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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용병라이더-236화 (236/404)

236.동부로(2)

”다시 생각해 주십시오.”

바일과의 만남을 뒤로하고 다시 자택으로 돌아오는 길, 깊은 생각에 잠겨있던 마라스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

“저장된 브랜디의 양이 상당합니다. 더구나 거래량만 해도 용병대의 한해 수입을 몇 배나 웃돌 정도로 큰 사업입니다. 도저히 제가 감당할 수준이 아닙니다.”

마라스의 말에 카일이 묵묵히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곳은 저택으로 돌아가기 전 반드시 지나야 하는 제법 넓은 전나무 숲이었다.

“잠시 쉬었다 갈까요.”

카일이 커다란 전나무 아래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마른 나무를 모아 오겠습니다. 잠시 쉬고 계십시오.”

파코가 황급히 주변을 돌아다니며 마른 나뭇가지를 모아 순식간에 작은 모닥불을 피웠다.

“능숙하군요.”

“한해 대부분을 사냥터에서 지내다 보면 이런 것쯤이야 아무것도 아닙니다.”

파코가 웃으며 말했다.

“그만큼 가족들과도 떨어져 지냈겠군요.”

“용병이라면 어쩔 수 없죠.”

“파코는 가족들이 모두 북부에 있습니까?”

“예!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셨지만, 누이와 남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성인이 되면 녀석도 용병대로 데려올 생각입니다.”

“동생도 용병이 되길 원하는 겁니까?”

카일의 물음에 파코의 눈동자가 급격히 흔들렸다. 지금까지 그저 동생을 데려오겠단 생각만 가득했을 뿐 정작 동생의 생각은 물어보지 못한 것이다.

파코는 잠시 생각을 정리하려는 듯 붉게 타오르는 모닥불을 뒤적이다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용병이 아니라면 결국 소작을 해야 합니다. 그럼 그럭저럭 먹고살 수는 있겠죠. 하지만 평생 무거운 세금을 감당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럴 바에야 용병이 낫지 않겠습니까?”

“동생까지 데려오면 누이는 혼자 남게 될 텐데요?”

“영지에 작은 땅을 소유한 자영농이 몇 있습니다. 몇 해 전까지 혼담이 꾸준히 들어 왔으니 모아둔 골드를 긁어내고 살고 있는 집을 팔면 지참금 정돈 마련할 수 있을 겁니다.”

어린 막냇동생을 키우느라 혼기를 놓친 누이를 떠올리고는, 파코가 침울해진 표정으로 말했다. 사냥터만 봉쇄되지 않았다면 고생한 누이에게 충분한 지참금을 마련해 줄 수 있었을 텐데. 그럴 수 없어 아쉬울 뿐이었다.

“다른 용병들의 생활 수준은 어떻습니까?”

파코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인 카일이 마라스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자 마라스가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파코야 가족이 적어 그나마 나은 편입니다만 다른 용병들은 소작농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마라스의 말에 카일이 품 안에서 작은 물주머니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얼떨결에 물주머니를 받아든 마라스가 물었다.

“바일에게 주려고 가져왔습니다만, 아무래도 마라스 님이 먼저 맛을 보는 게 좋을 것 같아 그냥 가지고 있었습니다. 마셔보십시오.”

카일의 말에 마라스가 주머니를 잠시 내려보다가 조심스럽게 마개를 열어 냄새를 맡았다.

“이건… 술이 아닙니까?”

마라스의 말에 파코가 의아한 듯 카일을 바라보았다. 술을 지니고 다닐 정도면 분명 술을 즐긴다는 말일 텐데 지금껏 카일이 술을 마시는 모습은 단 한 번도 본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물론 카일이 마라스에게 건넨 건 직접 만든 증류주였다. 음식에 풍미를 더하기 위해 가지고 다니던 것으로 그동안 사용할 일이 없어 가방 안에 처박아 놓았던 술이다.

꿀꺽-

카일의 눈빛에 마라스가 주머니를 기울여 한 모금 입에 머금었다. 향기롭고 달큰한 과일 향이 입안 가득 퍼졌다가 부드럽게 목 안으로 넘어갔다.

“하아~!”

순간 아래에서부터 올라오는 강렬하면서도 뜨거운 기운에 마라스가 낮은 숨을 내뱉었다.

“어떻습니까?”

카일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닙니다만… 이런 독특한 향과 맛을 지닌 고급술은 처음입니다.”

마라스가 조심스럽게 주머니를 카일에게 건넸다. 이런 맛과 향을 지닌 독한 증류주는 비싼 몸값 덕분에 귀족들도 아껴 마시는 귀한 술이었다.

“마음에 드신 것 같아 다행이군요.”

“이런 고급술을 마시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라스의 극찬에 자연스럽게 파코의 시선이 카일의 손에 들린 주머니로 향했다.

“마셔 보세요.”

파코의 시선을 느낀 카일이 웃으며 주머니를 내밀었다.

“그래도… 되겠습니까?”

파코가 마라스의 날카로운 눈빛에 잠시 망설였지만 결국 카일이 내민 주머니를 받아 들었다. 그리고는 주머니를 기울였다.

“아!”

목 안으로 한 모금 넘기는 순간 몸 전체로 퍼져가는 향기에 파코가 가볍게 탄성을 터트렸다.

“정말 독특한 술이군요!”

“수수를 발효시켜 증류한 술입니다.”

“설마 직접 만드셨단 말입니까?”

카일이 고개를 끄덕이며 파코에게 돌려받은 주머니를 바라보다 말을 이었다.

“제가 마라스 님께 술 창고를 맡기려는 건 단순히 창고를 관리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 정도는 바일에게 맡겨도 충분하죠”

“그럼… 왜?”

“술 창고 옆으로 양조장을 지을 생각이니까요. 그럼 당연히 사람들이 많이 필요하겠죠.”

카일이 마라스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설마… 용병들의 가족들을 불러들일 생각이십니까?”

파코가 카일의 의중을 눈치채고는 먼저 물어 왔다. 그제야 마라스도 왜 카일이 자신에게 창고를 맡기려는지 어렴풋이 이해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하지만 단순히 용병 가족들 때문만은 아니에요.”

“다른 이유도 있단 말씀입니까?”

“술이란 같은 재료를 사용해도 발효 과정이나 증류 방법에 따라 맛과 향에 큰 차이가 나는 법입니다. 제가 만든 술 역시 제조방식이나 도구가 독특해 최대한 비밀을 유지해야 하지요. 그러니 믿고 맡길 사람이 필요합니다. 물론 양조장을 경비하고 운송하는데 필요한 인력과 병력도 통솔해야겠죠.”

카일의 말에 마라스는 물론 파코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용병들의 가족이라고 해서 무조건 믿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 중에서도 쉽게 배신하지 않을 사람을 가려 뽑으려면 용병들의 내부 사정을 자세히 알아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니 십수 년 동안 그들을 이끌어온 마라스 만큼 이일에 적합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아, 아닙니다. 오히려 제가 감사합니다. 이렇게 용병들 가족까지 세심하게 살펴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이젠 제가 안고 가야 할 제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당연히 해야 할 일이죠.”

카일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쉴 만큼 쉬었으니 그만 돌아가 볼까요.”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카일의 말에 파코가 밝게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하지만 그들은 곧 걸음을 멈춰야 했다.

이히힝-

낮은 말 울음소리와 함께 두 마리의 말이 끄는 낡고 초라한 마차가 세 사람의 앞에 멈춰 섰다. 마부석에 앉아 있던 늙은 기사가 세 사람을 내려보며 물었다.

“이곳에 마일론 남작의 저택이 있다고 들었다. 어딘지 아느냐?”

“마일론 남작은 왜 찾으시는 건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카일을 대신해 마라스가 앞으로 나서며 정중히 기사에게 물었다.

“쓸데없는 궁금증은 생을 단축시킨다. 그쯤은 알만한 나이라 생각한다만?”

마라스를 무시하는 기사의 태도에 파코는 물론 카일의 얼굴도 찌푸려졌다. 하지만 마라스는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고 더욱더 자세를 낮추며 말했다.

“마일론 남작님은 저희 용병대의 대장님이십니다. 대장님께선 잠시 출타 중이시니 용건을 말씀해 주시면 전해 드리겠습니다.”

마라스의 능청스런 대꾸에 카일은 물론 파코까지 실소를 금할 수 없었다. 물론 마라스의 대답에 거짓은 없었다. 실제로 카일은 지금 저택이 아니라 바로 마차 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장? 그럼 네가 마라스란 늙은이냐?”

“그렇습니다. 제기 부대장인 마라스 입니다.”

마라스가 고개를 끄덕이자 늙은 기사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어렸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기사가 마부석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그리곤 마차에 뚫려있는 작은 창을 두들겼다.

“주군!”

늙은 기사의 부름에 창이 열리며 나른한 표정의 젊은 귀족이 얼굴을 내밀었다.

“무슨 일인가요? 펠페츠.”

“이 늙은 용병이 마라스라고 합니다.”

펠페츠라 불린 기사의 말에 나른하게 풀어져 있던 젊은 귀족의 눈빛이 한순간 밝게 빛나며 마라스와 카일, 파코를 자세히 살폈다. 그리곤 얼굴 가득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됐군요.”

“어떻게 딸까요?”

늙은 기사가 비릿한 표정으로 검파에 손을 올리자 젊은 귀족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아이쿠, 머리야! 따긴 뭘 딴단 말입니까?”

“목을 댕강…”

“쓸데없는 말은 집어치우고 문이나 여세요.”

“킁, 알겠습니다.”

젊은 귀족의 말에 늙은 기사 펠페츠가 불만을 토해내듯 거친 콧바람을 내며 문을 열었다.

그 모습에 고개를 저은 젊은 귀족이 마차에서 내린 뒤 세 사람, 정확히는 카일에게 다가왔다.

“당신이 마일론 남작이군요.”

젊은 귀족의 말에 마라스와 파코가 깜짝 놀라 카일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정작 정체가 발각된 카일은 담담하게 젊은 귀족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였다.

“캐시언 백작이시군요. 마일론 가문의 카일입니다.”

카일이 고개를 숙이며 예를 취하자 젊은 귀족 캐시언 백작이 놀란 얼굴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날 알고 있다니… 당신, 생각보다 더 흥미로운 사람이군요.”

“저야말로 단번에 절 알아보실 줄은 몰랐습니다.”

“여기 두 사람이 선 모습이 당신을 보호하는 형국이니 금방 눈치를 챘습니다. 결정적으로 당신 손에 끼워진 인장 반지를 보고 확신을 가졌죠.”

캐시언 백작의 말에 카일이 마라스와 파코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은연중 카일을 보호해야 한다는 마음 때문인지 카일의 앞과 뒤를 막아선 형태로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렇군요.”

“이젠 당신 차례군요.”

“저야 더 쉬웠습니다.”

“네?”

캐시언 백작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캐시언 백작가는 영지가 없는 문관 출신의 귀족 가문으로 사교계에서도 그다지 알려지지 않은 가문이었다.

그들이 3 왕자를 보필하면서 조금씩 그에 관한 이야기가 돌긴 했지만 지극히 일부에 지나지 않은 만큼, 왕성이 처음인 카일이 그의 존재를 알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테일런 용병대에 대해 좀 알아보았습니다. 백작님께서 뒤를 봐주고 계시더군요. 그리고 무엇보다, 왕성에서 제가 알고 있는 귀족이라고는 백작님이 유일합니다. 그래서 그냥 한번 여쭤본 겁니다.”

“이런… 하하하!”

카일의 말에 캐시언 백작의 얼굴에 잠시 황당함이 어렸지만 결국 대소를 터트리고 말았다. 결국 요지는 알고 있는 유일한 귀족 이름을 말했는데 얼떨결에 맞았다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날 이렇게 당황하게 만들다니, 당신 참 마음에 드는군요.”

케시언 백작이 밝게 미소를 지었지만, 카일은 여전히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제게 용건이 있으신 것 같은데… 이야기를 들어볼 수 있을까요?”

“그래도 제가 손님인데, 차 한 잔은 대접해 줄 수 있는 것 아닌가요?”

케시언 백작이 미소를 지으며 말하자 카일의 얼굴에 살며시 금이 갔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고개를 숙였다.

“그럼… 저택까지 모시겠습니다.”

“마차가 작긴 해도 함께 탈 수 있을 것 같은데, 어떠세요?”

“아닙니다. 걷는 게 편합니다.”

카일이 앞서 걸어가자 미소를 짓고 있던 백작의 얼굴에서 서서히 웃음기가 사라졌다.

“만만한 상대가 아니군.”

케시언 백작이 점점 멀어져가는 카일의 뒤를 바라보다가 마차에 올라탔다.

“가지요.”

“알겠습니다.”

펠페츠가 날렵하게 마부석으로 뛰어올랐다.

“이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한 마차가 곧 앞서가는 카일을 비롯한 마라스와 파코의 뒤를 바짝 뒤쫓았다. 그리곤 얼마 뒤 저택의 정문에 다다랐다.

헌데 이번엔 저택의 정문 앞, 커다란 대검을 바닥에 박아 놓고 팔짱을 낀 채 눈을 감고 서 있던 사내가 카일이 다가오자 눈을 번쩍 떴다. 그리곤 카일을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당신에게 정식으로 도전하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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