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2.아킨스 자작령4
“이제 보니 부하들을 버리고 도망간 겁쟁이가 다시 나타났군! 혹 자살할 용기가 없어 도움이 필요한 건가?”
마크가 빈정대듯 말했다.
“크크, 입만 살아있군! 조금 뒤엔 내 발밑에 깔려 살려달라 비명을 지르고 있을 거다.”
밀런의 말에 마크가 검을 천천히 뽑았다.
“좋아. 죽고 싶다면 소원을 들어줘야겠지.”
마크의 검이 곧장 밀런을 찔러 들어왔다. 밀런은 마크의 검을 보면서도 도망가지 않고 검을 뽑아 마주 달려들었다.
깡-
까강-
연달아 강렬한 검격이 오가며 불똥이 튀었지만, 두 사람의 실력은 우열을 가리기 힘들 정도로 비슷했다. 하지만 검술 자체만 보면 마크가 밀런을 압도하고 있었다. 그러나 밀런은 수많은 고난을 이겨온 용병으로, 놀라운 임기응변과 반사신경으로 비터의 공격을 번번히 피하거나 역공을 펼치고 있었다. 하지만 점차 밀런의 검에 익숙해지기 시작한 마크는 밀런을 압도적으로 밀어붙이기 시작했다.
깡-
깡-
연속적으로 검을 찔러 넣는 마크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어리기 시작했다. 적어도 다섯 수 안에 승부를 볼 수 있을 거라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하하! 아까 그 자신만만한 태도는 어디 갔지!”
깡-
“어서 날 발아래 깔아뭉개보란 말이다.”
마크가 장작을 패듯이 검을 내려칠 때마다 밀런이 몸을 잔뜩 움츠리며 물러났지만, 마크는 오히려 더욱 강력하게 검격을 날려댔다.
“이 도둑놈! 감히 우리가 가진 골드를 노려! 넌 내 손에 오늘 죽을 줄….”
마크가 고함을 치며 검을 더욱 높게 치켜들었다.
순간 자세를 한껏 낮춰 마크의 검을 막아가던 밀런의 품 안에서 한줄기 은빛 물체가 마크의 심장으로 날아들었다.
푹-
“크윽-!”
심장으로 향하던 은빛 물체를 인지한 순간 마크는 필사적으로 몸을 틀었다. 하지만 어깨 깊숙이 박혀 드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은으로 만든… 나이프군.”
밀런이 던진 나이프는 전투용이 아닌 귀족들이나 사용하는 고급스러운 문양의 은제 식기였다.
“크크, 그거 말인가? 며칠 전 영주성에 갔다가 하나 슬쩍했지!”
“네놈! 태생부터 도둑놈이구나!”
“뭐… 그럴지도….”
마크의 말에 밀런이 고개를 끄덕이며 작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바닥에서 일어나 먼지를 털며 마크를 향해 비웃음을 날리며 말을 이었다.
“그럼 넌 어떠냐? 평생 누군가의 물건을 빼앗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나?”
“그건…!”
마크가 밀런의 추궁에 당황한 듯 주춤 뒤로 물러났다.
“오호? 표정을 보아하니 네 녀석도 있었나 보군! 그럼 너와 난 다를 것이 없다. 아닌가?”
밀런의 말이 마크는 물론 비터의 심장을 아프게 찔러 왔다.
“설마, 그땐 어쩔 수 없었다 변명이라도 할 생각인가? 원래 처음엔 다 그런 것이거든, 어쩔 수 없었다. 이번 한 번뿐이다. 그러다 한 번이 두 번, 세 번이 되고, 결국 나처럼 되는 거지.”
마크는 밀런의 조롱 섞인 말에 제대로 대답할 수 없었다. 그도 지금껏 마음속으로 어쩔 수 없었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수도 없이 되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쓸데없는 말이 늘었군, 자! 그럼 다시 시작해 볼까? 이번엔 끝을 봐야지?”
밀런이 검을 들어 마크를 가리켰다.
“물러나. 저 녀석은 내가 상대하지. 넌 상처나 치료해.”
비터가 마크의 앞을 막아서며 말했다.
“하지만….”
“물러나!”
비터의 말에 마크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비터의 등장은 오히려 밀런을 기쁘게 했다. 그의 목표는 처음부터 마크 따위가 아니었다. 밀런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어렸다.
“이런, 이러면 내가 불리한 것 아닌가? 나는 방금까지 당신 친구와 싸우고 있었는데?”
“부상을 당한 상대보단 내가 나을 것 같은데?”
비터가 더 이상 대화는 필요 없다는 듯 검을 뽑아 휘둘렀다. 빠르게 뻗어간 검이 밀런의 목을 향해 떨어져 내렸다.
밀런은 급히 검을 들어 비터의 검을 막았다.
까아앙-
밀런의 검이 그대로 잘려 나가며 목으로 떨어져 내렸다. 하지만 이미 밀런은 자신의 검이 부러져 나갈 거란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자연스럽게 몸을 돌려 목으로 떨어져 내리는 검을 피했다.
사아악-
하지만 검을 완전히 피하진 못했는지 비터의 검이 어깨를 가르고 지나갔다.
“크윽….”
밀런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나며 부러진 검을 바닥에 버렸다.
“네놈!”
비터의 얼굴이 굳어졌다. 분명 놈은 검을 완벽히 피할 수 있었다. 비터 스스로가 검만 부러트릴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헌데 무슨 생각인지 밀런은 목으로 떨어져 내리는 검을 피하면서도 일부러 어깨를 들이밀었다. 분명한 목적이 있지 않고서는 행할 수 없는 행동이었다.
“이런… 나도 상처를 입었군!”
밀런은 고통 속에서도 비릿한 웃음을 흘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입구에 서 있던 사내를 바라보았다.
“형님! 마무리는 아무래도 형님이 나서셔야겠습니다.”
밀런이 뒤로 물러나는 순간 거구의 사내가 천천히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이런, 상처가 크군.”
핀크가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지만,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만은 피할 수 없었다.
“누구냐!”
비터가 긴장한 얼굴로 핀크를 노려보았다.
“난 아킨스 영지의 제2 기사단장 핀크라 하지.”
“핀크!”
“기사단장…!”
아킨스 자작령에 두 명의 중급 엑스퍼트 기사단장이 있다는 사실은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남부에서는 널리 알려진 이야기였다.
“기사단장이란 자가 설마 저런 강도질이나 일삼는 놈을 도우려는 거요?”
“밀런이 강도질을? 처음 듣는 이야기군! 혹 증인이 있나?”
핀크가 미소를 지으며 오히려 마크를 보며 물었다.
“방금 저자가 하는 말을 못 들었단 말이요?”
“못 들었다! 누구든 밀런의 말을 들은 사람은 나오라.”
핀크가 식당 내부를 둘러보며 물었다. 싸움이 시작되는 순간 2층과 3층에 묵고 있던 손님들이나 용병들 수십이 몰려나와 있었지만,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었다.
“이런! 아무도 없군… 그럼 이젠 내 차례인가?”
핀크는 돌연 비터와 마크를 사납게 노려보았다.
“네놈들이 영지에서 용병들을 학살했다지?”
“그놈들은 돈을 노린 강도들이다.”
“증인은 있나?”
“그야….”
당연히 없다. 살아남은 자라고는 밀런 뿐이었고, 이른 아침 아무도 없는 골목에서 벌어진 일이니 증인이 남아있을 리가 없었다. 물론 비터를 유인한 소년과 소녀 그리고 뒷골목 주먹패가 몇 명 있었지만, 그들도 밀런과 용병들이 강도질을 하려는 모습은 직접 보진 못했으니 증인이라 할 수가 없었다.
“이런…. 역시 증인도 없군. 하지만 난 증인이 있는데?”
핀크가 부상을 당해 한쪽에 서 있는 밀런을 가리켰다.
“분명 저 녀석들이 용병들을 무참히 죽였습니다. 전 복수를 하러 왔습니다.”
밀런의 당당한 말을 믿을 사람은 식당 안에 아무도 없었지만 그렇다고 반박할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그렇다는군! 그럼 결론이 난 건가?”
핀크의 말에 비터와 마크의 얼굴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이… 이 일은 용병들의 일이요. 기사단장인 그대는 관여할 수 없소! 이번 일은 저자와 해결하겠소.”
비터가 밀런을 가리키며 크게 소리쳤다.
* * *
“…저 사람, 생각보다 멍청한 것 같아요.”
식당 한쪽 구석진 자리, 카일과 이엘이 가면으로 얼굴을 가린 채 흥미롭게 상황을 주시하고 있었다.
“뭐가 말이요?”
“제가 보기엔 지금 두 사람은 기사가 파놓은 함정에 스스로 걸려든 것 같아요. 차라리 영지 안에서 벌어진 범죄로 몰아가는 게 좋았어요.”
“함정?”
“기사단장이잖아요. 일단 기사들을 동원해 잡아들인 뒤 조사하고 해결하면 될 걸, 굳이 여기까지 찾아와 이 많은 사람 앞에서 명분을 쌓을 이유가 없잖아요.”
“명분 말씀이십니까?”
“저들을 정당하게 자신의 손으로 죽일 수 있는 이유 말이에요.”
이엘의 말을 카일은 곧바로 이해했다.
“저 사람 처음부터 이번 일을 용병들 간의 분쟁으로 만들려고 하고 있어요.”
“그럼 저 기사단장이란 자는 이번 일에 나설 수 없을 텐데?”
“겉으로 보면 그렇죠. 하지만 뒤집어 생각해 보면, 기사단장이 이 일에 나설 수 있는 명분이 되기도 하지요.”
“…명분이라….”
“복잡하게 생각할 필요가 없어요. 용병 간의 일은 용병들이 해결한다? 답은 간단하잖아요.”
“아! 그렇군.”
카일은 이엘이 하고 싶은 말을 곧 이해할 수 있었다.
* * *
“용병들간의 일?”
“그렇소. 이번 일은 용병들의 일이니, 저자와 해결하겠소.”
“오호! 결국 힘으로 해결하겠다는 말이군! 좋다. 이번 일은 용병간의 일로 해결하겠다.”
핀크의 말에 비터와 마크의 얼굴이 더욱 굳어졌다. 설마 순순히 비터의 요구를 받아들일 거라고는 생각지 못한 것이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
핀크가 천천히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약속을 어길 생각이요? 분명 용병들간의 일로 해결한다고 하지 않았소.”
“그럴 리가? 난 약속은 지킨다.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난 용병 핀크로서, 그리고 핀크 용병대의 단장으로서 그대들에게 죄를 물으려 하는 것이다. 이만하면 이유가 충분하지 않은가?”
“용… 병단장!”
“너희들이 죽인 용병들은 원래가 핀크 용병대의 소속이었다. 밀런이 부단장으로 있긴 하지만, 아직 여전히 용병 단장은 나! 핀크다.”
핀크의 말에 비터와 마크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했다. 핀크가 직접 용병으로 나선다면 마크와 비터가 아무리 용을 써도 살아남을 방법이 없었다.
“이건….”
“너희에게 살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기회?”
“너희가 죽인 용병들에 대해 보상한다면 너그러운 마음으로 살려주지!”
“단장님!”
밀런이 깜짝 놀라 소리쳤다. 설마 핀크가 두 사람을 살려주려 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었다.
“넌 조용히 있어!”
핀크가 사납게 밀런을 노려본 뒤 고개를 돌려 자연스럽게 비터가 들고 있는 검으로 향했다.
“어떤가? 내 제안이.”
“처음… 부터 검을 노린 건가?”
비터가 입술을 깨물며 분노한 얼굴로 물었다.
“글쎄?”
핀크가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모호하게 대답했지만, 마크와 비터는 어렵지 않게 핀크의 목적이 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게 지금 뭐 하는 짓인가!”
엄청난 고함 소리와 함께 세 명의 기사가 식당 안으로 들어왔다.
그중 중년의 사내가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 나와 핀크의 앞에 섰다.
“지금 이 소란은 뭔가?”
“로하스 경이 신경 쓰실 일이 아닙니다만?”
핀크가 잔뜩 굳어진 얼굴로 싸늘하게 말했다.
“뭐라!”
“이 일은 핀크 용병대의 일입니다. 아무리 로하스 경이 제1 기사단장이라도 이번 일에 대해선 명령을 내릴 수 없는 일입니다.”
“자넨 이제 용병이 아니라 아킨스 영지의 제2 기사단장이야! 자네가 아직도 용병인 줄 아나!”
“제 용병패는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잊으신 겁니까? 주군께서도 분명 인정하신 일입니다.”
“그건……!”
로하스가 분노한 얼굴로 핀크를 바라보았지만, 그렇다고 핀크의 말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핀크의 말대로 아킨스 자작은 중급 엑스퍼트인 핀크를 영지로 받아들이기 위해 그의 용병 신분도 인정해 줬기 때문이었다.
“분명 말씀드리지요. 이번 일은 용병간의 일입니다. 로하스 단장께서는 나서실 수 없습니다.”
“…자네가 용병 신분을 이용해 얼마나 많은 패악질을 벌였는지 내 모를 줄 아나!”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만… 원하신다면 이번 일이 끝나는 대로 상대해드릴 테니 지금은 좀 비켜 주시겠습니까? 제가 좀 바쁘군요.”
“네놈이 감히!”
로하스가 분노한 얼굴로 핀크를 노려보았다.
“…그 말 반드시 지켜야 할 것이다. 이번 일이 끝나는 순간 내 검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 말이다.”
“쯧! 그러시든가….”
핀크가 로하스를 보며 귀찮다는 듯 손을 저었다. 어차피 이번 일이 끝나고 저 검만 손에 쥘 수 있다면 로하스 정도는 얼마든지 물리칠 수 있었다.
“어떠냐! 이 정도면 제법 생각할 시간을 준 것 같은데?”
핀크가 비터와 마크를 보며 물었다.
“……주자.”
“마크!”
“방법이 없잖아. 우린 여기서 죽을 수 없어!”
“난, 난 못해! 우리가 이걸 얻기 위해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배신을 했단 말이야!”
“하지만……!”
“난 더 이상 이런 비열한 짓…. 못하겠어! 이 검은 다시 주인에게 돌려줘야 해!”
“여기서 죽을 수도 있어! 정신 차려, 비터!”
“그래! 여기서 죽을 수도 있겠지…. 아니, 반드시 죽겠지! 하지만 다시 도망가고 싶진 않다. 우린 이미 한 번 고향에서 도망쳤어! 그리고 도움을 준 은인도 배신했어!”
비터가 손에 들린 검을 쓰다듬었다.
“이번에 또 검을 내어주고 도망가면, 우리가 저 밀런이란 자와 뭐가 다르지?”
“…달라! 적어도 넌 다르잖아! 모두 내가 한 일이야…. 넌 다르다고….”
“아니…. 널 말리지 않는 순간 이미 나도 다를 것 없어. 넌 내 생각을 읽고 먼저 나선 것뿐이니까…. 그러니 이번만은 도망가지 말자.”
비터가 마크의 어깨를 두드리며 핀크를 노려보았다.
“이런, 살길을 마다한다면 어쩔 수 없지….”
핀크의 검 위로 옅은 녹빛 소드오러가 피어올랐다.
“잠깐!”
그때였다. 구석진 자리에 앉아 있던 가면을 쓴 사내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지금껏 상황을 지켜만 보고 있던 카일이었다. 하지만 그의 곁에 있어야 할 이엘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보이지 않았다.
“누구냐!”
“저자들에 대한 우선권을 주장할 수 있는 사람이라 할까?”
카일의 눈가에 웃음기가 맺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