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13 회: 24장. 선택 -- >
24장. 선택(3)
소유와 테라가 찾은 입구는 마니산 참성단의 뒤쪽이었다. 테라가 다가가자 자연스레 문이 열렸다고 한다.
“이런 예전부터 내려오던 유적들은 이런 입구를 표시해둔 걸지도 모르겠네요. 아니면. 그자가 이용하기 편하도록 만들어둔 거라든지.”
입구로 들어가면서 여러 가지로 살펴본 채영이 그런 감상을 이야기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테라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전의 기억에 대한 건 내게 별로 남아있지 않지만. 확실히 그런 느낌이 들어.”
희한하게도 지하의 모습은 예거 시뮬레이션 온라인에서 본 것과 비슷했다. 방사형으로 꾸준히 돌아내려 가면서 강현 일행은 몬스터를 퇴치했다. 능력의 제한이 있던 예거 시뮬레이션 온라인 때와 달리 그야말로 껌이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99층을 돌파했다. 정확하게 층별로 나뉘어 있는 게 아니라서 잘은 모르겠지만. 그렇게 이야기한 건 최종 목표물이 눈에 보였기 때문이다.
*****
“너희 인간들은……. 진절머리나는군.”
100층으로 내려가자마자 마주친 테라의 오리지널은 그렇게 말했다. 물론, 오리지널은 오리지널대로 따로 이름이 있을 테니 테라의 오리지널이라고 부르는 건 다소 어폐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지하 100층은 예거 시뮬레이션 온라인에서 봤을 때처럼 커다란 공동처럼 되어있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 CCTV에서 봤던 은발의 그녀가 하얀 꽃으로 만들어진 침대 위에 비스듬하게 누워있었다. 군살 하나 없는 매끄러운 나신에는 실오라기 하나 걸쳐있지 않았다.
UD팀은 그런 그녀를 포위했지만. 쉽사리 공격하진 못했다. CCTV에서 봤던 그 모습도 두려웠지만. 그녀가 뿜어내는 존재감이 주위를 억누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움직일 수 있는 건 강현뿐이었다.
“뭐가 그렇게 진절머리난다는 거지?”
그렇게 말하는 강현은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왼쪽 손에는 레이저 버스터가, 오른손은 건틀릿 소드로 변해있었다. 어느 쪽도 막대한 주먹을 휘두를 수 있는 강력한 무기. 하지만 그녀는 별로 개의치 않아 보였다.
“그야 당연하지 않겠어? 일부로 신경 써 몬스터를 보내뒀더니. 이상한 짓을 해서 몬스터의 힘을 얻어 가질 않나. 아무리 기생충이라고 해도 너무 적응 잘하는 거 아냐?”
그렇게 말하는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그녀의 앞에 있는 강현의 양손에는 힘이 들어갔다. 자신의 앞에서 자신의 입으로 몬스터들 보냈다고 했으니까. 자신의 부모님을 해친 것부터 해서 많은 사람을 해친 원흉이다.
“자, 잠깐만요.”
어느새 속박을 풀었는지 채영이 강현을 말리기 위해서 다가왔다.
“알고 있어.”
그렇게 말한 강현은 그대로 등을 돌려 뒤로 물러났다. 저런 말 하는 것 정도는 이미 사전에 예상했던 터다. 그리고 이곳에 오기 전에 그녀에 대해서 어떻게 대응하기로 이미 결정되어 있었다.
그 대응이랑 바로 대화였다.
채영은 강현을 쳐다봤다. 그러자 강현은 괜찮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채영더러 그녀와 대화하라는 신호였다. 이곳의 대표는 강현이었지만. 실제로 그녀를 눈앞에 두고 있자니. 쉽사리 흥분해버렸다.
채영은 무방비 상태로 그녀의 앞에 서서 고개를 꾸벅 숙인 다음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권채영이라고 합니다. 실례가 안된다면 이름을 알 수 있을까요?”
정중한 태도였지만. 그녀는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이대로 대답을 하지 않을까 걱정했을 때? 그녀가 입을 열었다.
“아마도. 그대들이 부르기에는 여러 가지로 부를 수 있겠지만. 굳이 이름이라고 하면 말이야.”
그렇게 말한 그녀는 뜸을 들인 다음 마지막 말을 내뱉듯이 말했다.
“지구…. 라고 할까?”
다들 그 말에 헉! 하는 소리와 함께 숨을 집어삼켰다. 강현은 그 말을 듣고 낭패라는 표정을 지었다. 가능하면 그 입에서 그 말이 나오지 않았으면 했다.
이미 강현일행은 테라가 해준 말로 자신들이 상대하려는 자의 정체를 추정하고 있었다. 그 추정으로는 그녀는 인류가 지금까지 뿌리내리고 살고 있던 땅과 바다, 하늘…. 그녀의 말처럼 [지구] 그 자체였다.
그런 존재에게 버림받는다? 그야말로 인류는 끝장이었다. 결국, 회의 끝에 전 세계의 사람들은 만약. 그 존재가 정말이고 확인된다면. 가능한 한 호의적으로 접근하기를 원했다. 대화로 풀어내자는 거였다.
그 말을 들었을 때. 강현은 코웃음을 쳤다. 당당하게 남의 집안까지 쳐들어가서 대화로 이야기하자는 꼴이나 마찬가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지 않겠다고 빼진 않았다.
이번 침입의 목적은 이 [지구]를 퇴치하는 건 아니었다.
-거짓말. 지금 네 모습은 우리와 같은 인간이잖아?
그때, 슈라가 날카로운 압박감에 버텨내면서 이야기했다. 어쩌면 중얼거리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만. 통역기를 거치면서 여기 있는 모두가 알아들을 정도는 충분했다.
“바보 같은!”
여자가 일갈했다. 순간적으로 무거워졌던 공기에 서늘함이 더해졌다. 그러자 아까와는 다른 압박감이 UD팀을 짓눌렀다. 전신이 찢겨나갈 듯한 살기에, 뼈까지 바스러질 듯한 압박을 받았다. 그 속에서 [지구]가 이야기했다.
“인간 모습인 건 그저 너희와 대화하기 편한 모습을 취하고 있을 뿐이야. 내가 이런 모습이라 해서 너희랑 같은 줄 알아? 인간답지 않게 왜 무기부터 안 휘두르는지 모르겠지만. 어차피 난 너희를 배제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인류 종말의 선언.
그 말에 다들 머리가 곤두서는 게 느껴졌다.
“좋아. 거기에 내가 힘을 빌려주지.”
언제부터 있었던지 몰랐지만. 누군가가 어두운 구석에서 뛰쳐나와 [지구]의 옆에 섰다.
그 옆에 선 사람의 모습을 보고 강현이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의 아이덴티티인 듯 항상 염색하고 있었던 금발은 보라색으로 변했지만. 익숙한 얼굴이었다.
“성제?”
“아아, 이 몸의 원래 이름이 성제였나 보군. 지금은 혼괴라고 불러줬으면 좋겠네.”
그 말에 반응한 것은 채영이었다. 언제 짓누르는 압박감을 벗어냈는지. 예거 스틱을 들고 혼괴에게 뛰어들었다. 이를 앙다문 결의에 찬 동작이었다.
“이거 뒤치다꺼리해주던 인간 아냐?”
혼괴는 그런 채영을 알아보고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이내 그 미소를 지웠다. 평소 같으면 조그마한 압박으로도 무릎을 꿇었을 채영이 전혀 개의치 않은 듯. 다가왔으니까. 채영은 그 틈을 노려 공격에 성공할 자신이 있었다. 그 예상대로 혼괴는 피하지 못하고 채영의 스틱에 목이 꺾여버릴 듯한 강타였다.
“공격 성공….”
채영이 그 모습을 보면서 승리를 자신하는 순간, 혼괴의 팔이 뻗어져 나왔다. 사람의 팔같이 않게 기다랗게 늘어진 팔은 채찍처럼 휘둘러져 채영의 머리를 노렸다.
-피해요.
그때 비교적 채영의 가까이에 있던 슈라가 역시 예거 아머에 장착되어있는 스틱을 휘두르면서 달려왔다. 채영에게 가해지는 공격방향을 바꾸기 위해서였다. 거기에 성공하나 싶었더니 혼괴의 다른 팔이 날아와 두 사람의 몸통을 타격했다. 결국, 두 사람 모두. 혼괴의 공격의 버티지 못하고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그 앞을 이번에는 하르몬이 아무 말 없이 막아섰지만. 이어지는 공격은 없었다.
혼괴는 자신의 힘을 충분히 보여줬다고 생각했는지. 팔을 원래대로 되돌리고 돌아간 머리를 억지로 원래대로 되돌렸다. 우으득우드득하는 불쾌한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사라지자 혼괴는 [지구]를 돌아봤다.
“어때요? 지구인지 뭔지 잘 모르겠지만. 나랑 손잡는 건?”
“손을 잡다니?”
[지구]가 고개를 갸웃했다. 여전히 큰 관심 없어 보이는 눈빛이었다.
“어차피 지구니 뭐니해도 저 인간이 진심으로 덤비면 이길 수 없는 건 마찬가지 아냐?”
혼괴의 말을 들은 [지구]는 슬쩍 강현을 쳐다봤다. 채영을 제외한 모두가 [지구]가 발하는 존재감에 억눌러 있다가 간신히 벗어났을 때조차. 강현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 듯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혼괴가 나타났을 때도 말릴 기색은 안보였다. 무언가 계속해서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뭐 그럴 수도 있을지도 모르죠.”
[지구]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투로 대답했다. 하지만. 그다음의 혼괴의 반응은 다들 예상 밖이었다.
“그렇다면. 그 몸 얌전히 나한테 내놓으시지?”
혼괴는 [지구]에게 달려들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장이평과 하르몬이 동시에 공격을 가해서. 각각 혼괴의 팔다리를 분쇄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지구]의 가까이에 갔다.
최근의 실패로 인간들에게 이제는 이길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을 해왔다. 하지만. 반대로 인간들이 강해지면 강해지는 만큼. 그 강한 인간의 육신을 빼앗으면 자신도 강해질 수 있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가만히 은둔하고 있을 만은 없었다. 그런 생각으로 몬스터 사이에 숨어있다가 쫓아 들어왔다. 그리고 최적의 육신을 찾은 거였다.
“어리석은 녀석.”
[지구]는 혼괴를 맞이하려는 듯이 손을 뻗었다. 하지만. 혼괴가 그 손을 중심으로 육신을 장악하기 위해 완전히 성제에게서 벗어난 순간. [지구]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순식간의 혼괴의 존재가 순간적으로 압축되어버렸다.
“이 녀석도 어차피 내가 예전에 인간을 없애기 위해서 만들었던 존재. 내가 거두는 것도 맞는 일이겠지.”
[지구]는 그렇게 말하며 주먹을 천천히 폈다. 그 안에는 콩알만 한 몬스터 코어가 있었다.
“소멸시켰어?”
“원래대로 돌아갔을 뿐이다. 너희도 마찬가지.”
그렇게 말하는 [지구]는 비릿하게 웃었다.
“결정했어.”
그때 [지구]의 미소를 가르듯 강현의 말이 떨어졌다. 다들 의아한 표정으로 강현을 쳐다봤다. 하지만. 강현의 목소리가 들린 곳에 이미 강현은 없었다.
이미 강현은 건틀릿소드를 [지구]의 어깻죽지에 꽂아넣고 있었다. 지구가 손을 뻗어서 컨틀릿 소드의 움직임을 막으려고 했지만, 힘에서 밀리는 듯 강현의 칼이 조금씩 움직이고 있었다. 그 사이로 피 대신 시커먼 물질이 스며져 나왔다.
“호오. 내가 누군지도 알고 있으면서도 날 죽일 건가?”
[지구]가 흥미롭다는 듯 강현을 쳐다봤다. 강현의 얼굴은 아까처럼 분노에 사로잡혀있지도 흥분해 있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전신에 힘을 가하고 있었다.
“죽기 전에 이쪽이 먼저 죽인다. 당연하잖아.”
“멋대로 만들어놓고 죽일 거면 이쪽도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그렇게 말한 강현은 숨을 들이쉰 다음. 다시 한 번 속사포처럼 내뱉었다.
“그에 대한 반항으로 지구가 죽는다면. 또 다른 지구를 찾으면 된다. 어차피 너 말대로 파괴적인 우리들은 그렇게 파괴하면서 진화해 왔으니까. 그것이 우리가 생존하는 데 필요한 대가라면 네 죽음으로 내주지.”
그 말에 [지구]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는 이내 눈을 가늘게 떴다. 얼핏 보면 미소 짓고 있는 것처럼 보일도 했다.
“정답은 아니지만.”
그렇게 말한 [지구]는 눈을 감고는 나머지 말을 이었다.
“나쁘지 않은 대답이군.”
그 말과 함께 손에 힘을 뺐다. 그와 동시에 건틀릿 소드가 [지구]를 비스듬하게 갈랐다. [지구]는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지구]는 그대로 생명력이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자신의 품속에 있는 생명체는 모두 그렇게 순환되게 되어있었다. 지구에 먹히고 퇴적되고 새로운 생명을 만들어낸 다음에 다시. 그 순환과정 속에서 자신은 힘을 얻었다. 그뿐만 아니라. 쾌락을 느꼈다. 하지만. 이 인간이라는 것들은 그마저도 원활하지 못하게 자신을 더럽히고 오염시키고 있었다.
게다가 그것들은 이제까지와 달리 자신이 일으키는 자연재해나 천적에도 적응해서 살아남았다. 그 때문에 이번에는 좀 더 직접적으로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결국, 이렇게 되어버렸다. 어떤 의미로는 알 수 있었다. 저 무한한 변화를 일으키는 인간들에게 버림받는다는 것을.
“나를 소멸시킨 다음 너희는 어떻게 할 거지?”
“인제 와서 걱정해주는 거야?”
[지구]의 말에 강현이 쏟아 붙였다. 냉정한 말이지만. [지구]에게는 개의치 않은 듯 담담하게 말했다.
“다른 의미로는 너희 부모나 마찬가지니까.”
“신경 안 써도 돼. 어차피 사람이 죽어도 시체가 남듯. 네가 죽는다고 해서 갑자기 세계가 무너지는 것도 아닐 거 아냐? 그 사이에 다른 곳을 찾아가면 되니까.”
그 말에 [지구]는 미소를 지었다.
긍정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던 순간에 [지구]는 의식을 잃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