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7.손님
“세인이 왔었다고?”
“전언만 남기고는 바로 돌아갔습니다.”
심각하게 굳어 있는 기사 벤더의 안색에, 보통 일이 아니라는 걸 직감한 다핸 남작이 물었다.
“무슨 말을 하던가?”
“수상한 자들이 영지로 들어왔다고 합니다.”
“몇 명이라던가?”
“작은 마차를 끌던 마부까지 포함해 모두 4명 정도입니다만, 마차 안은 확실히 살펴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차에 노인 한 명이 타고 있었다고 합니다.”
벤더의 보고에 남작이 앓는 소리를 냈다. 4명, 많아야 5~6명 정도의 작은 규모이긴 하나 만약 그 모두가 엑스퍼트라면 세인이 화급히 돌아와 알릴 만도 했다. 벽지의 남부 영지에 그만한 실력자들이 대뜸 나타났다면, 상당히 위협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남작가의 알려지지 않은 힘을 생각해 봤을 때 충분히 상대할 만한 숫자였다. 그동안 보일이나 카일과 친분을 쌓으며 알게 모르게 많은 것을 얻은 남작가는 지금, 무력으로서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당장 기사들을 파견해 놈들을 잡아라.”
“안됩니다. 세인 경이 말하길 멀리서 지켜만 보고, 절대 그들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수상한 자라 하질 않았느냐?”
남작의 눈썹 사이에 자글자글한 주름이 잡혔다. 정체가 불분명한 자들을 검문하고 잡아들이는 것은 영주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섣불리 나서지 말고 예의주시하기만 하라니 남작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도통 납득하지 못 하겠다는 남작의 기색에 벤더는 가장 중요한 정보를 토해냈다.
“마차 내부에 있는 노인이 대단한 실력자로 보인다고 합니다.”
“실력자?”
“그렇습니다. 아무래도 천인장님께서 직접 나서야 할 것 같다고 합니다.”
타앙
남작이 손바닥으로 서탁을 내려치며 벌떡 일어났다. 천인장은 영지에 유일하게 단 한 사람뿐이었다. 바로 보일 대장이 나서야 한다는 말이었다. 그렇다면 상대는 최소 소드 엑스퍼트 상급이란 말이었다.
“제대로 확인된 정보인가?”
“카일이 직접 얘기했다고 합니다. 일단 어떤 목적으로 영지에 들어왔는지 알 수 없어, 접근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전언이었습니다.”
“우선 눈치 빠른 병사 몇 명을 차출해, 은밀하게 뒤를 쫓아 보고하라 전하게.”
“기사를 보내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상대는 상급 이상의 실력자. 기사가 흘리는 마나에 노출될 수 있다. 그리고 당장 성에 비상을 걸고 천인장에게 전언을 보내라.”
“알겠습니다.”
인사를 올린 벤더가 방을 나가려 했으나, 남작이 그를 붙잡았다.
“세인은 바로 돌아갔다고 했느냐.”
“그렇습니다. 이야기만 전달하고는 돌아갔습니다.”
“지금 당장 카일을 찾아라! 성안에 있다면 반드시 데려와야 한다.”
“거절한다면….”
“시간을 끌어라! 내가 직접 가겠다.”
벤더는 박차고 일어나 그대로 달렸다. 얼마되지 않아 벤더가 돌아왔다. 초조함을 이기지 못한 남작이 방안을 마흔 번쯤 돌았을 무렵이었다.
“마차를 발견했습니다.”
“놈들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뭐라!”
남작이 탄식처럼 소리쳤다.
“설마 들킨 것이냐?”
“발견했을 때 이미 마차는 비어있었다고 합니다.”
“마차는 어디서 찾은 것이냐?”
“남쪽 숲입니다. 위치로 보아 아무래도 샤론 마을로 향한 것 같습니다. 마차가 지나간 길목을 중심으로 확인했습니다만, 중간에 내린 사람은 없습니다.”
골똘히 생각을 정리하던 남작이 입술을 무겁게 떼었다.
“카일은?”
“이미 성을 떠났습니다. 아무래도 세인 경이 돌아오자마자 바로 출발한 것 같습니다.”
희망을 잃어버린 남작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무래도 카일은 남작이 자신을 붙잡을 것을 이미 짐작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내 길고 긴 한숨을 쉬었다.
사실 남작도 벤더에게 카일을 붙잡으라 지시는 했지만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다만 도대체 누가 그만한 실력자를 샤론 마을로 보냈는지 알 수가 없어 갑갑할 노릇이었다.
“마을로 전언은 보냈나?”
“전서구를 날렸습니다.”
벤더의 말에 남작이 고개를 숙인 채 눈을 감고 손짓으로 물러나란 표현을 했다.
“보일 대장을 믿어보는 수밖에….”
남작이 남쪽 창문 밖으로 보이는 거대한 산맥을 응시하며 한탄조로 웅얼거렸다.
* * *
“어떻게 되었나?”
“떠났습니다. 지금쯤이면 도착했을 겁니다.”
“용케도 설득했군.”
“다행히 이번에는 쉬웠습니다. 오히려 혼자 가겠다는 걸 막느라 더 힘들었습니다.”
“응? 그럴 리가. 웬만해서는 말을 잘 듣지 않는 놈인데?”
“상대가 상급 엑스퍼트란 말에 바로 승낙했습니다. 상대가 강하다하는 말에 투지가 불타오른 것 같습니다.”
“수많은 생사투로 지금의 경지에 오른 녀석이니 그럴 만도 하지. 더군다나 상급에 오른 이후 이렇다 할 대결도 없었으니…. 하지만 그만큼 실력은 확실하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그분의 독기라면 정면 대결에서도 밀리지 않을 겁니다.”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 헌데 어찌 말리지 않으신 겁니까?”
“내가 말린다고 들을 녀석인가? 붙잡아도 갈 녀석이라면 돌아올 길을 만들어 두어야지.”
공작이 먼 곳에 시선을 두며 말했다.
“허나 이번 일은 너무 위험하지 않겠습니까? 자칫 고립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기회에 거미의 본거지를 밝혀낼 수도 있겠지.”
“전하, 설마 자작님을….”
“어차피 보내야 한다면 최대한 성과를 내야 할 것 아닌가? 검은 여우들이 지원해준다면 분명 거미들에게 복수를 할 수 있을 거야.”
공작의 내면엔 식지 않은 분노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지금 공작은 자신의 동생을 미끼 삼아 크로노스 왕국의 거미들을 잡아내려 하고 있었다.
* * *
“음… 녀석들이 사라지니 집안이 썰렁하군.”
힐튼 남작이 적막감이 흐르는 집안을 둘러보며 말했다. 남작은 시끄럽고 북적거리는 공간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때문에 여러 귀족 가문의 파티에서도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다리를 다친 이후 카일의 집에서 손녀인 시안느와 집주인 카일, 이니엘 영애와 부대껴 생활하다 보니, 도란도란 모여 앉아 밥을 먹는 생활에 동화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들이 훌쩍 떠나 버리자 지금에 와서는 혼자 있는 자신이 외롭고 서러워졌다.
“후우. 오늘은 보일 대장도 순찰을 나간 터라,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데…. 오늘은 아무래도 혼자 지내야….”
우울하게 쳐져 있던 남작이 허리를 쫙 폈다. 흐렸던 남작의 눈동자로 잘 벼려진 살기가 서렸다.
“좋지 못한 손님이 오셨군.”
남작이 옆에 놓여 있는 검을 잡았다.
* * *
“누구냐!”
“크크크! 역시 공작 각하 말이 사실이었구나.”
스며들어있던 어둠을 떨치고 모습을 드러낸 사내가 괴기한 웃음을 지었다. 보일의 등허리로 소름이 돋았다.
얼굴은 잘 보이지 않으나, 하얀 머리카락과 쇳소리 섞인 목소리로 미뤄보아 눈앞의 남자가 노인이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노인장은 누구요.”
“나 말인가? 으음 이런 말 하기는 미안하지만, 난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이름이 없다네! 길에 버려져 있었다고 하더군.”
“…그래도 노인장을 부르는 호칭이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만.”
“이름이라고 하기는 힘들지만 다들 날 009호라 부르고 있다네.”
“009호?”
“그렇네! 날 다들 009호라 부르고 있다네. 아, 내가 어디서 왔는지도 궁금하겠군. 난 말이야 제국에서 왔다네. 아이젠 공작 각하께서 샤론 마을을 세상에서 아예 지워지길 바라고 계신다네. 그 안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포함해서 말이야.”
노인은 친절하게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설명했다.
“왜 이런 말을 제게 해 주시는 겁니까? 그림자 속에 숨어있는 자들을 믿고 하는 말입니까?”
“저들 말인가?”
009호라 불리는 노인이 가당찮다는 것처럼 코웃음을 쳤다.
“모두 나와라!”
검은 가면과 검은 레더 아머를 입은 사내들이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노인을 제외하면 모두 25명이었다.
“이들은 그리 걱정할 것 없네. 우리가 대결하는 중에는 절대 끼어들지 않을 것이네. 만약 누군가 끼어든다면 내 검을 먼저 받아야 할 것이라네.”
노인이 싸늘하게 주변 인물들을 향해 경고했다.
저들은 다른 이의 명을 듣는 장기 말이었으나, 자신의 성향을 알고 있다면 이 말이 결코 거짓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을 테였다.
“저들이 이곳에 온 전부입니까?”
“오, 깜빡했군. 자네 집으로 5명이 갔다네. 자네 아들을 잡으러 간 것 같은데… 미안하게도 내 수족이 아니라 막지 못했다네.”
노인은 가면을 쓰고 있었으나, 눈이 둥글게 휘어져 있다는 건 명백했다.
검을 나누기 전 보일의 감정을 흔들려는 수작이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정정당당한 대결을 원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노인의 행동은 모두 철저하게 계획된 움직임이었다.
25명의 엑스퍼트들로 하여금 주변을 포위하게 만들어 압박하는 것과 동시에, 집에 혼자 남아 있을 아들을 언급해 심리적으로 흔들어 놓으려는 행동이었다.
엑스퍼트 간의 대결에선 작은 실수 하나가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노인은 검을 부딪치기에 앞서, 철저하게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을 만들어 놓고 대결에 임하려는 것이었다.
“…그렇습니까?”
보일은 겨우 한마디를 내뱉었다.
겉으론 흔들리는 마음을 간신히 다잡는 듯해 보였다. 그러나 보일은 진심으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노인이 파악해놓지 못했던 두 가지 정보 때문이었다.
첫째. 카일은 마을을 떠난 지 벌써 4일이 넘었다.
설령 집에 카일이 있다 해도 크게 걱정하지 않았을 것이다.
카일의 실력이라면 쉽게 당하지 않을 거란 굳건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애당초 카일을 확실히 믿지 못했더라면 보일이 나서서 카일의 외유를 막았을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모두가 떠난 집을 지키는 건 자신보다 더 무서운 인물이었다. 두 다리를 다쳤지만, 최상급 엑스퍼트인 힐턴 남작이 고작 다섯 명의 엑스퍼트를 막지 못해 위험에 처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 * *
정체 모를 인물이 평원으로 들어서는 상단 행렬로 향하는 세 여인과 한 사내를 언덕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사람인가?”
검고 칙칙한 로브 속에서 여인인지 사내인지 모를 소름 끼치는 기괴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한 손에 들려있는 붉은 보석이 달린 지팡이가 분위기를 더 음산하게 만들고 있었다.
“음….”
검은 광택으로 반질거리는 단단한 갑주를 입은 거대한 체구의 사내가, 언덕으로 길게 내려앉은 그늘 속에서 천천히 걸어 나왔다.
“크크크… 잘 됐군. 그럼 바로 시작한다.”
검은 로브 속에서 또다시 차갑고 소름 돋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검은 갑주의 사내를 힐끔 바라본 검은 로브는 언덕을 터벅터벅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검은 갑주의 사내가 따랐다.
“크아악-”
순간 검은 로브와 흑기사의 뒤로 무수한 발자국 소리가 울려 퍼졌다.
척척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