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125화 (125/404)

125.흑기사

“으흠… 틀렸다. 이래서는 데려올 수가 없다.”

붉은 보석이 박힌 지팡이를 언덕 바닥에 꽂아 놓고 있던 검은 로브의 입에서 거칠고 가는, 기묘한 목소리가 음울하게 흘러나왔다.

검은 로브는 이번 결과가 안타까운 듯 말했지만, 어쩐지 기분이 상당히 좋은 것처럼 보였다.

“내가… 가겠다.”

그때였다. 지금껏 뒤에서 검은 로브를 호위하듯 서 있던 거대한 덩치의 흑기사가 허리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지, 직접 가겠다고…?”

탐탁지 않았는지 검은 로브가 날카롭게 되물었다. 냉랭한 기운을 품고 흑기사를 쏘아보던 눈동자는 곧 평정을 되찾고 처절하게 전투를 벌이는 상단으로 향했다.

“흥, 얼마든지.”

불퉁한 검은 로브의 음성에 흑기사는 사양하지 않고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 * *

“헉, 헉, 후우.”

시안느가 탁한 숨을 토해내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미 대부분의 오크들은 죽었고 남은 오크는 2마리였다.

“전 이번이 5마리째에요.”

세인 역시 지쳤는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저도 5마리에요.”

둘의 말이 끝맺어지기 무섭게, 남은 두 마리의 오크가 피를 쏟아내며 쓰러졌다. 그 자리에 워드가 모습을 드러냈다.

“흠. 난 12마리군.”

워드가 별것 아니라는 양 중얼거렸지만, 그 의미를 모를 세인과 시안느가 아니었다.

“워드 님은 내기 대상이 아니었잖아요.”

인상을 찡그린 시안느가 반박했으나, 워드는 신경도 쓰지 않고 무심한 척 어깨를 까딱일 뿐이었다.

“우리 내기는 무승부군요.”

“아니에요. 제가 졌어요. 세인 경은 처음에 죽인 2마리는 세지도 않으셨잖아요.”

“그때는 내기를 시작하기 전이잖아요. 시안느 경도 처음 잡은 오크는 세지 않았고요.”

주위를 둘러보던 세인이 대꾸했다. 여기저기 용병들이 쓰러져 있었고, 상단일꾼들은 어질러진 물건들을 정리하려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번에 습격한 오크는 모두 30마리로, 대부분은 시안느와 세인 그리고 워드의 손에 죽었다. 하지만 용병들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용병대장인 코퍼가 2마리를 잡았고, 오크 한 마리 당 서너 명의 용병들이 달라붙어 견제하는 동안, 상단일꾼들이 볼트를 쏘아 3마리의 변종 오크를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만큼 많은 용병들이 변종 오크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변종 오크들의 베틀 엑스가 워낙 크고 위력적이라, 공격이 부상으로 이어지지 않고 치명상이 되어 모두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만 것이다.

때문에 용병들 대부분이 죽었고 생존한 인원은 고작해야 5명도 되지 않았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상단이 받은 손해는 그리 크지 않다는 점이었다.

이엘 일행이 빠르게 달려와 알려준 덕분에 그나마 미리 대비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피해가 너무 크군요.”

세인이 눈썹 끝을 늘어트렸다. 한껏 우울해 보이는 표정이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죠. 오크들의 위력을 생각해 보면 이 정도로 끝난 게 다행일 수도 있어요.”

땅에 굴러다니는 용병들의 시체를 보던 시안느가 막 몸을 돌리려 할 때였다.

“피해!”

코퍼의 경고에 시안느는 반사적으로 몸을 앞으로 쓰러트렸다.

정수리 위로 서늘한 기운이 스치고 지나갔다.

바닥에 쓰러진 시안느는 몸을 굴려 자리를 이탈한 뒤 재빨리 뒤돌아섰다.

타앙

고막을 찢어발길 듯한 금속음이 울렸다. 코퍼가 던진 검이 빙글거리며 하늘 위로 튕겨 나갔다.

“누구냐.”

시안느는 기척도 없이 나타난 존재에게 검을 겨누며 물었다.

눈앞에 나타난 사람은 대륙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금속제 갑옷으로 온몸을 감싸고 있었다. 불현듯 시안느의 뇌리로, 과거 종족전쟁 당시 전설의 마법 생물인 드레곤과의 전투에서 눈부신 활약을 했다는 기사가, 저것과 비슷한 모습을 취하고 있었단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떠올랐다.

“멍청히 서 있지 마! 놈이 변종 오크를 조종하던 자인 것 같다.”

코퍼가 떨어진 자신의 검을 들고 눈앞에 나타난 흑기사를 경계했다.

“도와줘서 고마워요. 덕분에 살았어요.”

“됐소. 나도 도움을 받았으니, 피차 빚진 건 없는 것으로 합시다.”

“좋아요.”

코퍼와 대화를 나누면서도 시안느는 흑기사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누구냐. 정체를 밝혀라.”

낮게 목소리를 내리깐 코퍼가 질문을 던졌다.

아일론 상단은 몬스터 부산물을 취급하는 중소 상단으로, 골드가 많은 대 상단도 귀족파나 국왕파에 골드를 대는 자금줄도 아니었다.

그렇기에 변종 오크까지 동원할 정도로 큰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았다.

“너… 희들은 알… 필요 없다.”

흑기사의 입에서 불쾌한 쇳소리가 더듬더듬 흘러나왔다.

“그냥… 죽어라.”

흑기사는 늘어트리고 있던 거대한 검을 좌측으로 휘둘렀다.

카강

아무것도 없던 공중에서 무언가 부딪히는 소리가 울렸다. 검은색 물체가 빠르게 뒤로 날아가 나무에 처박혔다.

나무와 충돌해 땅에 나자빠지며 워드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났다. 흑기사와 코퍼가 이야기하는 순간을 노려 기습을 감행하려다, 오히려 역습을 받은 것이다. 워드는 쿨럭이며 핏덩이를 뱉었다.

“크윽… 단번에 알아채다니.”

얼굴을 잔뜩 찌푸린 워드가 다시 한번 피를 토해냈다. 그리고는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생각보다 내상이 깊었던 탓이다.

“아무래도 저자는 우리가 상대해야 할 것 같아요.”

어느새 시안느의 근처로 다가온 세인이 말했다. 남은 용병들은 숫자도 얼마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전의를 상실한 상태였고 코퍼 역시 흑기사를 상대하기에는 도움이 되지 않아 보였다.

“어쩔 수 없죠.”

시안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세인과 눈을 마주치는 순간, 두 사람은 동시에 흑기사를 향해 달려들었다. 기습적인 행동이었지만 둘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흑기사는 아무렇지도 않게 흑검을 횡으로 휘둘렀다. 두 사람을 한꺼번에 제압하려는 것이다.

흑기사의 검은 엄청난 크기를 지니고 있었음에도 무척이나 빨랐다. 두 사람이 피하기에는 너무 늦었다.

“내가 막을게요!”

시안느가 세인보다 한발 앞서 몸을 튕겼다. 가뿐하게 뛰어오른 시안느는 몸을 한껏 웅크려 방패 뒤로 숨은 뒤 검을 향해 날아갔다.

꽈-앙

시안느의 방패와 흑기사의 검이 맞닥뜨리자 귀청을 뒤흔드는 폭음이 울렸다. 반동을 이기지 못하고 그대로 튕겨 나간 시안느는 바닥에 고꾸라졌다.

“시안느!”

이엘이 그 모습에 절규하듯 시안느를 불렀지만, 그녀는 쓰러져 움직이지 않았다. 거대한 충격을 해소하지 못하고 기절하고 만 것이다.

‘지금이다.’

시안느의 방패와 충돌하는 찰나의 순간 흑기사의 거검은 주춤거렸다. 세인은 그사이를 놓치지 않고, 왼발을 축으로 삼아 등허리를 땅에 닿을 듯 몸을 뒤집었다. 흑기사의 검이 세인의 코끝을 종이 한 장 차이로 스쳐 지나갔다. 세인은 곧장 무릎을 튕겨 흑기사의 옆구리에 있는 작은 틈으로 검을 찔러 넣었다.

푸욱

“끝이다.”

세인은 확신에 찬 듯 나지막하게 소리를 질렀다. 흑기사가 상체를 뒤틀 때 생기는 작은 빈틈에 검을 아래에서 위쪽으로 찔러 넣었다. 검은 사선으로 옆구리를 파고들어 정확히 심장을 관통했다.

사람이 아닌 이상 급소인 심장을 찔리고는 살 수 없다.

승리를 자신한 세인은 검을 뽑아내며 의기양양하게 흑기사를 올려다보았다.

“허억….”

작게 숨을 몰아쉰 세인은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흑기사의 새카만 눈동자에는 아무런 고통도,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몇 초의 시간이 흘렀을까.

흑기사의 검을 쥔 손이 세인의 머리를 노리고 떨어져 내렸다

생각지도 못한 기습에 세인이 몸을 비틀어 가까스로 피했지만, 흑기사는 이미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발을 들어 세인을 걷어찼다.

세인이 검을 들어 흑기사의 공격을 겨우 막았으나,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주르륵 뒤로 밀리다가 이내 흙바닥을 뒹굴었다.

흑기사는 검을 질질 끌면서 세인에게 다가갔다.

“쿨럭.”

가까워지는 흑기사를 본 세인은 급히 일어나려 했지만, 비틀거리다 쓰러져 피를 한 움큼 토해냈다.

철컥 철컥

흑기사가 움직일 때마다 금속 갑옷이 요란 소음을 냈다. 마치 지옥에서 올라온 마계의 악마가 다가오는 것 같이 보였다.

-부웅

흑기사의 검은 수천의 벌 떼가 날갯짓하듯 부르르 진동을 일으키며 세인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세인은 차마 떨어져 내리는 검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 눈을 꼭 감았다.

‘카일 님.’

세인이 마음속으로 카일의 이름을 불렀다. 카일과의 여행을 그토록 기다렸건만, 고작 하루 만에 그와 영원히 헤어져야 하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콰아아앙

대지가 쪼개지는 것처럼 엄청난 굉음이 울리더니 흑기사가 주춤주춤 물러났다.

“젠… 장!”

익숙한 목소리에 세인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토록 보고 싶었던 카일이 어디선가 나타나 그녀의 앞을 막아서고 있었다.

“물러나요!”

카일이 다급하게 소리치며 앞으로 달려나가 있는 힘껏 검을 휘둘렀다.

콰아앙-

흑기사는 어렵지 않게 카일을 막았고 굉음이 울려 퍼졌다. 바닥에 긴 고랑을 만들며 카일의 몸이 주르륵 뒤로 밀려났다. 땅에 칼을 박아넣지 않았다면 바닥을 뒹굴며 나자빠졌을 정도로 강대한 힘이 담겨 있었다.

이번 일격은 카일이 가진 모든 힘을 동원한 것이다. 양손에는 파워를 증폭하는 장갑을 끼고, 낼 수 있는 모든 오러를 쥐어짜 검에 밀어 넣었을 정도로, 무시할 수 없는 거력이 담겨 있었다.

그런 카일의 검을 받아내고도 흑기사가 물러난 것은 고작 서너 걸음이 전부였다.

그것도 연속해서 날린 카일의 공격을 불안정한 자세로 받아내고도 말이다.

“크윽.”

짧은 신음과 입가로 가는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공격을 가한 사람은 카일이지만, 피해를 본 것도 카일이었다.

단순히 검을 맞댄 것만으로도 내상을 입었다니. 흑기사가 얼마나 강한 존재인지 모두들 느낄 수 있었다.

이 상황에서 가장 놀라움을 금치 못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코퍼였다. 카일의 검에 떠오른 선명한 기운과 흑기사와 충돌할 때 일어난 파괴력을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았기 때문이었다.

“이럴 수가. 에… 엑스퍼트… 중급이라니.”

코퍼의 손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껏 확연한 강자를 상대로 협박과 음모를 벌이고 있던 것이다.

더구나 그를 둘러싸고 있던 여인들 모두 이미 엑스퍼트에 올라, 자신과는 차원이 다른 강함을 가지고 있는 존재들이었다.

“대장!”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카일을 바라보고 있던 코퍼의 옆으로, 브린과 아덱, 버크가 다가왔다.

“어찌 된 일이냐? 너희들이 왜!”

“그게….”

브린이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가려는 순간.

꽈광 꽝

카일이 허공을 날아 흙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코퍼가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흑기사의 공격을 막아낸 카일이 충격을 해소하지 못하고 튕겨 나간 것이다.

“피해요!”

세인이 카일에게 다가가는 흑기사를 향해 검을 찔렀다. 방어를 완전히 도외시한, 오직 공격 일변도의 검이었다. 세인은 자신의 실력으로는 도저히 흑기사를 죽일 수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카일이 몸을 피할 최소한의 시간을 벌어주기 위해 흑기사에게 뛰어든 것이다.

“쿨럭, 젠장! 안돼.”

바닥을 뒹굴던 카일이 피를 토해내면서도 흑기사를 다시 뛰어들었다.

세인이 아무리 정밀한 검술을 구사한다고 해도, 흑기사의 몸에 상처하나 낼 수 없음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흑기사는 돌진해오는 세인을 흘깃 바라보더니, 검도 들지 않은 손을 휘둘렀다. 동시에 쏘아져 오는 카일의 환도를 향해 검을 휘둘렀다.

터엉-

서로 다른 이질적인 소리가 울리며 카일과 세인이 또다시 공중을 날았다. 도저히 상대할 수조차 없는 강함이었다.

숨을 죽이고 있던 용병들은 경악에 빠져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여차하면 도주를 감행하려는 모습이었다.

“괴물 같은 놈.”

비틀비틀 일어난 카일이 이를 악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는 검을 고쳐 잡고 다시 흑기사를 향해 뛰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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