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21 회: 5장. 국가공인 스토커 -- >
5장. 국가공인 스토커(2)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설소유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쳐다보고 있었다. 강현은 그 미소에 자신이 녹아내리려고 하는 걸 보고 이 소유가 진짜임을 확신했다.
“강현씨...아닌가요?”
강현이 대답이 없자. 소유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몸을 움츠렸다. 그러자 매끈한 턱 아래로 자연스럽게 커다란 융기가 모여들었다. 그 존재감에 정신이 번쩍 든 강현이 대답 대신 겨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맞았네요!”
소유는 미소를 지으며 강현의 옆자리에 바짝 붙어 앉았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서 강현을 올려다봤다. 자신의 오른쪽 팔에 부드러운 가슴이 기대어와서 형태를 무너트리자 강현은 더욱 굳어버렸다.
“다행이에요. 지나가다가 익숙한 얼굴이 보여서 불러봤는데. 혹시 전혀 다른 사람이면 민망하잖아요.”
“...”
“거기다 한번 밖에 못 봤는데. 이런 말 하기 그렇지만. 그때와 좀 달라 보이시는 거 같아요.”
강현을 만난 게 정말 반가웠던 듯 계속해서 대화를 시도하는 소유옆에서 강현은 자신을 미친 듯이 욕하고 있었다.
‘이런 병신도 상병신이 따로 없을 때가. 뭐라도 말 좀 해봐. 아까 연습했던 건 다 뭐였어? 응? 이런 데서 계속 앉아 있을 게 아니라. 자리 옮겨서 커피라도 한잔 산다고 하던가. 아님, 데이트 신청이라고 하던가.’
강현이 머릿속에서 연애능력제로인 자신의 자아와 싸우느라 정신이 팔렸을 때. 소유가 먼저 선수를 쳤다.
“저기. 다시 만나서 그때 일 제대로 감사인사 드리고 싶었어요. 그런데 이렇게 뵙게 되다니. 다음에 꼭 저녁이라도 대접하게 해주세요.”
그렇게 말하고는 긴장했었는지 얕은 숨을 들이쉬고는 시선을 아래로 떨궜다. 옆으로 드러나는 뺨이 발그스름했다. 그리고는 속삭이듯 한마디를 더 보탰다.
“괜찮으시다면요.”
‘으아 귀여워.’
강현은 심장이 터져나가면서 그 뒤로 넘어갈 뻔했다. 그와 동시에 무한한 죄책감이 생겨났다.
‘저런 귀여운 애한테 먼저 식사 약속을 잡게 하다니. 이건 최소 무기징역이다.’
그렇게 허공을 떠다니면서 스스로 죄를 선고하고 있었을 때. 강현이 도통 반응이 없자 소유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쳐다봤다.
“저기...?”
“앗. 물론입니다. 저녁 식사 좋죠. 제가 정말 분위기 좋은 식당을 알고 있거든요. 거기에서 대접하겠습니다. 기대하셔도 좋아요.”
한 번 입이 열리자. 폭풍처럼 말이 쏟아져 나왔다.
하지만 강현은 자신이 무슨 말을 지껄이는지 제대로 생각할 수 없었다. 지금 이야기한 것도 거짓말이었다. 평생 그런 식당에 가서 물 한 잔 마신 적도 없었다.
하지만. 소유랑 같이 식사할 수 있다면 몇 번이나 먼저 가 예행연습을 철저히 해서 단골처럼 굴 자신이 있었다.
소유는 강현의 말에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가볍게 토라진 척했다.
“정말~ 제가 사드리는 거라니까요.”
‘녹는다 녹아.’
강현은 그 자리에서 흐물흐물해져서 그대로 흘러내려 버릴 거 같았다. 하지만 정신줄을 잡고 이 상황을 리드하기 위해서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려서 결정타를 날렸다.
“그럼 연락처 교환하죠. 핸드폰 주세요. 제가 찍어드릴게요.”
아니 결정타를 날렸다고 생각했다.
강현은 말을 뱉어놓고 나서 아차 싶었다. 아무리 분위기가 좋았다고 하지만. 여자 휴대폰을 함부로 달라고 하다니.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면 그대로 머리 박고 사죄할 생각이었다.
다행히. 소유는 순순히 핸드백에서 휴대폰을 꺼내줬다. 그걸 건네받은 강현은 번호를 입력하면서 은근히 심장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타인과 휴대폰 전화번호를 교환한다고 생각하니까. 서로 이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날 때 그 사람에게 가볍게 문자로 마음을 전할 수 있고, 그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반대로 상대도 나를 그렇게 찾을 수 있다. 그런 작은 설렘과 두근거림이 이제부터 자라났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문득, 수지가 생각났다. 며칠 전의 수지가 떨었던 것도 이런 것 때문이었을까? 이런 느낌을 받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그런 선머슴 같은 여자가 그럴 리 없지.’
수지의 우락부락한 모습을 떠올리며 가볍게 부정했다.
강현은 번호입력을 마친 다음. 통화버튼을 눌렀다. 자신의 폰에 신호가 가는 것까지 확인하는 의식까지 마치자. 드디어 마음이 놓였다. 그와 반면에 소유에게 휴대폰을 건네는 손길이 무척이나 아쉬웠다.
핸드백에 휴대폰을 집어넣은 소유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편의점에 볼일이 있어서 가볼게요.”
“아 제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강현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서 따라가려고 했다. 하지만.
“아뇨. 괜찮아요. 친구가 데리러 오기로 해서.”
소유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가볍게 고개를 저어 거절의 의사를 표시했다. 그러자 풍만한 가슴이 출렁거렸다. 동시에 강현의 마음도 출렁거렸다.
‘친구가 데리러 오니까 같이 가기 꺼려진다는 말은. 혹시 남자친구?!’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겨우 부여잡은 강현은 못난 행동이라는 걸 알면서도. 결국, 해서는 안 되는 그 질문을 입 밖으로 내버렸다.
“그...친구라는 분이. 혹시 남자 친구예요?”
강현의 말이 바로 이해가 안 된 소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내 무슨 뜻인지 파악하고서는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아니. 아니에요. 저 아직 남자친구 한 번도 사귀어본 적 없는걸요.”
자신이 말하고도 부끄러웠는지. 유난히도 하얀 피부가 살짝 달아올랐다.
“그 친구가 학생 때부터 절 지켜줬거든요. 워낙 힘이 세거든요. 대신 그게 너무 익숙해져서인지 제가 다른 남자와 있는 것만 보면 항상 무례하게 굴어서요. 고맙기는 하지만. 혹시 강현씨에게 실례가 될까 봐서...”
소유의 말에 강현은 완전히 납득할 수 있었다. 그보다 그 친구라는 분에게 무한한 호감이 솟아올랐다. 한마디로.
‘굿잡!’
이었다.
그 친구가 소유를 쭉 지켜준 덕분에 이렇게 곱게 자라날 수 있었을 터였다. 정말 기회가 되면 언제 한 번 만나서 거하게 술을 사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강현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 소유와 작별 인사를 했다.
*****
강현과 헤어진 소유는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편의점 안에 있던 긴 장발의 남자 알바생은 손님인 줄 알고 시큰둥하게 인사했다가 소유인 걸 확인하고는 반갑게 맞았다.
“어서 오세유~ 아. 소유구나.”
“안녕하세요. 아저씨.”
소유가 꾸벅 고개 숙여서 인사를 했지만. 남자 알바생은 섭섭한 표정을 지었다.
“아저씨라니 너무해. 난 아직 삼삼한 서른 세살이라구.”
소유는 아저씨 개그에도 꿈쩍하지 않고, 싱긋 웃으면서 호칭을 정정해줬다.
“네네. 오빠.”
“좋아. 좋아. 이 맛에 여기서 알바하고 있는 거지.”
남자 알바생은 오빠라는 소리에 만족한 듯 긴 장발을 쓸어넘기면서 껄껄 웃었다. 이내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소유를 쳐다보면서 목소리를 깔면서 이야기했다.
“그보다 금방 너 찾는 남자가 왔었다. 또 스토커 같은 녀석이 붙는 거 아냐? 조심해 혼자 돌아다니지 말고.”
“아. 강현씨 말이군요. 다행히 이 앞에서 만났어요.”
“알던 사이였나 보네.”
남자 알바생은 자기 일처럼 다행이라는 듯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을 본 소유가 갑자기 뭔가 짐작 가는 게 있는 듯. 부드럽게 처진 눈을 가늘게 모으면서 남자 알바생을 추궁했다.
“혹시 강현씨한테 해코지라도 한 건 아니시죠?”
“아, 안 했다니까. 그냥 또 스토커 같은 녀석인 줄 알고 가게 쫓아내 버린 게 다야. 담 기억해 뒀다가 담에는 친절하게 굴 테니까. 그 녀석 이름이 뭐랬지?”
“유강현씨에요. 전에 말씀드렸었잖아요. 몬스터한테 습격당했을 때 절 구해주신 분이라고.”
“그래. 강현. 강현이라 이름도 좋네.”
남자 알바생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연신 강현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그때. 편의점 문이 열리면서 단단하고 거대한 체구의 사람이 들어왔다.
“오래 기다렸음?”
강렬한 붉은색의 투블럭컷 머리. 시뻘건 라이더 재킷. 그것보다 한층 존재감을 과시하는 땅딸막하지만 바위 못지않게 굴강한 육체. 도퍼 능력자인 탱커 함수지였다.
그 모습에 남자 알바생이 그대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소유와 수지의 모습을 몇 번이나 번갈아 보다가 소유의 앞을 가로막았다.
“소유야. 위, 위험해.”
“왜 그러삼?”
수지는 의외의 상황에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소유가 남자 알바생을 지나쳐 수지 옆에 붙어 섰다.
“아 참 오빠 왜 그래요. 제 친구인 함수지에요. 수지야 인사드려. 여기 매니저로 일하시는 오빠야.”
“안녕하삼. 함수지임다.”
수지가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인사를 하자 남자 알바생이 식은땀을 흘리며 인사는 그만 냈다면서 손을 내저었다. 물론, 오해해서 미안하다는 사과를 덧붙이는 걸 있지 않았다. 수지는 익숙하다는 듯 쓴웃음을 지으면서 사과를 받아들였다.
“수지야. 몸은 좀 괜찮아? 숙취 같은 거 없어?”
소유가 걱정스러운 듯 쳐다보자. 수지는 이두박근을 만들어 보이면서 씩 웃었다.
“나야. 튼튼하니까 걱정마삼. 그보다 오늘 저녁은 내가 한턱낼 테니까 어서 가셈. 어제 레이드에서 완전 대박터졌삼.”
“응. 그거 기대되는걸?
소유는 수지의 팔짱을 끼면서 웃었다.
“그럼 아저씨....아니 오빠 수고하세요.”
“오빠님. 수고하삼.”
그러면서 수지와 소유는 다정하게 편의점을 나섰다. 한편
수지한테 오빠라는 소리를 들은 남자 점원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
소유와 헤어진 강현은 그야말로 날아갈 듯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순식간에 집으로 돌아왔다. 아직 다현이는 집에 안 돌아온 거 같았다.
그대로 침대에 퍼질러 누워서 주먹과 발을 연신 찼다. 연락처를 교환하고 저녁 약속을 잡았을 뿐인데. 왜 이렇게 기쁜 것인지 도통 알 수 없었다.
“그러고 보니 언제 저녁 먹자고는 안정했지.”
정확한 약속시각을 잡지 않았다는 걸 기억해낸 강현은 한참 동안을 휴대폰을 노려다 봤다. 그러면서 먼저 연락해서 약속을 잡을 건지. 그쪽에서 연락 오기를 기다릴 건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바로 연락하는 건 없어 보이겠지?’
결국, 기다리기로 한 강현은 혹시라도 연락이 올까 봐 휴대폰을 조작해 볼륨을 최대한 높여뒀다. 그리고 컨트롤 헬멧과 케이블까지 연결해뒀다.
“이 정도면 게임할 때 연락 오더라도 문제없겠지.”
그렇게 만만의 준비를 하고 게임을 하기 위해 컨트롤 헬멧을 쓰자. 밖에서 벨 소리가 들렸다.
‘뭐야? 이 시간에 누구지?’
다현이가 돌아올 시간은 조금 남았고 열쇠도 가지고 있을 터였다. 그렇다면 잡상인 아니면 종교권유일 텐데. 어느 쪽도 강현이 반길만한 손님은 아니었다.
금방 포기하겠지 싶어서 무시하고 다시 컴퓨터나 켜려고 하는데, 상대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서 벨을 눌러댔다. 그렇게 5분이 지났을까? 그제야 상대는 포기했는지 잠잠해졌다.
“후유. 이제 정말 게임 좀 하자.”
다시 컨트롤 헬멧을 쓰려고 하고 있을 때. 이제 문 쪽에서 뭔가 덜컥덜컥하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잠겨있는 문을 열쇠 말고 도구를 이용해서 따려고 할 때나 들릴법한 소리였다.
“빈집털이?”
강현은 컨트롤 헬멧을 내려놓고 주머니에 넣어둔 [ 예거 ]를 확인한 다음. 핸드폰을 쥐고 경찰에 신고할 채비를 마쳤다. 그리고 문을 열고 들어오려는 도둑을 향해 가장 효과적인 액션을 취했다.
“강도야! 도둑이야!”
큰소리로 외쳤다. 보통이라면 문을 따려는 걸 멈추고 부리나케 도망칠 터였다. 하지만 강현이 소리침과 동시에 상대방은 문 손잡이를 더욱 거칠게 잡아 흔들었다.
“아, 안 되겠어. 신고해야...”
강현은 핸드폰에 미리 준비해둔 긴급메시지를 전송했다. [ 예거 ]를 먹고 멋지게 강도를 때려눕혀도 되겠지만. 약값이 1억이나 되는 이상. 보상이 확실한 레이드할 때 외에는 쉽게 먹기도 힘들었다.
물론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왔는데 강도가 무기를 들고 있으면 망설임 없이 [ 예거 ]를 먹고 쓰러트릴 생각이었다.
이렇게 강현이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 돌리고 있을 때
결국, 손잡이가 부서지면서 문이 벌컥 열리고 한 개의 검은 그림자가 들어왔다. 그 검은 그림자의 손에는 시커먼 권총이 들려있었다.
대한민국에서 총이라니. 질려버린 강현이 그 그림자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허탈해졌다.
“채영씨?”
그림자의 정체는 레이드 담당자인 채영이었다. 채영은 권총을 요리조리 겨눠가면서 강현에게 물었다.
“강도는 어디 있습니까?!”
============================ 작품 후기 ============================
지금은 순위가 많이 떨어졌지만...
며칠 전에 처음으로 투베2위까지 올라가봐서
일러스트레이터 Ryu님께서 기념으로 소유를 그려주셨습니다.
일러스트의 주 운수대통님 남겨주신 코멘트대로.
[ 소유인 거유 ] 입니다.;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