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00 회: 21장. 예거 아머 -- >
21장. 예거아머 (4)
“저, 저기 무슨 오해가 있으신 거 같은데. 진정하세요.”
피를 본 상황에서도 미사키는 중재하기 위해서 강현의 앞을 나섰다. 당찬 모습. 아까 유혹할 때보다 매력적인 모습이라고 강현은 생각했다. 게다가 미사키의 놀란 모습을 보니 아마도 이 기습과는 무관해 보였다. 그렇다면.
“한번은 넘어가지.”
강현은 전투태세를 풀었다.
지킬 것이 있는 지금 난전을 펼칠 이유가 없었다. 소유 쪽으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가 눈을 마주쳤다. 서로 반가움을 듬뿍 담은 눈빛을 교환한 뒤. 강현은 알렉스의 사설부대원에게 지시했다.
“비행기로.”
“라져.”
기껏 이런 쇼까지 해가면서 소유를 회복시켰는데 전투에 휘말려 다치기라도 하면 말짱 도루묵이었다. 소유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는지 얌전히 캡슐에 누워있었다. 사설부대원들 은 캡슐을 들고 격납고 밖으로 나갔다.
강현측의 그런 행동을 미사키는 담담하게 지켜봤다.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은 건, 예거 아머가 들어 있는 케이스는 이 그대로 격납고에 뒀기 때문이었다.
한편 오른손이 잘린 드레인은 비명을 지르다 못해 가냘픗 신음만 흘리고 있었다. 피를 쏟은 채 전신이 식은땀으로 범벅되었다. 애처로운 상황. 드레인이 치료 못 받고 방치되어있는 건. 그레이 팀원 중에서 힐러가 없어서가 아니었다. 다만, 드레인이 몬스터와 싸워 다친 게 아니라. 강현과 트러블 때문에 다친 탓에 강현의 눈치를 보며 쉽사리 치료에 나서지 못하는 중이었다. 다만 강현은 그걸 알면서도 모른 척 했다.
“내…. 내 팔. 사, 살려줘.”
드레인은 애원하는 목소리로 강현을 올려다봤다. 지금이라도 손을 수습해서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서두르거나 뛰어난 힐러 능력자의 도움을 받으면 손을 되살릴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강현 입장에서는 먼저 배신한 드레인이 회복하도록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다.
강현이 짧은 영어로 드레인의 말을 알아듣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팔과 목숨. 둘 다는 안 되겠는데?”
강현의 말을 통역기로 건네 들은 그레이쪽의 분위기가 급속도로 냉각됐다. 앞서있었던 돌발상황일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드레인은 동료기도 했지만, 그레이로서는 희귀한 특이능력자였기에 쉽게 포기할 수 없었다.
“강현님.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미사키가 무릎 꿇고 이마를 바닥에 댔다. 일본 고유의 최대한 성의를 보이는 사과법으로 이른바 도게자였다. 하지만 어떤 사과를 하더라도 양보할 수 없는 선이었다.
“이게 내 선처야. 팔이라도 없으면 내 능력 뺏으려고 뻗대진 못할 거 아냐?”
강현의 말에 드레인의 눈빛이 바뀌었다. 강현이 자신의 생살여탈권을 쥐고 있는 만큼 하나도 놓치지 않고 듣고 있던 참이었다. 드레인이 자신들의 동료를 향해 외쳤다.
“이 미친 새끼! 저 새끼 쳐 죽여버려! 어서!”
“드레인!”
도게자를 하고 있던 미사키가 드레인을 만류하려고 했지만. 때는 늦었다. 서로 눈빛을 교환한 그레이들이 강현에게 각자 무기를 쏘고 휘두르면서 달려든 것이다. 팀원들의 대부분 능력이 출중한 만큼 애당초 남의 명령을 잠자코 듣고 있던 체질이 아니었다. 게다가 분명 사전 브리핑 때에는 여차하면 강현을 제거하고 예거 아머를 확보하는 시나리오도 있었다. 한마디로 지금의 소란도 예거 아머만 확보한다면 “문제없음.” 이었다. 단,
“날 쓰러트릴 수 있다면 말이지.”
강현은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다시 전투 자세를 잡았다. 강현에게 덤벼드는 건 미사키를 뺀 11명이었다. 이 11명의 능력과 버릇은 이미 사전에 그레이측으로부터 받은 정보였다. 팀원을 적재적소에 운영하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달라고 했지만. 설마 강현이 그 정보를 가지고 이렇게나 빨리 자신들을 상대할 거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다. 물론, 그 정보를 유용하게 쓰는 건 정확히는 강현이 아니었다.
“[ 콩 ] 알지? 플랜 A다.”
-체크했습니다. 마스터.
[ 콩 ]은 강현의 지시에 대답한 뒤 최초 얇은 손목시계 정도의 부피였던 본체가 빠르게 불어났다. 건틀릿 소드 정도? 그리고 어느새 강현이 인벤토리에서 꺼낸 A급 몬스터 코어와 결합하기 시작했다.
그 [ 콩 ]과 결합한 몬스터 코어는 끈적끈적한 얇은 막이 되어서 강현을 뒤덮었다. 강현을 집어삼킨 그 검은 액체는 순식간에 모양을 갖췄다. 거칠 갑옷 모양의 그 모습은 예거 아머의 모습과 흡사했다.
- [ 심비오트 슈트 모드 온 ]
*****
‘아니, 어떻게?’
미사키는 금방의 공방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강현이 예거 아머를 입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미사키가 알고 있는 바로는 알렉스가 JS온라인 우승자인 강현에게 지급한 것 한 개와 본인이 착용하는 예거 아머 한 개. 총 두 개였다. 그중에서 강현이 수상한 예거아머의 경우에는 눈앞의 케이스에 얌전히 들어가 있었다.
‘설마 저 케이스 안에 들었던 게 가짜?’
그런 생각을 잠깐 했지만. 이내 지워버렸다. 강현이 지금 뒤집어쓰고 있는 예거아머는 알렉스가 공개한 예거 아머와 외관부터 확연히 차이가 있었다. 차갑고 평평해 날카로운 기계 느낌이 많이 나는 알렉스의 예거 아머와 달리, 마치 점토를 굳힌 거 같은 강현의 예거아머는 기계라기보다는 하나의 시커먼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강현을 공격하려던 근접딜러들도 순간적으로 변신한 강현이 모습에 동요했다. 하지만. 동요는 잠시뿐. 그레이측 근접 딜러들은 강현을 치기 위해서 각자 무기를 내질렀다. 레이피어가 강현의 다리 움직임을 봉쇄하기 위해서 찔러 들어왔고, 강현의 몸통 쪽으로 부웅하는 파공음을 내며 거대가시가 달린 해머가 휘둘러졌다. 마지막으로 두꺼운 곡도가 강현의 목을 노렸다. 어는 것 하나 무시무시한 공격. 하지만 강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칠흑색의 전신 갑주를 입은 채로 그 모든 공격을 받아냈다.근접딜러들은 자신의 공격이 안 통하는 걸 보고 어이없어했다. 이들은 A급 몬스터 정도는 충분히 사냥해왔던 실력인데도 안 통하다니 납득하기 어려웠으니까.
하지만. 강현으로서는 당연한 결과였다.
A급 몬스터 코어로 작동하고 있는 심비오트 슈트 모드일때는 A급 몬스터의 코어에 1급 탱커인 강현의 능력까지 더해진 상태. 게다가 [ 콩 ]이 현재 상대의 공격에 따라 공격받는 부분의 장갑을 순간적으로 강화해 방어력을 높였다.
“제압 시작해.”
-체크했습니다.
강현의 지시에 [ 콩 ]이 대답했다.
강현의 양쪽 팔뚝과 허벅지에서 무기가 튀어나와서 한창 강현을 공격하고 있던 근접딜러들의 어깨와 다리를 공격해서 무력화했다. 시야를 가리는 게 사라지자. 양쪽 어깨와 허리춤에서 허벅지에서 총구가 튀어나왔다. 미니 레이저버스터 였다.
“탱커들 막앗!”
비교적 앞쪽에서 상황을 지켜보고 있던 미사키가 나머지 인원들한테 소리쳤다. 그 말에 미리 대기하고 있었다는 듯 탱커 두 명이 자신의 멤버를 가리듯이 양팔을 벌렸다. 강현이 쏜 레이저 버스터 하나는 막아냈지만. [ 콩 ]이 세밀하게 사격해 뒤쪽의 원딜 둘과 힐러 하나는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졌다.
순식간에 11명의 전투원 중에 6명이 쓰러졌다.
“괴물….”
그렇게 중얼거린 그레이 원딜은 이를 악물고 산탄을 발사했다. 하지만. 공격한 본인도 공격이 통할 거라는 기대 없이 자포자기로 공격한 거였다.
“아직도 포기를 모르네.”
강현이 한 발짝 발을 내딛자. 순식간에 그레이측의 뒷줄로 진입했다. 앞에서 막고 있던 탱커 둘이 막아낼 틈도 없이. 자신을 공격한 원딜의 산탄총을 걷어차 부숴버린 다음 그 반대방향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주먹에 맞은 원딜은 우스꽝스럽게 쭉 밀려 날아갔다. 그 사이에 [ 콩 ]이 컨트롤하고 있는 미니 레이저버스터가 나머지 원딜과 힐러들을 공격해서 무력화시켰다.
“이런 젠장!”
탱커 둘이 강현에게 덤벼들었지만. 그런 우격다짐 공격이 통할 리 만무했다. 강현이 심비오트 슈트 모드가 되었음에도 남아있던 건틀릿 소드를 휘두르자 탱커 둘은 연이어 비명을 질렀다.
그렇게 강현이 11명의 도퍼 능력자를 제압하는데 걸린 시간은 10분도 안 됐다. 이게 다 심비오트 슈트 덕분이었다. 첫 실전 사용을 해본 강현도 그 효율에 새삼 놀랐다. [ 콩 ]의 인공지능이 보조해주자 공수에 거의 사각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예거 아머는 못 가져도 이거 하나 챙겨서 다행히 긴하네’
강현이 이 능력을 얻게 된 건 JS 온라인 플레이를 마치고, 예거 아머의 설계도를 미국과 중국으로 전달할 때였다. 예거아머의 설계도를 스캔한 [ 콩 ]이 심비오트 슈트 모드가 가능하다고 알려왔다.
“예거아머 설계도랑 몬스터 코어 가지고 이렇게 변신할 수 있다면 더 일찍 하지.”
-그건 불가합니다. 테라의 경우를 보고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됐으니까요.
레이저 버스터를 사용할 때처럼 몬스터 코어를 단순히 에너지원으로 사용하는 게 아니라. 테라가 몬스터 코어를 통해 만들어진 만큼. 몬스터 코어를 흡수해서 손목시계만 했던 [ 콩 ]의 하드웨어를 보충해서 이렇게 전신을 덮는 갑옷을 만들 수 있었다. 참고로. 예거 아머처럼 비행능력도 갖출 수 있게 됐다.
문제는 테라의 생성과 [ 콩 ]의 업그레이드 때문에 인벤토리에 있는 몬스터 코어를 대부분 소모해버렸다는 거였다.
‘최근 게임에서가 아니라 현실에서 장비 업글한다고 돈을 많이 써버리네. 아니 이제 현실과 게임의 경계도 모호해졌으니까. 의미가 없나?’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강현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강현에게는 금전이 중요한 게 아니라. 몬스터 코어가 금전 대신 중요한 비용으로 자리 잡아버린 것이다.
“그럼. 돌아가 볼까?”
강현은 그렇게 중얼거리며 출구로 몸을 돌리다가 바닥에 주저앉아있는 미사키를 발견했다. 미사키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자신이 공격한 적도 없고, 피를 흘린 것처럼 보이지 않았기에 강현은 무슨 일인가 의아했다.
“그쪽이 먼저 덤벼들었으니까. 난 잘못 없어.”
강현은 실없는 소리를 하면서 미사키를 살펴봤다.
하지만 미사키는 넋이 나간 표정만 짓고 말할 기미가 안 보였다. 대신에 미사키가 주저앉은 곳에 노란 물이 흥건했다.
흥미가 사라진 강현은 그대로 몸을 돌려서 자신의 몸만한 예거 아머 케이스를 번쩍 들고는 겹낙고를 나갔다. 지금쯤이면 알렉스의 사설부대가 소유를 비행기 안으로 옮기고 금방이라도 이곳을 뜰 수 있게 준비해뒀을 터였다.
*****
미사키는 텅 빈 격납고 안에 주저앉아있었다. 원래라면 전투기 수리까지 가능한 격납고 안은 텅 비어있었다. 대신 피비린내와 고통과 신음이 가득했다. 자신의 동료들이 고깃덩어리마냥 꿈틀대고 있었다.
하지만. 미사키가 주저앉은 건 그런 그로테스크한 상황에 겁먹어서가 아니었다. 그저 강현 때문이었다.
‘괴물….’
강현의 압도적인 강함을 보고 미사키를 치를 떨었다. 이미 도퍼의 레벨이 아니었다. 이런 괴물을 상대로 덤벼서 일을 이 지경으로 만들다니. 미사키는 드레인이 새삼 원망스러웠다.
‘이렇게 최악의 상황이 되어버리다니.’
원래라면 강현과의 계약대로만 진행하고 예거아머를 확보할 수 있는 게 베스트였다. 다른 팀원들의 돌발행동이 이런 참사를 불러왔지만. 현장 책임자로서 상황을 컨트롤 못한 미사키에게 문책이 뒤따를 거였다.
‘이제 모든 게 끝….’
강현은 이대로 비행기를 타고 유유히 돌아갈 터.
“어차피 끝이라면….”
미사키가 중얼거렸다. 음험한 복수심이 타오르기 시작하자.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고 기운이 돌아오는 거 같았다. 그러자 문뜩 떠올랐다. 자신에게는 아직 최후의 수단이 남아있다는 것을.
============================ 작품 후기 ============================
드디어 100화입니다.
처음 소설 쓸때만해도 너무 멀어보였던 숫자였습니다만.
많은 분들의 응원덕분에 이렇게 100화까지 무사히 오게되었습니다.
다들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열심히 하겠습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