가긴 어딜 갑니까? 그냥 말이 그렇다는 거지 이걸 팔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정말이냐?”
툴린이 의심스러운 눈으로 밀런을 바라보았다.
“참나, 평생 먹고살 골드가 있으면 뭐 합니까? 지킬 힘이 없는데. 차라리 이번 전쟁에서 한몫 단단히 잡아 크레센트에 평생 눌러앉을 겁니다. 생각해보니 크레센트만큼 안전한 곳도 없을 것 같더군요.”
“그야 그렇긴 하지…!”
툴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역시 이미 아킨스 자작령에 숨겨 놓았던 실험실 집기와 서적들 모두를 크래센트로 이전한 뒤였다.
“그나저나, 카일은 괜찮은지 모르겠구나. 녀석이 무사해야 크레센트 장원도 유지될 수 있을 텐데….”
“그 괴물 같은 녀석을 뭐하러 걱정합니까? 알아서 잘 돌아올 텐데.”
따악-
마부석에 앉아있던 툴린의 지팡이가 허공을 날아 밀런의 머리통에 작렬했다.
“아악-!”
밀런이 머리통을 붙잡고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었다.
“망할 녀석아! 장원에서 살겠다는 녀석이 뭐! 장주에게 한다는 소리가, 괴물 같은 녀석!”
툴린이 손을 뻗자 바닥에 떨어져 있던 지팡이가 둥실 떠올라 툴린의 손으로 날아들었다. 툴린의 손에 끼워진 가는 실반지와 연동된 덕분이었다.
“빌어먹을 영감탱이 같으니라고! 지금 나랑 해보자는 거야!”
바닥을 뒹굴며 머리를 부여잡던 밀런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나 툴린을 노려보았다.
“뭐? 빌어먹을 영감탱이? 이런 망할 놈! 그래, 오늘 끝장을 보자! 이놈아!”
툴린이 지팡이를 들어 올리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또 시작이군요. 저렇게 하루도 쉬지 않고 싸우면서도 매일 붙어 있는 게 신기할 따름입니다.”
제이콥이 지팡이를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달려드는 툴린을 보다 고개를 저었다. 검사를 향해 지팡이를 휘두르는 툴린이나 마구잡이로 휘두르는 지팡이를 얻어맞고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는 밀런이나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광경임은 분명했다.
“하하! 난 그래도 툴린 님과 밀런 덕분에 원행이 지루하지 않아 좋았다네”
“그야 그렇긴 하죠.”
제이콥이 고개를 끄덕였다.
쿵-
커다란 성문 사이로 작은 쪽문이 열리며 낯익은 얼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테일런 님?”
가장 먼저 테일런을 알아본 제이콥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이콥.”
“오랜만에 뵙는군요.”
“그래… 오랜만이야. 얼굴도 밝아진 것 같고, 아이언 용병대의 생활이 제법 나쁘지 않나 보군.”
“하하, 아마도 그럴 겁니다. 처음엔 누군가의 밑에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니 항상 져왔던 무거운 짐이 사라져 있더군요. 그래서인지 지금은 아주 편합니다.”
“무거운 짐이라… 하긴 용병대장이란 자리가 그렇긴 하지.”
테일런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테일런 님도 오셨으니 성안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겁니까?”
“그렇네, 캐시언 백작께서 보증을 서주셨으니 안으로 들어가도 될 거야.”
“감사합니다.”
“감사할 일이 아니네, 당연한 일이지.”
“하하! 그렇군요. 그럼 전 용병대를 통솔해야 하니 그만 가보겠습니다.”
“그러게!”
고개를 끄덕인 테이런이 멀어져가는 제이콥을 잠시 바라보다 몸을 돌려 함께 온 기사에게 다가갔다.
“확인은 했나?”
“아이언 용병대가 확실합니다.”
“좋네, 신원을 확인했으니 통행을 허락하겠네. 단 저들이 문제를 일으키면 케시언 백작이 책임져야 할 거야!”
“걱정 마십시오. 저들이… 문제를 일으킬 일은 없을 겁니다.”
성벽 아래, 질서정연하게 서 있는 용병대를 바라보며 테일런이 말했다.
“과연 그럴까? 지금껏 수 많은 용병들을 보아왔지만, 그들은 항상 크고 작은 문제를 만들어 왔다네. 저들이라고 다를 것 같은가? 특히나 지금처럼 수백, 수천의 용병들이 모여있는 상황에서 말이야.”
“그건… 솔직히 말씀드리면, 규모가 큰 용병대일수록 용병대장이 용병대 전체를 장악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특히나 개인 성향이 강한 용병들이 모여있어 통제가 쉽지 않은 부분이 있음을 이해해 주십시오.”
“하하! 왠지 자네 말이 변명처럼 들리는군.”
“그렇게 생각하셔도 어쩔 수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용병이란 존재이니까요.”
태일런이 씁쓸하게 웃으며 말했다. 용병들 개개인으로 보면 일반 정예 병사들보다 월등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진형을 갖춘 병사들과의 전투에선 용병들이 쉽게 이기지 못했는데, 그것은 그만큼 용병들의 통제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때문에 대부분의 전투에서 용병들은 집단전보단 기습을 통한 난전을 선호했다.
“그럼 저들은 다르단 말인가? 용병들만 해도 3백에 가깝네. 자네의 말대로라면 저들이야말로 통제가 쉽지 않을 것 같은데?”
“물론 그렇게 생각하실 수 있지만, 저들은 좀 다릅니다. 혹 마라스 용병대라고 들어보셨습니까?”
“후작께서 마라스 용병대를 알아보라 지시하셨다곤 들었지만, 호위기사단에서 조사한 내용이라… 나는 그저 아이스 랜드에서 사냥을 하던 용병대라 들었을 뿐이네.”
“그렇습니다. 주로 아이스 트롤을 사냥했죠.”
“아이스 트롤이라… 쉽지 않은 선택을 했군.”
“그렇습니다. 그것도 단장을 제외한 전원이 실력이 비슷한 전역 병사 출신이면서 말입니다.”
“저, 전역 병사?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하지만 사실입니다. 집단 진형 하나로 아이스 트롤을 잡던 자들이니 상하 간 지휘체계는 말할 것도 없이 강력할 것입니다.”
“흠… 하긴 전역 병사 출신이라고 했으니 전혀 불가능하진 않겠군. 용병에 대한 통제력도 상당할 테고 말이야.”
“그렇습니다. 저들, 아이언 용병대의 전신이 바로 마라스 용병대입니다.”
“하하, 지금 날 놀리는 건가? 아이언 용병대는 전원이 소드 유저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러 하나 없던 마라스 용병대가 갑자기 전원 소드 유저가 되다니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저도 그 부분이 수상하긴 합니다만, 저들이 마라스 용병대의 전신임을 변하지 않습니다.”
테일런의 말에 기사가 잠시 고개를 끄덕이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만약 단 몇 달 만에 소드 유저를 대량으로 찍어냈다면 이는 보통 일이 아니었다. 전쟁은 물론, 어쩌면 앞으로 권력의 방향이 획기적으로 변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러고 보니 아직 통성명을 하지 않았군. 난 화이트 베어 기사단의 단장인 허크라 하네.”
“테일런 용병단의 테일러입니다.”
“테일런 용병단이라, 기억하고 있겠네, 원정에서 함께할 수 있으면 좋겠군.”
“저 역시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테일런이 허크 단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사이 제이콥과 마라스는 빠르게 용병들을 통솔해 성문 앞에 집결시켰다.
“성문을 열어라!”
그그그-
허크의 허락이 떨어지자 굳게 닫혀있던 성문 한쪽이 열리며 수레 마차 하나가 지나갈 정도의 길이 열렸다.
“길은 내가 안내하지.”
“감사합니다, 테일런 님.”
제이콥이 뒤를 돌아보며 크게 소리쳤다.
“출발!”
제이콥의 명에 따라 용병들이 천천히 후작성 안으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그와 같은 시각 일단의 사람들이 남문을 통해 후작성 안으로 들어섰다.
“드디어 도착했군요.”
멀린이 지친 표정으로 말했다. 벨하크와 대장장이들을 구해 곧장 왕성으로 향한 뒤, 드디어 미리 마련해둔 저택에 도착한 차였다. 멀린 일행은 이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한 뒤 대장장이들과 그들 가족만 따로 코퍼 용병대에 맡겨 크레센트로 내려보내고, 벨하크와 세인, 그리고 터그 형제들과 함께 왕성에서 용병대와 합류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바일에게서 이미 아이언 용병대가 크레센트를 떠나 북부로 향하고 있단 소식을 전해 듣고 급히 마파린 후작령으로 달려온 것이다.
“주변이 상당히 어수선합니다.”
터그가 주변을 돌아다니는 영지병들을 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병력으로 동요할 영지민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후작이 보낸 영지병들이었다.
“갑자기 수천에 이르는 병사들이 성안으로 진입했으니 영지민들이 놀라는 건 당연한 일이지. 오히려 이 정도면 동요가 적다고 볼 수 있다.”
주변을 돌아보던 벨하크의 말에 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멀린 님!”
그때 앞쪽에서 누군가 멀린을 부르며 달려왔다.
“마크! 비터!”
“늦지 않게 도착하셨군요.”
“저희를 기다리고 있었습니까?”
“바일 님께서 중간에 사람을 보내 알려주셔서, 저흰 본대보다 하루 일찍 성에 도착해 있었습니다. 본대도 지금 막 내성 쪽으로 향했으니 바로 합류할 수 있을 겁니다. 헌데 카일은 함께 오지 않았습니까?”
“카일 님은 동부에서 무사히 벗어나셨습니다. 아마도 따로 합류하셔야 할 겁니다.”
“휴! 다행이군요”
멀린의 말에 안도의 한숨을 내쉰 비터가 시선을 돌렸다.
“세인 경, 어디 다치신 곳은 없습니까?”
“전 괜찮아요. 걱정해줘서 고마워요.”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까딱인 세인이 비터에게서 곧장 시선을 돌려버렸다. 그런 세인의 모습에 시무룩하게 고개를 숙인 비터를 보며, 고개를 가로저은 마크가 멀린을 향해 말했다.
“바로 합류하시겠습니까? 왕자 일행은 아직 내성 밖에서 모여있습니다. 아마도 저희 아이언 용병대를 기다리는 것 같습니다.”
“우릴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흠… 혹 이유를 알고 있습니까?'
“아마도 카일의 신분 때문인 것 같지만… 정확하진 않습니다.
“그것 역시 일단 용병대에 합류한 후에나 알 수 있을 테니 서둘러야겠군요”
“저희가 안내하겠습니다.”
“부탁합니다.”
멀린의 말에 마크와 비터가 앞장서 길을 안내했다. 하루 일찍 성에 도착한 덕분인지 두 사람은 머뭇거림 없이 대로를 빠져나와 작은 골목길로 접어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