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습격
-쉬익 퍽
쿠우웅
공기를 가르며 날아간 단검이 제일 마지막으로 이 층에 진입한 사내의 얼굴에 박혀 들었다. 희생양은 단말마도 지르지 못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웬 놈들인지는 모르겠지만, 기다리느라 지쳤다.”
방안으로 들어온 검은 가면을 쓴 사내들의 눈이 침상에 앉아 있는 노인에게로 향했다.
“누구냐?”
이곳은 이제 갓 성인이 된 사내아이가 자고 있어야 할 방이었다.
그런데 엉뚱하게도 노인 한 명이 중검 하나를 가슴에 품고 침상에 앉아 있는 것이 아닌가?
“이런 멍청한 놈들을 봤나. 그런 건 내가 물어야 할 말이 아닌가?”
힐튼 남작이 침상을 둘러싸고 있는 사내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그의 얼굴 어디에서도 두려움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실제로 힐튼 남작은 지금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두 다리가 부러진 탓에 꼼짝없이 집안에 갇혀 무료한 일상을 보내야 했는데, 작은 유흥거리가 찾아왔으니 흥이 나는 것이다.
“아무래도 이 방의 원래 주인을 찾아온 것 같은데…. 쯧, 누가 보냈는지는 모르겠지만, 분명 어리바리한 놈인 건 확실하군.”
힐튼 남작이 보기에 침입한 자들의 실력은 엑스퍼트 초급과 중급 사이로, 암살자로 보내기에는 제법 실력이 출중한 자들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카일은 이미 완숙한 중급 엑스퍼트에 오른 천재였다. 게다가 카일의 장기는 섬광처럼 빠른 검술이었다. 그런 카일과 사방이 막힌 실내에서 근접 전투를 치른다는 것은 죽음을 자초하는 짓이나 마찬가지였다.
“자, 시간 끌 것 없다. 오너라!”
힐튼 남작이 품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참고로 도망갈 생각은 접어라. 이 방의 주인이 재미있는 장난감을 주고 갔거든….”
가슴팍을 뒤적이던 손이 눈 깜빡할 사이에 나왔다. 번쩍이는 단검 한 자루가 쏘아져 계단 주변에 서 있던 사내의 가슴에 박혔다.
“커허억.”
쿠웅
“젠장, 아티팩트다. 죽여라!”
침상을 포위하고 있던 3명의 사내들이 세 방향에서 힐튼 남작을 향해 돌진했다. 그들이 휘두르는 검에는 푸른 오러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하하! 좋아, 당연히 그렇게 나왔어야지.”
힐튼 남작이 호쾌하게 들고 있던 검을 수평으로 그었다.
일렁이던 푸른 오러가 순식간에 힐튼 남작의 검을 잠식하더니, 앞으로 쭉 뻗어 나가 순수한 오러로 이루어진 새로운 검신을 만들었다.
“오, 오러 블레이드.”
“소드… 마스터.”
그리고 그것이 그들의 마지막 유언이었다. 침상으로 달려들던 세 사내의 몸이 상하로 분리되며 바닥으로 무너져 내렸다.
“크윽… 아직은 무리군.”
입에서 붉은 핏물이 주르륵 흘러내렸으나, 힐튼 남작은 무척 즐거워 보였다.
남작은 그동안의 깨달음을 정리해 드디어 최상급에 한 발을 내디뎠다. 덕분에 오러 블레이드를 펼칠 수 있게 되었지만, 전력을 다한다 해도 펼칠 수 있는 시간은 몇 초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짧은 지속시간이란 단점을 상쇄하리만치 오러 블레이드의 위력은 강력했다.
무리하는 바람에 내상을 입긴 했지만, 남작으로서는 만족할만한 결과였다.
* * *
“여기 어디쯤 같은데….”
브린이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거렸다.
“벌써 그 말만 다섯 번째야. 정말 있긴 있는 거야?”
버크가 잔뜩 화가 난 얼굴로 브린을 죽일 듯이 노려보며 시근덕거렸다.
이 주변을 둘러본 게 한참이었다. 그런데도 찾고 있는 녀석들의 흔적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곳에 없는 놈일지도 몰랐다.
‘젠장. 분명 여기가 맞는데….’
당황한 브린이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다시 한번 세세히 바닥을 살폈다. 이 정보는 무려 1골드나 들여 얻은 정보였다.
‘이대로 허탕 치면, 저 녀석이 아니라 대장이 날 죽이려 들 거야.’
버크 녀석이야 자신과 그다지 실력 차이가 나지 않고, 단순한 놈이니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었다. 하지만 코퍼 대장은 아니었다. 능력 차부터 하늘과 땅 차이였고, 처음 코퍼 대장이 세운 계획을 자신이 고집부려 바꿨기 때문이었다.
‘이대로 놈들을 찾지 못하면 이번 계획은 완전 실패다.’
브린이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땀을 닦으며 땅바닥을 살폈지만, 없는 흔적을 억지로 찾을 수는 없었다. 브린은 낙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때 눈을 홉뜨며 입을 함지박 만하게 벌렸다.
지금까지 찾고 있던 실마리를 드디어 발견한 것이다.
“찾았다!”
브린이 환호성을 지르며 후다닥 달려갔다. 목적지는 나무 한 그루였다. 개처럼 내내 땅을 보고 다녔는데, 정작 찾아 헤맸던 흔적은 바닥이 아니라 나무 위에 있던 것이다.
“됐다. 이제 찾는 건 시간문제다.”
홀로 난리를 치던 브린을 보던 버크가 아덱에게 물었다.
“그런데… 정말 괜찮을까요? 실패하면 정말 모든 걸 잃는다고… 아니 정말 죽을 수 있어요!”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실패만 생각하지마! 성공했을 때를 생각해야지!”
버크의 질문을 낚아챈 브린이 아덱 대신 대꾸했다. 그의 음성엔 짜증이 한가득 이였다. 온갖 눈치를 참아내며 겨우 흔적을 찾아냈는데, 저런 말을 들으니 화가 난 것이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버크와 다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언제까지 왕국을 떠돌며 용병으로 살 거야! 너도 정착해야지. 혼인도 하고 말이야.”
성질을 누른 브린이 버크를 달래듯 말했다. 여기서 시간을 지체하다간 계획이 어그러질 수도 있었다.
“용병이 어때서… 자유롭게 세상을 둘러 볼 수 있어서 좋잖아.”
“자유는 얼어 죽을! 이게 자유롭게 사는 거냐. 매일 죽을 둥 살 둥 살얼음판을 걸어가는 거지. 정말 자유롭게 살고 싶으면 이번에 받은 골드로 길드에서 적당한 검술 하나 사서 익혀!”
“넌 뭐할 건데? 레드 라이트 지구에 가서 또 가진 골드 모두 탕진할 거냐?”
“탕진은 무슨. 이번에 골드가 생기면 반드시 토샤를 그 지옥 같은 곳에서 구하고 말 거야.”
“또 토샤 타령이냐! 그년에게 갖다 바친 골드 만 모아도 그년보다 불쌍한 년 벌써 여럿 구했을 거다. 넌 그년을 겪어보고도 아직도 못 빠져나왔냐?”
버크가 쯧쯧거리면서 브린을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볼 때마다 늘 원수지간처럼 싸우지만, 그동안 미운 정이 들었는지 못된 계집에게 잡혀 인생을 망치고 있는 브린이 걱정되었다.
토샤에게 홀려 나락으로 떨어진 용병만 해도 수 명이 넘었다. 그런데도 용병들은 그녀를 잊지 못 해 주변을 맴돌며 얼굴이라도 한번 보기를 원하고 있었다. 버크는 브린이 그들처럼 인생을 망가트리는 건 바라지 않았다.
“토샤는 그런 여자가 아니야. 집에 있는 동생과 병든 노모 때문에, 스스로 레드 라이트의 문을 두드린 불쌍한 여자란 말이다. 그런 여자를 모욕하는 건 절대 가만히 못 있어.”
브른은 당장이라도 검을 뽑을 것처럼 손가락을 움찔거렸다.
“미친놈! 아픈 노모가 있는지, 아니면 어린 동생이 있는지 직접 봤냐? 진짜로 어린 동생과 노모가 있다고 해도, 그년에게 용병들이 가져다 바친 골드면 나아지고도 남았어.”
버크도 지지 않고 맞섰다. 당장 눈앞에 있는 브린만 해도 벌어들이는 대부분의 골드를 토샤에게 가져다 바치고 있었다. 브린뿐만 아니었다. 브린처럼 순진한 용병 몇몇도 토샤에게 빠져 골드를 헌납하고 있었다.
“토샤가 입는 옷이나 장신구가 얼마나 값비싼 건진 아냐? 레드 라이트 지구에서 그년보다 더 값나가고 고급스러운 옷을 입는 사람은 없을 거다. 아니 가난한 귀족가의 영애도 그년보다 화려하게 입지는 않아!”
버크가 고래고래 소리 질렀으나, 브린의 귓가에는 의미 없는 메아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에게 토샤는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순결한 여인이었다.
“그만! 지금 그런 거 따질 때가 아니다. 서둘러 놈을 찾아야 해. 늦으면 놈을 찾아도 아무 소용없어.”
둘을 방관하던 아덱이 나서 싸움을 중재했다. 아덱의 말대로 여기서 더 늦었다가는 계획이 어긋나기에, 둘은 싸움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서로를 외면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다 브린은 말없이 고개를 획 돌려 쿵쿵거리며 앞장서서 걷기 시작했다.
“가자, 버크.”
아덱이 버크의 어깨를 툭 치곤 걸어가기 시작했다. 못마땅했는지 버크는 입을 비죽거렸지만 결국 아덱의 뒤를 쫓았다.
묵묵히 걷던 세 사람의 발걸음은 어느 순간부터 점점 느려졌다. 공기를 타고 기묘한 긴장이 흘렀다.
“저기다.”
* * *
“자, 그럼 시작해 볼까?”
노인이 천천히 검을 뽑았다.
얇은 황금빛 검이 검집을 빠져나왔다.
검신 전체에 기하학적인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또한 검 자루 끝에는 푸른 보석이 아름다운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상급 마력석과 고합금 미스랄 검이 조합된 마력검으로, 용병들이 들고 다니는 싸구려 검은 단번에 잘라낼 수 있을 정도의 명검이었다.
노인의 검을 관찰하던 보일은 사방을 포위하고 있는 사내들을 돌아보았다.
“쯧. 저들은 신경 쓸 것 없다….”
깡 까앙- 깡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보일의 검이 노인을 몰아치기 시작했다. 은빛으로 아름다운 반원을 그리며 날아간 검격은, 오러를 두르고 있지 않았음에도 강맹하고 빨랐다.
차앙 깡-!
전혀 생각지도 못한 순간 기습적으로 맥을 끊으며 들어온 공격 때문인지 노인은 보일의 검격을 제대로 막지 못하고 연신 뒤로 밀리기 시작했다.
“크윽.”
노인이 짦은 신음성과 함께 보일의 검격을 힘겹게 막아냈다.
보일의 검술이 워낙 강하고 첨예해 노인이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이라고는 마주 검을 휘두르는 거였다.
“…이놈!”
노인이 당황한 듯 소리를 지르며 서둘러 뒤로 물러나려 했다. 그러나 보일은 지체하지 않고 따라붙으며 검을 내려그었다.
카아앙-
이런 건 절대 노인이 원하던 대결이 아니었다. 노인은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보일과 정식으로 검과 검을 주고받고 싶었다.
때문에 기습이나 암살을 하지 않고 당당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상대의 검식과 검술을 파악해, 그동안 정체돼있던 경지를 극복하려는 것이 이곳까지 온 진정한 목표였다. 이렇게 무작정 힘으로만 밀어붙이며 검격을 나누는 건 작전에 없었다. 현재 보일이 펼치는 검식은 빠르게 접근해 위에서 아래로 내려치는 단 한 동작뿐이었다. 그러나 기습적인 공격에다가 무엇보다 빠르고 강력한 힘을 중점으로 내려치는 일변도의 검격이라, 노인이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내려치는 공격을 막는 것뿐이었다.
캉 카앙
오러도 실리지 않은 보일의 검이 은빛 궤적을 그리며 노인의 정수리로 떨어져 내렸다.
“보통 검이 아니구나.”
노인이 아름답게 물결치는 파도문양이 새겨진 보일의 검신을 노려보며 말했다. 지금까지 자신의 검과 부딪혀 멀쩡했던 무기는 본 적이 없었다. 평생 누군가의 생명을 빼앗아 모은 골드로 만든 검이었다.
그만큼 많은 미스랄을 합금시켰고 그래서 가벼우면서도 강하고 질긴 검을 만들 수 있었 던 것이다.
그런데 합금으로 보이지 않는 어려운 보일의 검은 멀쩡해 보였다. 벌써 수십 번이나 검격을 주고받았지만 검신에 남은 흔적이라고는 조그마한 흠집 정도였다. 오히려 노인의 합금검이 조금 더 많은 손상을 입기까지 했다.
이런 병기는 절대 흔치 않았다.
합금이 아닌 오직 한 가지 금속만으로 이만한 강도를 낼 수 있는 것은, 미스랄을 제외하면 하나뿐이었다.
“설마… 운석으로 만든 검이란 말인가.”
“지금 와서 그런 것이 중요한가?”
보일의 팔뚝 근육이 불거지자 노인은 버티지 못하고 밀려나기 시작했다. 오직 육체적인 힘만으로 이런 강대한 힘을 낼 수 있다는 사실에, 노인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크윽~.”
비록 상급 엑스퍼트에 오른 덕분에, 젊은 청년보다 더 강인한 육체를 지니게 되었다 해도 보일의 신력은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보일이 한 발짝 앞으로 내디딜 때마다 노인의 육체는 뒤쪽으로 맥없이 주르륵 밀려났다.
순간 노인의 검에서 푸른 기운이 폭발적으로 뿜어져 나왔다.
더 이상 참지 못한 노인이 본격적으로 오러를 끌어올린 것이다. 그에 검에 박혀 있던 마력석이 발동해 검신에 뚜렷한 오러의 형상이 만들어졌다.
“오러 블레이드….”
보일은 오러 블레이드가 형성되는 모습에, 좌측으로 몸을 날려 포위망을 형성하고 있는 가면의 사내들을 향해 뛰어들었다.
설마 보일이 노인을 뒤로하고 자신을 공격할 거라 생각지도 못한 가면의 사내는,자신의 가슴을 꿰뚫는 은백색의 검신에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커억-”
“막아!”
뒤늦게 보일의 움직임을 확인한 노인이 외쳤다. 하지만 보일은 이미 숲속으로 뛰어든 후였다.
사실 보일은 노인과 정식으로 대결을 펼칠 생각이 처음부터 없었다.
설령 정면대결을 해 노인을 제압한다고 해도, 상급 엑스퍼트의 실력자를 부상 하나 없이 제압할 순 없었다.
지치고 다친 보일은 사방을 포위한 자들에 의해 살아서 돌아가지는 못할 것이다. 그럴 바에는 포위망을 돌파한 후, 놈들을 자신에게 유리한 전장으로 끌어들여야만 했다.
대뜸 검격을 날려 힘으로 노인을 몰아붙인 이유도, 자신을 둘러싼 자들에게 기습에 대비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멍청히 서 있지 말고 쫓아라. 놈을 반드시 잡아야 한다!”
노인의 지시에 검은 가면의 사내들이 보일의 뒤를 추격하기 시작했다.
숲속을 질주하던 보일이 멈춰 섰다.
“이쯤이면 적당하겠군.”
탁한 숨을 길게 내뱉던 보일이 사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이곳 자이언트 블루 우드 숲은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보일의 삶의 일부였다.
지형뿐 아니라 이곳에 있는 돌 하나, 나뭇가지 하나까지도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고 있는 보일이었다.
아무리 암살에 능한 자들이라도 이 숲 안에서만큼은 누구도 이길 자신이 있는 보일이었다.
“이곳에 들어온 이상, 아무도 살아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보일이 가슴 앞쪽으로 매달고 있던 총을 풀어 로우 레디 자세를 취했다.
“그럼 가볼까!”
자세를 낮춘 보일은 어두운 숲속 나무 그늘 속으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