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253화 (253/262)

제5장. 130년 역사에 길이 남을 경기. (3)

짧은 침묵 뒤에 마틴이 입을 열었다.

“이유를 들을 수 있을까?”

“이제 네 경기 남았습니다. 얀센, 기예르모, 그리고 벤치에서 대기하던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었으면 싶습니다.”

“우승 반지를 얻을 기회 말인가?”

“그렇습니다.”

마틴이라면 한 번쯤 생각했을 일이라 여겼다. 그런데 그는 다른 판단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자네가 경기를 끝까지 지켜 냈을 때 돌아올 명예나 이익 같은 건 생각하지 않나? 필드 선수 중에는 득점왕이 되고 싶어서 동료의 페널티킥을 욕심내는 선수들도 많아.”

정지우는 편안한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몸값도 생각해야지?”

“다음 시즌에 이적하라는 뜻입니까?”

“쥬피터 회장이 들으면 까무러칠 이야기로군.”

마틴은 이제야 어느 정도 여유를 되찾은 얼굴이었다.

“우승입니다, 코치. 130년 만의 우승을 나 혼자의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니란 걸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그 승리를 분명하게 나누어야 합니다.”

“점점 한국이란 나라를 존경하게 되는군. 자네도 그렇고, 자네의 동료들도 그렇고, 마지막으로 박용근 감독까지.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그렇지 않다면 왜 코치를 찾아왔겠습니까?”

정지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마틴이 책상에 손을 올리고 깍지를 끼웠다.

“나중에 감독이 될 생각이라면 꼭 내게 먼저 의논해 주게.”

뜬금없는 말이어서 정지우는 픽 하고 웃었다.

“지금 말한 내용은 쥬피터 회장과 의논한 뒤에 결정하겠다. 결국 자네의 의견대로 되겠지만 말이지.”

“고맙습니다, 코치.”

이야기가 대강 끝났다.

정지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에 마틴이 ‘Ji.’ 하고 나직하게 불렀다.

“엄청난 제안들이 들어올 거다. 우리 팀이 도저히 맞춰 줄 수 없는 조건이 있을지도 모르고. 어떤 결정을 내리든 간에, 적어도 내가 모르는 상태에서 진행되는 일은 없도록 부탁한다.”

자리에서 일어났던 정지우는 의자의 등받이에 팔을 걸치고 섰다. 그 바람에 상체가 책상 쪽으로 기울어서 마틴의 얼굴이 좀 더 가까이 있었다.

“내가 다른 팀으로 갈 것 같습니까?”

“쉽게 말할 내용이 아냐. 자네에게 엄청난 금액을 베팅할 팀이 나올 텐데, 그런 걸 함부로 장담하는 건 어리석은 일이 되지.”

정지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130년 만의 우승을 경험했고, 레드 블레이트에서 환상적인 시즌을 보냈습니다. 그렇다면 유니온 시티가 내게 그만한 대우를 해 주면 됩니다.”

“이봐! 세계 최고의 팀으로 갈 기회가 있어! 맨유! 첼시! 고개만 돌리면 레알 마드리드나 바르샤에 갈 수도 있다고!”

“그걸 원합니까?”

마틴은 당장 답을 하지 않았다.

“코치, 난 코치가 우리 팀으로 그들을 상대해서 우승컵을 가져오길 바라는 줄 알았습니다.”

프로 축구 바닥에서 지금껏 버텨 온 나이 든 코치가 딱딱하게 굳어진 얼굴로 정지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챔피언스 리그를 의미하는 건가?”

“예전처럼 코치가 회장과 의논해 주십시오. 손해 본다는 생각만 들지 않는다면, 유니온 시티의 재정 상태에서 최고의 대우라고 생각된다면 굳이 옮기고 싶지 않습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또 뭐지?”

“어느 정도의 보강은 몰라도, 지금의 동료들, 코치와 스태프들이 함께였으면 좋겠습니다.”

마틴은 털썩 소리가 나도록 의자의 등받이에 상체를 기댔다. 그러고는 커다랗게 한숨을 토해 냈다.

“약속 하나 해도 됩니까?”

마틴은 대답할 힘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챔피언스 리그에서 우승하는 순간에는 분명하게 코치에게 먼저 달려가겠습니다.”

솔직히 말하면 예상 밖의 반응이었다. 마틴의 목덜미에 소름이 쭉 올라오는 걸 보는 게 말이다.

“호랑이 등에 매달린 줄 알았더니, 하늘을 나는 괴물의 등에 타고 있었던 거군.”

“가 봐도 됩니까?”

마틴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점심시간이었다.

마틴의 방을 나선 정지우는 식당으로 향했다.

“이봐! 휴식기에 한국에 한번 가 볼까 하는데? 설마 모른 척하지는 않겠지? 이보다 맛있는 거 한두 가지는 사 줄 만하지 않아?”

불고기를 잔뜩 담아 놓은 데이빗이 웃는 얼굴로 던진 질문이었고, 그 옆에서 라파엘과 꼼빠니가 어떤 답을 할까 하는 눈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너무 많이 먹지 않는다는 조건이라면.”

“오! 그건 약속하기 어려운데?”

“일단 약속하고 가지! Sang도 있고, Lee나 Jun에게 찾아가도 될 테니까.”

“그럼 적어도 네 번은 보장되는 거잖아!”

진짜인가 싶을 정도로 동료들의 농담이 달려 나갔다.

말은 이렇게 했지만, 이들의 식사 비용이 부담스러울 정도의 연봉은 아닌 거다.

무슨 일인가 하며 다가온 박상민과 신준석, 이정렬에게 내용을 설명해 주었다.

우승했다는 기쁨과 여유, 안도감이 산 아래를 휘감는 연무처럼 식당 바닥을 떠돌았다.

얀센과 기예르모, 그리고 몇몇 선수들 역시 웃으며 정지우와 동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웃고 있는 거 맞다. 그러나 그들의 속이 편하지 않을 거라는 것은 모두 짐작하는 일이었다.

점심을 먹고 난 다음이었다.

정지우는 박상민, 신준석, 이정렬과 함께 그라운드로 움직였다.

“너는 어째서 점점 감독님을 닮아 가냐?”

“내가?”

“말하는 거나 행동이 그렇잖아. 식당에서 난 감독님 젊은 시절을 보는 줄 알았다.”

정지우는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솔직히 기분 나쁜 말은 아니었다.

북적였던 그라운드가 한가한 모습으로 정지우와 동료들을 맞았다. 회복 훈련이 끝난 뒤로 관광객과 기자들은 모두 퇴장했고, 내일 오전에야 다시 열린다.

“왜 나오자고 한 거야?”

“훈련 좀 도와달라고.”

정지우는 골대 왼쪽 페널티 에어리어의 중간쯤에 공을 늘어놓았다.

“봐! 그쪽에서 나를 빗겨 가게 차서 휘어들어 가는 슈팅을 날려 줘야 돼.”

“여기서?”

“상민아! 넌 저 반대쪽 골대 앞! 준석이 네가 정렬이 이 각도를 막아 주고.”

이정렬이 공 앞에, 그 앞을 신준석이 막아섰고, 반대편 골대에 박상민이 섰다.

“정렬이 네가 휘어서 골을 넣든, 상민이에게 패스하든 상관없어! 일단 반대쪽 골대 구석으로 나를 피해 공을 넘겨!”

이정렬은 고개를 갸웃하며 정지우가 가리킨 공간을 보았다.

“이런 각도에서 네가 말한 슈팅을 날릴 선수가 몇 명이나 되겠냐? 내가 보기엔 다 털어도 몇 명 안 될 것 같은데? 그나마 세 번에 한 번, 겨우 골대로 향할 것 같고?”

“그 세 번에 한 번이 문제잖아! 만약 그 한 골이 결정적인 경기에서 터지면? 모른다면 모를까, 알았다면 훈련을 해 둬야지. 이거 때문에 잠을 제대로 못 잔다.”

이정렬이 어쩔 수 없다는 투로 신준석과 박상민을 바라보았다.

누가 뭐래도 부천 1번 개가 하겠다는 훈련이었다.

퍼어엉!

이정렬이 공을 차 주었고,

화아악! 털썩!

몸을 날린 정지우가 그라운드에 떨어졌다.

공은 골대를 벗어나 반대쪽 코너킥 지점으로 곧바로 날아갔다.

20개를 차 준 다음이었다.

이정렬은 박상민과 교대했다.

퍼어엉! 화아아악!

또다시 몸을 옆으로 비틀며 높이뛰기 선수처럼 떠오른 정지우가 바닥에 떨어졌다.

별거 아닌 것처럼 시작했는데 슈팅이 하나둘씩 늘어 가면서 정지우의 모습이 점점 처절해 보였다.

“상민아! 교대해!”

“아냐! 10개만 더 차고!”

박상민이 다부진 눈빛으로 공을 앞에 두었다.

정지우가 저렇게 열심히 연습하는 거다.

그런데 박상민은 아직 제대로 코너를 파고드는 슈팅을 날려 주지 못하고 있었다.

퍼어엉! 화아악! 털썩!

이번 공도 골대를 1미터쯤 벗어나서 밖으로 날아갔다.

다시 10개의 공을 차고 난 다음이었다.

“상민아!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느닷없는 연습이고, 그것도 각도가 없는 상태에서 코너를 노리고 감아 차는 슈팅이었다.

자칫하다가는 허벅지 뒤 근육이나 발목을 다칠 우려가 있어서 정지우는 박상민을 말렸다.

“어후!”

정지우는 몸을 좌우로 비틀며 골대 바깥에 주저앉았다.

“지우야, 어느 쪽으로 오는 게 가장 까다로운 거야?”

“교대하고 바로 쐈던 거 있잖아? 빠르고 가까이 날아오는 거보다는 느긋하게 날아오는데 궤적이 큰 거. 그게 더 섬뜩하지.”

박상민과 이정렬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신준석이 수비 위치에 대해 질문을 던졌고, 각자 포지션에서 느꼈던 점을 전해 주었다.

네 사람은 몰랐다. 레드 블레이트를 나서던 마틴이 한동안 이 훈련을 지켜보았다는 사실을 말이다.

쥬피터는 그야말로 우승팀의 회장다운 태도로 마틴을 맞았다.

“이리 앉게.”

홍차를 준비해 주는 그의 행동과 표정에 여유가 넘쳐났다.

“오전까지 기자들에게 어찌나 시달렸는지 정신이 하나도 없군. 그래, 어쩐 일인가?”

“기대되는 소식과 언짢은 소식 중 어느 것을 먼저 들으시겠습니까?”

고개를 뒤로 뺀 쥬피터가 경계하는 눈빛으로 마틴을 살폈다.

“저라면 언짢은 소식부터 듣겠습니다.”

“흠! 자네의 판단을 존중함세.”

마틴은 정지우가 했던 말을 그대로 옮겨 주었다.

“가끔, 아주 가끔은 Ji를 이해하기가 정말 어려울 때가 있지. 지금이 꼭 그렇군. 그래! 기대되는 소식은 뭔가?”

쥬피터는 정지우의 의견을 거스르지 않겠다는 심정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가 지금의 멤버로 챔피언스 리그 우승을 이루고 싶답니다.”

“누가? Ji? Ji가 말인가?”

마틴의 웃음을 쥬피터는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는 얼굴이었다.

“구단의 재정 상태에서 최고 대우를 해 준다면 굳이 이적할 마음은 없답니다. 적당하다고 판단되면 금전적인 조건보다 유니온 시티의 모두와 이룰 챔피언스 리그 우승이 더 매력적이라고 하더군요.”

“그 적당한 수준이라는 것을 판단하는 사람은 역시 자네가 되겠군.”

쥬피터가 의심을 털어 내지 못한 얼굴로 말을 건넸다.

“게다가 말일세, 챔피언스 리그는 프리미어리그와는 전혀 다르지. 자네 생각은 어떤가?”

리그 우승이 쥬피터를 좀 더 단순하게 만든 느낌이었다.

좋게 말하자면 의뭉스럽던 그가 자신의 감정을 조금씩이나 내보이기 시작한 거였다.

“회장님.”

“말하게.”

“회장님이 전과 같은 어리석은 욕심만 부리지 않는다면 챔피언스 리그는 충분히 도전해 볼 가치가 있습니다.”

쥬피터의 입에서 신음처럼 ‘끄응!’ 하는 한숨이 나왔다.

“우리가 선수 한 명에게 너무 끌려간다는 생각은 안 해 봤나?”

“그가 우리를 실망시킨 적이 있습니까?”

반짝이는 쥬피터의 눈을 마틴이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는 말을 이었다.

“챔피언스 리그입니다. 그가 맨유, 첼시, 레알 마드리드, 바르샤를 상대로 우승을 노리겠다고 했다면 우리는 그런 경기를 보게 될 겁니다. 우리가 그에게 신뢰를 잃지 않는다면 말입니다.”

쥬피터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투자받을 금액이 상당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중계권료도 대단하지요. 선수를 보강하고, Ji와 그의 한국 동료들, 헌신해 준 선수들에게 정당한 대우를 해 준다면 우리는 더 큰 무대에서 전설을 이뤄 낼 수 있을 겁니다.”

마틴은 마음을 비웠다.

정지우가 어떤 의지를 보였든 간에 쥬피터가 욕심을 부린다면 여기까지가 유니온 시티의 최선인 거였다.

“내게 고민할 시간을 주겠나?”

“물론입니다.”

쥬피터가 요구했고, 마틴이 흔쾌하게 답을 건네주었다.

***

TV는 아직도 유니온 시티의 우승을 연신 떠들어 댔다.

<박용근의 패하지 않는 경기>

<미운 오리에서 하늘을 나는 백조로. 박상민의 모든 것>

인터넷에는 도대체 무슨 내용이 들었을까 싶은 기사들이 연일 올라왔다.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확정 지은 유니온 시티 소속의 박용근 국가대표 감독과 우리 선수들이 다음 주에 입국합니다.』

스포츠 보도 시간에 나온 기사였다.

『이성훈 기자가 전해 드리겠습니다.』

『박용근 국가대표 감독이 다음 주에 입국합니다.』

화면은 유니온 시티 벤치에 앉아 경기를 지켜보는 박용근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번 입국은 5월 일본과의 평가전을 앞두고 전체 훈련을 위한 것으로, 정지우와 박상민, 이정렬, 신준석 선수도 함께 들어오는 것으로 알려졌습니다.』

TV에는 우승을 확정 짓는 순간에 환호하는 정지우와 동료들의 모습이 그대로 올라왔다.

『아직 리그가 진행 중이어서 정지우 선수를 비롯한 세 명의 선수들은 사흘간의 훈련을 마치고 먼저 영국으로 돌아갈 예정입니다.』

이어진 보도는 한국과의 평가전을 준비하는 일본의 모습이었다.

『일본은 예선전을 함께 치른 최정예 멤버를 모두 소집해 훈련하고, 치밀한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국 팀의 약점을 파고들겠다고 밝혔습니다.』

화면에 일본의 국가대표 감독의 모습이 나왔다.

『한국은 빠르고 강한 팀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오랫동안 준비해 왔고, 그 과정을 통해 세계 최고의 실력을 갖췄다고 자부합니다. 이번 한국과의 평가전은 일본이 어느 정도 수준에 올랐는지를 증명하는 좋은 계기가 될 것입니다.』

자부심 가득한 그의 인터뷰에 이어 화면은 정장을 입은 인물들을 비춰 주었다.

『일본은 이번 평가전에 FIFA의 회장과 부회장을 비롯한 세계 축구의 주요 인물과 아시아 축구 연맹의 회장단을 초빙했습니다. 세계인이 바라보는 현장에서 한국을 꺾고 월드컵 본선 진출을 기념하겠다는 일본 축구의 각오가 대단합니다.』

기자의 멘트를 끝으로 보도는 다른 내용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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