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도주
털썩-
루트가 밀런을 바닥에 내팽개치듯 내려놓으며 불결한 기분을 날려버리려는지 옷을 털었다.
그사이 세인과 시안느는 한쪽에 누워있는 카일에게 다급히 다가갔다.
“무사히 돌아와 다행입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너무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무리하게 흉부의 마나 플라워를 개화시키려다 문제가 생겼을 뿐입니다. 조금 쉬면 괜찮아 질 겁니다.”
카일이 태연하게 말했지만 듣고 있는 시안느나 세인은 그렇지 않았다. 흉부에 위치한 마나 플라워를 개화시켰다는 말은 카일이 상급에 진입했다는 뜻과 같았다.
“설마… 상급 엑스퍼트에 올랐단 말인가요?”
“개화는 시켰지만, 아직 온전히 마나 플라워를 사용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닙니다. 상급에 올랐다고 할 수는 없죠. 그것보다… 저 사람들은….”
카일은 자신의 상황을 대충 얼버무리며 낯선 사람들에게 화제를 돌렸다.
“루트라는 자작가의 용병기사예요. 세인 경을 납치하려다 항복했어요. 아킨스 자작이 세인 경을 납치하려 했단 사실을 밝힐 수 있을 것 같아 데려왔지만….”
시안느가 고개를 저었다. 이곳으로 달려오면서 와이번의 공격으로 화마에 휩싸인 자작성을 보았기 때문이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놈은 밀런이란 놈이다. 용병들 사이에선 제법 유명하지! 쓰레기 같은 놈으로 말아야!”
언제 다가왔는지 코퍼가 밀런을 싸늘하게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곧 사람들이 모여 여길 빠져나갈 방법을 의논하기로 했다.”
“여기서… 저와 말입니까?”
“넌 이미 한 무리를 이끌고 있다. 당연히 회의에 참석해야지.”
코퍼가 카일의 주변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러네요. 저도 이미 사람들을 이끌고… 있었군요.”
코퍼의 시선을 따라 주변을 둘러본 카일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 물어봐도 되겠나?”
“물어 보십시오.”
카일의 한참을 망설이다 무겁게 입을 여는 코퍼를 바라보았다.
“왜… 우리에게 책임을 묻지 않는 거지?”
“…책임 말입니까?”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난 널 협박해 운석검을 빼앗으려 했다. 심지어 몬스터까지 끌어들여 위험에 빠뜨렸지. 헌데 왜 책임을 묻지 않는 거지?”
“그야… 이미 충분히 책임을 물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오늘 보니 그 생각이 틀린 것 같지도 않네요.”
“뭐?”
벽에 몸을 기댄 카일이 웃음을 지었다.
“그때의 일로 죽거나 다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저 제 기분만 조금 상했을 뿐이죠. 화는 났지만 그렇다고 상단에 피해를 주면서까지 무력을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른 방법을 생각했죠.”
“다른 방법? 지금까지 넌 우리에게 어떤 요구나 강요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신경도 쓰지 않았지. 그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코퍼가 미간을 좁히며 말했다. 카일은 지금껏 단 한 번도 그때의 일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다. 카일 뿐만 아니라 카일의 동료라 할 수 있는 세 여인들도 모두 그때의 일을 잊은 것처럼 행동했다.
덕분에 코퍼를 비롯한 용병대는 하루하루 살얼음판을 걷는 듯 심장을 졸이며 살았다.
‘오늘 갑자기 카일이 검을 들고 찾아와 책임을 묻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상행이 끝나는 날 모두 한꺼번에 죽이려고 참고 있을지도 모르지!’
‘워드라는 자를 시켜 잠든 우리를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진 않을까?’
코퍼 용병대는 수많은 추측과 상상으로 잠도 제대로 들지 못할 정도로 초췌해져 갔다. 그러던 중 카일이 갑자기 신관들 손에 실려 오자 코퍼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직접 카일에게 물어보기로 한 것이다.
“바로 그겁니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것.”
카일의 말에 코퍼가 고개를 저었다.
“미안하지만 난 평민 출신에 알고 있는 글자도 몇 되지 않는다. 돌려 말하지 말고 직접적으로 말해줬으면 좋겠다.”
“말 그대로입니다. 전 아무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강요도 요구도 할 필요가 없었죠. 스스로가 내린 벌을 받고 있었으니까요.”
“…스스로가 내린 벌?”
“그래요. 제가 중급 엑스퍼트란 사실을 알고 난 뒤 어땠나요? 아마도 보복이 두려워 걱정했을 겁니다.”
“…맞다.”
“전 아무 말도 행동도 취하지 않았지만, 어땠습니까? 보복에 대한 걱정이 줄어들었습니까?”
카일의 물음에 코퍼가 고개를 저었다.
“그럴 리가…. 그랬다면 직접 찾아와 물어보지도 않았을 거다. 오히려 불안감이 가중되어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했다. 덕분에 신경이 날카로워져 대원들 간의 싸움도 부쩍 늘었지.”
“바로 그겁니다. 걱정과 불안감. 다들 알아서 벌을 받고 있었던 거죠. 제가 무력을 사용했다면 고통이야 있었겠지만 마음은 편했을 겁니다.”
“…그런 건가?”
코퍼가 지난 일을 생각해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카일의 말대로였다. 지금껏 코퍼 용병대는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미 충분히 벌을 받았을 겁니다. 그러니 전 따로 책임을 물을 생각이 없어요.”
“휴… 알겠다. 그리고… 미안하다. 정식으로 그때의 일은 사과하마!”
코퍼가 고개를 숙였다.
“사과는 받아들이겠습니다.”
“녀석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주고 다시 오겠다.”
코퍼가 급히 용병대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클클, 이야기를 대충 들어보니 사람들의 심리를 이용한 것 같은데…. 벌이 과한 것 아니냐? 며칠이긴 해도 고통이 컸을 것이다.”
“무슨 말씀이세요. 저들은 트롤까지 끌어들여 우릴 위협했어요. 자칫 상단사람들까지 위험해질 뻔한걸요. 며칠 불안감에 괴로워했겠지만… 그만한 벌은 당연한 것 아닌가요?”
툴린의 말에 이엘이 미간을 좁히며 반박했다.
“그래도 결론적으론 아무 일도 없지 않았느냐! 다친 사람도 없고…. 사람의 마음은 생각보다 약하다. 불안과 공포는 사람에게 큰 고통을 줘. 차라리 어딜 부러트리는 게 나을 뻔했다.”
“…글쎄요? 저들이 겪은 불안감이나 공포는 제 일이 아니니 모릅니다. 하지만 한가지 만큼은 분명하게 말씀드릴 수 있죠.”
카일이 기뻐하는 용병들을 보며 말을 이었다.
“제가 보복을 했다면 사람들은 절 원망했을 겁니다.”
“원망? 그게 무슨 소리냐? 잘못에 대한 벌을 내린 것인데?”
“저들은 모두 아일론 상단의 상행을 책임진 용병들이죠. 암흑마법사와 변종 오크의 공격으로 용병들도 대부분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들에게 보복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상단 사람들이라면 충분히 이해하지 아니겠느냐? 더구나 트롤이 나타났다면 그들도 피해를 보았을 것인데?”
“물론 처음이야 이해를 했을 겁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어떨까요.”
상단을 지키는 실질적인 무력은 카일과 그 일행들이다. 이 사실은 변종 오크나 흑기사를 상대해온 상단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다. 하지만 카일 일행만으로 상단 전체를 보호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용병이 사라지면 불편하고 불안한 건 상단사람들입니다. 결국 사람들은 용병들에게 보복한 절 원망했을 겁니다.”
“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구나.”
“사실 좀 귀찮기도 했습니다. 코퍼 용병대에게 책임을 묻게 되면 결국 상단 호위를 저희들이 전적으로 맡아야 하는데…. 그러기엔 너무 힘들 것 같았거든요”
카일과 툴린의 대화가 끝날 때쯤 마티슨과 토일, 조세츠 자작과 코퍼가 다가왔다.
“상황이 급박하니 바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는 곧장 북문을 통해 빠져나갈 생각입니다.”
“북문을 통과하면 넓은 개활지야! 공중에서 공격하는 와이번을 어떻게 피할 생각인가?”
“북문을 통과하는 동시에 조를 나눠 사방으로 흩어질 생각입니다. 남문을 통해 빠져나갈 생각도 해 보았지만 자칫 고립될 가능성이 있어 포기했습니다.”
남쪽은 베링 산맥과 이어지는 숲과 바위지대가 있어 숨을 곳이 많아 보이지만, 길이 좁고 험준해 자칫 고립되면 몰살당할 가능성이 높았다.
“피해가 클 거야! 아무리 사방으로 흩어져 빠르게 달린다고 해도 와이번의 속도는 상상을 초월해!”
“하지만 방법이 없습니다. 시간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저들이 영주성을 함락시키기 전 이곳을 빠져나가자는 게 상단의 입장입니다.”
“흠… 다른 방법이 없다면… 우리도 따를 수밖에… 사람들이 많으면 많을수록 탈출할 가능성도 크겠지!”
조세츠 자작이 미간을 찌푸리면서도 다른 방법이 없는지 고개를 저었다.
“카일! 넌 어쩔 생각이냐? 우리와 함께 가겠느냐?”
마티슨 부 단주가 카일을 보며 물었다. 호위병력이 부족한 아일론 상단으로서는 카일의 도움이 절실했지만, 지금은 강요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함께 하고 싶지만, 당장 제 몸을 움직이기도 힘듭니다.”
“그건 걱정 마라! 함께 가겠다면 우리 코퍼 용병대가 도와주겠다.”
코퍼가 카일을 보며 말을 이었다.
“…이렇게라도 사과하고 싶다.”
코퍼의 말에 카일이 미소를 지었다.
“감사합니다. 그럼 저도 함께 움직이겠습니다.”
“잘 생각했네!”
마티슨이 고개를 끄덕이며 토일을 돌아보았다.
“불필요한 물건은 모두 버려! 최대한 가볍게 이동한다. 도자기와 옹기는 등짐으로 일꾼들에게 나눠 지게하고, 수레와 마차도 버려! 모두 말을 타고 이동한다.”
“이미 주변으로 사람들을 보내 말을 최대한 수배하고 있습니다. 등짐도 몬스터 가죽을 말아쥐면 어렵지 않게 만들 수 있습니다.”
“좋아!”
마티슨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주변을 돌아보며 말했다.
“죄송하지만, 수레와 마차를 버려야 하기에 개인 물품이나 식량은 직접 챙겨야 합니다. 상단의 마차를 개방할 테니 필요한 건 직접 챙기십시오.”
“그럼 서둘러 움직이도록 하지!”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그때 예기치 못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잠깐!”
지금까지 바닥에 쥐죽은 듯이 누워있던 밀런이 갑자기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는 사람들을 돌아보더니 히죽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보아하니 영지에서 급히 빠져나가려는 것 같은데, 날 살려주면 안전하게 빠져나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겠다.”
밀런의 말이 떨어진 순간 소란스럽게 움직이던 사람들의 움직임이 그대로 멈췄다.
“안전하게 나갈 수 있는 방법? 아직 상황을 모르나 본데… 지금 영지가 공격당하고 있다. 성문이 모두 막혔다는 말이다. 그런데도 안전하게 빠져나갈 길이 있단 말이냐?”
자리에서 일어난 코퍼가 밀런을 노려보며 말했다.
“오, 코퍼 아닌가? 오랜만이군! 그럼 이 사람들은 아일론 상단이겠군!”
“쓸데없는 소리를 하기엔 상황이 좋지 않다. 말을 하지 않겠다면 내가 직접 목을 잘라주지!”
“쯧! 옛 친구가 반갑게 인사를 하는데 검부터 들이대는군. 섭섭하게!”
밀런이 서운하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지만, 얼굴엔 웃음기가 가득했다.
스르릉-
코퍼가 밀런의 말에 곧장 검을 뽑았다.
“아아, 알았어! 말할 테니 이 검부터 치워라!”
밀런이 목에 드리워진 검을 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밀어내며 말했다.
“대답이 먼저다.”
“쯧, 야박하긴! 알았다. 크음… 내가 말한 길은 성문이 아니다. 성문을 거치지 않고 빠져나갈 수 있는, 일종의 비밀통로라고나 할까?”
“헛소리! 우리 코퍼 용병대도 수년간 이곳을 왕래했지만, 비밀통로가 있다는 말은 들은 적이 없다.”
“당연한 것 아닌가? 비밀통로가 왜 비밀통로겠어! 비밀이잖아, 비밀.”
밀런이 웃음을 지으며 손가락을 입술에 댔다.
“그래서, 그 비밀통로가 어디지!”
“아! 그전에 날 살려 준다는… 아니 내 몸에 어떠한 위해도 가하지 않겠다는 약속이 필요해! 그리고 적당한 대가도 있어야겠지?”
밀런의 말에 코퍼의 얼굴이 찌푸려 졌다.
“네놈을 어떻게 믿고!”
“골드는 성을 빠져나간 뒤에 받겠다. 어때, 이만하면 믿음이 가지 않아?”
“좋소! 성을 안전하게 빠져나간다면 우리 아일론 상단이 골드를 지급하지!”
“천 골드!”
밀런이 마티슨을 돌아보며 말했다.
“좋소!”
“앵? 깎지도 않네!”
“깎으려 들면 더 올리겠지!”
“크크, 이런, 들켰군! 좋아, 약속은 약속이니 나도 신용을 지켜야겠지”
밀런이 웃으며 한쪽에 기절해 있는 소년을 발로 툭툭 찼다.
“이봐, 일어나!”
“으음-.”
“일어나라구!”
밀런이 소리를 질러 아이를 깨웠다. 소년이 머리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밀런!”
“그래 나야! 일단 정신 좀 차리지.”
밀런의 말에 소년이 고개를 흔들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어디죠?”
“쓸데없는 말 집어치우고, 너! 비밀통로 알고 있지?”
밀런의 말에 사람들의 얼굴에 황당함이 어렸다. 이제 보니 비밀통로의 존재를 알고 있는 사람은 밀런이 아니라 바닥에 쓰러져 있던 소년이었다.
“…그건 왜?”
“어딘지 말해! 그럼 보상금 문제는 없던 일로 해주지!”
밀런의 말에 소년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밀런에게 다시 보상금을 토해내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소년은 충분히 기뻤다.
“정말이죠! 나중에 다른 말 하면 안 돼요.”
“물론! 그래서 그게 어디야?”
밀런이 미소를 지으며 소년을 재촉했다.
“그곳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