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260화 (260/262)

제8장. 이제부터는 내 싸움이다. (3)

일본의 거친 수비를 막아 준 것은 박상민과 이정렬이었다.

둘이서 앞과 뒤를 지켜 준 덕에 이재범은 여유 있게 공을 따낼 수 있었다.

터어엉!

『아! 아쉽습니다!』

『골인 줄 알았어요! 하야시 아키히로 골키퍼가 손을 제대로 쓰지 못했거든요.』

공은 아슬아슬하게 크로스바 끝을 타고 밖으로 빠져나갔다.

이재범이 안타까운 마음에 얼굴을 찌푸릴 때, 박상민과 이정렬은 겨우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정말 아깝다!”

“죄송해요!”

“기운 잃지 마! 다음에 넣으면 돼! 얼른 나가자! 애들 또 눌러 줘야지!”

이재범은 독이 잔뜩 오른 눈으로 뛰었다.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

공을 따낸 자신을 지켜 주기 위해 함께 점프했고, 수비수들에게 떠밀려 바닥에 고꾸라졌던 선배들이다.

그런데도 결정적인 골을 놓친 것에 대해 싫은 내색은커녕 이재범이 실망하지 않도록 다독여 준다.

이런 팀에 꼭 남아서 월드컵에 나가고 싶다.

반드시 저 형들에게 힘이 되는 후배가 되고 싶다.

이재범의 눈에 독기가 오른 이유는 그랬다.

하야시 아키히로 골키퍼의 골킥이었다.

그는 굳은 얼굴로 뒤로 물러났다가 한국 진영을 향해 공을 길게 날렸다.

중앙선 부근에 떨어진 공을 향해 우사미 다카시, 가가와 신지, 오카자카 신지, 혼다 케이스케가 일제히 달려들었고, 우리 선수들이 동시에 뛰었다.

터엉!

공은 오카자카 신지의 머리에 맞았다.

퍼어엉!

『흘러나온 공! 박영길이 걷어 냅니다!』

그런데 그렇게 차 낸 공이 곧바로 일본의 골대 앞까지 날아갔고, 하야시 아키히로가 다시 잡았다.

일본 선수들과 관중들은 기가 막힌 얼굴이었다.

있는 힘껏 내지른 공이 중앙선 부근에 떨어지자마자 그대로 돌아온 꼴인 거다.

일본은 얼른 전반이 끝났으면 하는 눈치였다.

“우-”

“대한민국!”

짝짝짝! 짝짝!

『시간을 끄는 일본 선수들을 향해 일본 응원단이 야유를 보내고 있습니다.』

『일본 팀에게는 악몽 같은 전반일 거예요.』

삐익! 삐이익!

그때 주심이 전반을 끝냈다.

정지우는 제대로 공을 만져 보지도 못했을 정도로 필드 선수들이 악착같이 뛰어 준 전반이었다.

김문호는 자리에서 일어나 움직이는 나와구치를 보며 입가에 웃음을 달았다. 저 인간은 경기가 끝난 감독을 붙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고, 그래서 승리를 가져오라고 악을 써 댈 게 분명했다.

통로로 걷던 박용근이 고개를 돌렸다가 김문호와 시선이 마주쳤다.

‘박 감독! 당신이 이겼어.’

‘아직 전반 끝난 거야.’

고개를 끄덕이는 김문호를 송인수가 힐끔 보았다.

느린 그림이 나올 때마다 호프집과 한강 공원, 시청 등 응원 팀이 모여 있는 곳마다 연달아 함성이 터져 나왔다.

“어후! 저 장면은 정말 소름 돋지 않냐?”

골을 넣은 박상민이 차가운 표정으로 달리는 장면에서는 손으로 팔뚝을 문지르는 사람도 많았다.

“정지우는 공 한번 못 잡아 봤어! 그런데 우리나라가 언제부터 이렇게 확 바뀌었지? 사우디아라비아전도 그렇고.”

“이번 월드컵 기대해 볼 만하지?”

“생각만 해도 짜릿하다! 캬하!”

선수들이 악착같이 뛰어서 공을 뺏어 내는 장면, 신준석이 어깨를 먼저 넣고 발을 뻗는 장면에서 또다시 박수가 터져 나왔다.

라커룸에 들어선 정지우는 자리에 앉아 물을 마셨다.

분위기는 더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그러나 마냥 기뻐할 수만도 없는 일이었다.

나서야 할까? 아니면 박용근이 올 때까지 기다려 봐야 하나?

달칵.

그때 박용근이 들어왔다.

몇몇 선수들은 잘 나온 시험 성적을 칭찬받고 싶은 학생처럼 뿌듯한 얼굴로 박용근을 바라보았다.

“잘했다!”

박용근은 대놓고 손뼉을 쳐 주었다.

“밥상을 엎으랬더니 아예 패대기를 쳐 버리더구나!”

앞쪽의 선수들이 웃음으로 박용근의 말을 받았다.

“어때? 할 만하지?”

“예.”

박용근과 시선이 마주친 김오영이 답을 하고 난 다음이었다.

“정말 잘해 줬다! 다들 알다시피 오늘 경기는 평가전이다! 그래서 우리는 일본을 상대로 확실히 이기는 훈련을 한다!”

선수들이 궁금한 시선으로 박용근을 바라보았다.

“월드컵에 나가서 마주할 세계적인 강팀들에 대비한 훈련이다. 이정렬!”

“예, 감독님!”

박용근이 이정렬에게 다가가 어깨를 다독였다.

“세계적인 강팀을 맞았다고 생각하고 중앙선 부근에서 수비 위주로 경기를 풀어 줘라. 기회가 생기면 날카롭게 찌르고, 다시 수비! 후반은 우리가 훈련했던 역습 위주로 바꾼다.”

“알겠습니다!”

박용근은 근처에 있던 박상민에게 다가갔다.

“상민이 너도! 후반에는 도민이, 영길이, 오영이, 재범이와 단단하게 틀어막은 뒤에 역습 위주로 풀어 봐.”

“예, 감독님.”

“다들 굉장했다! 그러나 우리는 이긴 것만으로 만족하지 말고, 우리만의 훈련 상대로 일본을 이용한다.”

말을 마친 박용근이 신준석과 정지우를 향해 시선을 준 뒤에 라커룸을 나섰다.

“니뽄!”

둥! 둥! 둥!

일본 관중들의 응원이 다시 시작된 모양이었다.

응원 구호와 북소리가 염탐하는 것처럼 라커룸을 헤집고 들어왔다가, 문을 닫자 바로 꼬리를 잘리고 사라졌다.

뭔가 알 것 같은데 확실히는 모르겠다는 눈으로 신준석이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너는 알지?”

“뭘?”

라커룸에 있던 선수들의 시선이 일제히 정지우에게 달려들었다.

“죽여준 전반을 감독님이 이렇게 바꿀 때는 뭔가 있는 거잖아! 그게 뭐냐고!”

“에이! 눈치 없는 자식!”

정지우는 장난처럼 말을 던지고 선수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상민이가 선제골을 일찍 터트려 준 덕분에 다들 쉽게 달렸거든. 그런데 전반에 워낙 많이 뛰었다! 평소 뛰던 양을 단숨에 넘어서기는 어려워! 후반 중반까지는 감당하겠지만, 막판에 급격히 체력이 떨어지면 그때부터 어려워질 수 있어.”

갸웃하는 선수도 있었고, 고개를 끄덕이는 동기도 있었다.

“사우디아라비아전을 생각해 봐. 후반 추가 시간에는 다들 다리가 풀릴 정도였잖아. 일본이다. 응원 열기를 타고 일본이 살아나면 감당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감독님께선 아마 그 점을 염려하신 거 같다.”

설명을 들은 선수들이 다들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월드컵에 나가서 한 골을 성공하고 신 나서 뛰다가 후반에 당하지 말자는 의미라고 생각한다. 후반은 잠근다. 그리고 우리가 훈련했던 빠르고 강한 역습을 통해 기회를 만든다.”

“너는 정말 꼭 감독 해라!”

신준석이 이길 수가 없다는 것처럼 고개를 저어 가며 꺼낸 말이었다.

“우리가 오늘 원하는 것은 완벽한 승리다! 아직 남은 체력을 후반 막판까지 잘 유지해서 일본이 절대 어떻게 할 방법이 없는 상태에서 경기를 마치는 것! 감독님께서 요구한 후반이다!”

김오영이 박용근의 지시를 들은 것처럼 ‘알겠습니다!’ 하는 바람에 박상민과 이정렬이 가볍게 웃었다.

평가전 전날까지도 상상하지 못했었던 여유가 라커룸에 가득했다.

『양 팀 선수들이 후반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 선수들 전반에 정말 잘 뛰어 주었지 않습니까?』

『그렇죠! 전반 초반에 터진 박상민의 선제골 덕분에 경기가 쉽게 풀린 점도 있구요. 일본의 패스를 전방에서부터 완벽하게 틀어막은 점을 무엇보다 칭찬하고 싶네요.』

『양 팀 벤치! 일단 선수 교체는 없는 것으로 보입니다!』

골대를 향해 걸어간 정지우는 각오를 전하는 것처럼 골포스트를 툭 찼다.

전반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나직한 야유가 터졌는데 한국 응원단의 응원에 바로 묻혔다.

정지우는 반대편 골포스트로 움직였다.

호프집에 모인 손님들이 손을 앞으로 뻗어 ‘대- 한민국!’을 외친 뒤에 손뼉으로 박자를 맞췄다.

골포스트를 발로 찬 정지우가 골대 중앙으로 움직인 다음이었다.

휘이익! 터억!

“와아아아아-!”

한순간 호프집이 터질 정도로 커다란 함성이 울려 나왔다.

“오오-! 오오! 오오오! 오오-! 오오! 오오오!”

이어서 한국 팀의 응원가가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한국의 선공으로 경기 시작합니다!』

삐이익!

『경기 시작됐습니다! 이정렬! 김오영에게! 김오영! 박상민에게 공을 넘겨줍니다! 박상민 선수가 공을 잡으면 우선 마음이 놓입니다!』

『어지간해서는 볼을 뺏기지도 않는 데다, 뺏기더라도 악착같이 달려들어서 꼭 되찾아 오거든요! 그 외에도 패스나 공이 없을 때의 움직임은 이제 세계적인 수준에 올랐어요!』

공을 잡은 박상민은 선도민, 박영길에게 공을 주었다 다시 받았고, 밀고 올라갈 듯하다가 강서준에게 패스했다.

『전반에 사라졌던 스시타가가 후반에 김치타카로 돌아왔습니다! 박용근 감독! 일본이 들고 나왔던 전술로 일본을 상대합니다!』

후반이 시작되면서 일본 응원단의 목소리는 다시 높아져 있었다.

응원석 앞에 발을 걸친 남자가 연신 북을 두드리며 악을 썼고, 그 때문인지 제법 우렁찬 ‘니뽄!’ 하는 함성이 사이타마 스타디움을 흔들었다.

탐색전을 하는 것처럼 후반 10분이 흘렀다.

그때였다.

어지간해서는 벤치에 앉아서 지켜보던 박용근이 테크니컬 에어리어로 나왔다.

‘잘하고 있다! 단단하게! 기회를 봐서 역습!’

그가 이재범이나 박영길, 혹은 선수들을 가리킨 뒤에 엄지를 치켜드는 장면이 나왔다.

TV로 보는 이들은 잘 모르겠지만 박용근은 주로 공이 없을 때 동료를 돕는 플레이를 하거나, 혹은 빈자리를 찾아 스스로 움직이는 선수들을 칭찬하고 있었다.

솔직히 선수들도 칭찬 무지하게 좋아한다.

박용근이 엄지를 세워 줄 때마다 칭찬받은 선수는 더욱 좋은 공간을 만들기 위해 뛰었고, 다른 선수들은 그에 자극받은 것처럼 달렸다.

신준석은 수비 라인을 조절하다가 힐끔 정지우를 보았다.

그가 경기 시작 전에 ‘나는 진심으로 감독님이 아버지 같다.’라고 했던 말이 선수들 전체를 울리고 있었다.

이건 뭐, 아버지에게 칭찬받고 싶어 하는 아들놈들처럼 선수들이 뛰고 있는 거다.

“야! 범주! 올라와! 그래!”

신준석은 수비 라인을 조절하고는 박용근을 슬쩍 보았다.

그때였다. 박용근이 신준석을 향해 엄지를 슬쩍 들어 주었다.

‘햐아!’

생각했던 것보다 백배쯤 뿌듯했다.

『일본! 서서히 라인을 올리고 있습니다!』

『그렇네요! 우리가 점유율을 높이는 경기를 하거든요. 전반에 많이 뛴 점을 염려했는데 박용근 감독! 확실히 대단하네요! 이런 식이라면 일본은 기회를 얻기 어렵겠어요!』

『일본이 저렇게 올라오면 아무래도 뒷공간이 비지 않겠습니까? 우리 팀의 빠른 공격이 후반에 한두 번쯤 나올 만도 해 보입니다.』

투우욱!

중앙에서 박상민이 찔러 준 공이 이재범 앞에 떨어졌다.

그런데 녀석은 뒤로 나오려 했던 모양이었다.

터치라인 밖으로 공이 빠져나가자 이재범이 미안하다는 의미로 오른손을 들어 주었다.

박상민은 고개를 끄덕여 주고는 힘을 내란 의미로 이재범에게 엄지를 살짝 들어 보였다.

후반 20분이 넘자 일본은 좀 더 적극적으로 밀고 올라왔다.

강력한 전방 압박을 펼쳤던 전반과 달리, 후반의 한국 팀은 포메이션을 유지한 채 꾸준히 경기를 끌고 나가는 데 주력했다.

“니뽄!”

쿵! 쿵! 쿵!

후반 25분가량이었다.

스시타카를 버린 것처럼 일본은 롱패스를 뿌리기 시작했다.

한순간, 하라구치 겐키가 뒤에서 넘겨준 공을 가가와 신지가 환상적인 롱패스로 연결했다.

“와아아아아-!”

침묵했던 일본 응원 팀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반쯤 몸을 일으켰을 정도로 기가 막힌 연결이었다.

“범주야! 서! 서!”

정지우의 고함이 함성에 묻힌 바람에 김범주는 공과 혼다 케이스케를 향해 달려 나갔다.

늦었다.

아무리 독하게 마음먹고 뛰어도 늦은 건 늦은 거다.

투욱!

혼다 케이스케는 유연한 동작으로 김범주를 제치고 골대 왼쪽으로 치고 들어왔다.

‘얼마든지 날려라!’

정지우가 이를 악물고 자세를 낮췄을 때 주길성이 왼쪽을 막았고, 신준석이 오른쪽 골포스트를 막아섰다.

“길성아! 왼쪽 각을 잡아! 각만!”

주길성이 혼다와 왼쪽 포스트의 각을 잡는 순간이었다.

퍼어어엉!

공이 정지우를 빗겨나며 오른쪽 골포스트를 향해 날아왔다.

정지우는 무섭게 회전하며 날아오는 공을 보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꿈에서 봤던 그 슈팅, 그 장면이었다.

유니온 시티에서 악착같이 대비했던 휘어들어 오는 공!

“와아아아-!”

골이 터진 것처럼 일본 관중들이 벌떡 일어섰고, 일본 벤치가 모두 뛰어나왔을 때,

화아아악!

정지우는 높이뛰기 선수처럼, 등을 활처럼 휘며 높다랗게 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