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블랙 와이번 3
전투가 끝나고 무기들까지 모두 수거했을 즈음은 날이 거의 저물어 가고 있을 때였다. 그동안 시안느와 이니엘 영애는 절벽의 한쪽에 놓인 주안의 시신 위로 돌을 쌓기 시작했다.
주안의 시신을 가져갈 수도 그렇다고 절벽 아래로 내려 땅에 묻을 수도 없었다.
땅에 묻더라도 냄새를 맡은 몬스터가 파헤칠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절벽 위에 무덤을 만드는 게 시신을 보전할 수 있는 안전한 방법이었다.
“휴… 대충 마무리는 된 것 같은데 이들은 어쩌지….”
카일은 돌을 모으기 위해 부지런히 돌아다니는 이니엘과 시안느를 뒤로 하고, 죽어버린 보틀러와 피툰을 바라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들의 무덤을 만들어 줄 생각이 없는지, 둘의 시신은 아무렇게나 방치되어 있었다.
마음 같아서야 카일 역시 그들의 시체를 내버려 두고 싶었으나, 이대로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이 장소는 카일이 정찰을 위해 가끔 찾아오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잠깐 고민하던 카일을 결정을 내렸는지 어깨를 으쓱였다.
“어쩔 수 없지.”
카일은 두 사람을 낭떠러지 아래로 던져버릴 요량으로 보틀러와 피툰의 시체를 절벽 쪽으로 끌고 갔다.
툭-
막 보틀러를 들어 절벽 아래로 던지려던 그때, 보틀러의 품 안에서 물건 하나가 떨어졌다.
“이건 뭐지?”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주운 카일이 중얼거렸다.
작은 점들이 기하학적으로 이어진 특이한 문양이 새겨진 손바닥만 한 작은 은판이었다. 별 의미가 없는 평범한 물건이라 보기는 어려웠다. 그 순간 보틀러가 제국의 정보조직 중 하나인 검은 여우라는 생각이 카일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보틀러와 와이번 나이트 간의 대화를 미뤄 짐작건대 보틀러는 조직에서 상당한 지위에 있는 자 같았다.
“분명 크로노스 방면 검은 여우 제 4지대 소속에다가 이번 일을 지휘했다고 했지.”
은판을 이리저리 돌려보던 카일을 일단 피툰의 몸을 뒤져 보았다. 보틀러가 용병이라 하긴 했지만, 그 말을 그대로 믿을 수는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틀러의 말대로 그냥 용병일 뿐인지 그다지 값진 물건은 나오지 않았다.
카일은 실망하지 않고 이번엔 보틀러의 옷을 들쳐 뒤지기 시작했다.
“역시!”
카일의 예상은 적중했다. 민망할 정도로 아무것도 없던 피툰과 달리 보틀러는 꽤 값진 물건들을 지니고 있었다. 앞서 나온 은판과 함께 상당한 금액의 골드와 실버는 물론이고, 처음 만났을 때 보여준 와이번을 보관할 수 있는 아공간석이 나왔다.
이와 함께 고급스러워 보이는 단검과 두 장의 스크롤, 그리고 왕립중앙은행이라는 단어가 선명하게 새겨진 동화가 나왔다.
물건들은 두 손으로 들기엔 버거울 정도로 많았다. 카일은 우선 보틀러의 물품을 가방 안에 집어넣은 후, 보틀러와 피툰의 시신을 망설임 없이 절벽 아래로 던져 버렸다.
퍼어억
떨어진 시체가 으깨지며 기분 나쁜 소리가 들렸지만 카일은 신경 쓰지 않고 주변을 정리한 후 작게 모닥불을 피웠다. 이미 뉘엿뉘엿 지던 해가 완전히 산등성이 너머로 사라져 어느덧 절벽 틈 안쪽은 시커먼 암흑으로 덮여 있었다.
시안느와 이니엘 영애는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잠이 들었는지 아니면 주안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을 받았는지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절벽 틈 안은 쥐죽은 듯 고요하다는 것이었다.
“일단은 내버려 두는 게 낫겠지.”
뺨을 긁적인 카일은 바닥에 자리를 잡고 누워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카일 역시 상당히 지쳐 있었기 때문이었다.
* * *
-나와 맹약을 맺겠느냐.
얼마나 잤을까?
꿈속을 헤매는 카일에게 누군가 굵고 거친 음성으로 말을 걸었다. 귓가에서 울리는 소리가 아니라 마치 머릿속에서 직접 말을 건네는 것만 같았다. 비몽사몽 한 카일은 그저 꿈인 줄로만 알고 몸을 뒤척였다.
-나와 맹약을 맺겠느냐!
그러자 이번엔 음성이 좀 더 크고 선명해졌다. 카일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허억.”
그리고 그의 눈 앞에 펼쳐진 건 꿈보다 더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고양이 앞의 쥐처럼 카일은 온몸을 굳힌 채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별빛조차 잡아먹은 듯 칠흑 같은 어둠 속, 눈앞에 이글거리는 두 개의 푸른 불꽃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와 맹약을 맺겠느냐!
세 번째 질문이었다. 카일은 굵은 침을 삼켰다.
* * *
꽝
주먹으로 내려친 일격에 서탁이 그대로 박살 나 산산이 부서져 버렸다.
“지금… 뭐라 했느냐.”
“2공자… 블랙 와이번 기사단장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검은 레더 아머를 입은 사내의 귓불에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흩날린 서탁의 나무 파편에 긁힌 것이다. 그러나 사내는 부복한 자세 그대로 미동하지 않았다.
“…어찌 된 것이냐!”
서탁을 박살 낸 중년의 사내, 아이젠 공작이 바닥에 부복한 사내를 싸늘하게 노려보며 물었다.
“페링 남작을 제외한 나머지 기사들을 모두 처리한 후였습니다. 크로노스 왕국의 남은 잔당들을 처리하려는 순간 어디선가 공격이 날아왔습니다. 정확히 어디서 시작됐는지 모를 공격에 단장님께서는 심장이 관통당했고, 그대로….”
블랙 와이번 기사단의 부단장인 티론드가 고저 없는 음성으로 그때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어디서 시작됐는지조차 몰랐다면, 보이지도 않는 마법 공격이었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단장님뿐만 아니라 와이번 나이트 한 명이 더 공격을 당해 목숨을 잃었습니다.”
“휴우~. 블랙 와이번은 어찌 되었나.”
아이젠 공작이 끓어 오르는 분노를 겨우 참으려는 듯 크게 숨을 내쉬었다. 두어 번 심호흡한 공작은 눈을 감으며 물었다. 그러나 그의 꽉 쥐어진 주먹으로 그가 간신히 분노를 참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블랙 와이번은 단장님을 기사단의 숙소에 남겨두고 사라져 버렸습니다. 목을 관통당한 와이번 나이트는 제국으로 돌아와 숨을 거두었습니다. 다행히 소식을 듣고 미리 대기하고 있던 기사와 다시 맹약을 맺었습니다.”
“블랙 와이번이 그냥 떠났다니, 설마 예비 기사를 대기시키지 않았단 말이냐?”
믿기지 않는단 것처럼 아이젠 공작이 입술을 달싹였다. 블랙 와이번은 와이번 중에서도 화이트 와이번 만큼이나 희귀한 종이었다. 제국에서도 오직 단 한 명과 맹약을 맺은 만큼 귀한 존재일 뿐만 아니라, 전략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가진 존재였다.
“블랙 와이번을 대하는데 어찌 소홀함이 있었겠습니까? 분명 20대 후반의 예비나이트인 중급 엑스퍼트를 대기시켜 놓았습니다. 그러나 블랙 와이번은 맹약을 거절하고 그대로 하늘 위로 날아올라 자취를 감췄습니다.”
연이은 충격적 소식에 아이젠 공작의 목에 두꺼운 핏줄이 솟았다. 블랙 와이번은 그도 어렵게 구한 귀한 존재였다. 특히 이번에 죽은 기사단장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알려져서도 안 되는 아들, 즉 숨겨진 서자였다. 비록 시녀의 몸에서 태어났지만, 그 재능이 워낙 뛰어나 20대 초반에 중급 엑스퍼트가 될 정도였다. 아이젠 공작은 그의 재능을 아껴 블랙 와이번의 오너로 만들었다.
비록 아들이라 밝히지는 못하지만 아이젠 공작은 다른 두 아들만큼, 아니 그보다 더 귀하게 여기고 있었다.
최상급 엑스퍼트에서 멈춘 자신을 뛰어넘어 마스터가 되어 줄 거라 굳게 믿고 있는 아들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번 전투로 인해 아들은 물론이고 공작가의 힘 중 하나라 할 수 있는 블랙 와이번까지 잃고 만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어버린 이상 아이젠 공작이 할 수 있는 일은 단 한 가지밖에 없었다.
“제국 전역을 뒤져 블랙 와이번과 맹약을 맺은 자를 찾아라! 절대 다른 자에게 블랙 와이번을 넘겨줄 수는 없다. 되도록 맹약을 맺은 와이번 나이트를 회유하되, 불가능하다면….”
아이젠 공작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했다.
“블랙 와이번을 반드시 되찾아 오겠습니다.”
아이젠 공작은 머리를 까딱이곤 관자놀이를 문지르며 티론드의 옆에 놓인 상자로 눈길을 옮겼다. 아이젠 공작의 눈이 상자로 향하자 티론드가 급히 상자를 들어 올렸다. 경량화 마법과 함께 보호 마법이 걸려있어 상자는 새것처럼 깨끗했다.
기대를 한 몸에 걸고 있던 아들과 블랙 와이번을 허망이 잃었지만, 그는 화이트 와이번의 알을 확보했다는 것만으로 위안 삼았다.
화이트 와이번은 설원의 학살자라 불릴 만큼 대단한 전설을 지니고 있었다.
블랙 와이번을 잃었지만 화이트 와이번을 깨울 수만 있다면 블랙 와이번을 능가하는 전략적 가치를 가진 존재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화이트 와이번의 알인가?”
“그렇습니다.”
티론드가 목에 걸고 있던 황금열쇠로 상자를 열었다. 그러자 그 속에서 백색 알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이….”
아이젠 공작이 매끈하게 빛을 발하는 와이번의 알을 황홀한 듯이 바라보았다.
“과연 아름답구나!”
아이젠 공작이 탄성을 지르며 상자 안에서 알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묵직한 둥근 알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이젠 공작이 가만히 알을 바라보다, 다시 상자 안에 조심스럽게 집어넣었다.
“맹약석과 기사는 이미 준비가 되었다. 마법사를 불러라!”
마치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집무실의 문이 열렸다. 황금빛 실로 복잡한 무늬를 정교하게 수놓은 백색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오랜만입니다. 공작 각하.”
“어서 오게, 데너리스. 잘 지냈는가?”
아이젠 공작은 자신이 언제 분노를 했다는 양 반갑게 마법사 데너리스를 맞이했다.
데너리스는 빛의 마탑의 장로 중 하나로, 아이젠 공작과는 어려서부터 아카데미를 함께 다닐 정도로 절친한 사이였다.
“이것이 바로 화이트 와이번의 알입니까?”
데너리스가 호기심을 감추지 못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렇네. 이것이 바로 화이트 와이번의 알이네. 일전에 말한 대로 맹약석을 만들어주었으면 하네.”
“염려 마십시오. 맹약석을 만드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이렇게 전설 속 화이트 와이번의 알을 보게 되어 저 역시 기쁩니다.”
데너리스는 매끄러운 와이번의 알에서 일어나는 은은한 백색 광택을 황홀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화이트 와이번의 알이라 그런지 다른 와이번의 알과는 확실히 다르군요. 이렇게 은은하고 아름다운 빛을 뿜어내는 알은 처음입니다.”
“나 또한 이런 와이번의 알은 처음이라네.”
아이젠 공작 역시 몇 번 와이번의 알을 접했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와이번의 알은 처음이었다.
“그럼 부탁하지.”
아이젠 공작이 한걸음 물러나자 데너리스가 상자 앞으로 다가간 후 품 안에서 기하학적인 문양이 새겨진 푸른 보석을 꺼내었다. 마나석에 마법진을 새겨 넣은 맹약석이었다.
데너리스는 한 손에 맹약석을 쥐고 다른 한 손을 천천히 와이번의 알 위에 올려놓았다.
순간 데너리스의 손에서 흘러나온 새하얀 백광이 서서히 알 전체를 감싸 안았다.
“헉!”
와이번의 알에 손을 올렸던 데너리스가 깜짝 놀라 급히 와이번의 알에서 손을 떼며 물러났다.
“이게, 이런, 이럴 수가!”
“무슨 일인가?”
불길함을 감지한 아이젠 공작이 불안하게 눈을 굴리며 물었다. 그러나 데너리스는 아무 말 없이 다시 와이번의 알 위에 손을 얹은 후 눈을 감았다.
그리고는 잠시 후, 심각한 얼굴로 눈을 뜬 데너리스가 고개를 들어 아이젠 공작을 바라보았다.
“이 와이번의 알에 손을 댄 자가 있습니까?”
“왜 그러는가?”
“아무리 집중을 해도 알에서 어떠한 기운이나 파장도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죽은 알이거나….”
데너리스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가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