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218화 (218/262)

제9장. 우리의 우승을 확신하는 경기. (1)

훈련은 일주일에 두 번 있었다.

그리고 유니온 시티는 주말에 있었던 크리스탈 팰리스와의 경기에서 1 대 0으로 승리했다.

그 경기의 주인공은 결승 골을 넣은 레믹이 아니라, 네 번의 눈부신 선방을 펼친 얀센이었다.

경기 직후, 그는 정지우를 향해 양손 검지를 높게 치켜들었는데, 정지우가 깁스한 검지와 중지를 뻗으며 답한 것이 영국과 한국의 매체를 장식하기도 했다.

회복 훈련, 그리고 그 뒤 이틀간 이어지는 전술 훈련.

“카알! Jun! 상상력을 발휘해!”

마틴은 전에 없이 커다란 고함으로 선수들을 밀어붙였다.

“Sang! 빈 곳이 어디인지를 확인해!”

짧은 지시쯤 알아듣는 박상민이 독기를 품고 뛰었고,

“스웰던! 언제까지 그 자리에 서 있을 건가!”

마틴의 지적을 받은 스웰던이 욕을 뱉어 가며 달렸다.

삐이익!

오전의 한 시간 훈련이 끝나자 동료들이 벤치 앞에 널브러졌다.

“고생했어.”

정지우는 스태프들과 함께 나가 동료들에게 비타민 음료를 건네주었고, 다리를 풀어 주었다.

무리다. 무리한 요구다.

주말마다 피 말리는 리그 경기를 치르며 주중에 이렇게 달리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뜻밖의 응원이 유니온 시티 선수들을 달릴 수밖에 없도록 자극하고 있었다.

응원이었다.

전술 훈련 날이야 당연히 비공개이지만, 그라운드를 개방하는 평일에는 레드 블레이트의 3분지 1을 차지할 정도로 홈 관중과 관광객들이 몰려들었고, 취재진의 숫자도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전술 훈련 다음 날은 경기 다음 날과 마찬가지로 가볍게 몸을 푼다.

짝짝짝짝짝짝짝짝!

그라운드에 나서는 동료들을 홈 관중들과 관광객들이 응원해 주었고, 매일 새로운 매체들이 취재를 요청해서 홍보 담당관 에이미를 바쁘게 만들었다.

“우리가 화제의 중심이긴 한 거지?”

데이빗은 물론이고 동료들 모두 이런 변화가 나쁘지 않은 얼굴이었다.

아직 마틴이 정식으로 부르지 않아서 이정렬은 박용근과 함께 훈련했다.

“빈 곳을 봐야지! 상대 팀이 볼 수 없는 곳!”

박용근의 지시는 날카로웠다.

“좀 더 빨리! 더! 더!”

“헉헉! 헉헉!”

함께 훈련하던 동료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박용근의 지도는 독했고, 이정렬은 악착같았다.

삐이익!

휴식이었다.

“허억! 허억!”

벤치 앞에 주저앉은 이정렬은 숨을 헐떡였다.

의심하지 않는다. 의심하지 않을 거다.

이렇게 리저브 팀에서 선수 생활을 마치더라도 말이다.

잊지 않고 찾아 준 정지우에게, 아버지에게, 자기 자신에게 약속했던 일이다.

최선을 다해 뛰고 선수 생활을 접는 한이 있어도 이제는 흔들리지 않고 박용근과 정지우를 믿을 거다.

박용근이 다가왔다.

그는 이정렬뿐만 아니라 특정한 선수에게 애정을 보인 적이 없었다. 그런데,

툭툭.

동료들이 다 보는 앞에서 박용근이 이정렬의 어깨를 다독여 주었다.

“이제야 내가 알던 내 제자 이정렬 같다. 고생했다.”

별말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정렬은 눈시울이 왈칵 붉어져서 애꿎은 하늘을 노려보았다.

11월 1일, 웨스트 브로미치와의 경기는 전술 훈련의 후유증이 그대로 드러난 경기였다.

미드필더는 발이 무거웠고, 패스는 이리저리 흩어졌으며, 수비 또한 제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두 골을 먼저 먹은 유니온 시티는 박상민이 미친놈처럼 뛰어다니며 한 골을 만회한 뒤에, 이어서 레믹과 꼼빠니가 한 골씩을 넣어서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다.

11월 8일, 왓포드전 역시 비슷했다.

그나마 수비수들이 좀 더 단단해졌고, 웨스트 브로미치전의 경험을 바탕으로 중앙을 단단하게 한 덕분에 2 대 1의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스포츠 관련 매체에서 유니온 시티의 한계가 언급되기 시작한 것도 이쯤이었다.

역시 이쯤에서 밀려나는 게 아니냐는 말과 함께 선두 역시 오래가지 못할 거란 예상도 나왔다.

그다음 주 화요일에 마틴은 박용근을 불렀다.

“앉으시죠.”

유정호가 동석한 자리였다.

“맨유전에 앞서 22일 뉴캐슬과의 경기에 Lee를 불러올 생각입니다.”

“알겠습니다.”

“박 감독님도 짐작하겠지만, 뉴캐슬전에서 훈련의 성과를 점검하고 부족한 부분이 있는지를 확인해 볼 예정입니다. 다만, 모든 것을 내보이지는 않았으면 합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긴말이 필요하지는 않았다.

수요일에 정지우는 깁스를 풀었다.

“통증은 어때?”

“지금은 잘 모르겠는데요? 악력이 좀 떨어진 느낌은 있구요.”

정지우는 천천히 오른손을 쥐었다 펴 보았다.

“무리하지 말고 천천히 적응할 필요가 있어.”

“그러죠.”

병원까지 따라왔던 스미스는 아직 불안한 얼굴이었다.

저녁은 신준석과 이정렬까지 함께 먹었다.

다른 무엇보다 젓가락을 사용할 수 있는 게 제일 좋았다.

목요일부터 가볍게 공을 받는 연습을 했는데 통증은 그다지 없었다. 동료들이 전술 훈련을 하는 동안, 일주일에 4회씩 체력 훈련을 해 오고 있어서 감각이 떨어진 것을 제외하면 다른 문제도 없었다.

11월 22일, 뉴캐슬과의 원정 경기는 유니온 시티의 3 대 0 승리로 끝났다.

승리를 기뻐하는 홈 관중들과는 다르게 경기를 마친 유니온 시티 동료들의 얼굴에 묘한 흥분이 감돌았다.

훈련의 성과를 느낀 거였다.

비단 선수들만이 아니었다.

마틴과 스태프들에게서도 비슷한 흥분이 느껴졌다.

1군에 올라온 이정렬이 끝내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예상보다 승부가 일찌감치 결정 난 탓에 굳이 녀석이 뛰는 것을 내보일 필요가 없어서 그런 것 같았다.

***

호프집 사장은 월요일부터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오후 3시에 가게 문을 열면 가장 먼저 정지우가 선물해 준 유니폼 상의를 확인한다.

그냥이나 걸었나?

반듯하게 펴서 액자에 담아 걸었다.

“정지우 선수! 이번 주말 맨유와의 경기! 정지우! 정지우!”

두 주먹을 불끈 쥔 사장이 액자를 향해 정지우의 이름을 외치는 거?

직원들은 이제 그러려니 하는 일상이었다.

게다가 맨유전에 정지우가 선발로 나설지 모른다는 보도까지 나왔으니 오죽하겠나.

『정지우 선수가 선발로 나설지가 영국 현지에서도 굉장한 관심거리입니다.』

『그렇습니다. 게다가 유니온 시티가 선두를 유지하려면 이번 주말 맨유전을 시작으로 연달아 이어지는 강팀과의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어야 합니다.』

호프집은 아예 스포츠 채널을 고정해 놓았다.

이번 주는 이미 주말 예약이 꽉 찼다. 그런데도 직원들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저 상태 안 좋은 사장이 또 ‘내가 다 계산할 거야!’를 외치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 때문이었다.

일주일은 금방 지나갔다.

유니온 시티와 맨유의 경기는 한국 시간으로 토요일 자정이었다.

정확한 선발 명단은 경기 시작 한 시간 전에 나온다.

호프집은 밤 10시부터 발 디딜 틈 없이 손님들로 꽉 차 있었다.

정지우가 직접 들러 사인한 유니폼 상의를 건네준 곳인 데다, 팬들과 직접 사진 찍었던 곳이니까 사실 그럴 만도 했다.

정지우의 선발이 예상되는 경기, 그것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라는 강팀과의 경기가 있는 날이다.

VJ 기동대, 시선 집중 등의 프로그램에서 나온 PD들이 방송 카메라를 들이대고 손님들과 인터뷰까지 한 덕분에 경기 시작 전인데도 호프집 분위기는 어느 정도 달아올라 있었다.

『지난 경기에서 뛰지 못했던 이정렬 선수까지 일단 우리 선수가 네 명이나 엔트리에는 들어 있습니다. 과연 마틴 감독은 오늘 어떤 선발 명단을 들고 나올지 기대됩니다.』

『부상에서 회복한 지 얼마 되지 않기 때문에 아무래도 정지우 선수는 오늘 선발이 어려울 것 같은데요, 사실 골키퍼라는 포지션 특성상 후반 교체도 기대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이정렬 선수의 교체 정도는 기대해 볼 만하지 않을까요?』

『그렇죠. 지난 경기부터 벤치에 있었기 때문에 오늘 아마 후반에 교체로 투입되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습니다.』

경기 시작 두 시간 전부터 스포츠 채널 역시 특집 편성으로 분위기를 띄우고 있었다.

『잠시 후면 명단이 나올 텐데요, 아! 명단이 나왔나요?』

캐스터가 고개를 기울이며 카메라 앞쪽을 바라보았다.

『맞습니다. 명단이 나왔습니다.』

자료를 확인하기 위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유니온 시티의 선발 명단입니다. 골키퍼 정지우, 정지우 선수가 골키퍼 선발입니다!』

“와아아- 아!”

손님들이 함성을 지르는 틈에서 사장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허공에 뻗은 두 주먹을 부르르 떨고 있었다.

『우리 선수들, 그동안 계속 선발로 경기를 뛰었던 박상민, 신준석은 물론이고, 이정렬 선수까지 선발입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상대하는 경기에서 우리 선수 네 명이 선발입니다! 엄청납니다! 이건 정말 굉장한 일입니다!』

캐스터만큼이나 해설자도 흥분한 음성이었다.

『그동안 벨기에 선수들이나 브라질, 스페인 선수들이 한 경기에서 네 명 뛴 적은 있지만, 프리미어리그에서 우리 선수 네 명이 동시에 선발로 나선 건 정말이지 우리 축구사에 새로운 기록으로 남을 일입니다!』

“사장님! 종 한 번 치고, 맥주 돌려줘요! 내가 살 거야!”

사장이 나서기 전에 직원 한 명이 얼른 종을 울렸다.

그렇지 않으면 사장이 ‘아닙니다! 오늘은 내가 삽니다!’ 하고 나설지 몰라서였다.

맥주가 서빙되고 나서 북적북적하게 시간이 흘렀다.

『중계가 시작되었습니다. 선수를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오늘은 3-4-3의 포메이션을 선택했습니다.』

『반 할 감독이 스리백을 들고 나왔네요.』

『맥네이, 스몰링, 블린트.』

캐스터가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선수들을 먼저 소개했다.

『이어서 유니온 시티의 선수입니다. 유니온 시티는 역시 4-2-3-1의 포메이션입니다. 스웰던, 라파엘, 무둔바, 신준석이 포백을 형성했습니다.』

4명의 선수가 앞으로 한 걸음 나와 뒷짐을 지는 그림이 화면에 올라왔다.

『이어서 이정렬, 데이빗입니다.』

『스트라이커인 이정렬을 포백 바로 앞에 뒀네요?』

해설자가 놀랐다는 것처럼 명단을 확인했다.

『앞쪽에 꼼빠니, 박상민, 카알을 세웠고, 원톱으로 레믹, 골키퍼 장갑은 말씀드렸던 대로 정지우 선수가 끼었습니다.』

『양 팀 모두 오늘 경기에 단단히 준비한 느낌입니다.』

선수 소개가 끝나고 레드 블레이트의 모습이 화면에 가득 비쳤다.

유니온 시티 홈 관중들이 양팔을 높게 들고 부르는 응원가가 TV를 타고 호프집을 가득 메울 때였다.

통로에서 선수들이 걸어 나왔다.

“와아- 아!”

짝짝짝짝짝짝짝짝!

레드 블레이트가 아니라 호프집에서 터져 나온 함성과 박수 소리였다.

『우리 선수 네 명이 그라운드로 나왔습니다. 벤치 안쪽에 박용근 감독의 모습도 살짝 지나갔는데요, 이런 경기를 중계한다는 것이 정말 가슴 벅찬 순간입니다.』

카메라가 천천히 지나가며 줄지어 서 있는 선수들을 차례로 비춰 주었다.

정지우는 당당한 자세로 서서 벤치를 향해 시선을 주었다.

‘감독님, 새로운 시작입니다.’

‘기대하마.’

박용근과 뜻을 주고받았고,

‘코치, 배려해 준 만큼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오늘을 시작으로 그라운드를 완벽하게 지배해.’

마틴과도 의지를 전했다.

정지우는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전은주가 물개 박수로 응원해 주었고, 그 옆에서 데이지가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정지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동전을 던진 주심이 루니를 바라보자, 그가 공을 선택했다.

정지우는 벤치의 왼쪽 골대를 가리켰다.

맨유 선수들이 줄줄이 움직여 유니온 시티 선수들과 악수를 나누고는 빠르게 지나갔다.

“오- 오오! 오- 오오!”

레드 블레이트의 홈 관중들이 열광적인 응원을 시작하는 동안 정지우는 동료들과 함께 그라운드로 들어섰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선공입니다. 보시는 화면에서 왼쪽이 유니온 시티, 오른쪽이 맨유입니다.』

훈련한 결과를 보이는 경기였다.

“다들 모여 봐!”

데이빗이 동료들을 유니온 시티 진영의 중앙으로 불러 모았다.

팔을 펼쳐 옆에 있는 동료의 어깨를 잡았고,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우리가 왜 선두인지를 오늘 증명한다!”

데이빗이 전에 없이 강한 어조로 동료들에게 뜻을 전했다.

“Ji가 실점을 각오하면서까지 원했던 승리다! Ji가 원했고, 우리가 원하게 된 승리! 오늘! 우리는 그 승리를 손에 넣는다! Ji!”

하고 싶은 말을 한 데이빗이 정지우를 불렀다.

길게 끌 시간은 없었다.

“경기가 끝날 때까지 내가 골대를 지킨다! 그러니 다 함께 달려가서 맨유를 무너트려! 이 경기가 우리의 우승을 확신하는 경기가 될 거다!”

정지우의 고함이 끝나는 순간,

“예에-!”

동료들이 함성을 지르며 몸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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