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추적자
저 멀리서 한 줄기 연기가 하늘을 향해 피어오르는 장면이 카일의 눈에 똑똑히 들어왔다.
“흠… 추적자가 붙었군요.”
추적자라는 달갑지 않은 단어에 일행들의 시선이 일제히 카일에게 돌아갔다.
“설마 추적자들이 보인단 말인가요.”
급히 경계의 자세를 취한 일행들이 이니엘 영애를 감쌌다. 질문을 던지는 이니엘의 목소리엔 걱정과 긴장, 공포가 섞여 있었다. 카일이 재빨리 부정했다.
“설마 그럴 리가요. 아직은 추적자들과 거리가 있으니 안심하셔도 괜찮습니다.”
“보이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그렇게 확신하고 있나요?”
“아버지께서 추적자들이 마을을 출발할 경우 신호를 보내어주기로 했습니다. 바로 저렇게요.”
눈을 가늘게 뜬 카일이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치켜들었다. 뒤를 돌아본 일행들의 시야 사이로 한줄기 푸른 연기가 멀리 협곡 아래에서 피어오르는 게 잡혔다.
“일단 추적자는 20여 명인 것 같습니다. 이제 마을에서 출발했을 테니 대략 반나절 정도 떨어져 있는 셈이네요.”
“그럼 서둘러 가야 하는 것 아닌가요?”
시안느의 얼굴에 다급함이 떠올랐다.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분명 추적하는 자들은 협곡을 따라갈 겁니다. 그럼 실질적으로 거리가 더 벌어질 겁니다.”
“그나마 다행이군요.”
“헌데 이상하군요. 분명 말리셨을 텐데.”
카일이 몇 번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아마 추적자 대부분이 엑스퍼트 급 기사들일 겁니다. 그러니 오크 정도는 무시하고 추적해올 게 분명합니다.”
“하지만…그렇다고 해도 쉽지 않을 텐데….”
이 중얼거림을 끝으로 대화는 잠시 끊겼다. 다시 카일은 몸을 돌려 다시 길을 재촉하기 시작했다. 바위를 타고 넘으며 열심히 전진하던 중 갑자기 카일이 그 자리에서 멈춰 섰다.
“잠깐.”
어쩐지 긴장한 기색이 묻어나오는 음색이었다. 일행들은 멈춘 채 가만히 카일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카일은 일행에게 눈길도 주지 않고 바위 절벽 위쪽을 바라볼 뿐이었다.
“저건…!”
“쉿~.”
막 소리치려는 시안느의 입을 카일이 황급히 막았다. 나머지 일행들은 뒤늦게서야 그들이 무엇을 보고 그렇게 놀랐는지 알아채곤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매끈한 절벽 위엔 거대한 뿔과 체구를 가진 동물이 거만한 눈빛으로 일행들을 빤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모습은 마치 산양 같았지만 크기는 일반적인 산양에 비해 족히 3배 정도 커 보였다. 특히 위협적인 건 피처럼 붉은 눈과 둥글게 말린 거대한 뿔이었다.
“모두 천천히 빠져나갑니다. 소리치거나 위협적인 행동만 하지 않는다면 공격하지 않을 겁니다.”
나직한 카일의 목소리에 일행들은 큰 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하며 천천히 바위를 넘어갔다. 위로 올라가자 수많은 거대 산양들이 절벽 위를 마치 평지처럼 뛰어다니는 모습이 보였다. 그 수는 족히 수백은 되어 보였다.
“대단하군요. 이곳에 저런 몬스터가 자리 잡고 있다니.”
“저들은 몬스터가 아닙니다. 그저 체구가 큰 산양일 뿐이지요. 다만 이런 지형에선 아무리 오우거라도 저 산양을 당할 수가 없을 겁니다. 절벽을 평지처럼 달리며 거대한 체중과 힘으로 들이받는다면 속수무책이죠.”
오우거도 물리칠 산양이라니. 어딘가 희극적인 정보에 시안느가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였다. 그때 저 멀리서 굉음이 들려왔다.
쾅-! 쾅-!
공기를 찢어발기는 소리의 정체는 바로 거대한 산양들이 서로의 머리를 부딪치며 싸우는 모습이었다.
절벽 위에서 온 체중을 실어 아래에 있는 상대의 뿔에 부딪히는 모습이 대단히 위협적으로 다가왔다. 깎아지른 절벽에서 벌어지는 난투라는 게 믿기지 않을 지경이었다.
“정말 대단하군요.”
어딘가 비현실적인 광경에 넋을 빼놓고 있던 일행을 깨운 건 카일의 음성이었다.
“서둘러 가죠. 곧 오늘 머물 장소가 나올 겁니다.”
카일의 재촉에 일행들은 앞쪽에 펼쳐진 완만한 절벽의 측면을 따라 빠르게 걸어갔다.
물론 비교적 완만하다뿐이지 아래쪽으로는 까마득한 낭떠러지라 일행의 등 뒤에는 식은땀이 절로 흘러내렸다.
장장 한 시간을 걸어 서서히 하늘이 붉어질 때쯤에서야 완만한 절벽이 끝나고 다시 수많은 거대 바위들이 나타났다.
카일을 따라 바위 절벽 사이로 다가가자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돌계단이 나타났다.
바위와 바위 사이 중간에 커다란 돌을 끼워 넣은 단순한 형태의 계단이었으나 지금까지 넘어온 험준한 바위들을 생각하면 이것만으로도 감지덕지했다.
돌계단을 따라 내려가자 다시 커다란 바위 두 개가 서로 겹쳐진 곳이 나타났다. 그 뒤론 커다란 돌벽이 쌓여 있었다. 돌벽을 따라 겹겹이 겹쳐진 바위를 돌아가자 돌담으로 둘러싸인 제법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여기는 당신이 만든 건가요?”
주변을 둘러보던 시안느가 묻자 카일이 머리를 위아래로 까딱이며 겹쳐진 바위 사이로 다가갔다.
이곳 역시 겹쳐진 바위틈을 돌벽을 쌓아 막아둔 형태였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한쪽에 나무를 덧댄 문이 달려있다는 부분이었다.
“들어가시지요. 오늘은 여기서 쉬어가면 됩니다.”
“대단하군. 이런 곳을 만들어 놓다니.”
주변을 관찰하던 주안이 말했다. 길을 다듬고 바위틈 사이에 돌을 쌓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몇 년 전부터 조금씩 쌓아 만든 곳입니다.”
카일이 문을 활짝 밀어젖혔다. 일행은 안으로 들어가는 카일의 뒤를 천천히 따랐다.
바위 동굴은 생각보다 넓고 상당히 밝았다. 바위와 바위가 겹쳐지면서 생긴 틈 사이로 빛이 동굴 깊숙이 들어온 덕분이었다.
안쪽 바위틈으론 작은 웅덩이가 있었는데 이곳 역시 인위적으로 돌을 쌓아 만든 것처럼 보였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 바위틈으로 조금씩 물이 흘러나오는 걸 보고 이곳을 만들었죠. 이곳에서 멀리까지 나가 식수를 찾는 것도 위험한 일이니까요.”
카일의 말 속에서 상당히 오랫동안 공을 들여 만든 곳이란 걸 알 수 있었다.
카일은 일단 일행들에게 자리를 안내해주고는 중앙에 모닥불을 피웠다.
처음에는 동굴 안에 연기가 가득 찰 것 같았지만 그러한 우려와 달리, 연기는 위쪽에 뚫려 있는 바위틈으로 모두 빠져나가고 동굴 안은 금방 훈훈한 기운이 돌았다.
“헌데 너무 빨리 쉴 곳을 찾은 건 아닌지 모르겠군. 추적자들과 달리 지름길로 간다 쳐도 거리를 더 벌리는 것이 나을 것 같은데….”
보틀러가 걱정스럽게 말하자 카일이 그를 안심시키듯 미소를 지었다.
“어차피 곧 날이 어두워질 겁니다. 절벽인 이곳은 오크들은 마주치기 힘들지만, 가끔 산양을 사냥하기 위해 웨어 울프들이 돌아다니니 차라리 쉬는 게 낫지요.”
“이곳에 웨어 울프가 산단 말인가?”
“가끔 서너 마리가 무리를 지어 다닙니다.”
“허, 웨어 울프라니….”
웨어 울프가 나타난다는 말에 일행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웨어 울프는 상당히 보기 어려운 몬스터였다. 최소 엑스퍼트가 되어야 다 자란 웨어 울프를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강력한 몬스터 중 하나였다. 웨어 울프를 더욱 위협적으로 만드는 건 바로 사냥감을 무리를 지어 공격한다는 점에 있었다. 때문에 엑스퍼트가 되었다 해도 혼자서는 상대할 수 없는 녀석들이었다.
그러나 불행 중 다행으로 이 녀석들은 개체 수가 적었다. 평생 1~2마리의 새끼밖에 키우지 않기 때문에 만나기도 어려웠다.
“그렇다면 이곳도 위험한 것 아닌가요?”
이니엘이 불안한 듯 문 쪽을 향해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녀석들의 목적은 산양이다 보니 이곳보다는 북쪽 능선 쪽으로 출몰합니다. 더군다나 이곳은 입구가 좁은 곳입니다. 무리를 지어 공격할 수 없는 곳이라 충분히 녀석들을 처치할 수 있답니다.”
카일은 말을 하면서 길게 만 밀가루 반죽이 꽂힌 쇠꼬챙이를 들고 와 모닥불 주변에 꽂아 굽기 시작했다.
구수한 냄새가 퍼지는 건 금방이었다. 일행들은 입맛을 다셨다. 아침 일찍부터 험한 바위를 오르내리면서 지치고 배고픈 상태라, 카일이 꽂아둔 꼬챙이에서 피어오르는 구수한 냄새가 식욕을 자극할 수밖에 없었다.
이곳은 카일이 자주 머무는 곳이라 식량은 물론이고 간단한 작업 도구까지 어느 정도 갖추고 있어 가지고 온 식량을 소비할 필요가 없었다. 미리 훈제해둔 고기와 술이 있어 일행들이 배불리 먹으며 쉴 수 있는 곳이었다.
허겁지겁 저녁 식사를 마친 그들은 한껏 지친 탓에 금세 잠들었다.
* * *
그 시각 추적을 나섰던 힐튼 남작은 낭패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는 중이었다.
“이런, 실수했군.”
힐튼 남작의 주변은 온통 오크들의 시체로 가득했다.
처음에는 단순히 몇 마리 오크가 나타난다 싶었는데, 순식간에 머릿수가 수백 마리로 불어났다. 치열한 전투는 벌써 두 시간 째 이어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녀석들이 한꺼번에 달려드는 것도 아니었다. 수십 마리씩 차례차례 덮쳐오는 상황이라 좀처럼 앞으로 나갈 수가 없었다. 좀 전진한다 싶으면 전투가 벌어지고, 전투가 좀 사그라든다 싶으면 또 다른 오크 무리가 나타나니 힐튼 남작이 후회할 만도 했다.
그렇다고 중간 휴식처로 돌아가자니 애매하게 거리가 떨어진 터라 걸음을 돌릴 수도 없었다. 진퇴양난이었다.
힐튼 남작은 방진을 형성한 기사단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매튜를 바라보았다.
중간 휴식처에서 밤을 보내자고 강력하게 주장했던 매튜의 권유를 무시하고 야간 행군을 결정한 것이 바로 자신이다 보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오크들의 공격이 시작되면서 형성하게 된 이 방진은, 오랫동안 훈련해온 기사단원들이 자연스럽게 형성한 진형이었다. 이 자리에 외부인인 매튜가 낄 자리는 없었다.
더군다나 길잡이로 따라온 상황이라 따로 부상을 당해서도 안 되었다. 결국 매튜는 방진 안쪽에서 기사단의 보호를 받으며 가게 된 것이다.
그나마 힐튼 남작이 선두에서 길을 뚫기 시작하면서 조금이나마 앞으로 전진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는 느린 전진 속도가 아니었다. 바로 오크들을 죽이면서 생겨난 혈향 때문에 오크들의 숫자가 점점 불어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오크를 죽이면 죽일수록 더 많은 오크와 몬스터를 불러들이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 * *
충분한 휴식을 취한 카일과 일행은 다시 바위 절벽 길을 지나 하루를 더 걸었다. 그들의 눈앞에 깎아지는 절벽 사이의 좁은 협곡이 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오크 랜드로 진입하는 관문에 들어선 것이다.
“이젠 어떻게 할 건가요?”
이니엘이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좁은 협곡을 바라보는 카일에게 다가가 말했다.
사실 지금까지 일행은 카일이 정확하게 어디를 목표로 가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오크 랜드로 향하면 추적자를 따돌릴 방법이 있다는 말에 카일을 따라온 것뿐이었다.
“저곳으로 갈 겁니다.”
카일이 손을 들어 가리킨 방향은 오크 랜드로 향하는 좁은 협곡을 형성한 거대한 산맥이었다.
“저곳이 바로 통곡의 협곡입니다. 저곳을 넘어가면 곧 오크 랜드지요.”
이쯤 되면 일행들도 카일이 향하고자 하는 목적지를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설마 지금 오크 랜드로 가겠다는 말입니까?”
믿기지 않는다는 어투로 시안느가 말하자 카일이 고개를 저었다.
“협곡을 통과해 오크 랜드로 향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저 산맥의 능선을 타면 오크 랜드 외곽을 통해 곧장 왕국의 서부지역까지 갈 수 있을 겁니다. 산맥은 아마 서부 멘피스 왕국까지 이어져 있을 거예요.”
“하지만 저 거대한 산맥에 얼마나 많은 몬스터들이 살고 있을지 모르잖느냐. 일행이 통과할 수 있을지 의문이구나.”
퍽 걱정스러웠는지 보틀러가 팔짱을 단단히 끼웠다. 카일의 얼굴에 은은한 미소가 어렸다.
“걱정 마세요. 아버지를 따라 와본 적이 있어서 어느 정도 길은 알고 있습니다.”
믿음직한 카일의 말에 일행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정말 저 산맥 안으로 들어가 보았단 말이냐?”
“그렇습니다. 대략 6~7일 정도 거리까지는 이미 가 보았습니다. 물론 그 이후에는 새로 길을 찾아야 하지만….”
“그만큼이라도 길을 알고 있다면 충분히 모험을 할 만하군”
보틀러는 안심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어느 정도 길을 알고 있는 길잡이와 함께 길을 간다는 것은 그만큼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더군다나 서부로 가려면 남부의 각 영지를 빙 돌아서 가야 하기에 오히려 산맥 타고 가는 길이 지름길이 될 수도 있었다.
“가시죠!”
카일 일행은 천천히 협곡의 능선을 따라 산맥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