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장. 누가 더 마음이 급할까? (2)
경기가 있었던 날은 일찍 잠이 든다.
맨시티와의 경기가 있었던 날도 정지우는 집에 도착한 뒤에 곧바로 잠자리에 들었다.
꿈이다. 꿈인 걸 안다.
상대 선수가 코너로 차 넣은 공을 전혀 막지 못하는 더러운 꿈이라는 걸 분명히 알고 있었는데도 도망치거나 막아 낼 수 없었다.
막고 싶었다. 꿈에서도.
그런데 시커먼 상대 선수가 정지우을 빗겨나 휘어들어 가는 멋진 골을 만들더니, 다음번에는 황소처럼 달려와서 자세를 낮추기도 전에 골을 성공시키고 있었다.
계속해서 손을 빗겨 나가 골대에 공이 처박히면서 스코어는 어느덧 69 대 0이었다.
출렁이는 그물, 골대 안에서 구르는 공, 그리고 그런 골대를 기가 막힌 표정으로 바라보는 유니온 시티 동료들과 어떻게 그렇게까지 됐느냐는 동기들의 시선.
수비를 도와달라고 고함도 지르지 못했다.
꿈은 계속됐다.
툭! 툭! 투욱! 툭!
장난처럼 공을 몰고 들어온 선수들이 정지우를 피해 이리저리 패스하다가 골을 넣었다.
멋지게 몸을 날린 것도 아니어서, 바닥을 마구 기어서 버둥거리는 바로 앞에서 넣는 골이었다.
“이봐! Ji! 더는 못 보겠다! 제발 그만두고 다른 일을 알아봐!”
교장 선생님의 고함이 들렸고,
“Ji! 네가 유니온 시티의 가장 처참한 패배를 기록한 골키퍼야!”
관중들의 야유도 들렸다.
골대 앞에서 겨우 일어난 정지우의 시선에 전은주의 모습이 들어왔다.
퍼뜩!
정지우는 잠에서 깨어나 침대에 앉았다.
전은주가 울고 있었다.
양손으로 얼굴을 가린 전은주는 분명 우는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지?’
가끔 경기를 앞두고 긴장할 때는 있었지만, 이런 악몽을 꾼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감독님께 안 좋은 일이 있는 건가?’
정지우가 골을 먹는 꿈인데, 왜 박용근에게 나쁜 일이 생기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이 드는 건지.
멍하니 침대에 시선을 두던 정지우는 무실점 기록이 꽤 오래되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남은 경기에서 실점하는 건가? 그때 내가 너무 힘들어해서 어머니가 우는 거고?’
그럴 수 있겠다.
세계적인 리그에서 수비수의 실수로 내준 한 골만으로 이렇게 오래 버틴 것만 해도 사실 엄청난 일인 거다.
맨시티의 경기는 앞으로 상대해야 할 팀들이 유니온 시티를 어떻게 공략할지에 대해 한 걸음 나아간 전술을 보여 준 것과 같다.
리그 막바지를 향해 달리는 길이다.
강등을 피해서 잃을 것이 없는 상태에서 챔피언스 리그 출전 자격이 있는 4위, 유로파 리그에 나갈 자격을 얻는 7위 안에 들지 못하는 중위권 팀들은 유니온 시티를 이기는 명예를 원할 게 분명했다.
승점 1점이 아쉬운 유니온 시티와 이기면 단숨에 명예를 얻는 중위권 팀들의 경기다. 그들은 패하더라도 정지우에게서 골을 얻어 내는 것이 오히려 승리보다 값진 기록이 될 수도 있었다.
정지우는 침대에서 일어나 거실로 움직였다.
물을 마신 후에 가볍게 몸을 풀어 줄 생각이었다.
***
오후 3시.
박용근은 김문호와 함께 협회의 송인수 집무실에 있었다.
“일본 팀은 오래 준비해 왔고, 이미 그들이 목표했던 완성에 가까워져 있습니다. 승패를 알 수는 없지만, 최선을 다한 경기로 월드컵 본선을 준비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김문호가 미안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앞이었다.
“개인적으로 이 친구와 제가 꼭 이겨 보고 싶은 경기이기도 하구요.”
내용을 아는 송인수가 먼저 잔잔한 웃음으로 답했다.
“어려운 결정 하셨습니다. 공문을 보냈으니 A매치 기간 중 일정을 확정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기자회견장에 함께 나가시는 건……?”
“협회가 결정할 일에 제가 끼어드는 것은 좋은 모양새가 아닙니다. 그리고 참! 출국하기 전에 장진모 기자와 단독 인터뷰가 있고, 그 뒤에 기자들을 만나 볼 생각입니다.”
“설마 여기 김 위원이나 제 흉을 보실 건 아니신 거죠?”
송인수의 농담에 잔잔한 웃음이 흘렀다.
오후 5시, 협회에서 한일전 발표가 있을 시점에 박용근은 장진모를 찾았다.
“감독님!”
장진모야 당연하게 뛰어나왔고, 그의 부장, 스포츠부 부장, 축구 담당 기자들이 우르르 나와서 박용근을 맞았다.
장진모는 회의실로 박용근을 안내했고, 함께 있는 이들을 차례로 소개했다.
간단한 인사를 나누고 자리에 앉은 다음이었다.
“별거 아닌 사람을 이렇게 대할 필요는 없는데, 인터뷰에 실망하는 거 아닌지 염려됩니다.”
“축구에 관심 있는 팬들에게 박 감독님의 생각이나 의중을 전하는 수준이라서 곤란하실 질문은 아예 없습니다.”
“나를 국가대표 감독으로 만들어 준 장본인이 장 기자님 아닙니까?”
박용근의 농담에 장진모가 특유의 뻔뻔한 표정으로 웃었다.
“아! 그리고 오늘 인터뷰에 상관없이 내일 출국하기 전에 기자분들을 만날 생각인데 괜찮겠지요?”
“물론입니다.”
장진모가 시원하게 답을 했고, 이후로 편안한 분위기에서 질문과 답이 오갔다.
한일전의 발표가 있었던 다음 날, 박용근은 오전에 기자들과 시간을 가졌다.
“부담이 많이 되셨을 텐데, 일본과의 평가전을 결심하신 계기가 있습니까?”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편안하게 앉은 만큼 오가는 대화 톤 역시 여유로웠다.
“새로 선발된 선수들과 함께 우리가 가야 할 길이 어디인지를 분명하게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지금껏 응원해 주신 국민께 최선을 다한 경기를 보여 드리고 싶다는 욕심도 있었구요.”
기자들이 고개를 끄덕이며 박용근의 말을 타이핑했다.
“감독님, 이런 질문이 곤란하실 테지만, 그래도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월드컵 본선에서 어느 정도의 성적을 목표로 하십니까?”
“곤란한 질문인데 답을 안 하면 안 되겠습니까?”
농담이다. 그래서 잔잔한 웃음이 지나갔다.
기자들이 기대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는 앞에서 박용근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이번 월드컵 본선에서 제 목표는 우리 축구가 어떤 것이었는지를 보여 드리고 싶다는 것입니다.”
타이핑을 하던 기자들이 무슨 소린가 하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다들 아시는 사건들로 인해 우리 축구는 자부심을 잃었습니다. 아시아의 맹주라 불리던 우리 축구가 종이호랑이라는 비아냥마저 듣고 있습니다.”
기자들이 눈빛을 반짝이며 박용근의 말을 듣고 있었다.
“승패에 상관없이 경기가 끝난 후에 후련하게 박수를 보낼 수 있는 경기, 우리나라가 왜 아시아의 맹주인지를 확인시켜 주는 경기. 내 목표는 전 세계 축구인들에게 대한민국의 축구가 어떤 색인지를 분명하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 시작이 이번 한일전이라는 말씀이시죠?”
“그렇습니다.”
“감독님, 승패에 상관없다고 하셨는데 패하고도 박수를 받을 수 있는 경기가 가능할까요?”
편안하게 진행되던 대화가 점점 진지해지고 있었다.
“선수들이 최선을 다해 뛰는 경기는 관중들이, 그리고 우리 축구 팬들이 분명 알게 됩니다. 우리는 마지막까지 포기하지 않던 우리 축구를 찾을 겁니다.”
“그렇게 하기에 한일전은 우리나라 축구 팬들에게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기자의 말에 박용근은 먼저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 축구는 이미 본선에 대비한 준비를 마쳤다고 스스로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제 시작입니다. 패하더라도 절대 우리를 무시할 수 없는 경기를 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박용근의 말이 끝난 직후였다.
“감독님! 취재하면서 지난 사우디아라비아전처럼 통쾌한 경기가 얼마 만인지 모르겠습니다. 부디 월드컵 본선에서도 경기가 끝난 후에 우리 축구를 자랑스럽게 보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앞쪽부터 고참 기자들이다.
스포츠부 최고참 기자가 당부처럼 말을 건넸고, 박용근이 미소로 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기자들과 하는 간담회인데도 엉뚱하게 박수 소리가 울려 나왔고, 기다렸다는 것처럼 기자들 모두가 함께 손뼉을 치기 시작했다.
당연하게 박용근을 응원하는 의미였다.
***
박용근과 전은주가 도착하는 날, 정지우는 클락과 함께 공항에 나가서 두 사람을 기다렸다.
비행기 도착 시그널이 뜨고 30분쯤 지나서였다.
커다란 가방을 올린 카트를 밀며 박용근과 전은주가 문을 빠져나왔다.
“감독님!”
고개 숙여 인사하는 정지우를 전은주가 다독여 주었다.
반갑다. 고맙다.
“피곤하시죠?”
“뭐하러 여기까지 나왔어?”
“뵙고 싶어서요. 집에 있어야 딱히 할 일도 없구요.”
정지우의 넉살이 늘었다.
박용근은 그런 제자의 모습이 나쁘지 않은 얼굴이었다.
공항까지 나와서 마중해 놓고 집으로 가는 차 안에서 오간 대화는 결국 축구 이야기였다.
맨시티와의 경기를 놓칠 박용근이 아니다. 정지우는 그 경기에서 궁금하고 답답했던 것들을 질문했다.
“분명 문제가 있는 건 알겠는데, 딱히 뭘 어떻게 해야 할지 전혀 몰랐습니다.”
“많이 답답했던 모양이구나.”
“상민이가 공 배급을 잘해 주면서 후반은 그럭저럭 풀어 나갔거든요. 그런데도 불안함이 사라지지도 않았구요. 경기에 질 수 있다는 불안함이 아니라, 무언가 어긋나고 있는데 그걸 못 찾는 것에 대한 불안함이었습니다.”
이전에 이런 말을 한 적은 없었다.
하긴 이런 감정을 느낄 만한 경기도 없었고, 또 이런 시간을 가지지도 못했었다.
“축구는 열한 명이 하는 경기다.”
박용근은 정지우의 질문에 대한 답을 알고 있는 것처럼 말을 꺼냈다.
“그 열한 명의 선수가 그라운드에서 각자 맡은 역할에 따라 승리를 위해 달리지. 잘하는 선수가 있고, 컨디션이 좋은 선수도 있는데, 반대의 경우도 있다.”
따로 이야기하지 않아도 아는 내용이었다.
그런데도 박용근은 진지하게 말을 건넸고, 정지우는 하나라도 놓칠세라 이야기에 집중했다.
“네가 보며 기대하는 것을 동료들 모두가 해낼 거라고 기대하지 마라. 현역에서 감독을 맡으며 가장 가슴 아픈 순간은 기대했던 선수들이 제 역할을 못해 줄 때였다.”
전은주의 표정으로 봐서 아마도 박용근은 이런 말을 처음 하는 모양이었다.
“감독은 승리를 위해 선발 선수들을 정하고, 중간에 전술 변화를 위해 교체하기도 하지. 그런데 그날 컨디션 때문에, 혹은 다른 이유로 기대한 만큼의 활약을 못해 주는 선수가 있고…….”
과거를 회상하는 듯한 표정으로 박용근이 말을 이었다.
“상대 팀이 워낙 강해서 우리 선수들만으로는 도저히 비길 방법조차 못 찾을 때도 있지. 그럴 때 감독은 미안하고 답답한 심정으로 선수들을 바라볼 수밖에 없다.”
말을 하던 박용근이 힐끔 정지우를 보았다.
“그리고 바라게 되지. 누군가 저 안에서 동료들을 이끌어 힘든 상황에서, 실점으로 뒤지는 경기에서도 마지막까지 악착같이 버텨 주기를 바란다.”
지금껏 생각하지 못했던 이야기였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정지우의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니란 생각도 들었다.
“넌 전에도 동료들을 잘 이끌었지. 유니온 시티에서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마틴 감독님의 경우엔 경기장 안에서의 지시를 너에게 맡길 정도니까.”
“예.”
“네가 성장한 거다. 골대 앞에서 경기를 바라볼 수밖에 없는 너의 위치가 마치 감독과 같다는 생각을 했었다.”
뭐라고 답을 하지 못할 만큼 멍해지는 이야기였다.
“필드에 나가서 대신 뛰고 싶을 때도 있고, 이렇게, 저렇게 하면 될 것 같은데 바라만 봐야 하는 것이 답답할 때도 있었겠지. 너는 교체를 지시할 수도, 다른 전술을 내밀 수도 없었을 테니까.”
정지우의 표정을 본 박용근이 재미있다는 표정으로 웃었다.
“혹시 맨시티전 후반에 마틴 감독님과는 다른 판단을 했었던 건 아니냐? 그게 너를 답답하고 불안하게 만들었을 수 있지. 솔직히 후반에 네게는 위기가 별로 없었으니까 더욱 바라보는 입장이었을 테고.”
정말 그랬을까 싶은 생각에 정지우는 애꿎은 머리만 긁적였다.
“이 녀석! 언제고 네가 감독이 된 경기를 볼 수 있었으면 했는데, 벌써 이 정도로 성장한 거냐?”
정말이지 확신이 서지 않았는데도 박용근은 마치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정지우의 등을 툭툭 두드려 주었다.
“여보, 우리 지우에게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
“문제? 이 녀석이 경기를 너무 냉정하게 바라보는 게 문제이긴 하겠지. 어쩐지 이 녀석은 선수 생활보다 더 엄청난 감독이 될 것 같은데?”
축구와 함께 살아온 전은주다. 박용근의 말뜻을 알아듣는 그녀가 대견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는데 정지우는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정말 그런가?
그라운드에서 동료들에게 지시를 내리면서부터 정말 감독의 시선으로 경기를 보고 있었던가?
돌아오는 길에 생각이 정말 많았다.
집에 도착했을 때 박상민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앞치마를 두르고 있었다.
“오셨어요?”
녀석이 얼른 벗어 들었지만, 손에 구겨져 들려 있는 건 분명 앞치마였다.
정지우까지 답을 요구하는 시선으로 녀석을 보았다.
“비행으로 피곤하실 텐데 도착하시면 어머니가 늘 청소하시잖아. 그래서 화장실이랑 몇 군데만 치웠어.”
뭔가 잘못한 녀석처럼 박상민이 고개를 떨궜을 때였다.
전은주가 잔잔한 표정으로 ‘고마워, 우리 아들.’ 하며 박상민의 등을 다독여 주었다.
“그런 걸 하려면 내가 나가기 전에 함께하자고 그랬어야지! 이거 너끈히 옐로카드 받을 일이야!”
정지우의 농담을 박상민이 씨익 웃으며 받았다.
옷을 갈아입고, 가방에서 먹을 것이 잔뜩 나왔을 때쯤 신준석과 이정렬이 찾아왔다.
다음 경기는 2월 28일 노리치전.
열흘 정도의 시간이 있었다.
오는 차 안에서 박용근 덕분에 길을 본 느낌이었다.
그러나 아직 맨시티전에서 느꼈던 불안함을 해소하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알지 못했다.
찾고 싶다. 알고 싶다.
정지우는 좀 더 발전하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