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장. 간질간질하다. (1)
오전의 가벼운 전술 훈련을 끝낸 정지우는 곧바로 골키퍼 코치와 함께 골대로 움직였다.
“이봐, Ji. 반응속도를 더 올리는 것은 불가능해. 시즌 막바지까지 이럴 필요가 있어?”
“훈련하는 동안은 적어도 반응속도가 떨어지지는 않을 것 같아서요.”
“글쎄. 내가 결정할 수 있다면 나는 휴식을 택할 것 같아.”
골대에 도착한 정지우는 골키퍼 에어리어의 끝에서 끝을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서너 걸음을 움직여서 골대 왼쪽 포스트 앞쪽에 섰다.
“코치, 내가 여기에 있을 때 코치가 슈팅을 날리는 겁니다. 골포스트에 바싹 붙이거나, 아니면 나를 빗겨 나서 커다랗게 휘는 슈팅을 날리겠죠?”
“그거야 당연한 거 아닌가?”
“내가 막을 수 있는 반경을 좀 더 넓게 가져가고 싶은데요.”
골키퍼 코치가 상체를 돌리며 정지우의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쪽에서 나를 피해 저쪽 구석에 슛을 날리려면 무조건 오른발을 써야 하는 거죠. 그런데 오른발이라고 해서 휘어 올 거라는 보장은 못하니까.”
정지우는 골포스트에서 1.5미터가량 떨어져 섰다.
“이게 내가 골포스트를 수비할 수 있는 최대 반경이거든요. 이 상태에서 반대편으로 지나가서 휘어들어 오는 공을 막을 방법이 내가 아는 것 말고 더 있을까요?”
이제야 질문의 내용을 알아들었다는 얼굴로 골키퍼 코치가 정지우의 옆으로 다가왔다.
“우리끼리 모임이 있어. 골키퍼 스태프들이 갖는 모임. 그곳에서 나온 이야기이기는 한데, 자네도 알겠지만 이런 경우는 뒤로 점프해서 그 각을 잡는 수밖에 없어. 높이뛰기 선수처럼.”
골키퍼 코치가 실제로 상체를 뒤로 눕히며 팔을 뻗어 보였다.
“그런데 이 자세로 점프해 보면 예상했던 것보다 높이 뛰지 못하더군. 이건 아무래도 평소 훈련과 주로 사용하는 근육의 차이에서 나오는 것이어서 함부로 권하기도 어렵고.”
정지우의 표정을 본 그는 걱정스럽다는 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무리하지 말자. 높이뛰기 선수들과 달리 우리는 그라운드로 바로 떨어져. 2미터 높이에서 허리까지 뒤로 젖힌 상태에서 떨어지면 가장 먼저 목 부위가 바닥에 닿는다.”
그는 손을 높이 들어 2미터쯤 높이를 가리켰다.
“우리가 평소 하는 훈련에 넘어지는 방법이 있는 이유가 뭔지 잘 알잖아? 공을 막은 뒤에 몸을 뒤틀어야 하는데, 그 정도로 체공 시간을 늘리는 건…….”
골키퍼 코치가 고개를 저으며 말끝을 흐렸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정지우는 평소처럼 지겨울 정도로 단순하고 반복적인 훈련을 소화하며 오전을 보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식당에 들어섰을 때였다.
“지우야! 오영이랑 도민이가 문자 보냈었어. 국가대표로 함께 훈련하게 돼서 정말 기쁘다고. 너한테 인사 전해 달래.”
신준석이 웃는 얼굴로 말을 건넸다.
“국내 선수들끼리 3월에 두 번 소집이 있고, 4월과 5월에는 우리도 일정이 있다던데? 한일전은 5월 말에 예정인가 봐.”
박상민과 이정렬도 귀를 쫑긋 세우고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솔직히 정지우는 맨시티전에서 느꼈던 불안함과 꿈에서 막아 내지 못했던 슈팅을 생각하느라 신준석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일본 만만치 않겠더라. 잘게 잘게 썰어서 패스하는 것도 그렇고, 슈팅도……. 에이, 우리야 네가 있으니까 아무 걱정 없지, 뭐.”
정지우의 눈치를 살폈던 신준석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것처럼 말을 마쳤다.
“일본전 영상을 본 적이 있어?”
“예선전 마지막 경기. 나한테 있어. 보고 싶으면 오늘이라도 가져갈게.”
보고 싶다. 그러나 지금은 리그에 최선을 다할 때였다.
잠시 망설였던 정지우는 ‘나중에.’라고 답을 했다.
한일전과 관련된 대화는 거기까지였다.
데이빗과 동료들이 다가와서 화제가 자연스럽게 리그 경기로 이어졌다.
2월 28일의 노리치전은 1 대 0의 어려운 승리였다.
리그 막바지에 강등권에 해당하는 팀들은 두 가지 유형을 보인다. 포기하거나, 아니면 미친 황소처럼 달려들거나.
노리치는 번득번득 이성이 돌아오는 미친 황소처럼 유니온 시티에게 달려들었다.
솔직히 제대로 된 슈팅은 전후반을 통틀어 딱 두 개밖에 없었는데, 그나마 어렵지 않게 막아 낼 정도였다.
그 덕분에 정지우는 4-5-1의 포메이션을 선택한 노리치와의 경기를 좀 더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이건가?’
전에는 주로 수비수에게 고함을 지르며 동선을 맞추려 애썼다. 때로는 수비를 돕기 위해 달려온 미드필더들에게 상대할 선수나 포지션을 정해 줄 때도 있었다.
그러나 노리치전에서는 동료 10명이 어떻게 해야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것인지, 그렇게 못하는 선수가 누구인지를 조금씩이나마 알 것 같았다.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렸을 때, 유니온 시티 관중들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나 어깨를 붙들고 뛰었다.
한 골이 가져다준 승점이 3점이다.
열 골을 넣어도 비기면 1점, 스무 골을 넣어도 지면 승점은 없는 거니까, 레믹이 욱여넣은 한 골의 값어치는 말할 것도 없었다.
『우리 선수 네 명이 선발로 뛴 유니온 시티가 우리 시간으로 토요일 자정에 열린 노리치전에서 1 대 0으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보도에 윤충일 기자입니다.』
화면이 노리치전을 보여 주었다.
『박용근 국가대표팀 감독과 우리 국가대표 선수 네 명이 포함된 유니온 시티가 노리치전에서 승리를 거두며 우승을 위한 승점 7점을 남겨 두었습니다.』
박상민이 연결한 패스를 카알이 찔러 넣었고, 달려든 레믹이 수비수와 뒤엉키며 발끝으로 밀어 넣는 장면이 나왔다.
『골은 우리 선수 박상민의 발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다시 한 번 박상민이 카알에게 패스하는 장면이 느린 그림으로 나왔다.
『박용근 국가대표 감독은 벤치에서 이 경기를 지켜보았으며, 우리 선수들은 모두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습니다. 유니온 시티가 승점 7점을 더 확보할 경우, 2위 토트넘의 경기에 상관없이 우승이 확정됩니다.』
이어진 화면은 레드 블레이트 앞에서 마이크를 들고 있는 기자의 모습이었다.
『경기가 끝난 후, 홈구장 레드 블레이트와 도시 곳곳에서 흥분한 관중들이 열띤 구호를 외쳤고, 상점마다 우승을 기원하는 플래카드가 걸렸습니다. 이상, 레드 블레이트에서 윤충일이었습니다.』
보도는 그렇게 끝났다.
3월에 우선 국내 선수들을 먼저 소집한 박용근이 전은주와 함께 다시 한국으로 출발했다.
영국에서의 생활이야 당연히 동기들과 함께였고, 이런 것들이 불편할 일은 없었다.
3월 2일 상대는 웨스트브로미치였다.
상대적으로 승점 3점을 확보할 수 있는 경기라고 다들 기대했는데, 결과는 0 대 0 무승부였다.
웨스트브로미치는 마치 맨시티를 흉내 내는 것처럼 움직였고, 그들보다 더 악착스럽게 뛰었다.
선수들은 힘들고 치열하게 달리지만 보는 사람은 묘하게 지루한 경기였고, 정지우에게는 뭔가 좀 더 알 것 같은데 확 손에 잡히는 것이 없는 안타까움 가득한 경기였다.
정지우를 갑갑하게 만들고, 불안하게 하는 무언가가 있다.
확 낚아채서 ‘이거구나!’ 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이 고스란히 남은 경기였다.
우승 승점은 6점 남았다.
2월의 일정 조정의 관계로 열흘 이상 쉬었던 만큼 3월과 4월은 빡빡한 경기 일정이었다.
3월의 두 번째 상대는 왓포드였고, 원정 경기였다.
이 경기에서만큼은 반드시 승점 3점을 가져오자고 다들 악착같이 뛰었는데, 결과는 허탈하게도 역시나 0 대 0 무승부였다.
집에 돌아왔을 때 동기들 역시 어쩐지 이제까지와는 다른 표정이었다.
늘 경기 후에는 일찍 잠이 드는 정지우다.
간단하게 씻고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동기들 셋은 소파에 있었다.
“자고 갈래?”
“상민이랑 있을게.”
“그래.”
신준석이 함께 잔다면 그냥 그러면 되는 거다.
정지우가 방을 향해 몸을 돌린 다음이었다.
“지우야.”
신준석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오늘 경기 말이야. 톱니바퀴 돌듯 잘 도는 거 같은데 이상하게 뭔가 안 맞고 비는 느낌이 들던데, 넌 그런 거 못 느꼈냐?”
정지우가 시선을 돌렸을 때, 박상민과 이정렬 역시 신준석과 비슷한 얼굴이었다.
“조금 더 자세하게 설명해 봐.”
“그게 수비 라인도 문제없었고, 미드필더들도 좋았고, 정렬이랑 레믹도 잘한 거 같은데, 거 왜 있잖아. 스텝만 죽어라 밟고 결국 한 방도 못 날리는 권투 선수 같은 느낌. 그런 거 같았거든.”
정지우는 멍한 얼굴로 신준석을 바라보았다.
“네가 못 느꼈다면 우리가 좀 예민했던 모양이지. 이상하게 이길 수 있는 경기였는데 이전과 다르게 밋밋한 거 있잖아. 소금 빠진 음식처럼.”
그 표현이 맞는다는 것처럼 박상민이 고개를 끄덕였고, 이정렬 역시 다르지 않은 표정이었다.
“솔직히 우승까지 승점 5점 남았는데, 내가 너무 예민한 건지도 모르지. 토트넘이 연승으로 달려오니까 슬쩍 부담도 되고.”
정지우는 소파로 다가가 박상민과 신준석의 중간에 앉았다.
“나는 맨시티전에서 그랬었다.”
“그래?”
동기들은 정지우의 대답이 숫제 반가운 얼굴이었다.
“확실히 넌 다르구나. 그래서? 이유가 뭐라고 생각했는데?”
“그건 아직 모르겠어.”
잔뜩 기대하고 나갔더니 정작 소개받으러 나온 여자는 꽝인데 소개해 주는 여자가 엄청나게 매력적일 때의 표정, 동기들 셋의 얼굴이 딱 그랬다.
“우리 우승하겠지?”
불안한 심정 때문이었을까?
신준석이 툭 던진 한마디가 정지우의 뒤통수를 제대로 때린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어서 두통약 광고처럼 세상이 화악 밝아지면서…….
“왜 그래?”
“그게 아니라 너 지금 질문한 거, 그거 때문에! 잠깐만! 정렬아! 너 최근에 경기 나설 때 뭐에 가장 신경 썼냐?”
“어?”
정지우의 질문을 이정렬은 전혀 못 알아먹은 게 틀림없었다. 그에 상관없이 정지우는 다시 박상민에게 시선을 돌렸다.
“상민이 너는?”
“경기에 나설 때 가장 신경 쓴 거? 뭘 말하는 거야? 유니폼 같은 준비물? 아니면 전날 경기 영상, 이런 거?”
“그게 아니라, 네 포지션에서 뭘 가장 신경 썼냐고? 경기 내내 네가 가장 신경 쓰면서 뛰었던 거?”
박상민이 고개를 갸웃했고, 이정렬은 이제야 알아먹었는지 ‘아!’ 하는 표정이었다.
“나야 우선 수비와 밀착 마크였지. 간간이 앞쪽으로 공 뿌려 주는 거 신경 쓰고.”
“너는?”
“나는 미드필더 돕는 거. 요즘 많이 뛰면서 상민이 자리를 내가 맡아 주는 거잖아.”
답을 하면서도 동기 셋 모두 정지우가 왜 이런 질문을 하는지는 이해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맨시티전부터 불안하긴 한데 실제로 위협적인 슈팅은 그전 경기보다 훨씬 적었거든. 위험한 순간도 훨씬 덜했고.”
“그랬나? 응! 그런 거 같다.”
수비수인 신준석이 확실히 빨리 이해했다.
“요즘은 정렬이, 그리고 준석이 너까지 상민이만큼 엄청나게 달리는데, 이게 가만 보면 점점 더 아래에서 뛰는 양이 많아진 거야. 정렬이가 아예 중앙 미드필더 역할을 할 정도니까.”
동기 셋이 허공으로 시선을 주었다가 약속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열심히, 미친 듯이 달리면서 점점 엉덩이가 뒤로 밀려난 거지. 그사이 역습은 없어지고, 레믹까지 수비에 치중하는 바람에 이건 비기는 것이 목표인 팀처럼 돼 버린 거지.”
빨리 결론을 내려 달라는 것처럼 동기 셋이 다시 눈을 초롱초롱하게 뜨고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포지션은 있는데 점점 더 아래로 내려왔다니까. 그러니 역습이 없어진 거야. 가끔 상민이가 찔러 주는 공으로 슈팅을 하는 게 전부일 정도로. 이해되냐?”
“간질간질하다.”
“우리 빠른 역습이 없어졌어. 다들 죽어라고는 뛰는데 그게 거의 수비를 위한 역할이 돼 버린 거. 거기에 무승부로 승점 1점씩만 쌓으면 되는 상황도 있었고. 나를 도우면 승점 1점은 어떡해서든 가져가지 않을까 싶은 심정으로.”
“호오!”
신준석이 허리를 펴면서 한숨처럼 감탄사를 뱉어 냈다.
“그게 불안한 이유가 되나?”
다 알아낸 줄 알았다.
그런데 신준석의 질문을 듣는 순간, 뭐가 또 빠졌나 하는 의심이 훅 일어났다.
“내가 한 점이라도 실점하면 그냥 끝이니까. 무패 기록은 당연하고, 그 뒤에 리듬이 깨져 버리면 리그 막판이라 돌이키기도 어려워. 일단 그래서인 거 같다.”
“후우.”
박상민이 노인처럼 커다랗게 한숨을 토해 냈다.
“이제 뭘 해야 하는 거지?”
그리고 녀석이 묵직하게 질문을 던진 다음이었다.
“어떡하긴 뭘 어떡해? 지우가 내일 마틴 감독님 만나서 지금 느낀 거 의논하고, 너는 얼른 일어나서 평택 호박 나이트에서 갈고닦은 솜씨로 형들 먹을 과일을 준비하면 되는 거지.”
신준석이 상황을 깔끔하게 정리해 버렸다.
“어? 과일 안 먹어?”
“나 잘 시간 지났다.”
“에이! 과일인데?”
신준석의 저 유쾌함과 장난기는 도대체 누구에게서 얻은 걸까?
“먹고들 자. 난 먼저 들어갈게.”
방으로 들어서는 정지우의 가슴이 한결 가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