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110화 (110/404)

110.소영주1

“세상에….”

깜짝 놀란 카일은 말을 잇지 못했다. 혼자 이 정도 수준까지 올랐다면, 검술에 대한 자질이 엄청난 것이었다. 카일이야 타고난 육체와 힘, 그리고 전생의 기억이 도움이 되었지만, 눈앞의 여인은 혼자 지금의 경지를 개척한 것이다.

카일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세인을 보며 물었다.

“죄송합니다만 제가 아가씨에 대해 여쭤도 되겠습니다.”

그제서야 서로 통성명도 하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세인이 화급히 사과했다. 그녀는 지금까지 카일에게 가르침을 얻었음에도, 정작 자신에 대한 소개는 하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죄송해요. 큰 배움을 얻고도 제 소개가 늦었어요. 전 다핸 남작 가문의 세인 몰티엔이랍니다. 켈토 몰티엔 기사단장님이 제 부친이세요.”

세인의 말에 그때서야 그녀의 검술이 이해가 되었다. 인제 보니 그녀의 검술은 몰티엔 기사가문의 검식이었던 것이다.

‘흠, 켈토 기사단장도 참 우둔한 것 같아. 후계자를 찾아 영지를 휘젓고 다니면서도, 곁에 훌륭한 재능을 가진 딸이 있는데도 보질 못하다니. 정말 등잔 밑이 어둡군.’

카일이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조금 도와나 줄까?’

장난기가 샘솟은 카일이 슬그머니 입매를 휘었다. 이런 짓궂은 마음이 세인의 인생을 송두리째 변화시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채로.

그런 카일의 속내를 모르는 세인은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음… 혹 조금 전 제가 보여 드렸던 기교를 가르쳐 드릴까요. 제가 오늘 가져다드린 검은 원래 제가 쓰려던 검이라, 마침 검 손잡이가 길지요.”

카일의 말에 세인은 뛸 뜻이 기쁜 마음을 겨우겨우 감추며 정중히 인사했다.

“정말… 정말 감사드려요. 오늘의 도움은 평생 잊지 않고 가슴에 새기겠어요.”

“하하 평생이라니, 그럴 필요까지야. 자, 시작하겠습니다.”

* * *

세인은 카일이 돌아간 후에도 그곳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대로 돌아간다면 오늘 배웠던 이 기억과 느낌을 모두 잃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어두운 밤이 지나고 서서히 날이 밝아 왔지만, 그녀는 여전히 검을 손에서 놓지 못했다.

“세상에. 아직도 안 가고 계셨습니까?”

나무를 향해 일점 찌르기를 하고 있던 세인이 시선을 돌렸다.

그녀의 눈앞에 그가 인상을 찡그린 채 안타까운 눈빛을 하고 있었다.

“무리한 수련은 자신을 망칩니다.”

근처로 다가온 카일이 검을 쥔 세인의 손을 잡았다.

얼마나 수련을 했는지 손바닥이 찢어져 붉은 핏물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괘, 괜찮아요.”

세인이 황급히 손을 빼려 했지만 카일은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그리곤 검을 빼앗아 바닥에 푹 박아 넣었다.

“제가 드린 검 때문에 생긴 상처니, 제 책임입니다.”

단호하게 말한 카일은 주머니에서 작은 합을 꺼냈다, 그 안에는 찐득한 검은 연고가 담겨 있었다. 카일은 약을 듬뿍 퍼내 상처에 골고루 발랐다. 그리고 하얀 천으로 단단히 동여매었다.

“블루 우드의 진액에 약재를 섞어 만든 약입니다. 꾸준히 상처에 바르면 흉이 생기지 않을 겁니다.”

카일이 세인의 손에 합을 쥐여주었다.

“전 이만 가야 합니다. 자경 대원들이 요새로 떠나기 전 순찰을 돌아야 하거든요.”

카일이 돌아서려 하자 세인이 힘껏 그를 붙잡았다. 마치 지금 떠나면 다시 못 볼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자신도 모르게 카일을 멈춰 세운 것이다.

“대련을… 저와 대련 한 번만 부탁드릴게요.”

세인의 말에 카일이 당황한 듯 세인을 돌아보다 그녀의 눈과 마주쳤다. 그녀의 동공에는 절박함이 담겨 있었다.

“좋… 습니다.”

카일은 얼떨떨하게 대답을 하면서도 왜 자신이 그녀의 부탁을 들어줬는지 이해할 수 없단 눈치였다. 하지만 카일은 그러면서도 천천히 그녀와 거리를 벌렸다.

“시작하겠습니다.”

카일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세인의 검이 카일에게 쇄도했다.

“어….”

순간 당황한 카일이 물러나며 환도를 뽑았다. 그녀의 검은 어제와 완전히 달려져 있었다.

단 하룻밤의 가르침만으로 그녀는 이미 그녀만의 검술을 만들었다.

“이럴 수가….”

물론 아직 정교함도 부족하고 기교도 떨어졌지만, 이만한 변화를 끌어냈다는 자체가 경탄스러웠다.

‘좋아! 이왕 이렇게 된 거 좀 더 해볼까?’

흥미가 동한 카일은 점점 속도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검보다 조금 빠르게, 그녀의 기교보다 조금 더 다양하게, 그녀를 끌어내기 시작했다.

마치 그녀의 모든 것을 끌어내려는 듯, 그녀가 따라올 수 있게, 조금씩 조금씩 앞서가며 그녀의 모든 것을 끄집어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카일은 뒤로 물러나 가만히 숨을 골랐다.

“다가오지 마십시오.”

카일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팔을 들어 누군가를 막았다.

“이게… 무슨….”

“물러나십시오. 지금은 그녀의 시간입니다.”

엄격한 카일의 행동에 켈토가 주춤 물러났다. 카일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날카로운 기운을 느꼈던 것도 있지만, 그보다는 그동안 관심도 주지 않았던 그녀의 딸의 놀라운 성취를 목격했기 때문이었다.

무아지경으로 검술을 펼치는 그녀의 검은 날래면서도 정교하고 화려했으며 섬세했다. 분명 몰티엔 가의 검이면서도 몰티엔 가의 검이 아니었다. 새로우면서도 낯설지 않은 그녀만의 검술이 탄생한 것이다.

곧게 내뻗어진 그녀의 검신 위로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검신 위로 오러를 발현하는 단계. 바로 소드 엑스퍼트 경지에 올라섰다는 확연한 증거였다.

털썩-

마지막으로 오러를 확인한 세인은 기쁨의 환호와 함께 그대로 쓰러지고 말았다.

“아!”

“세인아…!”

켈토가 쓰러진 세인을 향해 달려갔다. 그 뒤를 언제 나왔는지 모를 다핸 남작과 소영주인 멜토우가 따르고 있었다. 아마도 오래전부터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았다.

“밤새 검술을 수련해 지쳐 기절한 것 같군요. 몸에는 큰 무리가 없을 겁니다.”

카일이 어찌할 줄 몰라 하는 켈토를 다독였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이 아이가 엑스퍼트에 오르다니.”

“어제 잠시 아가씨의 수련을 보니, 이미 완숙한 소드 유저였습니다. 다만 검술 방식이 여인인 아가씨에게는 맞지 않는 것 같아, 몇 가지 조언을 해주었더니 밤사이 깨달음을 얻은 모양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카일에게 쏠렸다. 작은 조언만으로 검술 자체가 바뀐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카일은 15살의 어린 나이에 수 명의 소드유저를 꺾어버린 천재 검사였다. 그러니 분명 카일이 가진 무언가를 세인이 얻은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누구도 카일에게 이 추측이 진실이냐고 묻지 않았다. 이는 곧 비전을 뜻했으므로.

“아가씨의 재능은 놀라울 정도로 대단합니다. 하여 도움을 드리기 위해 몇 가지 조언을 한 것뿐인데, 밤새 이만큼 검술을 발전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습니다.”

카일의 말이 이어질수록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은 점점 변해 갔다.

재능!

그녀는 분명 굉장한 자질을 지녔다. 아무리 뛰어난 검술을 전해 주어도 하룻밤 사이에 자신의 것으로 삼는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당당히 해냈다.

더군다나 그녀는 카일의 가르침을 받았고 그에게 비전을 전수받았다. 비전은 가문의 사람이라도 가려 알릴 만큼 비밀스럽고 귀한 것이었다. 카일은 그런 걸 아무런 조건도 없이 가르쳐주었다.

이유는 단 하나.

카일은 그녀에게 마음이 있다.

아니, 없다고 해도 카일과 인연을 만든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잠정적 결론을 내린 켈토의 입매가 호선을 그렸다.

이제 그의 머릿속엔 보일의 얼굴은 사라지고 카일의 모습이 자리 잡았다.

아비의 마음으로서 켈토는 나이든 보일보다, 젊고 천재적인 자질을 지닌 카일이 딸의 반려가 되길 바랐던 것이다.

켈토는 쓰러져 있는 자신의 어여쁜 딸을 사랑스러운 얼굴로 바라보았다. 언제나 아들이길 바랐던, 그래서 외면했던 딸이 이제는 누구보다 자랑스러웠다.

켈토는 한껏 의기양양한 미소를 지은 채 다핸 남작을 바라보았다.

그것은 바로 승리의 미소였고 앞서가는 자의 여유였다.

다핸 남작은 세인을 잠시 바라보다 결국 길게 숨을 내쉬었다.

최상의 선택지는 그의 딸인 멜리안과 카일을 연결해주는 것이다. 하지만 가문을 위해서는 차선을 남겨둬야 했다. 이미 어느 정도 인연을 맺었으니, 과욕을 부릴 순 없었다.

세인은 언제 팔려갈지도 모를 귀족 가문의 여식에서, 카일을 가문으로 끌어들일 차선이 되었다. 이젠 그녀가 가문을 떠나려 해도 비전의 유출을 막아야 하니, 다핸 남작은 필사적으로 세인을 붙잡을 터였다.

“승부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맹랑한 사내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카일은 두리번거렸다.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날을 제거한 수련용 가검을 들고 서 있는 13~4의 아이가 카일을 노려보고 있았다.

“간다. 받아라!”

카일에게 달려든 소년, 소영주 멜토우는 다짜고짜 검을 찔러 넣었다. 의외로 기초가 잘 잡혀 있는 찌르기였다. 다만 그와 별개로 상대하는 카일의 안면엔 살짝 짜증이 묻어 있었다.

세인이야 어젯밤 작은 인연을 맺었고 훌륭한 자질이 아까워 도움을 주었다. 물론 얼굴이 예쁘다거나, 방긋거릴 때 오른쪽 볼 위로 앙증맞은 보조개가 생긴다거나, 은하수처럼 반짝이는 눈이 아름다워서 가르쳐준 건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저 소년은 뭐란 말인가?

사납게 노려보는 눈빛. 뭐… 세인이란 아가씨도 기색이 험했지만 그래도 귀여웠으니까…. 소질은 세인만큼은 아니지만 있어는 보였다. 그리고 얼굴도 크면 그럭저럭 생길 것 같아 기분이 더 나빴다.

나이도 비슷한 것 같지만 카일은 저런 사내 녀석에게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무엇보다 이른 시간에 나왔지만, 세인과 한 대련 탓에 시간이 지체되어 서둘러야 했다.

“귀찮게….”

카일이 아무도 듣지 못할 만큼 작게 음성을 죽여 중얼거렸다.

그리고 귀찮다는 기류를 숨기지 않으며 한 손으로 검을 뽑았다.

‘요 녀석, 혼 좀 나봐라!’

카일은 눈앞의 소년을 기사를 따라온 종자 내지는 아들이겠거니 하고 생각했다. 영주가 마을에 왔을 때 카일은 블루 우드를 벌목하느라 일정보다 며칠 늦은 어제저녁쯤에 도착했다. 영주가 며칠 전 도착했다는 걸 전해 듣기는 했으나, 그게 끝이었다.

카일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서, 하룻밤을 쉰 뒤 숲에서 사용할 물품을 챙겨 돌아가려 한 것이다. 외곽순찰조가 무너진 뒤, 요새가 완성될 때까지는 쉴 틈이 없기 때문이었다. 한 치의 휴식도 취하지 못하는 건 매튜와 필론도 마찬가지였다.

카일은 영주 일행이 자신을 보기 위해 며칠째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보일 역시 그들이 어린 자녀들까지 데려와 며칠째 머무는 까닭을 알지 못했다.

어쨌든 바빠 죽겠는데 달려드는 기사의 아들 녀석을 봐줄 만큼, 카일은 자비롭지 못했다.

스르릉

검이 검집에서 빠져나오는 순간!

“소영주님!”

멀리서 달려오던 호위기사가 크게 외쳤다. 온통 세인에게 관심을 집중하고 있던 사람들이, 막 검을 찔러가는 소영주 멜토우와 이제 검을 뽑아 드는 카일의 모습이 눈에 잡혔다.

‘젠장, 늦었다.’

녀석이 기사의 아들이 아니라 영주의 아들이라니….

정말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소영주까지 이런 오지 마을로 데려왔다니. 도대체 왜?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소영주에게 절대 상처를 입혀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미 검을 거두기는 늦은 상황. 재빠르게 머리를 굴린 카일은 최대한 힘을 뺐다.

지금으로서는 이 방법만이 그의 최선이었다.

챙-

짧은 소성이 울렸다. 소영주의 손을 벗어난 검은 빙글빙글 하늘로 날아올랐다가 바닥에 푹 박혔다.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알 수 없는 상황에 모두가 입을 다문 것이다.

‘다… 다행이다.’

카일이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검술을 배운 태가 나긴 하지만, 아직 대련은 제대로 해본 적이 없는 것 같았다. 때문에 몸이 굳고 손이 떨려 검을 제대로 쥐고 있지 못해, 사람이 아니라 검이 날아간 것이다. 만약 소영주가 정말 힘껏 검을 잡고 있었다면 몸이 다쳤을 것이다. 그러나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적어도 카일이 소영주를 향해 검을 뽑은 이유 정도는 만들어 내야만 했다. 소영주가 먼저 덤벼든 것이긴 해도, 어찌 되었든 한 지역 권력자의 아들이었다. 적당한 명분은 만들어 내야만 했다.

“소영주님! 검사는 절대 검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카일은 엄정한 척 굴면서, 바닥에 박혀 있던 검을 뽑아 멜토우에게 건넸다.

“다시 시도해 보십시오.”

카일이 짐짓 심각한 낯으로 말했다. 당황을 했는지 아니면 다른 생각이 있는지, 멜토우는 카일의 말대로 검을 찔렀다.

“틀렸습니다. 제대로 된 움직임은 그냥 검에 힘을 싣는다고 되는 게 아닙니다.”

카일이 직접 검을 들고 시범을 보였다.

쉬이익

빛처럼 앞으로 뻗어가는 검은 빨랐을 뿐만 아니라 강력한 힘이 내포되어 있었다.

“무작정 세게 한다고 힘이 실리는 것은 아닙니다. 어깨와 손목의 힘을 빼십시오.”

카일은 칼을 내민 채 굳어버린 멜토우의 자세를 세심하게 다듬어 주었다.

그러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소영주님께서는 아직 검술을 배울 때가 아닙니다. 기초수련이 완전히 잘못되었습니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셔야 합니다.”

그 말에 가장 먼저 발끈한 사람은 바로 소영주의 호위 기사였다. 그가 바로 소영주의 기초를 만들어준 장본인이기 때문이었다.

“무슨 헛소리냐! 소영주님은 기틀을 완성하신 지 오래고, 가문의 검술을 배우고 있으시다. 어디서 어린놈이 막말을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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