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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철의 용병라이더-126화 (126/404)

126.암흑마법사1

“대단하다.”

비터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가 경탄한 것은 흑기사의 압도적인 무위가 아니었다. 물론 그게 대단하지 않다는 건 아니었으나, 지금 비터가 놀란 것은 중급 엑스퍼트를 넘어선 카일의 실력과 단단한 정신력이었다. 그는 결코 이길 수 없는 존재의 일검을 받고도 계속해서 오뚜기처럼 다시 일어나고 있었다. 정말이지 괴물 같은 신체와 집요함이었다.

“지금 감탄만 하고 있을 때가 아니야. 그동안 우리가 저 녀석에게 어떤 짓을 했는지 먼저 생각해 봐야지.”

답답했는지 마크가 가슴을 퍽퍽 두들겼다.

“어쩔 수 없지. 강자를 몰라봤으면 그만한 책임을 져야지.”

비터는 덤덤하게 말하면서도 카일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차라리 지금 도망치는 게 어때. 중부나 서부로 간다면 크게 문제 될 것도 없을 거야. 지금 같은 상황이면 용병 길드도 크게 문제 삼지는 않을 것 같고.”

마크가 소리를 죽여 비터에게 소곤거렸다. 의뢰를 포기하고 도망을 치는 거나 다름없었으나, 이미 많은 수의 용병들이 죽었고 도무지 물리칠 가능성이 없어 보이는 적이 나타난 만큼, 용병 길드도 이번 일에 대해 큰 책임을 묻지는 않을 것이다. 다만 상단을 버리고 도주한 사실이 알려지면 한동안 남부에서 의뢰를 받긴 힘들어질 터였다.

“아니. 난 끝까지 남아서, 이번 대결의 결과를 지켜봐야겠어.”

비터는 마크의 제안을 단칼에 거절했다.

“차라리 인제 그만 포기하고 돌아가는 건….”

“그만!”

비터는 마크의 말을 잘라먹었다.

“분명히 말하지만 난 돌아가지 않아. 목표를 이룰 때까지는.”

비터의 단호한 기세에 질린 마크는 결국 머리를 끄덕였다. 그로서는 비터의 뜻을 막을 수는 없었다.

꽈광-!

둘이 얘기를 나누는 사이 거센 충돌음이 울려 퍼졌다. 카일이 비터의 바로 앞까지 밀려왔다. 하지만 이전처럼 바닥을 구르지 않고 주춤주춤 다시 일어나 곧바로 흑기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흠.”

지금껏 침묵으로 일관하던 흑기사가 자신의 검을 잠시 내려다보았다. 마치 자신의 실력이 줄어든 것은 아닌지 고민하는 것 같이 보였다. 그러다 이내 시선을 들어 카일을 바라보며 음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대단한 신체를… 가졌구나.”

그도 자신의 검격을 몇 번이나 막고도 다시 덤벼드는 카일을 의아하게 생각한 모양이었다. 카일이 이렇게 끈질기게 일어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혼원장 덕분이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신체로 스며든 오러가 근육을 비롯한 장기와 뼈를 더욱 질기고 강하게 만들어, 내부로 스며든 충격파를 견뎌낼 수 있게 했던 것이다.

“하… 지만 여기까지다. 더는 지체할 수 없구나.”

흥미를 느끼는 듯했던 흑기사는 이내 상관없다는 것처럼 검을 치켜들었다. 순간 흑기사의 검이 진동을 일으켰다. 점차 칠흑같이 어두운 기운이 검을 감싸기 시작했다. 뿜어져 나온 오러는 압축에 압축을 거듭하여, 하나의 선명하고 완벽한 검을 만들었다.

“오러 블레이드….”

코퍼는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손을 애써 부여잡으며 뇌까렸다. 그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젠장.”

카일이 낮게 중얼거렸다. 설마 흑기사의 정체가 소드 마스터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그저 막연하게 상급이상이라고만 느꼈을 뿐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드러난 흑검에서 뿜어져 나오는 막강한 기운은 분명 오러 블레이드였다.

일전에 카일은 힐튼 남작이 시전한 오러 블레이드를 경험한 적이 있었다. 당시 힐튼 남작은 이제 막 최상급에 올랐었던 터라 완벽하진 않았으나, 전율적인 기세가 담긴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오러 블레이드는 모든 것을 파괴하는 기운이었다. 단순히 충격파를 견딜 수 있는 튼튼한 몸을 가졌다고 막을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피할 방법이라 한다면 도주밖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만한 상황도 아니었다. 제아무리 신체가 강인하다 하더라도 그동안 흑기사의 검을 막아낸 탓에 카일의 내부는 만신창이가 되어있었다.

웅- 우웅 우웅

흑기사가 부르르 진동하며 위압적인 오러를 분출하는 검을 들고 카일을 향해 다가섰다.

“아… 안돼.”

검을 짚고 일어나려던 세인은 휘청거리며 다시 쓰러졌다. 처음 흑기사를 기습했던 워드와 세인을 대신해 검을 막은 시안느는, 이미 한쪽 구석에서 기절해버린 채 미동도 없었다.

억지로 몸을 일으킨 카일은 주변을 둘러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마을 밖으로 벗어난 지 고작 4일도 되지 않아, 죽음의 문턱 앞에 서 있게 되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지.”

카일은 제대로 굽혀지지 않은 손가락을 움직여 검을 세게 쥐었다. 그리고는 가지고 있는 모든 오러를 검에 밀어 넣었다.

화악-

순간 언덕 위에서 회색빛의 환한 구체가 서서히 공중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쿠쿵

카일에게 다가가던 흑기사는, 그 광경을 보곤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려 언덕을 향해 포탄처럼 쏘아져 나갔다.

* * *

“아이고 힘들다.”

멀린은 언덕 위에 도착하자마자 철퍼덕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연신 다리를 주무르며, 흘러내린 땀방울을 닦아냈다.

그런 멀린의 모습을 어이없이 바라보던 검은 로브가, 땅에 박혀있던 지팡이를 잡고 자리에서 일어나 멀린을 노려보았다. 지팡이에 심겨 있던 붉은 보석이 음산한 빛을 발했다.

“클클 요상한 놈이구나.”

검은 로브가 멀린을 바라보며 음침하게 말했다. 그의 음성은 여인인지 사내인지 모를, 높으면서도 낮고 거친 동시에 가느다란 괴이한 목소리였다.

“아, 하하….”

검은 로브의 목소리에 소름이 돋았는지, 멀린은 어색하게 웃으며 팔뚝을 문질렀다.

“허 참, 무서워라! 요상하긴 당신이 더하구만.”

멀린이 짊어지고 있던 검 하나를 꺼내며 투덜거렸다. 그의 등에는 대략 10자루가 넘어 보이는 장검들이 가지런히 묶여 있었다. 이것들은 모두 아일론 상단이 멀린에게 각인을 부탁한 질 좋은 합금검이었다. 모두 샤론 마을의 대장장이 타론이 만든 것이었다.

“큭큭. 나와 싸워 보기라도 하겠다는 것이냐?”

검은 로브가 비웃음 섞인 말을 던졌다.

장검을 지팡이 삼아 허리를 숙인 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 사내의 모습은, 당장 쓰러져도 할 말이 없을 정도로 지쳐 보였다.

그러나 멀린은 검은 로브의 말에 검을 바닥에 박은 다음 언제 힘들었냐는 듯 말했다.

“못 싸울 것도 없지요. 내 주인이 저곳에서 열심히 싸우고 계시는데, 작은 힘이라도 보태야 하지 않겠습니까?”

히죽 웃은 멀린이 등 뒤에서 또 다른 검을 하나 풀어 꺼냈다. 그리곤 당장이라도 검은 로브에게 달려가 찌를 것처럼 검을 휘둘렀다. 하도 모양이 어설퍼서 딱히 위협적이진 않았지만.

“쯧, 어리석구나! 굳이 이곳에 오지 않고 도망갔다면 살 수 있었을 것을….”

검은 로브가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이미 지팡이에 박힌 붉은 보석에선, 어두운 기운이 몽글몽글 피어오르고 있었다.

“역시 생각대로 암흑 마법이군.”

멀린이 붉은 보석이 박힌 지팡이에서 뿜어져 나오는 어둠의 기운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변종 오크가 나타났을 때부터 멀린은 암흑 마법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마나에 민감한 그는 이미 오크의 몸속에 암흑 마기가 주입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멀린 역시 고대 각인 마법을 사용하며 어둠의 기운을 사용하지만, 근본적으로 멀린이 사용하는 어둠의 기운은 검은 로브가 사용하는 암흑 마기와는 차이가 있었다.

멀린의 각인 마법이 세상에 퍼져있는 어둠의 마나를 끌어모아 사용하는 마법이라면, 눈앞에 나타난 검은 로브는 마왕과의 계약을 통해, 마계에서 흘러나온 암흑 마나를 몸 안에 저장해 사용하는 암흑마법사였다.

“내가 암흑마법사란 것이 중요한가? 어차피 세상 사람들은 암흑마법사의 존재를 모를 터인데?”

도통 익숙해지지 않는 기괴한 음성에 멀린의 팔 위로 오돌토돌한 닭살이 돋았다. 멀린이 미간을 찌그러트리며 말했다.

“그럴 리가요. 제가 이미 알고 있습니다만… 아!”

입술을 매만지며 잠시 고민하던 멀린은 뭔가를 깨달은 듯 활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하! 그렇군요. 당신이 사라지면 세상 사람들은 당연히 모르겠군요.”

멀린이 손에 들려 있는 검을 지팡이 삼아 자신의 말이 옳다는 양 연신 머리를 주억거렸다.

“이런 멍청한. 내가 아니라, 네놈이 여기서 사라질 거란 말이다.”

분노한 검은 로브의 입에서 날카로운 고음이 쏟아졌다.

“…제가 말입니까?”

“그래! 바로 너!”

“그럴 리가 없는데요?”

멀린이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검은 로브의 말이 도대체 무슨 소린지 도통 알 수 없단 표정이었다.

“반드시 그렇게 될 것이다! 내가 그렇게 만들 거니까.”

검은 로브는 자신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앙칼지게 일갈했다.

그리고는 멀린을 향해 지팡이를 내밀었다.

“파이어볼!”

파이어볼은 3서클의 마법이긴 했으나, 술식을 구성하는 데엔 시간이 필요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검은 로브는 이러한 법칙을 완전히 무시하고, 곧바로 머리통만 한 둥근 불덩이를 만들어 냈다.

“우와 마법을 어떻게 그렇게 빨리 시전했습니까?”

지팡이 위에 떠오른 거대한 불덩이를 관찰하던 멀린은 호기심 섞인 질문을 던졌다.

일견 순진해 보이기까지 하는 모습에, 검은 로브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을 지으며 대꾸했다.

“지옥에 가서 알아봐라.”

검은 로브는 망설임 없이 파이어볼을 날렸다.

“으아아!”

그제서야 당황한 멀린은 손에 들린 검을 허둥지둥 파이어볼을 향해 던졌다.

마치 겁을 잔뜩 집어먹은 멀린이 손에 들린 검을 얼떨결에 내던진 것처럼 보였다.

-위잉

순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맥없이 공중을 돌던 검에 갑자기 속도가 붙었다. 빠르게 회전하던 검은 파이어볼을 향해 날아 들어갔다.

그리고는 곧장 충돌!

장검은 그대로 불덩이를 반으로 가르더니, 검은 로브를 스쳐 바닥에 푹 박혔다.

“아, 아깝다. 맞출 수 있었는데.”

멀린이 진정 아깝다는 듯 주먹을 움켜쥐며 말했다.

“아티팩트로구나.”

분노를 억누르는지 검은 로브의 손에 들려 있던 지팡이가 파르르 떨렸다. 검은 로브의 시선은 자연스럽게 멀린이 등에 짊어진 10여 자루의 검으로 향했다.

“…그것들이 모두 아티팩트란 말이냐?”

“이거 말입니까? 흠…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요.”

멀린은 약 올리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지금 날 놀리는 것이냐!”

“아휴~ 놀리다니요. 그럴 리가요.”

멀린이 과장되게 몸을 잔뜩 움츠리곤 눈을 굴렸다. 그리고는 검은 로브의 시선을 피하려는 것처럼 좌측으로 슬금슬금 움직였다. 그리고는 등에서 검을 꺼내 바닥에 박았다. 비스듬히 기울어진 검에 몸을 기댄 멀린은 아무 일도 없다는 양 능청 피우면서 검은 로브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은 반달로 휘어져 있어, 웃음을 참는 것 같이 보였다.

멀린은 느긋한 동작으로 새로운 검을 뽑아 당장이라도 던질 것처럼 이리저리 휘둘렀다. 장검이 위태롭게 공기를 갈랐다.

“이… 이놈이!”

분노가 폭발한 검은 로브는 지팡이를 바닥에 꽂았다. 그리고는 손을 뻗어 지팡이에 박힌 붉은 보석을 움켜잡았다.

“가만히 두지 않겠다. 넌 여기서 반드시 죽는다!”

붉은 보석 위로 암흑 마나가 안개처럼 몰려들었다. 불타는 화살이 검은 로브 주변으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멀린의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 점차 딱딱해졌다.

“파이어 애로우?”

멀린이 낮은 음성으로 말했다. 파이어볼 보다는 낮은 2서클 마법이었고, 떠오른 화살도 고작 2개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래서 더 위협적인 마법이었다. 고서클의 마법사라도 높은 실력의 가드가 지켜주지 않는 이상, 술식이 복잡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큰 마법은 잘 사용하지 않았다.

대부분 자신의 서클 보다 2~3서클 이하의 마법을 공격 마법으로 사용했다.

즉 검은 로브는 3서클 마법을 딜레이 없이 곧장 사용했을 뿐 아니라, 2서클의 마법인 파이어 애로우를 더블 캐스팅으로 구현했으니, 최소 5서클에서 6서클의 고위 마법사란 말이었다.

“보아하니 애송이 용병이 아니라 마법사였나 보구나. 하지만 늦었다.”

검은 로브가 지팡이를 쭉 내밀었다. 그러자 두 발의 파이어 애로우가 멀린을 향해 짓쳐 들었다.

“으헉.”

갈팡질팡하던 멀린은 바닥을 굴러 마법 화살을 피했다. 그러나 파이어 애로우는 허공을 선회해 곧장 멀린에게로 날아갔다.

“클클, 끝이다.”

멀린의 귓가로 음침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흙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던 멀린은 벌떡 일어나 검을 꺼내 던졌다.

후웅 웅- 우웅

검이 허공을 배회하더니 검은 로브를 향해 쇄도했다. 검은 로브도 전혀 생각지 못한 공격이었다. 처음 검을 뽑아 들었을 때만 해도 놈이 마법 화살을 막으려는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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