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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용병라이더-179화 (179/404)

179.도주2

“으으.”

랜트가 힘겹게 눈을 뜨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전히 아킨스 자작의 집무실이었다. 고급스러운 카펫부터 서적이 빽빽하게 들어찬 책장까지 모두 익숙한 것들이었다. 하지만 고개를 조금 돌리자 이질적인 광경이 눈앞에 나타났다.

고급스런 가죽 의자에 앉아 조금 전까지도 밤의 숨결을 비우던 아킨스 자작이 목이 반쯤 잘려나간 상태로 처참하게 죽어 있었다.

“대장! 녀석이 깨어났습니다.”

한쪽 벽에 몸을 기댄 채 밤의 숨결을 입안으로 털어 넣던 기사가 랜트의 몸을 발로 툭툭 차며 말했다.

“그래?”

대장이라 불린 사내!

조금 전까지 랜트를 고문하던 바로 그자가 그 앞으로 다시 다가와 손을 폈다.

“다행히 아공간 석이 잘 봉인되었다. 녀석이 밖으로 튀어나올 일은 없을 것 같으니 우리도 다시 시작해 볼까?”

사내가 랜트를 보고 하얀 이빨을 드러내며 웃었다.

와이번은 가디언으로, 맹약자가 위험에 빠지면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때문에 사내는 랜트를 제압하는 즉시 아공간 석을 봉인진이 그려진 수정구에 봉인해 외부와의 시선을 단절시켰다.

어차피 부상이 심한 와이번이라 한동안 아공간 석에 머물러 있는 것이 좋았다.

“자, 다시 질문하지! 블랙 와이번이 있는 곳은?”

“…모른다. 난 그저… 우연히 하늘에서 싸우는 블랙 와이번을 보았을 뿐이다.”

“그걸 날 보고 믿으란 말인가?”

사내가 날카로운 단검을 뽑아 천천히 랜트의 뺨에 가져다 댔다. 싸늘한 금속의 기운이 뺨으로 스며들어 왔다.

“솔직하게 말하면 와이번을 회수할 동안 편안한 생활을 보장하겠다. 하지만 계속 입을 열지 않는다면 와이번이 상처를 치료할 몇 달 동안 살아있는 걸 후회하게 만들어주겠다.”

“정, 정말 모른다. 우연히… 정말 우연히 그곳에서 추락하는 와이번을 보았을 뿐이다.”

“우연! 모두… 우연이다? 크크!”

사내가 비틀린 웃음을 지으며 소리쳤다.

“우연히 블랙와이번이 나타났고, 우연히 공중전을 목격했는데, 하필 우연히 골드 와이번이 바로 눈앞에 추락하는 거야. 그런데 어! 또 이놈의 와이번은 우연히 아직 숨이 붙어 있어! 마침 아공간 석까지 가지고 있네? 와! 아주 그날은 운수가 대통한 날이었나!”

사내의 장난기 어린 목소리가 점차 분노로 바뀌더니, 그가 곧 살기 어린 눈으로 랜트를 바라보았다.

“넌 이게 말이 된다 생각하나?”

“하… 하지만 모두 사실… 크악!”

랜트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내의 손에 들려있던 단검이 정확히 겨드랑이 사이로 파고들었다.

“크크! 말하지 않겠다면 좋아!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해 간단히 말해주겠다. 똑똑히 들어!”

사내는 천천히 일어나 아킨스 자작에게로 다가갔다.

“원래 와이번을 회수할 때는 말이야, 기간에 따라 대응 방법이 달라. 너처럼 빨리 찾았을 경우는 좀 복잡해. 맹약자를 죽이면 와이번이 또 한 번 정신적 충격을 받을 수 있거든, 그래서 단번에 죽이진 못해!”

촤악-

사내가 아킨스 자작의 피 묻은 옷을 뜯어냈다.

“그래서 찾는 즉시 단번에 사지를 잘라내지! 도망칠 수 없게 말이야!”

사내가 랜트에게 다가가 겨드랑이에 박힌 단검을 거칠게 잡았다.

“크아악…! 읍읍!”

랜트가 어깨에서 올라오는 고통에 몸부림을 치며 비명을 지르자 사내가 아킨스 자작의 피 묻은 옷자락을 입속으로 밀어 넣으며 작은 목소리로 귓가에 속삭였다.

“이제부터 네놈의 팔 한 짝을 잘라낼 거야! 고통 속에서 다시 잘 생각해보면 블랙 와이번을 타던 놈이 기억날 거다. 그럼 다음 질문에 그 녀석이 누군지 내게 살짝, 아주 살짝만 말해주면 되는 거야! 어때, 할 수 있겠지?”

사내가 음침하게 미소를 지으며 단검을 그어 올리고 단번에 팔을 잡아 뜯어냈다.

“…으읍… 읍읍!”

랜트가 팔이 뜯겨나가는 고통에 거칠게 몸부림을 치며 비명을 질렀지만, 온몸이 단단히 결박된 랜트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포션!”

사내가 손을 들어 올리자 작은 병 하나가 날아와 잡혔다.

“붉은색?”

“마법사의 포션입니다.”

사내가 인상을 찌푸렸다. 마법사의 포션은 부작용이 심해 자칫 잘못 사용하면 사용자를 죽일 수도 있었다.

“설마… 죽는 건 아니겠지?”

“제법 잘 만든 포션입니다. 고통이 따른다는 부작용이 있긴 하지만 효과는 확실합니다.”

“그래?”

사내가 붉은 포션의 마개를 열어 랜트의 어깨에 쏟아부었다.

“으으읍!”

순간 랜트가 두 눈을 크게 뜨더니 거칠게 몸부림을 치기 시작했다. 팔이 잘려나갈 때 보다 더 격렬해 그가 얼마나 큰 고통을 겪는지 보는 사람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부글부글….

랜트의 격렬한 반응에 화답을 하듯, 포션이 스며든 상처가 격렬하게 피거품을 일으키며 급속도로 아물기 시작했다.

“이야! 이거… 효과 하나는 확실한데?”

사내는 고통에 신음하는 랜트보다도 급격히 아물어 가는 상처를 더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이 정도면 신전급 포션에 뒤지지 않을 정도의 치유력이군!”

“가격은 신전 포션의 절반도 되지 않습니다만…. 구하기는 그보다 더 어렵습니다.”

“흠… 이걸 만든 마법사가 누군지 알아봐! 대량으로 만들 수만 있다면 영지에 큰 힘이 될 거다.”

“알겠습니다.”

사내가 고개를 끄덕이며 랜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이미 어깨의 상처는 포션 덕분에 말끔히 치료되어 있었다.

“좋아, 그럼 다시 시작해 볼까?”

사내가 랜트의 입을 막고 있던 천을 뽑아냈다.

“우웩- 쿨럭쿨럭!”

랜트가 격하게 기침을 내뱉으며 힘겹게 말했다.

“피… 피스트 워리어!”

“뭐?”

사내가 눈을 빛내며 랜트를 바라보았다.

“내가 아는 건… 놈이… 두 기사단장을 죽이고 도주했다는 사실 뿐이다…! 그러니… 제발!”

랜트가 애원하듯 붉게 충혈된 눈으로 말했다.

“놈이 피스트 워리어란 말이지!”

사내가 랜트의 말에 미소를 지었다. 드디어 놈에 대한 작은 단서 하나를 찾아낸 것이다

“아주 좋아! 진작 이렇게 대답을 했다면 팔이 잘리지도 않았을 것인데…. 자자! 다시 잘 생각해 봐! 뭘 더 알고 있지!”

사내가 단검을 들어 랜트의 뺨을 톡톡 두드리며 물었다.

“…더 이상은 정말 아는 게…!”

“잘 생각해봐! 분명 생각나는 게 더 있을 거야!”

랜트의 얼굴을 두드리던 단검이 목을 지나 어깨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안돼 …생각! 그래 생각났다. 암청색 오러! 놈은 특이한 오러를 사용했다고 들었다.”

“흠! 어둠 계열의 오러라면… 확실히 특이하군!”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러 색을 확인하면… 놈을 확실히 찾을 수 있다. 얼마 전 영주님도 범인을 잡기 위해 영지로 들어온 피스트 워리어를 직접 만나셨다.”

“피스트 워리어!”

커억-

사내가 랜트의 목을 틀어쥐었다.

“영지에 피스트 워리어가 들어와 있단 말이냐!”

격투술을 익힌 사람은 극히 드물다. 경지에 올라 피스트 워리어라 불리는 사람은 더 만나기 어렵다. 그런데 단 며칠 사이 영지에 두 명의 피스트 워리어가 나타났다. 우연이라고 보기엔 믿기 어려웠다.

“콜록… 그, 그렇다. 놈과 비슷한 체격을 가져 처음에는 의심을 했지만… 놈의 오러는 청백색이었다. 사용하는 격투술도… 놈과는 전혀 달랐다.”

“마치 녀석의 격투술을 직접 본 것처럼 말하는군!”

“직접 봤다.”

랜트의 말에 사내의 눈이 빛났다.

“피스트 워리어의 격투술을 직접 봤다고? 어떻게? 직접 겨뤘나?”

“…아, 아니다. 우연히 조세츠 자작의 호위기사인 루트 경과 대련하는 모습을 봤다.”

“조세츠 자작! 그 놈이 이곳에 있다고?”

사내가 얼굴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아직 보고 받은 것이 없습니다.”

한쪽에 석상처럼 서 있던 와이번 나이트가 고개를 숙였다.

“젠장, 일을 어떻게 하는 거야! 당장 놈을 잡아! 녀석이 빠져나가면 큰일이다. 아! 아니, 내가 직접 간다. 그 피스트 워리어, 내가 직접 만나봐야겠어!”

“알겠습니다.”

사내가 몸을 일으켜 밖으로 향했다.

“대주, 이 녀석은 어떻게 합니까?”

사내가 문을 나서기 전 바닥에 널브러진 랜트를 무심히 바라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원칙대로 처리해!”

사내가 집무실을 완전히 빠져나갔다.

“…안돼! 으아악!”

집무실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사내가 얼굴을 찌푸렸다.

“혀는 뽑지 말라고 해! 또 물어볼 게 남았을지 모르니.”

“알겠습니다.”

* * *

“비밀통로는 빈민가 동쪽에 위치한 마른 수로예요. 지금은 사용되지 않아요. 수십 년 전에 강물이 범람해서 원래 있던 강 아래쪽에 새로운 수로가 만들어졌거든요.”

소년의 말이 끝나자 밀런이 히죽 웃음을 지었다.

“어때, 내 말이 맞지!”

“비열한 놈!”

코퍼가 인상을 찌푸리면서 고개를 돌려 브린을 바라보았다.

“확인해!”

“갑니다!”

브린이 버크의 팔을 툭 치며 밖으로 달려나갔다.

“왜 또 나야!”

버크가 버럭 고함을 지르면서도 브린을 쫓아 밖으로 달려나갔다.

“오호, 빠른데?”

밀런이 밖으로 달려나가는 두 사람을 보며 말했다. 코퍼는 밀런을 보며 인상을 찌푸리더니 몸을 돌렸다.

“자! 그럼 이제 한배를 탄 것 같은데 이건 좀 풀어주면 안 될까?”

밀런이 몸을 결박한 밧줄을 보며 말했다. 하지만 선뜻 그를 풀어주려는 사람이 없었다. 밀런을 잡아 온 사람은 그들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시안느와 세인에게로 향했다.

“아무래도 세인 경이 결정해야 할 것 같은데요?”

시안느가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지만 세인은 오히려 카일을 돌아봤다.

결정권을 카일에게 넘긴 것이다.

“휴… 풀어주죠. 일단 한배를 탄 건 맞는 것 같으니….”

“알겠어요.”

세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풀어주세요.”

세인의 허락이 떨어졌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세인도 더 이상 관심이 없는지 고개를 돌려버렸다.

“이봐! 말만 하지 말고 날 풀어줘야 할 거 아니야!”

밀런의 고함 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문 앞에 서 있는 루트에게로 향했다. 지금 이곳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가만히 서 있는 사람은 루트가 유일했다.

더구나 루트는 밀런을 여기까지 짊어지고 온 장본인 이기도 했다. 일말의 책임이 있다는 말이었다.

“…젠장!”

루트가 주변의 따가운 시선에 입술을 깨물며 천천히 밀런에게 다가가 검을 뽑아 들었다.

날카로운 롱소드를 들고 살기 어린 눈빛으로 다가오는 루트의 모습에 밀런이 주춤 뒤로 물러났다.

“이봐, 설마 그걸로 날 찌를 생각은 아니겠지!”

“…흥!”

스악-

루트가 단번에 검을 휘둘러 밀런의 밧줄을 잘라냈다.

그리고는 주변을 한번 둘러보더니 카일이 있는 곳으로 슬며시 다가가 벽에 기대섰다.

영지가 와이번에게 공격을 받아 영주성이 무너진 이상, 아킨스 자작령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실상 루트가 돌아갈 곳은 없었다. 더구나 돌아가는 상황을 봐도 영지에 남아 있기보단 이들과 함께 움직이는 것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더 컸다.

하지만 루트는 포로로 잡혀 온 외부인이었다. 비록 풀려나긴 했지만, 처음부터 적이었던 사람을 받아들이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때마침 밀런을 풀어주란 세인의 목소리에 사람들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루트를 향했다. 루트로선 세인의 명을 듣고 밀런을 풀어주면서 자연스럽게 카일의 일행과 합류할 기회가 찾아온 것이었다. 비록 여인이긴 하지만, 세인은 자신보다 월등히 실력이 높을 뿐 아니라 기사다. 용병기사인 루트가 그녀의 밑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하등 이상할 게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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