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운수 좋은 날7
“헉헉헉….”
루트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흘러내리는 땀을 닦아냈다.
“벌써… 지치신 겁니까?”
“그럴 리가! 지친 건 내가 아닌 것 같은데?”
“전… 얼마든지 싸울 수 있습니다만.”
“좋아, 그럼 승부를 봐야겠지!”
루트가 다시 검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이미 체력은 물론 오러까지 바닥났는지 검을 쥔 손이 파르르 떨려왔다.
“그만!”
막 카일을 향해 달려들려는 루트를 조세츠 자작이 막아섰다.
“이제 그만하게!”
“하지만… 주군! 아직 승부가 나지 않았습니다.”
“어허! 이건 결투가 아니야.”
조세츠 자작이 직접 루트의 팔을 잡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는 카일을 바라보았다.
“이만하면 훌륭한 대련이었다. 오늘은 둘 다 지친 것 같으니 다음에 다시 하는 게 어떻겠나?”
“휴…. 자작님의 말씀에 따르겠습니다. 사실 너무 지쳐 서 있기도 힘들었습니다.”
카일이 이마 위로 흘러내리는 땀을 닦으며 다행이라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이런, 많이 힘들었나 보군…. 이럴 줄 알았으면 조금 더 지켜볼 걸 그랬어!”
자작이 아쉬운 듯 카일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하하! 이미 늦었습니다.”
카일이 웃으며 멍하니 서 있는 루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루트 님! 좋은 대련이었습니다. 비록 이번엔 무승부로 끝났지만, 다음엔 꼭 제가 이길 겁니다.”
카일이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루트는 잠시 카일을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쉽지 않을 거다.”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걱정 마라. 실망시키지 않을 테니!”
루트가 검을 검집에 밀어 넣고는 천천히 돌아서 걸어갔다.
“몰골이 말이 아니군.”
조세츠 자작이 루트를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만신창이가 된 카일을 보며 얼굴을 찌푸렸다.
루트와 카일의 대련은 격렬하긴 했지만 그렇다고 큰 부상을 당하지는 않았다.
카일은 잽이나 로우킥 또는 어깨 차징 정도의 공격을 구사하기도 했고, 방어 때를 제외하면 오러도 사용하지 않아 부상이라고 해봐야 멍이 조금 든 정도에 불과했다. 루트 역시 근접한 상황에서 검을 짧게 잡고 끊어 찌르거나 휘두르는 공격을 주로 하였다.
대신 검을 든 루트와 근접한 상황에서 이루어진 격렬한 공방전으로 카일의 레더아머 여기저기가 잘려 버렸다.
만신창이가 된 레더아머만 본다면 카일의 완벽한 패배로 보였다.
“휴…. 수리는 힘들겠죠.”
카일이 갈라지고 잘려나간 레더아머 여기저기를 살피며 말했다.
“수리하는 게 더 비용이 많이 들겠어…. 차라리 새로 사는 게 좋겠군.”
“아무래도 그래야 할 것 같습니다.”
카일이 고개를 흔들었다.
“갑옷은 내가 사주고 싶은데, 괜찮겠나?”
“아닙니다. 저도 골드는 충분히 있습니다. 걱정 마십시오.”
“루트와의 대련 때문에 갑옷이 망가졌는데….”
“정말 괜찮습니다.”
“휴…. 본인이 싫다니 어쩔 수 없군. 대신 영지로 돌아가면 지난번 받은 도움까지 충분히 보상하겠네! 설마 이것까지 거절하는 것은 아니겠지?”
조세츠 자작이 눈을 가늘게 뜨고 카일을 바라보았다.
“좋습니다. 그럼 저도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하하! 좋아. 깜짝 놀랄만한 보상을 할 테니 기대하게!”
조세츠 자작이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카일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자! 이제 그만 돌아가 보게! 아무래도 아킨스 자작이 자네에게 관심이 많은 것 같으니 조심하고.”
조세츠 자작의 옆으로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마도 자넬 회유하려는 것 같은데… 조심하게! 꽤 욕심이 많은 늙은이니까!”
“잘 알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서 가보게. 나처럼 늙은 노인보단 자넬 걱정하는 레이디들과 함께있는 게 더 좋겠지.”
조세츠 자작이 묘한 웃음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세상에….”
만신창이가 된 카일의 모습에 세인이 깜짝 놀란 얼굴로 다가왔다.
“걱정 마십시오. 다친 곳은 없습니다.”
“정말 괜찮은 건가요?”
“괜찮습니다.”
카일이 웃으며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수고하셨어요.”
이엘이 카일의 옆으로 다가와 미리 준비한 마른 천과 물을 건냈다.
“고맙습니다. 마침 목이 말랐는데!”
카일이 단숨에 물을 들이켰다.
“잘하셨어요.”
“네?”
갑작스러운 이엘의 말에 카일이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대련 말이에요. 일부러 무승부를 만든 것 아닌가요.”
“…왜 그런 생각을 하신 겁니까?”
“상대는 조세츠 자작의 후계자이자 기사잖아요. 아무리 친분이 있다고 해도, 공개된 이런 자리에서의 패배로 자존심에 큰 상처를 받을 수 있잖아요.”
확실히 이엘의 말대로 루트는 중부와 남부 일대에서 알려진 기사였다. 이름도 없는 나이 어린 카일에게 패배한다는 것은 그의 명예를 크게 실추시키는 일이었다.
“아쉽지만 틀리셨습니다.”
“네?”
“시간이 더 있었다면 체력적으로 앞선 제가 이겼을 겁니다. 하지만 일부러 무승부를 만들려 했던 건 아닙니다.”
“그럼 정말 최선을 다했는데도 루트 경을 이기지 못했단 말인가요?”
세인이 놀란 듯 물었다. 비록 검은 들지는 않았지만, 평소 카일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루트를 제압할 수 있을 거라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루트 경은 근접전을 충분히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쉽게 공격이 먹히질 않더군요. 아마도 앞서 있었던 피스트 워리어와의 실전이 큰 도움이 되었을 겁니다.”
“그렇군요. 전 카일이 루트 경의 명예를 지켜주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끌며 무승부를 유도한 거라 생각했어요.”
“일부러 무승부를 유도했다면 레더아머가 이렇게 되지는 않았겠죠. 제법 아끼던 갑옷이거든요.”
카일이 아쉬운 듯 너덜거리는 갑옷을 떼어내며 말했다.
“아무래도 이건 다시 못 쓸 것 같네요.”
시안느가 엉망이 된 갑옷을 보며 말했다.
“아쉽지만 버려야 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용병등록을 하기 전 잡화점에 들러 새로 장만해야 할 것 같군요.”
“잡화점요?”
카일의 말에 시안느와 세인이 눈을 빛내며 카일을 바라보았다.
“네….”
“저도 따라가면 안 되나요?”
“저도 가고 싶어요.”
“그야…. 안될 건 없습니다만….”
“좋아요. 그럼 내일 다 같이 가기로 해요.”
“이엘도 갈 건가요?”
“그럼 저만 혼자 여기 있으란 말인가요?”
이엘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카일을 바라보았다.
“아니…. 그런 건 아닙니다. 다 같이 가시죠.”
카일이 세 여인을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 * *
“괜찮나?”
조세츠 자작이 루트에게 다가가 물었다.
“주군…. 괜찮습니다. 멍이 조금 들긴 했지만 큰 부상은 없습니다.”
“이걸 쓰면 금방 나을 거야.”
조세츠 자작이 품 안에서 작은 포션 병을 꺼냈다.
“괜찮습니다. 포션을 쓸 정도로 큰 상처는 없습니다.”
루트가 급히 손을 저었다. 포션은 비싼 물건이다. 고작 멍 자국이나 치료하기에는 아까운 물건이었다.
“쓸데없는 생각 말고 상처나 치료해!”
조세츠 자작이 루트의 손에 포션을 쥐여주었다. 루트는 잠시 망설이다 자작의 엄한 눈빛에 마지못해 포션을 마셨다.
순간 루트는 가슴속에서 올라오는 청량함과 함께 멍 자국은 물론 피로감까지 단번에 사라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귀한… 포션입니다.”
“쯧! 넌 조세츠 자작가의 후계자다. 이 정도 포션은 얼마든지 구해줄 수 있어!”
조세츠 자작의 말에 루트가 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휴…. 감사합니다.”
“내가 대련에 끼어들어 실망한 것이냐?”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다만.”
루트가 고개를 저었다.
“저 녀석… 최선을 다하지 않았습니다.”
“실력을 감췄단 말이냐?”
조세츠 자작이 깜짝 놀라 물었다.
비록 조세츠 자작이 나서 대련을 멈추기는 했지만, 체력적인 차이만 아니라면 두 사람의 실력은 비슷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분명합니다.”
“그럼…. 승패를 가리지 못해 실망하고 있었던 게 아니란 말이냐?”
자작이 루트를 보며 물었다.
“카일은 저보다 앞서 있습니다. 처음부터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습니다. 그저 카일의 온전한 실력을 보지 못해 아쉬울 뿐이죠.”
“허허! 그런 거였나?”
조세츠 자작이 허탈하게 웃었다. 설마 루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 때문이었다
“흠…. 그럼 카일이 기사단장을 죽인 범인일 수 있다는 말이냐?”
“분명 숨기는 것은 있지만, 그렇다고 동일인이라 볼 수는 없습니다.”
“응? 조금 전 실력을 감추고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실력을 감췄다고 범인인 것은 아닙니다. 더구나 아킨스 자작님이 그냥 돌아가셨습니다. 만약 조그마한 꼬투리라도 잡았다면 그냥 돌아가진 않았을 겁니다.”
“그건 그렇지. 그 욕심 많은 늙은이가 꼬투리를 잡았다면 네게서 한몫 단단히 뜯어 갔겠지.”
조세츠 자작이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는 루트를 보며 말했다.
“내일 날이 밝는 대로 갈 곳이 있다.”
“네?”
“아무래도 당시 상황을 정확히 알아봐야겠다.”
“당시 상황이라면 여기 주인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그보다 더 정확하게 알아봐 줄 사람이 있다. 너도 알아두면 좋을 테니 준비하고 있거라.”
“알겠습니다.”
루트는 고개를 끄덕였지만, 의아한 표정으로 조세츠 자작을 바라보았다.
“여기 아킨스 자작령에 아시는 분이 있었던가?”
* * *
“워드 님도 필요한 게 있습니까?’
카일은 앞서 걸어가는 세 여인을 보다,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워드에게 물었다
“없다.”
“네?”
카일이 황당한 표정으로 워드를 바라보았다.
“필요한 건 없다.”
“그럼 왜 따라오시는 겁니까?”
“그냥.”
워드가 무표정한 얼굴로 카일을 바라보았다.
“따라가면 안 되는 건가?”
“아니….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아무 문제 없군.”
“하하…. 그렇죠. 아무런 문제 없습니다.”
카일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런데, 지금 어딜 가는 거냐?”
“어딜 가는지도 모르고 따라 오신 겁니까?”
“그렇다.”
워드의 당당한 말에 카일이 할 말을 잃고는 워드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다 왔어요.”
그때, 이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리자 눈에 익은 낡은 건물이 눈에 들어왔다.
“아는 곳인가?”
“얼마 전 알게 된 곳이죠. 툴린이라는 노인이 운영하는 곳인데… 제법 괜찮은 물건이 많습니다.”
카일이 미소를 지으며 낡은 문을 밀고 들어갔다.
딸랑-
손님의 방문을 알리는 작은 종소리와 함께 안에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고개를 돌려 문을 열고 들어온 카일을 바라보았다.
“안녕하세요. 또….”
안으로 들어서던 카일이 당황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그대로 멈춰 섰다.
“카일, 무슨 일이에요?”
갑자기 굳은 얼굴로 멈춰선 카일의 모습에, 이엘이 카일에게 다가서며 물었다. 하지만 곧 카일의 표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당신들….”
“이건… 생각지 못한 상황이군요.”
카일이 붉은빛을 토해내는 벽난로 주변에 앉아 있는 세 사람을 보며 말했다.
“응? 자네들이 여길 왜 와? 도망간 게 아니었나?”
지팡이를 짚고 일어난 툴린이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하지만 노인의 의문은 의외로 쉽게 풀렸다.
“역시 예상이 맞았군!”
조세츠 자작이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앵? 두 사람… 아는 사이인가?”
“조금 전 말씀 드린 카일이란 아이가 바로 저 아이입니다.”
“아!”
툴린이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하고 카일을 바라보았다.
“상황이 복잡해졌군요.”
카일이 굳은 표정으로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워드 님.”
카일의 말이 끝나는 순간 자리에서 사라진 워드가 뒷문 앞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두 분은 문 앞을 지켜 주세요.”
카일의 말에 세인과 시안느가 급히 문 앞을 막아섰다.
“무슨 짓이냐?”
가장 먼저 루트가 자작의 앞을 막아서며 소리쳤다.
“상황이 복잡해졌으니 간단하게 풀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모두… 죽이기라도 할 생각인가?”
루트가 당황한 표정으로 물었다.
“필요하다면 어쩔 수 없겠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으면 합니다.”
“상황 판단이 빠르군.”
“…귀찮은 일은 미연에 방지해야지요. 저희들이 빠져 나갈 동안만 이곳에 계시면 됩니다.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블랙와이번이 있으니 지금 사라지면 뒤를 쫓기도 힘들 거야. 그렇지 않나?”
“…아는 게 많으면 목숨이 위험합니다.”
카일이 싸늘하게 조세츠 자작을 바라보았다. 설마 블랙와이번에 대한 이야기까지 알고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하하! 걱정해줘서 고맙긴 하지만, 오늘은 대운이 터진 날이라 죽을 것 같지는 않다네! 아주 좋은 소식을 들었거든…. 어떤가? 자네도 들어보지 않겠나? 자네에게도 좋은 소식인 것 같은데?”
조세츠 자작이 크게 웃으며 카일을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