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98화 (98/404)

98.공작령으로

카일은 항상 입던 레더 아머의 오른쪽 허리에 검과 환도를 나란히 차고, 검집과 도집이 흔들리지 않게 허벅지에 가죽끈으로 묶었다. 그리고 가방에 필요한 옷과 철합, 육포와 마른 곡식 가루, 몇 가지 공구까지 챙겨 넣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가방 옆으로 총이 들어 있는 가죽 주머니를 매달았으며, 팔목과 발목에 단검과 단도를 찼다.

원래 자경 대원들은 한두 개의 단검을 가지고 다녔다. 주로 오크나 래빗 같은 동물의 가죽을 벗기거나 나무를 자를 때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나오셨어요?”

“어서 와요.”

카일이 짐과 장비를 가지고 나오자, 식탁에 앉아 차를 마시던 이니엘 영애와 시안느가 일어났다.

“두 분 모두 옷차림이…?”

카일이 두 눈을 크게 뜨고 앞에 서 있는 두 여인을 바라보았다.

시안느는 그동안 입고 있던 그린넨 백작 가문의 문장이 새겨진 레더 아머 대신, 자경 단원들이 입고 다니는 평범한 레더 아머를 걸치고 있었다. 게다가 등 뒤로 방패와 검 그리고 작은 가죽가방까지 짊어지고 있어, 평범한 용병처럼 보였다.

그러나 카일을 크게 놀라게 한 사람은 다름 아닌 이니엘 영애였다.

시안느가 약간의 변화를 주었구나 하는 느낌이라면, 이니엘 영애의 변신은 대격변이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이니엘 영애는 평민들이나 입는 린넨 원단의 회색빛 원피스를 입고, 그 위로 엉덩이까지 내려오는 오크 가죽조끼를 두르고 있었다. 신고 있는 부츠 역시 오크 가죽으로 만든 것이었다. 심지어 체력도 약하면서 시안느처럼 작은 가방을 메고 있는 상태였다.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여행이에요. 이대로 멍하니 마차에 앉아 끌려가듯 가고 싶지는 않아요.”

생긋 웃은 이니엘 영애가 말했다.

원래 이니엘 영애는 이곳에 올 때 타고 왔던 마차를 다시 타고 갈 계획으로, 부서진 마차를 수리해 집 앞에 가져다 놓았다.

“고위 귀족 영애께서 걸어서 가시겠다는 말입니까?”

“굳이 걸어갈 필요가 있나요? 말이 있는데.”

틀린 게 없는 시안느의 말에 카일의 말문이 막혀 버렸다.

“그렇다고 해도 영애께서 그런 차림으로 돌아다니시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시안느 경과 카일이라면 절 충분히 지켜줄 거라 생각해요.”

“저희 두 사람이 호위한다 해도 언제, 어느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 더군다나 전 마을 밖으로 나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외부에 어떤 위험이 있는지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됩니다. 제가 아가씨 옆에서 항시 떨어지지 않을 테니까요.”

갑갑한 마음을 숨기지 못한 카일이 이마를 찌푸렸다.

이니엘 영애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마차를 권해야 하는 시안느가 오히려 영애의 편을 들고 있으니, 카일로서는 답답할 노릇이었다.

두 사람을 설득하고 싶었으나, 시간이 부족했다.

아일론 상단과 함께 길을 나서야 하는 카일의 입장에서는 서둘러 상단과 합류해야만 했다.

“그냥 데려가거라.”

벽난로 옆에 앉아 차를 마시며 이야기를 듣고 있던 힐튼 남작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백작가로 돌아가면 더 이상 이런 외유를 하기는 힘들 것이다. 어쩌면 돌아가는 즉시 정략혼에 내몰릴 수도 있으니, 이번 기회에 마음껏 자유를 느끼고 싶을 것이다. 시안느도 그래서 영애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니 그냥 데려가거라.”

남작의 말을 들은 카일은 그제서야 이니엘 영애의 눈에 담긴 간절함을 읽어낼 수 있었다.

“휴~ 좋습니다. 대신 시안느 경과 항상 같이 다니셔야 합니다.”

“염려 말아요. 아가씨의 안전은 제가 반드시 지킬 겁니다.”

“그린넨 영지까지 아무 일이 없기를 바랄 수밖에요.”

카일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이만 가보겠습니다. 남작님.”

“그래, 서둘러 가 보거라. 다음에 또 보도록 하지.”

“기회가 된다면 그렇게 하시죠.”

이후를 기약하는 인사를 나누며 카일은 문밖으로 향했다.

“가보겠습니다. 남작님.”

시안느가 많은 감정이 담긴 낯빛으로 남작을 향해 깊이 허리를 숙였다. 남작은 따뜻한 눈으로 시안느에게 당부의 말을 해주었다.

“몸 조심히 돌아가거라.”

“남작님께서도 건강히 돌아가세요.”

“영애도 조심히 돌아가게! 비록 이번에는 악연으로 만났지만, 다음에는 좋은 인연으로 다시 만나길 바라네.”

“저 역시….”

이니엘은 무릎을 굽혀 귀족가의 정통 예법 맞게 인사를 하고는 둘을 뒤따라 나섰다. 집 밖에선 멀린이 셋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오셨습니까?”

“먼저 상단에 가 계시지 않고….”

“그럴 수야 있습니까.”

멀린이 카일의 옆으로 다가와 작게 속삭였다.

“그 친구는 상단주께 미리 얘기해 놓았습니다. 아마 제가 이곳에 온 목적이 그 친구를 만나기 위해서였다고 생각할 겁니다.”

“잘됐군요.”

카일이 안면에 흡족한 빛을 띄웠다. 그 사이 옆으로 다가온 시안느가 마차에서 풀어낸 말 한 마리를 가져다주었다. 이니엘 영애는 이미 커다란 말 위에 올라앉아 있었다. 투레질하는 말을 다독이는 이니엘 영애는 승마에 익숙해 보였다.

“샤이어종 말은 힘과 지구력이 뛰어나 장거리 여행과 전투마로써 활용하기 무척 좋습니다.”

검은 말을 관찰하며 설명을 듣던 카일은 시안느가 내민 말고삐를 받지 않았다.

“전 말을 탈 줄 모릅니다.”

“예?”

카일의 말에 시안느가 당황한 듯 되물었다.

시안느는 물론이고 이니엘 영애까지 카일은 당연히 말을 탈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카일이 말을 타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샤론 마을은 다핸 남작령에서 제법 부유한 마을 중 하나지만, 평민이 귀한 말까지 가지고 있을 정도로 여유롭진 않았다.

더군다나 자이언트 블루 우드가 주변을 감싸고 있는 마을의 특성상 말의 효용성이 상당히 떨어졌다.

“카일 님도 못 하는 게 있군요.”

“저도 사람입니다.”

카일이 농을 치듯 말했지만 시안느와 이니엘 영애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자유롭게 말을 타고 돌아다니기 위해 린넨 원피스를 택한 이니엘 영애로서는, 카일이 말을 타지 못하자 다시 마차를 타고 이동해야 할지도 모를 난감한 상황에 처하고 만 것이다.

“이번 기회에 말 타는 것도 배워 두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익숙한 음성에 카일이 시선을 돌리자 보일이 다가와 말을 쓰다듬고 있었다.

“아버지!”

“용병이 되려면 승마법 정도는 배워 놓는 게 좋을 것이다. 기회가 되는 대로 가르쳐 주려 했는데…. 아쉽지만 공작령까지 가는 동안 말과 친해져 보거라. 말이란 동물은 최대한 많이 타고 교감을 이루어야 쉬이 다룰 수 있단다.”

보일이 카일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했다.

“알겠습니다. 이번 기회에 배워 보는 것도 좋겠죠.”

보일의 말을 이해한 카일은 망설임 없이 말에게 다가갔다.

“지금 공작령까지 가면서 말 타는 법을 익히겠다고 말한 건가요?”

둘의 대화를 듣고 있던 이니엘이 어이가 없다는 듯 시안느에게 물었다.

“음… 그런 것 같습니다. 아가씨.”

시안느가 이마를 문지르며 답했다. 말을 탄다는 건 그렇게 쉽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시안느와 이니엘 영애 두 사람 모두 어린 시절 작은 조랑말부터 타기 시작해, 수년 동안 차근차근 배워왔기에 능란히 말을 다룰 줄 알게 된 것이다.

더군다나 말을 타고 장거리 여행을 하는 것은 말을 제법 잘 다루는 두 사람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처음 말을 타는 카일이 공작령까지 말을 타고 가겠다고 하니, 황당한 것이었다.

“처음엔 힘들어도 요령만 생기면 그다지 어렵지 않다. 가장 쉬운 방법은 몸에 중심을 잡은 후 말의 움직임에 몸을 맡기는 것이다.”

“이해하기 힘든 것 같아요.”

“일단 말에 올라 보거라! 바로 출발해야 하니, 기초적인 것만 몇 가지 알려주마.”

카일은 순순히 안장에 올랐다. 말 중에서도 대형 말인 샤이어종인만큼 말에 올라타기가 쉽지 않았으나, 카일은 말고삐를 잡고 땅을 박차 안장에 올라앉았다.

고삐를 틀어쥐어 단번에 힘으로 제압한 것이다.

“쯧. 말은 덩치만 크지, 겁이 많고 민감한 동물이다. 억지로 제압하기보다는 달래가며 교감을 이루어야 한다.”

“알겠습니다.”

“일단 안장 위에서는 허리를 세워라. 발뒤꿈치와 골반, 허리가 수직이 되어야 한다.”

보일은 카일의 잘못된 부분을 척척 지적했다.

“좋아! 대충 자세는 된 것 같구나. 이 상태를 유지하며 말을 타면 된다.”

“이래서는 중심을 잡기 어려울 것 같아요.”

“일단 허벅지에 힘을 주면 쉽게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 상태에서 엉덩이의 근육을 써, 말의 움직임에 따라 중심을 잡으면 된다. 아비가 말을 끌어 줄 테니 천천히 중심을 잡아 보거라.”

“알겠어요.”

카일이 신중히 자세를 고쳤다. 잠시 기다려주던 보일은 카일이 얼추 자리를 잡자 시안느와 이니엘에게 말했다.

“그만 가지요.”

보일은 두 사람의 대답을 듣지 않고 말고삐를 잡고 천천히 앞장서서 걸었다.

그 뒤를 멀린이 남은 말 한 마리를 끌고 뒤따랐다.

“가요.”

이니엘 영애가 카일의 뒤를 쫓아가자, 시안느도 안장에 올라 말을 몰았다.

보일은 카일의 말을 끌고 북쪽 목책으로 향했다.

“어떠냐?”

“쉽지 않네요.”

얼굴을 찡그린 카일이 말했다.

“하하! 처음에는 힘들지만 계속 타다 보면 곧 익숙해질 것이다. 공작령까지 가다 보면 나름 요령도 붙을 것이다.”

“후우. 한동안 고생해야 할 것 같군요.”

“뭐든 쉽게 얻는 것은 없단다.”

보일이 씩 웃으며 말을 이었다.

“되도록 자작령에 도착하는 대로 용병등록을 하거라.”

마을을 떠나면 한동안 왕국을 돌아다녀야 하기에 신분을 확실하게 증명할 신분패가 필요했다. 그래서 카일은 이번 기회에 용병으로 등록하기로 했다.

일반적으로 평민이나 농노의 경우 소속된 영지에서 신분패를 발급해 주지만, 자유민의 경우 소속된 영지가 없으므로 성인이 된 이후 왕성에서 신분패를 발급받아야만 했다.

이는 자유민에 몰락한 귀족 가문의 사람이나 작위를 계승하지 못하는 자녀들, 혹은 고위 귀족들의 서자들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이런 점을 완전히 무시할 수 없었기에, 왕실에서도 자유민들의 가문과 신분 내력을 관리하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제 성인에 들어선 나이의 카일은 신분패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물론 다핸 남작이 발급한 임시 신분패를 소지하고 왕성으로 향할 수는 있지만, 그보다 확실한 방법이 바로 용병패를 발급받는 것이었다.

물론 단순히 용병패를 얻기 위해 용병이 되려는 것은 아니었다.

보일은 카일이 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다양한 경험을 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용병이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보일이 지금의 경지에 오를 수 있었던 건, 용병으로서의 수많은 경험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카일 역시 겪어보지 못한 세상을 경험하고픈 마음에서 용병이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여기 내 소개장이 있다. 용병 가족들에게는 조금 더 절차가 간소하니 필요할 거다.”

보일은 품에서 양피지 한 장을 꺼내주었다.

양피지에는 카일에 대한 기록과 이를 증명하는 보일의 용병패가 도장처럼 찍혀 있었다.

용병패의 경우 위조를 방지하기 위한 마법적인 처리가 돼 있어, 가장 확실하고 신뢰 높은 신분패로 사용되었다. 무엇보다 용병패 위로 피를 한 방울을 떨어트리면 마치 귀족들의 인장처럼 사용할 수도 있었다. 때문에 용병패는 각종 계약을 하거나 누군가의 신분을 보증할 때 유용하게 쓰였다.

두런두런 대화를 나누는 사이, 카일과 보일은 아일론 상회 사람들이 모여 있는 목책 앞에 섰다.

“다녀오겠습니다!”

“혹여 일이 생긴다면 언제든 연락하거라. 어디에 있든 찾아가마!”

“염려 마세요. 아무 일 없을 거예요.”

“그래! 너라면 잘할 거라 믿는다.”

보일이 카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때 보일의 뒤쪽에서 무트와 테일, 케트가 달려왔다.

“헉헉. 야, 카일! 너 오늘 떠난다며!”

제일 먼저 도착한 무트가 카일을 붙잡았다.

“무트 형 어떻게 알고… 조용히 가려 했는데.”

“너무 한 거 아니야? 친구 사이에 말도 없이 가려고 하다니.”

어느새 다가온 테일과 케트까지 소리치며 요란을 떨기 시작했다. 그러자 아일론 상단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테일과 케트에게로 향했다.

몰리는 시선에 카일이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럴까 싶어 조용히 떠나려고 했던 건데….’

카일은 쏟아지는 잔소리에 못 말리겠단 표정을 지으며, 왼쪽 팔과 왼쪽 다리에 차고 있던 단검 두 자루를 풀어 테일과 케트에게 건넸다.

보일의 검을 강철검으로 바꾸면서, 기존에 있던 보일의 검을 잘라 단검 4개를 만들어 보일과 카일이 각각 두 자루씩 나누어 가지고 있었다. 카일이 지금 준 단검 두 자루가 바로 이것들이었다.

“잠깐!”

막 테일과 케트가 단검을 받으려는 순간 무트가 재빨리 끼어들었다.

무트 자신도 있다는 사실을 알리는 무언의 항의였다.

“설마 제가 형을 빼먹을까요. 잠시만 이쪽으로….”

카일은 무트를 한쪽으로 부른 다음 오른쪽 다리에 차고 있던 단도를 꺼내어 주었다.

“이건… 운석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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