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크루트 용병단1
“크루트 입니다.”
얼굴을 가로지르는 긴 칼자국을 제외하면 평범한 농부를 연상케 하는 중년인이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건장한 사내를 보며 고개를 숙였다.
“늦었다!”
떠오르는 태양을 보며 눈썹을 찌푸린 사내가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고개를 숙인 크루트는 사내의 말에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젠장! 내가 부하도 아니고… 보자마자 반말이야!’
크루트가 내심 앞에선 사내를 욕했지만, 그렇다고 본심을 그대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눈앞의 사내는 신분도 소속도 모두 알려지진 않았지만, 아이젠 공작가와 깊히 연관되어 있다는 사실 하나만은 크루트도 알고 있었다.
‘쯧! 어쩔 수 없지, 참는 수 밖에….’
크루트는 동부지구를 담당하는 타격대 중 하나로, 100여 명의 용병들이 소속된 중대형 용병단의 단장이다. 용병단의 주요 수뇌부는 검은 여우들이 장악하고 있지만, 하급 용병들 대부분은 평범한 용병들로 채워져 있었다.
“여기저기 흩어진 용병들을 끌어모으느라 시간이 조금 걸렸습니다. 죄송합니다.”
크루트는 최대한 몸을 낮추며 저자세를 유지했다. 기분 나쁘다고 여기서 대들어봤자 자신만 손해란 사실을 오랜 경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법… 눈치가 빠르군.”
“예?”
“아니다.”
사내가 고개를 돌려 넓은 크레센트 숲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 숲 어딘가에 숨은 자들이 있다. 인원은 대략 30 이내, 이 중 하나는 피스트 워리어 중급에, 대원 둘을 장거리에서 타격해 죽일 정도로 대단한 아티팩트를 가지고 있다.”
“장거리 타격이 가능한 아티팩트에 피스트 워리어라면 좀 걱정이 되는군요. 희생이 제법 클 겁니다.”
“그래서 문제가 있나?”
사내가 차갑게 식은 눈으로 크루트를 바라보았다.
“죽고 죽이는 것이 용병들의 삶이니 문제 될 거야 없습니다. 죽은 하급 용병 정도야 얼마든지 채울 수 있지요.”
크루트가 싸늘한 사내의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용병을 움직이려면 골드가 필요합니다. 위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더 많은 골드가 필요하죠.”
“지금… 골드를 달라는 말인가?”
“이번 일은 정식으로 제국에서 내려온 명이 아니라서 용병들에게 지급할 골드를 받지 못한 상황입니다.”
생각지도 못한 크루트의 말에 사내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만약 주지 못하겠다면?”
“저흰 이대로 길을 돌아 동부로 돌아갈 수밖에요. 그래도 몸을 움직였으니 일정부분 골드를 지급해야겠지만… 어쩔 수 없죠.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여긴 네놈 말고도 명을 수행할 자들이 많을 것 같은데?”
“크크, 그럴 수도 있겠죠.”
사내에게서 흘러나오는 살기에도 크루트는 오히려 웃음을 지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여기저기 흩어져 휴식을 취하고 있는 용병들이 눈에 들어왔다.
크루트는 목적을 위해 용병을 모았고 훈련을 시켰다. 당시만 해도 하급 용병들쯤이야 죽으면 얼마든지 다시 채울 수 있는 소모품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용병들과 생사를 넘나들며 친분을 나누다 보니, 더 이상 용병들을 소모품 정도로만 취급할 수는 없었다.
물론 여전히 많은 하급 용병들이 크루트의 명에 따라 위험한 의뢰를 수행하고 목숨을 잃고 있지만, 대신 크루트는 그들이 정당한 목숨의 대가만이라도 받을 수 있게 노력하고 있었다.
“불필요한 감정을 갖게 된 건가?”
싸늘하게 크루트를 내려다보던 사내가 반쯤 빼놓았던 검을 다시 밀어 넣으며 말했다.
“…무슨 말씀입니까?”
“뭐…. 상관없겠지!”
사내가 품 안에서 작은 주머니를 던졌다.
“이만하면 목숨의 대가는 충분할 거라 생각한다.”
바닥에 떨어진 주머니 안에서 수십 개의 보석이 흘러나왔다.
“충분… 합니다.”
크루트가 바닥에 떨어진 주머니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이 정도의 보석이면 한동안 용병단 전체가 몇 달은 놀고먹어도 될 정도로 엄청난 금액이었다.
“아! 한 가지 알려드릴 정보가 있습니다.”
돌아서 걸어가는 사내를 크루트가 급히 붙잡았다.
“무슨 일이지?”
“트라발트 공작가가 움직였습니다. 공작가에서 곧 추적대를 파견할 것 같습니다. 왕실에서도 조사단을 꾸리고 있다고 합니다.”
“생각보다… 너무 빠르군.”
“왕실에서 먼저 움직인 걸로 봐선 붉은 거미들이 먼저 알고 움직인 것 같습니다.”
“일이 급해졌군! 오늘 안으로 놈들을 잡아야 한다.”
“아시겠지만 이 숲은 규모가 상당합니다. 용병들만으로 숲 전체를 뒤지려면 며칠은 걸릴 겁니다.”
“그럴 필요 없다. 놈들은 숲 중앙부에 몰려있다. 놈들을 최대한 빠르게 찾아 척살한다.”
“…알겠습니다. 바로 시작하죠.”
크루트가 고개를 끄덕이며 바로 용병들에게 달려갔다.
“와아-.”
크루트가 보석이 든 주머니를 높게 들어 올리자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용병들이 모여들며 환호성을 질렀다.
* * *
황량한 들판.
여기저기 널려있는 무너진 성벽의 잔해와 거대한 성터의 흔적만이 이곳에 세워졌던 고성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었다.
“보기 드문 실전형 성이군!”
성벽을 바라보던 코퍼가 눈을 빛내며 성벽 여기저기를 살폈다.
“성에 대해 잘 아십니까?”
“대장의 집안은 대대로 성을 쌓고 보수하던 석공이었습니다. 어려서부터 부친을 쫓아다녀서 그런지 성에 대해 모르는 것이 없습니다.”
카일의 물음에 야튜가 코퍼를 대신해 말했다.
“쓸데없는 말은 하지 말거라!”
코퍼가 야튜를 보며 엄하게 소리치며 무너진 성벽을 통해 성안으로 진입했다.
“그런데 어쩌다 용병이 된 겁니까?”
“부친을 쫓아 허구한 날 손이 부르트도록 돌을 깎는 게 싫었답니다.”
“도망을 친 거니까?”
“마침 마을을 지나던 늙은 용병이 대장을 본 모양입니다. 제자를 찾는다며 일검에 바위를 잘라내자, 그 길로 늙은 용병을 따라나섰다고 합니다.”
야튜가 앞서가는 코퍼의 눈치를 살피며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직도 어릴 때의 기억이 남았는지 성에 대해선 모르는 게 없습니다.”
무너진 성벽과 잔해로 미로처럼 변해버린 성안에서도 코퍼는 능숙하게 길을 찾아 내부로 진입하고 있었다.
“다행이군요.”
“네?”
“제가 경험한 전투 대부분은 사람이 아닌 저돌적으로 돌격만 일삼는 몬스터, 그중에서도 오크들 뿐이라 사람과의 공성전에 대해서는 잘 모르거든요.”
그때였다.
앞서가던 코퍼가 갑자기 멈춰서더니 뒤를 돌아봤다.
“이쯤이 좋겠군.”
코퍼가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코퍼가 올라서 있는 곳은 성벽이 앞으로 무너져 내리며 돌출된 곳이었다. 덕분에 성벽 위에서도 분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었다.
“양옆에 남아 있는 성벽을 무너트려 양 측면을 막으면 여길 공격할 방법은 정면뿐이다. 이 정도면 적들이 몰려와도 버틸 수 있을 거다.”
“양 측면의 성벽은 제가 무너트리겠습니다.”
“그럼 부탁하지! 난 들어오는 입구를 손보겠다.”
코퍼는 용병들을 모아 들어오는 길 중간 중간에 함정을 만들고, 진입하는 입구 여기저기를 손보기 시작했다.
그사이 카일은 양 측면에 위태롭게 서 있는 성벽을 무너트려 측면을 완전히 막았다.
“저….”
카일이 막 마지막 성벽을 무너트렸을 때 터그가 카일에게 다가왔다.
“무슨 일입니까?”
카일이 검집에 검을 밀어 넣으며 물었다.
“저기… 잠시 다녀올 곳이 있습니다.”
“언제 적들이 몰려올지 모릅니다.”
카일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저희가 사냥에 쓰던 장궁이 있습니다. 직접적으로 칼을 들고 싸우긴 힘들지만, 성벽 위에서 활을 쏘는 거라면 도움이 될 겁니다.”
터그의 말대로 장궁이 있다면 분명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좋습니다. 그럼 저랑 함께 가시죠.”
카일의 말에 터그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무래도 다시 크레센트 숲으로 돌아가는 것은 그들에게도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카일은 곧장 코퍼에게 사실을 말하고는 라이플을 등에 멨다.
“가시죠.”
“제가 앞장서겠습니다. 좀 빠르게 가겠습니다.”
터그와 부하들이 곧장 성 밖으로 달려 나가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일반인이라면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민첩하고 빠른 움직임이었다.
“대단히 빠르군요.”
터그의 옆으로 바짝 다가선 카일의 갑작스러운 질문에 깜짝 놀란 터그가 중심을 잃고 넘어지려 했다. 하지만 재빨리 카일이 팔을 잡아 넘어지는 것만은 면할 수 있었다.
터그는 지금껏 숲에서만큼은 누구도 자신보다 빠를 수 없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카일이 곧장 자신을 따라잡으며 말까지 하자 깜짝 놀라고 만 것이다.
“조심하십시오. 넘어지면 큰일입니다.”
카일이 웃으며 터그의 팔을 놓아주었다.
“어… 어떻게!”
당황한 터그의 표정에 카일이 미소를 지었다.
“저도 숲에서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하거든요. 그보다 좀 서둘러야 하지 않을까요. 아무래도 손님들이 숲으로 들어온 것 같은데?”
“아! 알겠습니다.”
카일의 말에 터그가 다시 속도를 높였다. 빠르게 산에서 내려와 숲으로 들어선 터크는 급히 방향을 꺾어 숲 중앙에 위치한 오두막으로 향했다.
“오래전 스승님께서 머물던 곳입니다. 스승님께서 돌아가신 후 지금까지 비어 있던 곳이죠.”
코퍼가 오두막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오랫동안 비워져 있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내부는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코퍼는 오두막으로 들어서자마자 낡은 탁자를 치우고 바닥에 감춰진 작은 문을 열었다.
“원래 부식을 넣어두던 창고였지만, 스승님이 돌아가신 후에는 여기에 장궁을 감춰두고 있었죠.”
코퍼가 창고 안에서 장궁과 화살집을 꺼냈다.
“아무래도 좀 서둘러야겠습니다. 여기로 몰려드는 자들의 숫자가 만만치 않군요.”
카일이 굳은 얼굴로 창밖을 바라보았고, 터그와 부하들이 급히 달려들어 장궁과 화살집을 급히 등 뒤에 메고 허리에 사냥용 단검을 꽂았다.
카일과 터그 일행이 오두막을 벗어나고 얼마 안 있어 다수의 용병들이 빠르게 오두막을 포위했다.
“조금 전까지 누군가 이곳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발자국을 봐선 대략 열 면이 안 됩니다.”
“방향은?”
“발자국 방향으로 봐선 곧장 산으로 향한 것 같습니다.”
“지금보다 포위망을 넓혀 놈들을 산 쪽으로 밀어붙인다. 중간에 방향을 바꿀 수 있으니 놈들을 발견하면 직접적인 공격은 피하고 조장들이 도착할 때까지 시간을 끌어라!”
“옛!”
크루트의 명령에 용병들이 신속하게 포위망을 넓히며 카일과 터크 일행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제법 훈련을 잘 받은 용병들이군요.”
카일이 스코프를 통해 넓게 포위하며 다가오는 용병들 보며 고민에 빠진 듯 손가락으로 바닥을 두드렸다.
“에일의 말로는 궁술이 뛰어나다고 들었습니다.”
“실력은 모두 비슷합니다. 날아가는 새 정도는 모두 맞출 수 있습니다.”
터그가 자신감 있게 말했다.
새는 크기가 작아 활로 맞히기 어렵다. 더구나 움직이는 새를 맞힐 정도라면 숙련된 장궁 병이라도 쉽지 않다. 그만큼 궁술에 자신이 있다는 말이었다.
“잘됐군요. 그럼 이대로 돌아가긴 아쉬우니 한 번 건드려보는 것도 좋겠군요.”
“저희만으로 가능하겠습니까?”
“걱장 마십시오. 간단히 실력만 확인해 볼 겁니다.”
카일이 웃으며 라이플을 다시 등에 돌려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