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254화 (254/404)

254. 가주

스악-

바람을 가르는 섬뜩한 소리와 함께, 흑기사를 향해 맹렬하게 달려들던 벨로시 자작이 걸음을 멈췄다.

“피했는데….”

벨로시 자작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며 흑기사의 대검을 바라보았다. 사선을 그리며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 대검을 피했다고 생각한 순간, 극심한 통증이 전신을 강타했기 때문이었다.

“크아악-!”

푸확-

고통스런 비명을 토하던 자작의 몸이 사선으로 갈라지며 바닥으로 쓰러져다. 상급 엑스퍼트이자 대 공작가의 기사단장으로서 처참한 최후가 아닐 수 없었다.

“다, 단장님!”

“이럴 수가… 단장님께서!”

단장의 비참한 죽음으로 한순간 공황 상태에 빠져버린 기사단의 얼굴에 차츰 분노가 차올랐다.

“죽여!”

낮은 목소리를 따라, 마치 한 몸이 된 듯 기사단 전체가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흑기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화르륵-

순간 미동도 없이 무심히 서 있던 흑기사의 대검에서 칠흑 같은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와 대검을 잠식하기 시작했다.

“오, 오러 블레이드… 안돼!”

펠론 자작이 흑기사의 대검을 보며 급히 소리쳤다. 상대는 소드마스터! 아무리 공작가의 기사단이 강하다고 해도 상급 엑스퍼트인 벨로시 자작까지 죽은 이상 흑기사의 오러 블레이드를 막아낼 방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스아악-

기사단의 검이 도저히 막을 수 없을 만큼 변칙적으로 찔러 들어가던 순간, 흑기사의 오러 블레이드가 마치 검고 아름다운 죽음의 띠를 그리듯 아름다운 곡선을 보이며 휘둘러졌다.

푸화악-

마치 아름다운 불꽃에 취해 맹렬하게 달려드는 불나방처럼, 공작가 기사 수십의 몸이 죽음의 검은 띠에 갇혀 사지가 갈라지며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죽음의 순간까지 누구 하나 고통스런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당사자조차 어떻게 죽었는지 모를 정도로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기 때문이었다.

“비, 빌어먹을!”

팰론 자작의 얼굴이 암울하게 굳었다. 백작가를 정식으로 방문했던 공작가의 기사단, 그중에서도 가장 정예기사단이라 할 수 있는 호위기사단과 상급 엑스퍼트인 단장 벨로시 자작까지 전멸하고 만 것이다. 더 큰 문제는 그들이 백작가와의 혼인동맹 협상을 위해 찾아온 협상단이란 거였다. 백작가로서는 그들의 생명과 안전을 책임질 의무가 있었다. 물론 벨로시 자작이 먼저 흑기사의 처리를 제안하고 나섰다지만, 문제는 이를 입증해줄 벨로시 자작과 기사단 전체가 전멸했다는 사실이었다. 공작이 이를 문제를 삼을 경우 백작가로서는 고스란히 그 책임을 떠안을 수밖에는 없었다.

“고, 공작이 가만있지는 않을 겁니다.”

“지금 공작 따위가 문젠가!”

“네?”

“저 괴물을 막지 못하면… 그린넨 백작가는 끝이다.”

팰론 자작이 대검을 등 뒤로 비끄러맨 뒤 방패를 집어 든 흑기사를 복잡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리곤 이내 결심했는지 내성을 향해 걸어가는 흑기사를 향해 달려갔다.

“멈춰라!”

펠론 자작이 양팔을 벌린 채 흑기사의 앞을 막아섰다.

“나를 알아보겠나!”

펠론 자작이 쩌렁쩌렁하게 소리치자, 흑기사는 앞을 막아선 펠론 자작을 향해 거대한 방패를 무심히 높게 들어 올렸다. 앞서 기사들과 같이 앞을 막아선 펠론 자작을 압살하려는 것이다.

“정말 날 모르겠나!”

펠론 자작이 다시 한번 소리쳤지만, 그땐 이미 흑기사의 방패가 자작의 머리 위로 떨어진 뒤였다.

삐이-

그때였다. 어디선가 들려온 날카로운 피리 소리와 함께 펠론 자작에게 떨어지던 방패가 멈춰 섰다. 거대한 방패가 떨어져 내리며 생긴 풍압으로 인해 자작의 머리가 찢어지며 붉은 핏물이 얼굴 위로 흘러내렸다.

“자네!”

펠론 자작이 멈춰선 방패 앞에서 흔들리는 눈으로 흑기사를 보았다.

하지만 자작을 내려다보는 흑기사의 눈동자엔 어떠한 감정도 담겨있지 않았다. 그는 그대로 뒤돌아 왔던 길을 되돌아 나갔다.

“괜찮으십니까?”

부관이 급히 자작에게 달려와 물었다. 펠론 자작은 부관의 손을 뿌리치며 멀어져 가는 흑기사를 바라보았다.

“흑기사를 향한 일체의 공격을 금한다. 즉시 전 기사단과 북문을 수비하는 경비 기사단에게 알려라!”

“네? …아, 알겠습니다.”

자작의 말에 부관이 서둘러 달려 나갔다.

“흑기사… 정말 자네가 아니란 말인가?”

펠론 자작이 미간을 찌푸리며 점점 사라져가는 흑기사를 바라보았다.

* * *

“사라졌습니다.”

“뭐!”

지붕 위에 앉아 흑기사와 기사들의 전투를 구경하던 사하가 얼굴을 찌푸리며 10호를 돌아보았다.

“정말? 확실해? 분명 여기에 있었단 말이야!”

“정말입니다. 동쪽 고성 안을 샅샅이 뒤졌지만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습니다. 조금 전 일어난 폭발도 그렇고, 백작가의 기사들까지 주변 수색을 강화하는 걸 보면 아무래도 탈출한 것 같습니다.”

“탈출? 하, 기껏 구하러 왔더니… 사라져 버렸군.”

“어쩌겠습니까? 이미 탈출했다니 그만 돌아가시는 것이….”

“안돼! 이번엔 무슨 일이 있어도 그 녀석을 붙잡아야 해!”

“하지만 녀석은 2호 님도 붙잡지 못한 녀석이라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도 무조건 붙잡아야 해!”

사하가 화난 얼굴로 소리쳤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카일의 행방을 찾아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 일단 2호 님은 그만 물러나게 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저러다 백작 가문이 끝장나게 생겼습니다.”

“칫, 주제도 모르고 감히 내걸 탐했으니 당해도 싸!”

“그럼 제국과의 전쟁은 어쩌시고요. 그린넨 백작가는 동부를 지키는 변경백입니다. 백작가가 멸문하는 순간 왕국의 동부가 혼란에 빠질 겁니다. 그걸 가만히 두고 볼 제국도 아니지요.”

10호의 말에 사하가 얼굴을 찌푸리면서도 어쩔 수 없는지 작은 피리를 꺼내 힘껏 불었다.

피익-

날카롭고 가는 피리 소리가 넓게 져나가자 흑기사가 몸을 돌려 사하가 앉아있는 지붕을 한차례 바라보더니 천천히 몸을 돌려 성을 빠져나갔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사하가 돌연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로 가실지 생각이 나셨습니까?”

갑자기 밝아진 사하의 표정에 10호가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쟤들이 저기에 있네?”

“네?”

“저기 쟤들 말이야!”

사하가 로브를 깊게 눌러쓴 채 주변을 살피며 걸어가는 사내들을 가리켰다.

“아시는 사람입니까?”

“물론 잘 알지!”

사하가 웃으며 지붕 위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헉, 아가씨!”

10호가 깜짝 놀라며 급히 지붕을 박차고 뛰어올라 건너편 건물을 딛고 바닥에 착지했다. 하지만 정작 거칠게 뛰어내린 사하는 가벼운 깃털처럼 느릿느릿하게 내려와 부드럽게 착지했다.

“그럼 가볼까요?”

“도대체 저자가 누굽니까?”

10호가 멀어져 가는 사내를 가리키며 물었다.

“우릴 카일에게 데려다줄 소중한 안내자.”

사하가 좁은 골목 사이로 사라져 가는 사내의 뒤를 쫓으며 말했다.

* * *

“지금… 이엘이 살아 있다고 했느냐?”

무너져 내린 건물 잔해를 바라보던 백작이 복잡한 감정에 휩싸여 흔들리는 눈으로 자작을 바라보았다.

“포위된 고성을 흔적도 남기지 않고 빠져나갔습니다. 비밀통로를 알고 있는 이엘의 도움 없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더구나 비밀통로와 연결된 창고까지 폭발했으니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펠론 자작의 말에 백작이 깊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숙였다. 죽었다고만 생각했던 이엘이 살아 있단 사실에 기쁨이 밀려왔지만, 한편으론 제 뜻을 거역하고 가문을 배신한 그녀의 행동에 분노도 치밀어 올랐다.

“내 선택이 정말 잘못되었느냐? 녀석이 스스로 죽음을 위장할 정도로 말이다.”

“형님….”

“이엘을 속이고 이용했다고 해도, 결국 이 모든 것이 가문과 그 녀석을 위한 고뇌의 결단이었다. 녀석에게 최고의 가문과 혼인할 기회를 준 것이다. 헌데 왜 이 모든 것을 포기하려 드는가! 정녕 내 선택이 잘못된 것이냐? 말해 보거라!”

백작이 충혈된 눈으로 물어오자 자작이 착찹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휴, 어떤 대답을 원하십니까? 대 그린넨 백작가의 가주를 위한 대답? 아니면 한 아이의 아비로서의 대답을 원하십니까?”

자작의 물음에 백작이 고개를 들었다.

“…두 대답이 다르단 말이냐?”

“대 그린넨 백작가의 가주로서, 냉정하게 판단해 본다면 형님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분명 이번 혼인동맹으로 가문은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럼… 한 아이의 아비로선 어떠냐?”

“꼭 듣고 싶으십니까?”

“말해 보거라!”

“최악입니다.”

“…최악? 내가 말이냐?”

백작이 충격을 받은 듯 입술을 떨었다.

“이엘은 이미 가문을 위해 죽음을 불사했고 큰 희생을 치렀습니다.”

“하지만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녀석도 그때의 일은 거론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마일론 남작 건은 철저히 이엘을 기만하고 이용한 행위였습니다.”

“그것 역시 녀석과 가문을 위한 일이었다.”

“아니, 그렇지 않습니다. 오직 가문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이엘을 위한다는 말은 그저 형님 스스로 만든 명분일 뿐입니다. 정말 이 모든 행위가 이엘을 위한 것이었다 생각하시는 겁니까? 정말 그런 마음이었다면 최소한 마일론 남작에 대한 결정권은 녀석에게 일임했어야 했습니다.”

“그건…!”

“이미 형님도 알고 계십니다. 지금까지 스스로 외면하고 계셨을 뿐, 누구보다 이엘에게 깊은 애정을 가진 형님께서 이 같은 이치를 모르실 리가 없지요.”

“….”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습니다. 이미 공작가와 혼인동맹을 결정하셨고 돌이키기엔 너무 늦었습니다. 공작가의 기사단이 가문의 적을 상대로 맹렬하게 싸우다 전멸했습니다. 이젠 정말 가문의 이익이 아니라 생존을 위해서라도 이엘을 반드시 공작가로 보낼 수밖에 없습니다.”

백작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그렇다. 그는 아비가 아닌 한 가문의 가주로서 결정을 내렸고 이젠 돌이키기엔 너무 많은 희생과 피해를 보았다. 너무 멀리까지 와 버린 것이다.

“하아! 결국 녀석에게 또 한 번 큰 아픔과 시련을 줄 수밖에 없단 말인가?”

백작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자작을 바라보았다.

“펠론 자작! 와이번 나이트는 물론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전력을 동원해 이엘을 데려오게!”

“알겠습니다.”

“잊지 말게. 내 앞에 데려올 사람은 오직 이엘 한 명뿐이야! 알겠나!”

백작의 말에 펠론 자작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엘이 혼인을 피하기 위해 스스로 죽음을 위장하고 남작을 구해 영지를 탈출했단 이야기가 공작가로 전해진다면, 공작가가 혼인 자체를 무효로 만들어 버릴 수 있었다. 백작가의 입장에선 최악의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걱정 마십시오. 이번 일은 세상 누구도 알지 못하게 될 겁니다.”

“자네만 믿겠네!”

백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힘없이 몸을 돌려 집무실로 향했다. 이틀에 걸쳐 엄청난 일을 겪은 탓에 잠시도 쉴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급한 것은 벨로시 자작과 기사단의 죽음을 공작가에 적극적으로 해명하고 적절한 보상을 준비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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