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5. 불안
날이 저물고 서서히 어둠이 밀려오자 터그가 마차를 세웠다.
“말도 지쳤고 날도 어두워 더 이상 갈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럼 오늘은 여기서 쉬었다 가죠.”
“알겠습니다.”
카일의 허락이 떨어지자 터그가 길 옆 넓게 펼쳐진 숲으로 마차를 이끌었다.
“가문비나무 숲이군요.”
이엘이 곧게 뻗은 나무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이곳에 와보셨습니까?”
“가끔 이곳에서 영주들이 사냥대회를 열었어요. 그때 오라버니를 따라 몇 번 와본 기억이 있어요.”
“그러고 보니 성에서 소영주를 보지 못했군요.”
“네. 오라버니께서는 지금 왕립아카데미에 있으니까요. 벌써 2년이 지났으니 내년이면 돌아오실 거예요.”
“어떤 분인지 궁금하군요.”
“사실 오라버니는… 기사라기보다는 전형적인 문관이라 보시면 돼요. 검술엔 전혀 재능이 없어 일찍 가문을 떠나 아카데미에 입학하셨죠.”
왕립 아카데미에서도 검술과 마법을 교육하긴 하지만, 보통은 귀족으로서 익혀야 할 교양 수준의 검술이나 방어 수단에 가까웠으며, 마법 수업 역시 기초적인 이론과 아티팩트, 스크롤을 사용하는 방식 정도만 진행될 뿐이었다. 아카데미의 실질적인 목적은 행정, 경제, 문화, 예술에 대한 전문적인 교육이었다. 때문에 전통적인 기사 가문들은 아카데미에서 교육을 받기보단 가정부를 통해 기본적인 예절과 행정을 배우고, 대부분의 시간 동안 가문의 검술을 수련했다. 반대로 전통적으로 문관을 배출한 가문은 반드시 아카데미를 통해 지식을 쌓으며 서로의 인맥과 유대를 강화했다.
“만약 오라버니가 계셨다면… 아마도 오늘 같은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예요.”
“백작과는 많이 다른 분인가 보군요.”
“책과 그림을 좋아하셨던 어머니를 닮았다고 했어요. 그래서인지 오라버니도 책과 그림을 좋아하세요.”
“그렇군요. 언젠가 꼭 한번 만나보고 싶군요.”
“카일을 만나면 오라버니도 좋아하실 거예요.”
카일의 말에 이엘이 환하게 웃음을 지었다. 카일과 이엘이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터그와 형제들은 바람을 막아주는 커다란 바위를 배후로 삼아 마차를 세워놓고, 순식간에 돌을 둘러 모닥불을 피웠다. 그사이 터그 형제 중 막내인 로닌이 커다란 사슴 한 마리를 잡아 와 통째로 모닥불 위에 올렸다. 성을 급히 빠져나오느라 노숙 준비를 전혀 하지 못한 것이다. 그나마 비축창고를 나오며 마차와 말에 밀을 가득 실어 왔기에 식량은 걱정할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카일 님, 멀린 마법사님과 합류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까?”
터그가 카일을 향해 물었다. 원 계획대로라면 코퍼 용병대가 외성 일대에서 혼란을 부추기는 사이 터그 형제기 고성에 갇혀있는 카일을 구해 남문 밖에서 대기 중인 멀린과 함께 천공탑으로 탈출하는 것이었다. 백작가의 기사단이 추적해 온다고 해도, 일단 크레센트 숲까지만 간다면 용병대와 함께 기사단을 상대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 우린 이대로 북진 합니다. 지금 멀린 님이나 코퍼 용병대와 합류하는 것은 모두를 위험하게 만드는 일입니다. 지금으로선 백작가와 최대한 멀어지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그럼 국경지대를 돌아 왕성으로 돌아가는 겁니까?”
“아닙니다. 우린 이대로 3왕자파의 원정군과 합류합니다. 국경을 따라 이동하면 원정군과 중간에 만날 수 있을 겁니다.”
카일의 말에 이엘과 시안느가 깜짝 놀라며 그를 바라보았다.
“잠깐! 참전이라니… 설마 제국 원정에 참전을 한단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우리 아이언 용병단은 3왕자파의 원정군과 함께 참전할 겁니다.”
“참전이라니, 왜 갑자기 그런 결정을 한 거죠? 더구나 3왕자파는 당신의 적이 아니었나요?”
“글쌔요. 모트 자작이나 조세츠 자작을 떠올리면 분명 좋은 관계라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적이라 단정할 수는 없는 관계죠. 그리고 이번 참전은 서로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습니다.”
“아!”
카일의 말에 이엘이 낮은 탄성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요. 카일에겐 정말 불가피한 선택이었어요.”
“불가피한 선택이라니, 아가씨께서 이유를 알고 계신 건가요?”
“카일이 3왕자파에 참전을 한 건 영지 때문이에요.”
“영지라면 다른 왕자들이 더 넓고 비옥한 영지를 가지고 있잖아요.”
“카일이 원하는 땅은 넓고 비옥한 토지가 아니에요. 3왕자의 수중에 떨어진 아킨스 영지, 그중에서도 크레센트 숲을 원하는 거죠.”
이엘의 말에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바로 알아보시는군요. 그렇습니다. 제가 원한 영지는 크레센트 숲입니다. 이미 참전의 대가로 숲 일대 토지의 소유권을 얻고 장원을 세울 수 있는 허락을 받았습니다.”
“벌써 말인가요?”
“케시언 백작이 제법 힘을 써준 것 같더군요”
“그만큼 그들이 간절하게 원하는 것을 카일이 가지고 있었다는 말이군요.”
“이번 원정을 함께 하다 보면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을 겁니다.”
“지금… 아가씨와 함께 이번 원정에 참전하겠단 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말도 안 돼요. 그런 위험한 곳에 어떻게 아가씨를 데려갈 생각을 하는 거죠? 절대 안 돼요.”
“원정이 위험한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번 원정엔 저와 용병대는 물론 멀린 님과 세인 경까지 모두 참전할 겁니다. 그럼 이곳에 남는다고 해도 이엘을 지켜줄 사람이 없지 않습니까.”
카일의 말에 시안느이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카일을 구해 백작 성을 떠나면서 이엘은 사실상 백작가와의 모든 인연을 끊었다. 카일이 이대로 전쟁터로 향하면 그녀를 옆에서 지켜줄 사람은 시안느 뿐이었다. 그녀가 살아있다는 사실이 드러나면 백작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그녀를 다시 백작가로 데려와 혼인을 성사시키려 할 것이다. 그러니 왕성에 있는 카일의 저택에선 더 이상 머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전쟁터로 아가씨를 데려갈 수는 없어요.”
“그럼… 방법은 한가지 뿐입니다.”
“그게 뭐죠?”
“샤론 마을로 가십시오. 지금 당장 우릴 도와 줄 수 있는 분은 아버지뿐입니다. 이대로 국경지대를 거쳐 북부 영지를 돌아가면 시간은 걸리겠지만, 추격자를 피해 안전하게 샤론 마을에 도착할 수 있을 겁니다.”
카일의 말에 시안느가 고개를 끄덕였다. 샤론 마을이라면 백작가에서도 이엘이 숨어 있다 생각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더구나 그곳엔 보일과 힐튼 남작이 버티고 있으니, 아무리 백작 가문이라도 쉽게 공략할 수는 없을 터였다.
“맞아요. 그곳이 있었군요.”
시안느가 안도한 얼굴로 이엘을 바라보았다. 그곳은 이엘도 한동안 머물렀던 곳이니 안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저도 카일을 따라 원정군에 합류하겠어요.”
“네? 무슨… 말도 안 돼요.”
이엘의 선언에 시안느가 깜짤 놀라 급히 이엘을 말렸다.
“시안느의 걱정은 알겠지만, 우리가 샤론 마을에 머물면 오히려 다핸 남작령 전체가 위험에 처할 거예요.”
“하지만 보일 님이라면…!”
“보일 님이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결국 다핸 남작령 전체를 지킬 수는 없어요. 더구나 백작가라면 보일 님을 직접 상대하지 않아도, 다핸 남작에게 압력을 가해 어렵지 않게 목적을 이룰 수 있을 거예요. 더구나 우릴 백작가에서만 찾을 거라 생각하기도 힘들어요.”
“설마… 트라발트 공작가에서도…!”
“맞아요. 공작가에서도 절 찾을 거예요. 그러니 이곳에 남아 있기보단 원정군에 합류하는 것이 오히려 백작가와 공작가 모두의 눈을 피할 가장 확실한 방법이 될 거예요. 그리고 전쟁 지역 전부가 위험한 곳은 아니잖아요.”
이엘이 미소를 지으며 시안느를 안심시켰다.
“물론 그렇습니다. 전장이라고 모두 위험한 곳은 아니죠.”
“그렇지만…!”
“이제 불필요한 말은 그만하도록 해요. 시안느가 아무리 절 설득하려 해도 이미 결정했으니까요.”
이엘이 화를 내듯 단호하게 자신의 말을 내뱉은 후 더 이상 반론은 듣지 않겠다는 듯 고개를 돌려 곧장 마차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아, 아가씨!”
갑작스런 이엘의 태도에 시안느가 급히 일어나 뒤를 쫓았다. 언제나 침착하게 어려운 상황을 해결해가던 이엘이기에, 시안느로서는 이런 모습이 당황스럽기 그지없었다.
“아가씨…! 괜찮아요?”
시안느가 마차 안에 앉아 고개를 숙인 이엘을 보며 물었다.
“미안해요. 시안느에게 화를 내서.”
“아닙니다.”
시안느가 고개를 저었다.
“맞아요. 전장은 위험한 곳이에요. 시안느의 말대로 샤론 마을에서 카일을 기다리는 것이 더 안전하겠죠. 더구나 날이 풀리면 곧 원정대가 소집될 테니 아무리 공작가라도 보일 님과 힐튼 남작이 계시는 샤론 마을은 공격할 수 없을 거예요. 자칫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을 테니 말이죠.”
“그럼… 왜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카일을 따라가려는 거죠.”
“불안하니까요.”
“네?”
항상 당당하던 이엘의 갑작스런 말에 시안느가 당황해하며 되물었다.
“시안느는 이 전쟁이 언제 끝날 거라 생각하나요?”
“…그건”
이엘의 물음은 시안느가 지금껏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였다. 영애의 호위 기사인 그녀로서 전쟁은 그저 먼 남의 이야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1년? 2년? 아니 어쩌면 10년이 걸려도 끝나지 않을 대전쟁이 될 수도 있어요. 만약 그때까지 전쟁이 끝나지 않는다면 그는 날 잊지 않고 기억해 줄 수 있을까요.”
몇 년, 아니 몇 달도 긴 시간이다. 하물며 십수 년이란 긴 세월 동안 떨어져 지낸다면 이엘의 말대로 카일이 그녀들을 잊고 살아갈지 몰랐다.
“전 이제 동부의 맹주인 그린넨 백작의 영애가 아니에요. 오히려 수년 동안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든 원수 집안의 여인일 뿐이에요. 그가 과연 날 잊지 않을까요. 어쩌면 목숨을 건 수많은 전투에서 자신을 이렇게 만든 저와 백작가를 원망하겠죠.”
“아니, 그럴 리가 없어요. 카일은 절대 아가씨를 원망하지 않을 거예요.”
“그럴까요?”
이엘이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힘든 일을 여럿 겪어서인지 오늘따라 너무 생각이 많으세요. 지금은 복잡한 생각보단 단순한 믿음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니 잠시 모든 생각을 잊고 잠을 청해보세요. 날이 밝으면 모든 고민이 사라질 거예요.”
“그럴까요….”
이엘의 물음에 시안느가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밤새 지켜드릴 테니 오늘은 편히 주무세요.”
“고마워요, 시안느. 이렇게 나와 함께 해줘서.”
“전 아가씨께 충성을 맹세한 호위 기사입니다. 옆에서 지켜드리는 건 당연한 제 소임인걸요.”
시안느가 이엘의 손을 잡으며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 이엘이 깊은 잠에 빠져들고 있을 때, 가문비 숲 외곽을 따라 말을 탄 일단의 무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무려 30여 기로 이루어진 용병무리였다.
“부단장님! 전방에 불빛이 있습니다.”
“이런 겨울밤에 야영을 하는 사람이 있었군.”
“어찌할까요?”
탐욕스런 눈빛을 번들거리며 다가온 용병이 물었다.
“백작령에 서둘러 가야 되긴 하지만, 이미 날도 저물었으니 잠시 지친 몸을 쉬었다 가는 것도 좋겠지”
부단장이라 불린 사내가 얼굴 가득 여유로운 미소를 지으며 불안한 듯 흔들리는 불빛을 바라보았다.
“어디 어떤 녀석들이 겁 없이 야영을 즐기는지 가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