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너무 과하게 손을 쓴 걸까요
보일이 카일의 검술을 유심히 바라보고 있을 때, 폴란의 검을 피해 물러나던 카일을 향해 투스가 검을 사선으로 짧게 찔러 넣었다. 카일은 재빨리 몸을 돌려 검을 피하며 오히려 투스의 어깨를 향해 검을 찔렀다. 그러나 투스는 카일의 공격을 무시하며 검을 세워 최소한의 방어만을 한 채 그대로 카일을 향해 돌진했다.
“요놈! 잡았다.”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카일의 환도를 묶어 놓고 폴란에게 기회를 주겠다는 회심의 한 수였다. 카일로서는 무작정 몸으로 밀고 들어오는 투스의 공격에 급히 뒤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때를 기회로 물러나는 카일을 향해 폴론이 마치 승리의 포효를 지르듯 소리치며 검을 찔렀다. 이번 작전이 실패했다 생각하고 있던 폴론에게는 뜻하지 않은 반전의 기회가 온 것이다.
“끝이다!”
폴론의 검은 짧은 거리로 찔러 들어와 상당히 위협적이었다. 보일이 한쪽에서 지켜보고는 있지만, 절대 카일을 도와줄 수 없는 거리였다.
“흥, 누구 마음대로!”
카일은 재빨리 몸을 돌려 다가오는 폴란의 검면에 환도를 가져다 댔다. 부드럽게 검을 회전시키며 방향만 살짝 바꿔 투스를 향하게 했다.
“안돼!”
폴란이 비명을 지르며 팔을 멈추려 했지만 이미 폴란의 힘과 카일의 힘, 거기에 관성이 더해진 검을 멈추기엔 역부족이었다. 칼날은 그대로 카일에게 달려들던 투스의 어깨에 틀어박혀 들었다.
“커억~!”
폴란의 검이 얼마나 깊게 들어갔는지 투스의 어깨 뒤로 폴란의 검신이 절반이나 삐져나와 있었다.
“이럴, 이러려던 게….”
사색이 된 폴란이 검을 뽑아내려 했다.
쉬익-
“크아악~.”
그때 카일의 환도가 다시 빠르게 움직이며 검을 쥐고 있는 폴란의 손목을 그대로 잘라버렸다.
아름다운 그림처럼 이어진 동작들에서 보일이 다시 한번 감탄을 터트렸다.
피가 튀고 손목이 잘려나가는 잔인한 장면이 연속됐지만, 보일은 태연하기만 했다. 용병으로서 수많은 전투를 겪었고 수많은 몬스터를 죽인 보일의 마음이 배신한 제자들의 손목이 잘렸다 하여 흔들릴 리가 없었다. 당연히도 카일을 탓할 생각도 없었고.
“허어. 상대의 힘을 이용해 다른 상대를 공격하다니.”
용병 시절 보일은 상급의 검술을 익힌 자들이 가끔 원을 그리듯이 검을 회전시켜 상대의 검을 날려 버리거나 빼앗는 걸 종종 보았었다. 그러나 카일처럼 상대의 공격을 되돌리거나 다른 이를 공격하게 하는 방식은 보일도 처음 보는 독특한 형식의 검술이었다.
“이렇게 했었나?”
카일의 동작을 손으로 몇 번 따라 해보던 보일은 옆에 놓아둔 약초와 천을 들고는 폴란과 투스에게 다가갔다.
“녀석, 깔끔하게 잘라 놓았군.”
보일은 먼저 폴론의 잘린 손목에 약초를 뿌리고 천으로 동여맸다. 투스 역시 검을 뽑은 후 간단하게 치료하고는 다른 녀석들이 있는 곳에 던져 놓았다. 포션으로 치료한다면 쉽게 치료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신을 배신하고 검까지 들이민 자들에게 그런 자비를 베풀고 싶지 않았다. 몇십 년 정주고 키워온 제자들이라 안타까운 마음에 치료해 주었지만 그렇다고 쉽게 용서할 생각은 없었다.
“아버지는 어떻게 하셨어요?”
카일은 자신의 싸움에 집중하느라 보일의 대결이 어떻게 끝이 났는지 알지 못했다.
상급 엑스퍼트인 보일이 고작 초급 엑스퍼트 둘을 이기지 못한다는 건 당연히 말이 되지 않았다.
다만 카일이 의아하게 여기는 건 그 점이 아니었다. 카일은 쓰러져 꼼짝도 못 하는 두 사람을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았다. 배신한 자들을 이곳에서 마무리 짓기로 한 만큼 다시는 검술을 사용할 수 없게 만들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뭐, 갈빗대 몇 개랑 다리뼈가 좀 나갔겠지!”
“…그럼 멀쩡한 거네요?”
카일이 보일을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며 말하자 보일이 모른 척 고개를 돌려버렸다.
자신을 공격한 다섯은 불구로 만들었는데 정작 배신을 당한 보일은 갈비뼈와 다리를 부러트린 게 다였다. 그건 몇 달만 지나면 멀쩡해진다는 말과 같았다.
“그래도 내가 가르친 아이들이니…. 막상 손을 쓰기가 어렵더구나.”
보일은 씁쓸하게 웃을 뿐이었다.
“음… 그럼 제가 너무 과하게 손을 쓴 걸까요?”
“아니다! 난 저들과의 정을 생각해서 적당히 해결했지만 넌 혼자 5명의 소드 유저를 상대했다. 저들이 일어나도 널 원망하기는 힘들 거야.”
카일은 그저 묵묵히 인상을 찡그릴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사람은 지금 자신이 처한 고통과 아픔이 더 괴롭게 느끼지, 남의 사정을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법이었다.
“휴~ 알겠어요! 이미 지난 일, 더 생각해서 뭐하겠어요.”
카일은 고개를 저으며 뒷마당으로 향했다.
보일이야 적당히 시간을 끌면서 쟝과 조셉을 두들겨 주었지만, 카일은 초 근접전에 이어 검술대결까지 펼쳐 상대의 가슴과 손목을 베어버리는 등 혈전을 벌였기 때문에, 몸 여기저기 핏물이 묻어있어 씻어야만 했다.
카일은 마당 한쪽에 놓여 있는 평평한 바위에 검과 레더 아머 (반코트형 가죽옷과 가죽조끼)를 벗어서 올려놓고는 마당 뒤쪽에 만들어 놓은 웅덩이 안으로 들어가 몸을 씻었다.
웅덩이는 대장간과 옹기를 제작하는데 많은 물을 사용하기 때문에 만들었지만, 이렇게 씻는 용도로도 사용했다.
카일이 웅덩이에서 나와 마른 천으로 몸을 닦으며 집안으로 들어왔을 때 밖에서 요란한 소음과 말소리가 들려왔다.
“마스터!”
밖에서 들려온 다급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매튜였다.
식탁에 앉아 봉인된 작은 옹기항아리를 풀어 막 술을 따라 마시려던 보일은 매튜의 목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쟝과 조셉 때문에 문이 날아가 버려 임시로 달아놓은 가죽을 걷어내자, 매튜와 필론이 서 있었다.
“마스터! 무사하십니까?”
매튜는 보일에게 질문을 하는 것 같았지만 정작 눈은 보일을 보고 있지 않았다. 분주히 움직이는 매튜의 눈동자는 보일의 뒤쪽을 향해 있었다.
그 행동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매튜가 안부를 묻는 것은 보일이 아닌 카일이었다.
“들어오너라!”
보일의 말에 매튜와 필론이 급히 집안으로 들어왔다.
“매튜 형! 필론 형도 왔군요?”
“아!”
“카일 무사했구나!”
새로 옷을 갈아입은 카일이 위층에서 내려오자 매튜와 필론이 한숨을 쉬며 안심한 표정을 지었다.
매튜와 필론은 이곳 샤론 마을 출신이었다. 보일이 이곳에 정착하던 해에 몬스터의 습격으로 부모를 잃은 두 아이를 받아들여 검술을 가르친 것이다.
당시 보일은 이곳에 정착할 생각이었고 혼자의 힘으로는 마을을 지켜나가는 것이 어렵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 마을도 점점 커지면서 실력 있는 자경단의 필요성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때 마침 마을에 있던 매튜와 필론이 검술에 재능이 있어 가르치기 시작했다. 처음 둘이었던 아이들이 차츰 한 명씩 늘어나면서 지금의 외곽순찰 조를 만든 것이다.
매튜와 필론은 보일이 자신들에게 검술을 가르친 이유가 마을을 지켜달라는 뜻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두 사람 역시 누구보다도 고향인 마을을 지키고 싶어 했다.
이런 신념을 지니고 있었으니 이들이 쟝과 조셉의 계획을 격렬히 반대했던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보일이 돌아오면 먼저 이 사실을 알리려 했지만, 같은 조원인 폴론의 배신으로 조금 전까지 자경단의 창고에 갇혀 있다가 간신히 풀려나 급히 보일에게 달려온 것이다.
특히 자신의 조원인 폴론의 배신은 매튜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폴론은 보일이 받아들인 3번째 제자였다. 이들 중 나이가 가장 많았지만 언제나 진중하면서도 보일을 가장 따르는 사람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몸은 다치지 않았느냐?”
보일이 자리에 앉아 서 있는 매튜와 필론을 보며 말하자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무릎을 꿇었다.
“마스터 죄송합니다. 이들을 막아야 했는데….”
“죄송합니다. 마스터!”
두 사람이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이자 보일이 고개를 저었다.
“그만 일어나거라! 나 역시 이 자리에 폴론까지 올 줄은 몰랐으니, 너희라고 폴론의 배신을 알 수 있었겠느냐!”
보일은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고 있는 두 사람을 일으켰다.
“비록 공격은 받았지만 이렇게 카일과 나도 무사하지 않느냐. 이미 벌어진 일 어쩔 수 없는 일이지.”
보일은 고개를 저으며 식탁 위에 놓인 술잔을 단번에 들이켰다. 그리고 다시 술잔에 술을 채웠다.
옆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던 카일이 한숨을 쉬며 조용히 일어나 밖으로 나가 작은 항아리를 하나를 가지고 들어왔다. 겉에 흙이 묻어 있는걸 봐서는 땅속에 묻어둔 항아리였다.
“좋지 않은 일도 있었고 여기 매튜 형과 필론 형들도 왔느니…. 특별히 드리는 거예요.”
카일이 새로운 단지의 뚜껑을 열고 두꺼운 천을 걷어내자 은은한 과일 향이 집안으로 퍼져나갔다. 보일이 마시는 술이 붉은빛이 도는 술이라면 카일이 지금 꺼내온 술은 마치 물처럼 깨끗한 술이었다.
“참! 밖에 있던 사람들은 어떻게 했나요? 사람들이 온 것 같았는데?”
단지 안에 있던 술을 나무 국자로 뜬 카일이 4개의 잔을 채우며 물었다. 술에 눈을 고정하고 있던 보일이 시선을 돌려 아직도 고개를 숙이고 있는 매튜와 필론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이 흠칫 몸을 떨더니 더욱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들은… 자경단원들이… 숙소로 옮겨 갔습니다. 아무래도 피를 너무 많이 흘린 것 같아….”
필론이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들이 여기에 왔을 때 쟝과 조셉을 비롯한 5명은 심각한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약간의 치료가 되어 있긴 했다. 정말로 목숨을 붙여놓기 위한 최소한의 치료이긴 했지만. 5명의 상처가 워낙 중해 필론은 자경단원들에게 숙소로 옮기도록 지시를 내렸다.
원래 매튜는 이를 말리려고 했었다. 혹시나 보일이 더 화를 내어 이들을 죽이지나 않을까 걱정을 한 탓이었다. 그러나 쟝과 조셉을 제외한 이들이 워낙 피를 많이 흘리고 있어 먼저 옮겨 회복하도록 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을 곤죽으로 만들어 놓은 범인은 카일이었으나, 이 둘은 카일이 그랬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킁…. 거 잘했다.”
회한에 잠긴 듯한 표정을 지은 보일이 다시 술독으로 눈을 돌렸다.
“쯧! 저만 나쁜 사람이 된 것 같네요.”
카일이 인상을 찡그리며 술잔을 하나씩 내밀었다.
보일에게 술잔을 건네고 매튜와 필론에게도 술잔을 건넨 다음, 주방 안쪽 화덕 위에 걸어 놓은 붉은 고깃덩어리를 가지고 왔다.
“몸을 썼더니 배도 고프군요. 안주 삼아서 래빗이나 먹죠!”
카일은 래빗이라 부른 고깃덩어리를 식탁에 올려놓고는 단도로 순식간에 먹기 좋게 해체했다. 매튜와 필론이 놀란 얼굴로 카일과 레빗 덩어리를 번갈아 응시했다.
래빗은 설치류인 쥐과 동물로 붉은 꼬리가 유난히 부드럽고 아름다울 뿐 아니라 고기 역시 맛이 좋아 고가에 거래되고 있었다.
그러나 워낙 산 깊은 곳에 살고 스피드가 빠르다 보니 잡기가 무척 어려웠다.
“다 됐어요. 이제 먹어도 됩니다.”
카일이 단도를 내려놓자 보일이 잔에 담긴 술의 향을 맡았다.
은은한 과일 향에 더해 톡 쏘아오는 알코올의 향을 보아하니, 대단히 독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거 혹시….”
술을 맛본 보일이 말끝을 흐렸다.
“맞아요! 수수술을 증류한 거죠.”
카일이 웃으며 말하자 보일이 눈을 휘둥그레 뜨며 잔에 들어 있던 술을 쭉 들이켰다.
독한 술이지만 목 넘김은 부드러웠다. 은은하게 과일 향이 입안으로 퍼졌다.
기존에 마시던 술과 비슷한 향을 가지고 있지만 향은 줄고 깔끔하고 부드러워져 있었다.
이 정도 맛을 내는 위스키는 구하기 힘든 고급술이었다.
“크으윽~. 좋구나!”
보일이 단숨에 술을 들이켜며 말했다.
“형님들도 마셔 보세요. 제법 숙성이 잘되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