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190화 (190/404)

190.달의 언덕2

“이야기는 잘 끝나셨습니까?”

“이노옴! 감히 마법사인 나에게 사기를 치다니!”

얼마나 화가 났는지 툴린이 붉게 달아오른 얼굴을 들이밀며 사납게 소리쳤다.

“사기라니! 당치 않습니다. 거래는 정당하게 이루어졌습니다.”

“뭐야! 지금 그걸 말이라고…!”

툴린이 또다시 위협적으로 카일을 노려보며 지팡이를 높이 들어 올렸다.

“애초부터 이 거래는 지식에 대한 거래였지, 마법에 대한 거래는 아니었습니다. 분명 멀린 님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는 새로운 지식을 알려드렸습니다. 아닙니까?”

카일의 말에 툴린은 그만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카일의 말대로 라이플은 기계학을 기반으로 저 서클 마법이 합쳐진, 지금까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개념의 마법무구였다.

마법사인 툴린에게도 기계학을 기반으로 한 마법무구가 새롭고 놀랍기는 했지만, 딱 그 정도에 불과했다. 마법진과 마나를 연구하는 툴린에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지식이라는 말이었다.

하지만 툴린은 이미 지식의 거래에 동의했고, 멀린이 지식을 밝힌 이상 반드시 자신의 비전중 하나를 멀린에게 알려주어야 했다.

“하… 지만 나에겐 하등 도움이 안 되는 지식이란 말이다.”

“지식의 거래는 툴린 님이 먼저 제안하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리고 왜 꼭 도움이 안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무슨 말이냐? 그럼 마법사인 내가 금속을 깎고 다듬는 일을 배워 뭘 한단 말이냐?”

툴린이 버럭 고함을 쳤다. 하지만 카일은 오히려 담담하게 툴린을 바라보며 말했다.

“꼭 툴린 님께서 기계학을 배울 필요가 있습니까? 직접 배우지 않아도 기계를 만들 사람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중요한 건 기계에 적용해 마법을 사용할 수 있는 마법진입니다. 혹 제가 라이플에 사용한 마법에 대해 들으셨습니까?”

“…고작 1서클 익스플젼 마법 스크롤이라 들었다.”

“그렇습니다. 전 고작 1서클 마법으로 와이번 나이트를 장거리에서 저격해 죽였습니다. 고작 1서클 마법으로 말입니다.”

카일이 당당하게 손가락 하나를 펴 보이며 툴린에게 말했다.

툴린도 카일의 말에 반박할 수 없을 만큼 놀랍고도 대단한 성과임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하지만 카일이 1서클 마법에 대해 강조하는 이유가 단순히 자랑을 하기 위해서가 아님을 툴린은 알 수 있었다.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것이냐?”

“기계학이 툴린 님에게 도움이 안 된다는 생각은 잘못되었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나보고 마법 무구나 만들라는 말이냐?”

“꼭 마법 무구가 아니어도, 툴린 님이 그동안 연구하고 발전시킨 마나와 마법진을 기계학과 연동시킨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대단하고 놀라운 것들이 만들어지겠습니까?

“어찌 되었든 나더러 마법 물품이나 만드는 공방의 늙은이가 되라는 말이 아니냐!”

툴린이 카일의 말에 버럭 화를 냈다. 카일 역시 말이 통하지 않는 툴린의 모습에 점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도 공방에서 가죽제품을 만들고 계셨지 않습니까?”

“뭐라! 지금 이 툴린을 공방의 늙은이라 놀리는 것이냐?”

툴린의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는 것과는 반대로 주변의 기운이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공방에서 물건을 만드는 것이 잘못된 일입니까?”

“그래도 이놈이!”

툴린이 들어 올린 지팡이 위로 붉은 기운이 서서히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그럼 툴린 님은 왜 마나와 마법진을 연구하신 겁니까? 마나와 마법진은 모두 아티팩트를 만들기 위한것 아닙니까?”

마나와 마법진은 자신보다 높은 써클의 마법을 발현시키기 위해 발전해왔다. 하지만, 전투마법사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아티팩트나 마법무구가 대체하기 시작하면서, 마법진은 더 강력한 아티팩트와 마법무구를 만들기 위하여 연구되었다.

“맞다. 마나와 마법진의 연구가 더 강력한 마법무구를 만들기 위한 것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카일의 말에 툴린이 들어 올렸던 지팡이를 천천히 내리며 침울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팡이에 어렸던 강렬한 기운도 어느새 사라지고 평범한 지팡이로 돌아와 있었다.

“솔직히 말해… 난 평생 실험을 통해 마법진과 마나를 연구했을 뿐 실질적인 마법 물품을 제작한 적은 없다. 이런 내가 전혀 생소한 기계학을 통해 아티팩트를 제작할 수 있겠느냐?”

마법사라고 모두 실전에 뛰어난 건 아니다. 전투에 능한 전투마법사가 있다면 전투에 필요한 마법을 연구하고 발전시키는 마법사가 있다. 마찬가지로 툴린은 마나와 마법진을 연구하는 마법사일 뿐 아티팩트나 마법무구 제작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다.

“상관없습니다.”

카일이 침울한 표정의 툴린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우리에겐 이미 최고의 아티팩트 마법사가 있으니까요.”

카일의 말에 고개를 숙이고 있던 툴린이 놀란 듯 고개를 들어 어색하게 웃음을 짓는 멀린을 바라보았다.

각인마법은 같은 서클의 다른 마법보다 현저히 낮은 위력의 마법이지만, 대신 아티팩트나 마법무구를 제작하는 데 특화된 마법이다. 더구나 멀린은 최초의 5서클 각인마법사다. 카일의 말대로 멀린은 아티팩트 제작에서 최고의 마법사라 할 수 있었다.”

“확실히… 멀린이라면….”

툴린이 멀린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기계학이야말로 분명 툴린 님이 연구한 마나와 마법진의 가치를 더욱 확실히 증명할 수 있게 해줄 겁니다.”

마법사, 그중에서도 연구와 실험에 몰두하는 마법사들의 목표는 오직 한 가지다. 자신이 연구하고 발전시킨 마법을 세상에 드러내고, 자신의 연구와 노력을 인정받는 것이다. 하지만 툴린처럼 신분을 숨기고 살아가는 마법사는 세상에 자신이 연구한 마법을 드러낼 수 없다. 자칫 거대 마탑의 표적이 되어 연구를 빼앗기거나 때론 말살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가치의… 증명, 평생을 숨어 살아야 했던 내겐 굉장히 떨리면서도 매력적인 말이다. 허나… 넌 마탑의 마법사들이 어떤 자들인지 몰라서 하는 소리다. 그놈들은 자신들을 제외한 어떤 마법 집단의 발호도 인정하지 않는다.”

툴린이 고개를 저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툴린의 가슴속 깊은 곳엔 아직 그들에 대한 깊은 공포가 저리 잡고 있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만약 제 것을 탐하는 자가 있다면 저도 가만히 두고만 보지는 않을 겁니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알고 하는 말이냐?”

카일의 말속엔, 마탑이라 해도 자신을 공격하면 가만히 있진 않겠다는 의미가 담겨 있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한 가지 비밀을 알려드리죠.”

카일이 멀린으로부터 라이플을 넘겨받았다.

“이 라이플을 보시면서 어떤 생각이 드셨습니까?”

카일이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분해가 자유롭고 대단히 정교하다. 무엇보다 구하기 쉬운 마법스크롤을 이용해 강력한 위력의 마법무구를 만들었다는 사실이 굉장히 놀라웠다.”

“그럼 라이플을 든 병사와 마법사가 싸운다면 누가 이길 거라 생각하십니까?”

“흠… 전투마법사는 전투에 특화된 마법을 전문적으로 익혀 빠르고 민첩하다. 방어마법과 함께 빠르게 거리를 좁혀 마법을 난사한다면 아무리 사거리가 긴 라이플이라도 병사가 불리하다. 병사로서는 마법사가 다가오기 전 라이플로 끝을 봐야겠지.”

“그럼 둘은 어떨까요? 아니, 셋은요.”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냐?”

“라이플의 최대 장점은 바로 대량생산이 가능하단 겁니다. 그리고 전 이 라이플로 무장한 조직을 만들어볼 생각입니다.”

“뭐!”

툴린이 깜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툴린이 확인한 라이플은 분명 정교하고 잘 만들어진 기계지만, 그만큼 대단한 약점을 가지고 있었다. 라이플 내부에서 폭발하는 스크롤의 열과 압력을 버텨줄 고 합금 금속이 대단히 비쌀 뿐만 아니라 가공하기도 굉장히 힘들어, 다수의 라이플을 만들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라이플의 최대 비밀은 마법도 기계학도 아닌 바로 라이플을 구성하는 금속입니다. 이걸 전 강철이라고 부릅니다.”

“설마! 운석이 아니란 말이냐!”

“아닙니다. 이건 제가 만들어낸 겁니다.”

스르릉-

카일이 허리에서 검을 뽑아 툴린에게 내밀었다.

“이것 역시 강철입니다. 강철은 기계학의 가장 기초가 된 금속입니다. 강도는 고 합금 미스릴검에 뒤지지 않지만, 가격은 훨씬 낮습니다.”

“허허! 이걸 지금 나더러 믿으란 말이냐?”

“믿으셔도 됩니다. 이곳에서 살아 돌아가기만 한다면 얼마든지 증명할 수 있으니까요.”

툴린이 흔들리는 눈으로 미소 짓고 있는 카일을 바라보았다.

* * *

코퍼와 카일이 탈출보다는 방어에 집중하기로 결정하면서 사람들의 얼굴에 자리하고 있던 불안감은 오히려 조금씩 옅어지고 있었다.

“휴…. 다행이다. 혹시 두 사람의 의견이 갈리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아덱이 앞서 걸어가는 코퍼와 카일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겉으로 보기엔 코퍼가 사람들을 앞서 이끌고 있긴 하지만 실질적인 무력은 카일과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강하다.

만약 카일과 코퍼의 의견이 갈라졌다면 상당히 난감한 상황에 처할 수밖에는 없었을 것이다.

“난 솔직히 돌파로 결정 나면 어쩌나 걱정했다.”

“설마 코퍼 대장이 그런 결정을 내릴까? 자칫 잘못하다간 다 죽을 텐데?”

브린이 말에 아덱이 고개를 저었다.

“그야 모르는 일이지 카일이 탈출을 주장했다면 대장도 거부하기는 힘들었을 거다. 더구나 저 파티의 전력이면 돌파하는 게 꼭 불가능할 것 같지도 않고.”

야튜의 말대로 카일의 파티는 루트를 포함해 총 5명의 엑스퍼트와 두 명의 마법사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 카일은 이미 완숙한 중급 엑스퍼트로, 중소 영지의 기사단장급 실력보다 더 뛰어나다. 웬만한 중소기사단 하나 정도는 충분히 전멸시킬 정도의 강력한 전력이다. 더구나 카일에게는 와이번 나이트를 장거리에서 저격할 수 있는 마법무구까지 있었다. 어느 정도 피해는 볼 수 있을진 몰라도 탈출이 전혀 불가능하다고 볼 수도 없었다.

“그것도 그렇긴 하네….”

버크가 고개를 끄덕이며 앞서가는 카일을 바라보았다.

달의 언덕은 생각보다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었지만 가는 길은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완만하던 산이 정상과 가까워지면서 점점 더 가파르고 험준하게 변했다.

“죄송해요. 이렇게 또 신세를 지네요.”

이엘이 지친 얼굴을 카일의 등에 기대며 말했다. 험준한 산행이 이어지자 결국 체력적 한계에 부딪힌 이엘이 먼저 주저앉았고 뒤이어 터그의 뒤를 따르던 두 여인들도 더는 버티지 못하고 각자 일행의 등에 업혀 가는 신세가 되었다. 하지만 사람들은 쉬는 것보단 조금이라도 빨리 고성으로 가길 바랐다.

“와!”

가장 먼저 산 정상에 오른 소년 에일이 넓게 펼쳐진 분지을 내려다보며 탄성을 터트렸다.

달빛에 비친 분지는 마치 커다란 스픈으로 중턱을 푹 떠낸 듯 동서도 긴 타원형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여기가… 달의 언덕인가요?”

“맞습니다. 이곳이 크레센트 숲에 있는 달의 언덕입니다.”

터그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허! 왜 이곳을 달의 언덕이라고 했는지 이제 알겠군!”

브린의 말에 분지를 내려다보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산 정상에서 분지로 내려가는 길은 험준한 산을 올라왔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고 있어 분지가 마치 작은 언덕으로 둘러싸여 있는 것만 같았다.

“저곳이 바로 제가 말했던 고성이 있는 곳입니다.”

터그가 가리킨 동쪽 절벽 위에는 높이 솟은 망루탑과 거대한 고성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지난 세월 이곳에 자리 잡았던 귀족 가문의 위세를 한눈에 느낄 수 있었다.

“저게 왜 여기에….”

카일의 옆에서 고성을 바라보던 멀린이 깜짝 놀란 얼굴로 망루탑을 바라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가까이 가봐야 알겠지만 저건 분명 하늘… 탑입니다.”

“이곳에 왜 하늘 탑이 있겠습니까? 혹 잘못 보신 건 아닙니까?”

“수십 년을 하늘탑에서 보낸 접니다. 탑의 형태만 봐도 하늘탑인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맞는 말이다. 수십 년을 하늘탑에서 보낸 멀린이다. 밝은 달빛 아래 드러난 거대한 탑의 정체를 못 알아볼 리 없었다.

“…어차피 목적지는 고성입니다. 내려가서 직접 확인해보면 좀 더 명확히 알 수 있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분지 아래로 내려가는 길은 평지를 걸을 때보다 편해 마치 밤 산책을 나온 듯 피로했던 몸과 마음도 살랑이는 바람을 따라 편안해졌다.

“허! 누가 이곳을 만들었는진 모르겠지만 여기저기 이상한 것들을 많이 만들어 두었구나!”

툴린이 눈을 크게 뜨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말했다.

“뭐가 있다고 그러십니까? 그냥 보이는 건 나무와 풀, 그리고 커다란 바위뿐인데….”

툴린의 뒤를 따르던 밀런이 중얼거렸다.

“이런 멍청한 녀석 같으니라고!”

“뭐요!”

밀런이 발끈해 소리쳤지만 툴린은 전혀 신경도 쓰지 않았다.

“눈에만 보인다고 전부인 줄 하느냐! 넌 아직 저 녀석들 쫓아가려면 멀었다.”

툴린이 지팡이를 들어 앞을 가리켰다. 카일은 물론이고 자신보다 실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했던 버크나 브린까지 고개를 갸웃거리며 몸을 여기저기 비틀었다.

“이 분지 전체엔 요상한 정신계 마법이 걸려있다.”

“마법!”

툴린의 말에 밀런이 깜짝 놀라 급히 뒤로 물러났다.

“클클, 이젠 겁이 좀 나느냐?”

“지금… 거짓말을 한 겁니까?”

밀런이 장난스럽게 웃음을 짓고 있는 툴린을 보며 버럭 소리를 높였다.

“누가 거짓말을 했다고 그러느냐! 마법사가 거짓을 말하는 걸 본 적이 있느냐!”

“하지만 조금 전 분명….”

“정신계 마법이 걸려있는 건 사실이다. 다만 사람의 몸엔 전혀 피해를 주진 않을 뿐이지. 오히려 일시적으로 고통과 피로를 잊게 해주기도 하고 말이야.”

“그, 그렇습니까?”

툴린의 말에 밀런이 당황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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