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강철의 용병라이더-36화 (36/404)

36.힐튼 남작

“오! 이 자가 그 브랜디를 만든 자인가?”

그때 뒤에서 걸걸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본 켈토 단장은 화들짝 놀라 고개를 숙여 보였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반백의 머리를 한 사내였다. 보일보다 열 살 정도 나이가 많아 보이는 그 남자는 보일의 어깨 정도의 키에 체격이 무척 다부졌다. 눈에 띄는 점은 두터운 중검을 등에 메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런! 죄송합니다. 힐튼 남작님.”

“아니, 아니야! 괜찮으니 죄송할 필요 없네. 어차피 그 정도 고급술을 만든 자라면 나도 한번은 보고 싶었지.”

사내의 정체가 바로 그 ‘힐튼 남작’이란 것을 알아챈 보일은 무척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남작은 북부에서도 멀리 떨어진 남부까지 소문이 자자하게 퍼진 유명한 상급기사였다. 최근에는 최상급에 근접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정도로 유명한 인물로, 마파린 후작가가 자랑하는 최고의 기사였다.

원래 힐튼 남작은 북부 영지를 거의 벗어나지 않고 후작을 근접 경호하는 사람이었다. 항상 후작의 옆을 지키는 인물로 알려진 만큼 이곳에 있을 이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이곳에 있다는 건 영애가 지닌 물건이 그만큼 중요하단 말이었다.

어쩌면 지난 며칠 동안 추격자들이 영지로 들어오지 않은 이유도 힐튼 남작을 기다리기 위해서였는지도 몰랐다.

“자네가 보일이란 자경 대장인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보일은 힐튼 남작이 이곳까지 왔다는 사실에 놀라기만 했을 뿐, 겁을 먹거나 위축된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덤덤한 보일의 모습을 힐튼 남작이 흥미롭다는 듯 바라보고 있을 때, 힐튼 남작의 뒤를 따르던 기사 한 명이 분노한 얼굴로 보일을 다그쳤다.

“건방진 놈! 감히 남작님을 보고도 고개를 뻣뻣이 들고 있다니!”

말에서 내린 기사가 검을 뽑아 들려 했지만, 보일은 물끄러미 그 모습을 지켜볼 뿐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 그러자 기사의 안면이 더욱 일그러졌다.

보통 기사들이 이런 반응을 보이면 평민이나 용병의 경우, 바닥에 엎드려 살려 달라 애원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약자가 강자에게 목숨을 구걸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보일에게선 두려움의 기색이라곤 한 점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것의 의미는 단 하나였다.

“이놈이!”

바로 상대가 자신을 충분히 대적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다는 것.

결국 참지 못한 기사가 검을 휘두르려고 했다.

그때 기사의 옆쪽으로 검 하나가 빠르게 다가왔다.

바로 힐튼의 중검이었다.

순간 놀란 기사는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최상급에 근접한 기사의 검격은 그보다 빨랐다.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기사는 눈을 질끈 감았다.

하지만 찾아온 것은 온몸을 덮치는 고통이 아닌, 귀를 울리는 커다란 폭음이었다.

쾅!

힐튼의 검은 목표물을 베지 못하고 멈춰 섰다. 동시에 힐튼 남작이 한 걸음 물러나고 보일은 두 걸음 물러났다.

“역시 내 생각이 정확했어! 이런 오지에 자네 같은 자가 있다니 놀랍군. 한데, 왜 막은 건가. 강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나대는 녀석은 팔 하나쯤 잘라줘야 한다네.”

그러면서 힐튼 남작은 뒤로 넘어져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기사를 하찮은 벌레 보듯 바라보았다.

힐튼 남작은 기사단에서도 높은 신임을 받는 기사였다. 평소 인정이 많고 호탕한 모습을 보이는 그였으나, 딱 한 가지 참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약자가 강자를 알아보지 못하고 함부로 하는 태도였다. 그에게 강자는 신분과 고하를 넘어 모든 것에 우선이 되는 사람이었다.

“이런 멍청한 녀석이 기사단에 있었다니.”

수치스럽다는 것 같이 인상을 찌푸린 힐튼 남작이 검을 내리쳤으나 검은 또다시 중간에서 막혀버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미리 예상했는지 힐튼 남작은 물러서게 된 만큼 달려들며 검을 휘둘렀다. 위협적이었으나 보일은 피하지 않았다. 보일의 검이 바깥쪽으로 원을 그리며 남작의 검을 퉁겨냈다. 보일은 멈추지 않고 아래에서 왼쪽 어깨 쪽으로 검을 올려 그었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힐튼 남작은 백스탭을 밟으며 다섯 걸음 정도를 급히 물러났다.

아래에서 위로 올라오는 검격의 궤적과 기운이 심상치 않아, 쉽게 막을 수 있는 게 아니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힐튼 남작의 판단은 정확했다.

방금 보일이 보인 검격은 카일이 평소 펼쳐 보이던 도격을 흉내 낸 것으로, 상대가 검을 막는 반동에 자신의 힘을 되돌려 주는 것이었다. 막으려 들면 들수록 더 강력한 힘과 스피드로 공격할 수 있어, 상대를 궁지에 몰아넣을 수 있었다.

하지만 힐튼 남작이 이 사실을 알고 있을 리가 없느니, 그가 놀란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보통 기사들이 검술을 익힐 때 가장 처음으로 배우게 되는 것이 바로 큰 동작을 자제하라는 것이었다. 큰 동작이 강력하고 위력적일 순 있어도, 이후 허점을 노출하거나 자세가 무너질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보일의 공격은 동작 자체가 크고 위력적이었지만, 각 동작이 단순하면서도 유기적이고 빨랐다. 난생처음 보는 공격이었으니 힐튼 남작으로서는 당황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허어…. 이런 검술이 있었다니 대단하군, 대단해! 정말 탐나는 인재야.”

가볍게 입맛을 다신 힐튼 남작이 여태 바닥에 나동그라져 있는 기사를 힐끔 쳐다봤다.

“쩝, 좋은 기회를 놓쳤군.”

“전 마을을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허허. 눈치가 빠르군. 그러지 말고 나와 함께 가는 것은 어떤가? 자네 정도면 내 후계자로 손색이 없어. 이런 시골구석에 있지 말고, 날 따라오면 당장 기사단장 자리를 물려주겠네. 분명 후작 각하도 자넬 보면 좋아할 거야.”

“죄송합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전 이 마을을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잇따른 보일의 거절에 낯을 험악하게 구기던 힐튼 남작은 이내 표정을 풀곤 뒤에 서 있던 켈토 기사단장에게 말했다.

“다핸 남작에 대한 충성이 놀라울 정도로 대단하군!”

힐튼 남작의 말에 켈토는 남작이 뭔가 심각한 오해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보일을 탐내는 힐튼 남작에게 진실을 말할 필요가 없었기에 그는 그저 머리만 숙여 보였다. 보일 역시 딱히 변명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어쩔 수 없지. 싫다고 하는 사람을 억지로 데려갈 순 없는 노릇이니.”

그러면서 힐튼은 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기사를 신경질적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려 버렸다.

“멍청한 녀석.”

힐튼 남작이 무리하게 기사의 팔을 잘라내려고 했던 이유는 사실 보일을 데려가려는 수작에 불과했다.

계획대로 상황이 흘러갔다면 보일은 일단 힐튼 남작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기사의 팔을 자른 것은 힐튼 남작이지만 일차적 원인을 보일이 제공했다 우기면 되었으니까.

이를 빌미 삼아 후작이 나서서 다핸 남작에게서 보일을 내어달라 압박할 수 있었으니, 일단 후작령에 데려가 설득이나 회유할 생각이었다.

물론 힐튼 남작에게도 처벌이 내려질 것이 분명하지만, 후작가 최고의 기사에게 중징계를 내릴 수는 없었다. 고작 몇 달의 근신으로 끝났을 게 분명했다. 그러나 영지를 거의 벗어나지 않는 남작에겐 징계라 할 수도 없는 형벌이었다.

헌데 보일이 나서서 힐튼 남작을 직접 막아 버린 것이다.

“이 녀석은 치워라.”

힐튼 남작의 말에 뒤쪽에 서 있던 기사들이 달려와 쓰러진 기사를 끌고 갔다. 어수선한 상황이 좀 정리가 되자 보일이 다가와 일행을 자경단 내 회의실로 안내했다.

이곳은 자경단이 늘어나자 만들어진 장소로, 각 자경단의 조장급들이 모여 회의를 하는 곳이라 제법 넓었다.

“이번에 우리가 이곳에 온 것은, 영지에서 죄를 짓고 도망간 녀석들을 잡기 위해서네.”

힐튼 남작은 자리에 앉자마자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리곤 품 안에서 푸른빛을 토해내는 작은 목걸이를 꺼내어 놓았다. 맹약석을 가공한 목걸이였다. 와이번의 알이 워낙 희귀하다 보니 맹약석의 존재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도 드물었다. 때문에 힐튼 남작은 구구절절 설명을 늘어놓는 대신 두루뭉술하게 마법 물품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무엇보다 자신들이 무엇을 쫓는지 이들에게 알릴 필요가 전혀 없었다.

“이것은 놈들이 훔쳐 간 물건을 추적하는 마법 물품이라네. 이걸 사용해 녀석들을 추적해 이곳까지 달려왔지. 보아하니 녀석들관 대략 하루 정도 거리가 벌어진 것 같군.”

“하지만 이곳을 넘어 존재하는 곳은 오크 랜드 뿐입니다. 설마 그들이 오크 랜드로 넘어갔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척 보일이 되묻자 힐튼 남작이 미간을 좁혔다.

“흠. 일단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다네. 그래서 일단 우리도 그쪽으로 가려 하는데…. 혹시 오크 랜드로 넘어갈 방법은 없는가?”

힐튼 남작의 물음에 보일의 옆에 앉아 있던 켈토 단장이 단호하게 말했다.

“없습니다. 지금까지 오크 랜드로 들어간 것은 수백 년 전에 단 한 차례, 제국원정대가 10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오크 랜드를 정복하려 했던 적뿐입니다. 그에 대한 결과는 이미 아시지 않습니까? 무엇보다 지금은 그때와 달리 오크 랜드의 입구에 붉은 트롤 수백 마리가 서식하고 있습니다. 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켈토 단장의 말에 힐튼 남작이 낮게 끙하는 신음을 냈다. 그렇다고 임무를 포기할 순 없었으니 다른 방도를 찾아봐야 할 성싶었다.

“하지만 우린 놈들을 포기할 수 없네. 입구에 붉은 트롤들이 서식한다고 해도, 오크들은 오크 랜드에서 잘만 넘어오지 않는가. 그렇다면 반대로 넘어갈 방법도 있겠지!”

힐튼 남작이 고집을 부렸다. 결국 켈토 기사단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보게, 보일 대장. 일단 우리에게 오크 랜드까지 가는 길을 안내할 길잡이를 붙여주게.”

난감하다는 듯 보일이 말했다.

“자경단 중 누구도 오크 랜드를 넘은 적이 없습니다. 간다고 해도 오크 랜드 초입까지만 안내가 가능합니다.”

“괜찮아! 그 정도면 충분하네.”

힐튼 남작이 아무리 후작가의 가신이지만 타 영지의 영지민이나 병력을 마음대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고민 끝에 보일은 길잡이로 매튜를 붙여주기로 했다. 필론은 아직 영주성에서 돌아오지 않아 길잡이로 매튜만이 가능했던 탓이었다.

“매튜라고 합니다.”

“호오!”

보일이 자경단 회의실로 매튜를 데리고 오자 자리에 앉아 있던 힐튼 남작이 작은 감탄사를 내뱉었다.

“대단하지 않은가, 일칸 경?”

힐튼 남작이 옆에 앉아 있는 부 기사단장 일칸에게 눈짓했다.

“놀랍군요. 자경단 안에 엑스퍼트가 있다니.”

“그것도 그냥 엑스퍼트가 아닌 이미 초급 단계를 넘은 수준인 것 같군. 아마도 저 친구의 작품 같은데…. 이봐, 보일 대장. 자네의 제자인가?”

“그렇습니다. 제가 가르쳤습니다.”

“역시….”

자신의 짐작이 틀리지 않음을 확인한 힐튼 남작이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매튜의 기질이 강하다면 보일은 강과 유가 적절하게 조화되어 있었다.

보통 같은 검술을 익힌다면 같은 기질이 나타나기 마련이었다. 특히 보일과 매튜는 스승과 제자이니만큼 보일과 기질이나 느낌이 비슷해야 했으나 미묘하게 달라 이상함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호기심이 앞섰으나 당장 중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었기에 힐튼 남작은 금방 관심을 끄고는 말했다.

“좋아. 일단 길잡이도 생겼으니 바로 출발하도록 하지.”

보일이 성급하게 구는 힐튼 남작을 만류했다.

“지금은 출발하기 어렵습니다. 이미 정오가 지난 시간이라 요새까지 가기는 힘들 겁니다. 내일 아침에 출발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걱정 말게. 우리 안전은 충분히 챙길 수 있네.”

난감해진 보일이 기사단장을 바라보았지만 켈토는 내버려 두라는 눈빛을 보낼 뿐이었다. 힐튼 남작의 고집은 유명했다. 한번 결정한 이상 쉽게 결정을 번복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보일의 만류에도 힐튼 남작은 기사단을 이끌고 목책을 나섰다.

“괜찮겠나?”

목책을 나서는 힐튼 남작을 바라보던 켈토 단장이 다가와 물었다.

“저 정도 전력이면 크게 문제는 없을 겁니다.”

보일의 말에 켈토 역시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보일이 고개를 돌려 멀리 목책 너머를 바라보자 한 줄기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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