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7.동부로(3)
“당신에게 정식으로 도전하겠소!”
제이콥의 말이 끝나는 순간 앞서가던 카일의 신형이 흐릿한 잔상을 남기며 사라졌다가 제이콥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도전을 받아들이지!”
카일이 환하게 미소를 지으며 제이콥의 복부에 향해 청백색으로 물든 주먹을 꽂아 넣었다.
콰앙-
“커억-!”
카일의 주먹에 얻어맞은 제이콥이 피를 토하며 그대로 뒤로 날아가더니 토벽에 처박혀 버렸다.
그 모습을 경악에 찬 얼굴로 바라보던 펠페츠가 자신을 응시하는 카일의 뜨거운 시선에 급히 고개를 숙였다. 이제야 저 어린 남작의 실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갑시다.”
카일이 다시 정문으로 들어서자 제이콥과의 결투를 구경하기 위해 모였던 용병들이 마차가 지나갈 수 있도록 황급히 길을 열며 물러났다.
“누추하지만 이곳이 제가 머무는 저택입니다.”
마차에서 내려선 케시언 백작이 주변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만하면 제법 훌륭하군요.”
“감사합니다.”
카일이 고개를 숙이며 건물 안 응접실로 백작을 안내했다. 이제 막 수리를 마친 작은 응접실이라 단출한 모습이었지만 백작의 얼굴엔 여전히 미소가 어려있었다.
“캐닙트 차입니다.”
카일이 백작에게 찻잔을 내밀었다.
“오호! 이건 도자기가 아닌가? 구하기 힘든 물건을 가지고 있었군.”
백작이 찻잔을 어루만지며 눈을 빛냈지만 카일은 그저 미소만 지으며 차를 음미할 뿐이었다.
“휴, 역시 답답한 건 싫어”
아무 말 없이 차만 비워내는 카일의 모습에 케시언 백작이 결국 먼저 손을 들었다. 지금 상황이 급한 건 백작이지 카일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처음 계획대로 당장 병력을 동원해 마라스는 물론 카일까지 붙잡고 싶었지만 불가능했다. 왕성 안에서 스파더 가문의 후계자인 카일에게 위해를 가했다간 붉은 거미들 전체를 적으로 돌려야 했다. 아무리 3 왕자를 뒤에 두고 있는 케시언 백작이라 해도 무사하진 못할 터였다.
“어쩔 수 없지. 급한 건 이쪽이니….”
백작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곤 카일에게 왕립중앙은행의 인장이 선명한 작은 동화를 내밀었다.
“마라스 용병단과 계약을 하고 싶네!”
“죄송한 말씀이지만 용병단은 당분간 의뢰를 받지 않을 생각입니다.”
“이유가 뭔가? 설마 모트 자작의 일 때문이라면…?”
“모트 자작께 무슨 일이 있습니까?”
카일이 담담하게 케시언 백작을 보며 물었다.
“설마… 모트 자작의 죽음과 관련이 없다고 말할 생각인가?”
“모트 자작이 죽었다니… 안타까운 일이군요. 하지만 전 모르는 일입니다.”
카일의 말에 케시언 백작이 얼굴을 찌푸렸다. 카일이 모르쇠 전략으로 나온다면 증거가 없는 케시언 백작으로서는 더는 압박할 수가 없었다.
“저희 용병단은 최근 제이콥 용병대와 통합하여 용병대를 재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당분간은 움직일 수 없습니다.”
“재편이야 얼마든지 늦출 수 있는 것 아닌가? 골드는 원하는 만큼 주겠네!”
“이제 보니 보통 임무가 아닌가 보군요.”
카일의 말에 케시언이 잠시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비밀을 지켜주겠다 맹세할 수 있나?”
“…알겠습니다. 맹세하죠.”
“좋네, 자넬 믿고 말을 하지!”
케시언 백작이 무겁게 입을 열자 그간 담담했던 카일의 표정이 점차 일그러져 갔다.
“미쳤군요!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합니까? 자칫 다 죽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성공하면 엄청난 전과를 올릴 수 있지! 우린 이번 작전을 반드시 성공시킬 작정이네! 그러기 위해선 마라스 용병대의 힘이 절실하지!”
“제가 이 작전에 동의할 것 같습니까?”
“위험 부담은 있지만 절대 불가능하진 않아! 이미 오랜 문헌을 통해 확인했다네!”
확신에 찬 캐시언 백작의 말에 카일의 눈빛이 흔들렸다. 확실히 성공만 한다면 그야말로 제국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것이다.
“좋습니다. 일단 마라스 부대장과 잠시 상의를 해 보겠습니다. 괜찮겠습니까?”
“어차피 이 작전엔 마라스의 도움이 필요하네! 비밀만 지켜준다면 얼마든지.”
케시언 백작의 승낙이 떨어지자 카일은 곧장 응접실을 벗어나 마라스에게로 향했다.
“어떤가?”
카일의 말에 마라스가 깊은 고민에 빠진 듯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이내 놀라운 대답을 내어놓았다.
“희생이 따르긴 하겠지만 가능합니다.”
“정말 가능하단 말인가?”
“확인이 필요하긴 하지만… 예. 가능합니다.”
마라스의 말에 이번엔 카일이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이번 의뢰를 맡으실 생각입니까?”
“불가능하다면 모르겠지만, 가능하다면… 어쩌면 원하던 것을 3왕자에게서 얻을 수 있을지 몰라!”
“원하던 것이 있으셨습니까?”
마라스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궁금한가?”
카일이 미소를 지으며 되물었다.
“궁금하긴 하지만 불편하시면 굳이….”
“불편할 것 없네. 내가 원하는 건 용병대가 마음 놓고 머물 수 있는 땅이야. 마침 적당한 곳이 3왕자 수중에 있거든.”
카일의 말에 마라스의 얼굴이 굳어졌다. 위험한 일이긴 하지만… 카일의 말처럼 용병대가 자리를 잡고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살아갈 땅만 얻을 수 있다면 이 정도 위험쯤은 감당할 수 있었다.
더구나 카일은 남작위를 가진 귀족이니, 공을 세워 영주가 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해 보겠습니다.”
“정말 괜찮을까? 희생이 많을 거야.”
“용병이 된 이상 희생은 감수해야겠죠.”
마라스의 말에 카일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그럼 이번 일을 맡기로 하지.”
카일이 드디어 결단을 내렸는지 자리에서 일어났다.
“함께 가겠나?”
“물론입니다. 저도 이번 계획을 짰다는 백작을 만나보고 싶습니다.”
“좋아! 그럼 함께 가지.”
카일이 서둘러 응접실로 향하자 마라스가 눈을 빛내며 카일의 뒤를 바짝 쫓았다.
* * *
어둠이 내려앉은 깊은 밤하늘, 지상으로부터 떠오른 한줄기 거대한 그림자가 두텁게 내려앉은 구름을 뚫고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와아!”
코끝을 애이는 차가운 바람을 맞으면서도 놀랍고도 감동적인 기분에 브린이 힘껏 소리치며 두손을 하늘 높이 치켜들었다.
“미친놈!”
한껏 들뜬 브린의 모습을 한심한 듯 바라보던 버크가 차갑게 스며드는 바람을 피해 털옷을 더욱 여미며 고개를 돌렸다.
“내가… 블랙와이번을 타고있다니…. 지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다!”
“정신차려요.”
버크가 정신줄을 놓은 듯 중얼거리는 아덱을 흔들며 소리쳤다. 와이번에 몸을 실을 때부터 제정신이 아니었던 아덱이 이젠 헛소리까지 지껄이고 있었다.
“나, 놔둬라! 녀석, 펴, 평생의… 소원이 와이번을 타보는 거였다. 제정신일 리가 없지.”
“그런데… 형님, 괜찮습니까?”
버크가 아튜를 걱정스럽게 바라보며 물었다.
“넌 지금… 내가 괜찮아 보이냐?”
야튜가 최대한 태연한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하지만 창백한 얼굴과 함께 부들부들 떨며 차가운 바람에도 연신 식은땀을 흘려대는 야튜가 정상일 리 없었다.
“곧 죽을 것 같은데요.”
“비, 빌어먹을…. 말좀 시키지 마라! 정말 죽을 것 같다.”
“그러게, 제가 남아 계시라고 했잖아요.”
“나 혼자 남아서 뭘 하라는 거냐? 그 녀석만 보면 심란하기만 하지!”
야튜가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밀런 때문입니까?”
“망할 놈, 엑스퍼트에 올랐다고 아주 기고만장해서는….”
야투가 투덜거리며 힘없이 말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른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대부분의 시간을 검술에 매진하며 땀을 흘리던 야튜와는 대조적인 모습이었다.
“너무 실망하지 마십시오. 형님도 곧 엑스퍼트에 오를 수 있을 겁니다.”
“나도 녀석이 피나는 노력으로 엑스퍼트에 올랐다면 얼마든지 축하해 줄 수 있다. 하지만 녀석은….”
야튜가 고개를 저었다. 녀석이 하는 일이라고는 하루 종일 카일의 뒤를 쫓거나 루트와 티격태격하며 싸우는 것뿐, 검을 들고 수련하는 모습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한 수 아래로 보고 있던 녀석이 어느 날 갑자기 엑스퍼트에 오른 것이다. 그것도 순수한 실력이 아닌 인위적인 방법으로 말이다.
밀런뿐만이 아니었다.
마크와 비터 역시 카일과의 인연으로 새롭게 엑스퍼트에 올라, 모든 걸 잊고 검술을 수련에 박차를 가하고 있어 이번 원행에도 참여하지 않은 것이다.
“밀런은 그래도 나은 편이죠. 수련이 부족해서 그렇지 핀크 단장으로부터 제대로 된 검술을 전수받았잖아요.”
“그야 그렇긴 하지만….”
“그보다 지금 용병들이 익히는 검술, 보셨어요?”
“카일이 용병들에게 개방한 크루트 검술 말이냐?”
“네!”
버크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나도 알고 있다. 연무장에서 아침마다 수련 중이라 나도 몇 번 따라 한 적은 있다만, 단순하기만 한 검술이었다.”
야튜가 용병들이 수련 중인 검술을 떠올리며 말했다. 카일이 전수한 크루트 검술은 단순하면서도 검에 힘을 실어 적을 베고 찌를 수 있는, 기본에 충실한 훌륭한 초급 검술이었다.
최근 마라스 용병대와 제이콥 용병대가 새롭게 아이언 용병대로 통합되면서 용병대 전체가 반드시 익혀야 할 기본 검술이 되었다. 때문에 제이콥 용병대 출신의 용병들도 새롭게 검술을 익히고 있었다.
“단순하고 단조로운 검술이긴 한데… 상대가 소드 유저라면 다르더군요.”
“무슨 뜻이냐?”
야튜의 물음에 바크가 허리에서 검을 뽑아 건넸다.
“보세요. 어제 파코와 대결 이후 남은 흔적입니다. 처음엔 그냥 장난으로 시작했는데… 제가 질 뻔했습니다.”
“…파코에게 말이냐? 그 녀석, 소드유저가 된 게 고작 보름 전인데?”
야튜가 깜짝놀라 급히 버크가 내민 검을 살폈다. 검 여기저기에는 이가 나가고 깨어진 흔적들이 여실히 드러나 있었다. 그만큼 파코의 오러가 강력하다는 뜻이었다.
“이게 파코와의 대결로 남은 흔적이란 말이냐?”
“네, 엑스퍼트보단 못하지만 소드 유저들이 일대일로 감당하긴 벅찬 상대였어요. 그나마 검술이 정직하고 경험이 부족해 겨우 이기긴 했지만, 다음번엔 장담하기 힘들어요.”
“대단하군, 도대체 어떤 연공법을 익힌 거지?”
“밤의 숨결!”
그때였다.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즐기고 있던 브린이 야투의 옆으로 빠짝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밤의 숨결이면 서북부 세실 지역에서 난다는 고급 술 아니야?“
“아니, 마나연공법의 이름이 밤의 숨결이랍니다.”
“넌 도대체 그런 걸 어떻게 안 거냐? 난 아무리 물어도 가르쳐 주질 않던데?”
브린의 말에 버크가 깜짝 놀란 얼굴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야… 당연히 툴린 님에게 직접 물었지. 순순히 알려 주시던데.”
브린이 씨익 웃으며 말을 이었다.
“나도 몇 녀석과 붙어 봤는데, 모두 파코란 녀석처럼 대단한 건 아니었어! 아마 십인장 이하면 한둘 정도는 감당할 수 있을 거야! 셋은 좀 어렵고.”
“직급에 맞춰 개방된 마나연공법의 수준이 다르다는 말이군.”
야튜가 고개를 끄덕였다. 규율과 직급이 존재하는 용병대에서 직급에 따라 연공법에 차이를 두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놀랍군, 말단 용병들에게까지 마나연공법을 개방하다니. 다른 용병대라면 상상도 못 할 일인데 말이야!”
“그보단 어떻게 소드유저를 이렇게 빠르게, 그리고 많이 만들어 냈는지 그게 더 신기한 노릇이지.”
“그야 카일 때문이겠지! 소드유저를 엑스퍼트로 만드는 능력이라면 소드유저 쯤이야 식은 스프 먹기보다 쉬울걸!”
야튜의 말에 버크과 브린이 카일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이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란 생각이 든 것이다.
“잠시 쉬었다 가겠습니다. 꽉 잡으세요.”
“헉!”
“앗!”
카일의 커다란 등을 멍하니 바라보던 브린과 버크가 갑작스러운 카일의 외침에 깜짝 놀라 허둥지둥 안전줄을 붙잡았다.
“내려갑니다.”
카일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블랙와이번 시카니스가 두꺼운 구름을 뚫고 아래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 뒤를 두 마리의 금빛 골드 와이번이 바짝 뒤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