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209화 (209/262)

제5장. 또 막아주면 됩니다! (1)

공을 양손으로 꽉 끌어안은 정지우가 몸을 일으킨 다음이었다.

쿵. 쿵. 쿵. 쿵. 쿵. 쿵.

“나나나- 나! 나나나- 나! 헤이! 헤이! 헤이! 굿바이!”

유니온 시티의 홈 관중들이 자리에서 뛰며 아스널 관중들을 향해 커다랗게 응원가를 불러 댔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오른손 중지에서 올라온 뻐근하고 짜릿한 통증이 온몸으로 퍼지는 느낌이었다.

후반이 20분 남짓 남았다.

지금 교체 사인을 내면 동료들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가라앉을지 모른다.

정지우는 좀 더 견디기로 했다.

손가락 때문에 공을 굴려 주다가 실수가 나올까 불안했다.

왼손으로 그라운드에 공을 내려놓은 정지우는 라파엘을 향해 짧게 차 주었다.

라파엘이 공을 받고는 몸을 돌렸다.

다급한 아스널 선수들이 라파엘과 근처에 있는 데이빗, 카알을 노리고 달려들었다.

투우욱!

라파엘의 선택은 신준석이었다.

평소보다 위쪽으로 올라가 있던 신준석이 공을 받아 카알에게 연결해 주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라운드의 잔디가 축축하게 느껴졌다.

드리블이나 슈팅을 하는 필드 플레이어에게는 별로 문제 될 것이 없는 변화였다.

그러나 그라운드를 튕기며 날아오는 공의 속도나 탄력이 미묘하게 달라져서 골키퍼는 좀 더 민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정지우는 카알을 향해 스웰던을 가리켰다.

그를 향해 아스널 선수들이 잔뜩 몰려 있어서 당장 공을 빼낼 곳이 필요해서였다.

투우욱!

카알이 넘겨준 공을 스웰던은 바로 앞으로 차 넘겼다.

꼼빠니였다.

그가 공을 잡는 순간에 단박에 아스널 선수 셋이 달려들었다.

투둑!

공을 받은 꼼빠니에게 아스널 선수들이 달려들었고, 결국 옥슬레이드 채임벌린의 발에 맞고 공이 사이드라인 바깥으로 튀어 나갔다.

유니온 시티의 스로인 기회였다.

공을 던질 것처럼 시간을 끌던 꼼빠니가 다가온 스웰던에게 넘겨주고 다시 페널티 에어리어 안쪽으로 움직였다.

주춤주춤!

스웰던은 시간을 끄는 게 아니었다.

아스널 선수들이 워낙 악착같이 달려들고 있어서 공을 줄 곳이 마땅치 않은 거였다.

휘익! 툭!

근처로 달려간 데이빗에게 스웰던이 공을 던졌고, 데이빗은 스웰던에게 다시 공을 차 주었다.

퍼어어엉!

아스널 선수들을 피해 스웰던이 길게 공을 걷어 냈다.

높다랗게 뜬 공이 아스널의 골대 앞까지 날아갔다.

쿵. 쿵. 쿵. 쿵. 쿵. 쿵.

“오- 오오! 오- 오오!”

홈 관중들의 응원이 계속 레드 블레이트를 흔드는 동안, 메르테자커가 공을 받았다.

투욱!

그는 빠르게 산티카솔라에게 공을 패스했다.

와락!

그때 박상민이 느닷없이 산티카솔라의 앞을 막아섰다.

틱!

산티카솔라가 빼내려던 공이 박상민의 발에 맞고 튕겼다.

와락! 와락!

이번엔 레믹과 아르테타가 동시에 흘러나온 공을 향해 달려들었다.

콰악! 콰다당!

힘에서는 레믹이 밀렸다. 대신 레믹은 넘어지면서도 악착같이 공을 발로 건드렸다.

“와아-!”

공을 잡은 것은 박상민이었다.

박상민은 그 공을 바로 왼편에서 손을 든 꼼빠니에게 연결했다.

퍼엉!

“예에-!”

툭툭!

꼼빠니가 페널티 에어리어 왼쪽을 파고들었고, 베예린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

투욱!

꼼빠니가 데이빗에게 공을 넘겼고, 데이빗이 바로 근처에 있는 레믹에게 패스했다.

투욱!

레믹은 아스널의 수비수들 틈을 뚫는 것처럼 공을 툭 찔러 넣었다.

“와아아-!”

아스널의 수비수들 뒤에 서 있던 꼼빠니가 단박에 뛰어들었고,

화아악!

체흐가 공을 향해 몸을 날렸다.

터억! 콰다당!

“우- 와아!”

체흐가 공을 잡는 순간에 꼼빠니가 앞으로 고꾸라졌다.

분명 손에 발이 걸린 것처럼 보였다.

삐이이익!

주심이 휘슬을 불고 달려가서 오른손을 쭉 뻗었다.

“예에에에에-!”

『주심, 페널티킥을 선언했습니다! 유니온 시티! 페널티킥을 만들어 냈습니다!』

레믹이 달려가 꼼빠니의 머리를 끌어안았고, 동료들이 다가가 등을 두드려 주었다.

아스널 선수들이 주심에게 항의하는 동안, 공을 바닥에 내려놓은 레믹이 고개를 돌려 정지우를 보았다.

‘급할 거 없어. 대신 단숨에 차!’

아스널의 체흐는 말할 것 없이 영국 리그에서 손꼽는 실력의 골키퍼였다. 그가 가진 이름값과 중압감이라면 페널티킥을 차는 레믹을 짓누르기에 충분했다.

“후!”

숨을 뱉어 낸 레믹이 공을 향해 시선을 준 채 주심의 신호를 기다렸다.

페널티 에어리어 라인에 아스널과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늘어서서 달려들 자세를 갖추고 레믹을 바라보았다.

얼굴을 가린 관중, 고개를 돌리고 옆 눈으로 바라보는 관중들, 모두 일어나 레믹을 응원하는 스태프와 서브 선수들.

레믹의 시선을 분산시키려고, 골대 뒤편에 있던 아스널 팬들이 미친 사람들처럼 좌우로 몸을 흔들거나 팔을 이리저리 휘두를 때였다.

삐이익!

주심이 휘슬을 불었다.

정지우는 체흐의 움직임만 보았다.

그는 정지우를 흉내 내는 것처럼 레믹의 왼편에 좀 더 공간을 두었다.

그쪽으로 공이 날아오길 기다리는 눈치였다.

주춤주춤.

레믹이 공을 향해 속도 변화를 주며 달려갔다.

‘왼쪽으로 강하게 차! 무조건 세게!’

퍼어엉!

레믹은 아스널 골대의 오른쪽을 노렸다.

화아아악!

체흐가 기다란 몸을 좀 더 늘이는 것처럼 공을 향해 몸을 날렸고,

터억!

그의 손에 맞은 공이 앞으로 튀어나왔다.

누군가의 외마디 비명이 울려 나올 때,

와락! 와라락!

왼편으로 몸이 기울어 버린 레믹의 옆으로 박상민이 튀어 나갔다. 그의 옆에서 아르테타, 메르테자커, 코시엘니가 동시에 달려들어서 넷이 공과 함께 뒤엉켰다.

“우아아-!”

틱!

누구의 발에 맞았는지 모른다.

공이 골대로 향했고, 몸을 일으킨 체흐가 삽시간에 발을 뻗었다.

티잉!

그의 발에 걸린 공이 페널티 에어리어 라인으로 흘러나왔다.

『데니 슛!』

데니가 달려들어 슈팅을 날렸는데 이번에는 수비수의 몸에 맞고 튕겨 나왔다.

“우-!”

수비수의 손에 맞았다고 데니가 제 팔을 두드렸는데 주심은 고개를 저었다.

퍼어어엉!

마음 급한 코시엘니가 기다랗게 공을 차 내는 것으로 결정적인 득점 찬스가 끝났다.

“라파엘! 지루 잡아! 지루!”

너무 몰렸다.

아스널 진영에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너무 몰려 있어서 당장 2선이 휑한 느낌이었다.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면 반드시 위기가 온다.

정지우가 고함을 버럭버럭 지르자, 라파엘이 지루를 향해 뛰었다.

“무둔바! 위치! 위치!”

정지우가 손짓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무둔바가 빠르게 이동했다.

높다랗게 솟구쳤다가 아래로 떨어지는 공을 옥슬레이드 채임벌린이 머리로 따냈다.

티잉!

옥슬레이드 채임벌린이 헤더한 공을 받은 선수는 외질이었다. 오른쪽 가슴으로 공의 방향을 바꾼 외질이 골대를 향해 일직선으로 달려왔다.

그의 뒤에서 아스널 선수들과 데이빗과 카알, 박상민, 신준석이 달려오고 있었다.

투우우욱!

외질은 정지우의 오른쪽 구석을 향해 공을 깊게 찔렀다.

“예아아-!”

아스널 원정 팬들이 커다랗게 함성을 질렀다.

오른쪽의 빈 곳을 파고든 공을 향해 산체스가 악착같이 달려들었다.

신준석은 아직 돌아오지 못했다.

아무리 위치를 지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해도 달려오는 산체스를 멍하니 보고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무둔바가 달려 나갔다. 덩치가 큰 그가 겅중겅중 달려서 산체스를 막아섰다.

몸싸움을 통해 위치를 지키는 건 최고지만, 몸의 중심이 너무 높았다.

툭툭! 투욱!

그래서 두 번 공을 밀고 오다가 느닷없이 방향을 바꾼 산체스의 동작에 완벽하게 속고 말았다.

“예아아아아-!”

무둔바를 제친 산체스가 골대를 향해 똑바로 달려왔다.

“헉헉! 헉헉!”

박상민과 데이빗이 페널티 에어리어 라인에 도착하는 순간이었다.

정지우는 오른쪽 골대를 1.5미터가량 비워 두고 자세를 잔뜩 낮췄다.

산체스! 슛을 해! 슛! 오른쪽을 노리기로 했잖아!

정지우의 오른쪽 앞 7미터쯤에 산체스가 있었다.

“내가 맡을게!”

신준석의 고함이 들렸다.

그와 동시에 아스널과 유니온 시티 선수들이 페널티 에어리어 안쪽으로 몰려들었고, 산체스의 뒤를 무둔바가 바짝 쫓았다.

동료들이 너무 급하게 뛰어들고 있었다.

라파엘과 무둔바가 라인을 지켜 줘야 하는데, 하필이면 두 사람 모두 마크를 위해 자리를 비웠다.

선수들이 뒤엉켜 있는 순간에,

퍼어엉!

산체스가 정지우의 왼쪽을 향해 강하게 패스했다.

정지우가 빠르게 각도를 죽이며 움직인 직후였다.

공을 향해 달려드는 옥슬레이드 채임벌린이 보였다.

고작 7미터 앞이었다.

후욱! 후욱!

정지우는 그의 발과 공만 보았다.

파악! 파악!

파란 잔디를 찍으며 달려오던 스터드.

조명을 받아 여러 개의 그림자를 달고 굴러오는 공.

파아악!

마침내 그의 왼발이 잔디를 깊게 밟으며 몸이 기울었다.

‘왼쪽!’

봤다! 봤으니까 이건 막는다!

퍼어엉!

화아아악!

정지우가 왼편으로 몸을 날렸고,

터억!

손에 맞은 공이 앞으로 튕겨 나갔다.

골라인 바깥으로 보내지 못했다.

워낙 강한 공이라 자칫하면 골대로 밀고 들어올까 봐 일단 앞으로 걷어 냈다.

털썩!

그라운드에 떨어진 상태에서 겨우 상체만 들었을 때 아르테타가 다시 슈팅을 날렸다.

퍼엉!

오른쪽이었다.

공은 벌써 눈앞을 지나고 있었다.

왼팔로 그라운드를 짚은 정지우가 오른손을 크게 휘둘렀다.

티익!

그리고 정지우의 손에 걸린 공이 오른쪽 앞으로 튀어 나갔다.

그 순간,

와락! 턱!

골키퍼 에어리어에서 골대를 향해 뛰어들던 카알의 가슴에 공이 맞았고, 그대로 골대 안으로 떨어졌다.

삐이익!

주심이 휘슬을 불며 중앙선을 가리켰다.

“예에에에에에-!”

“우-!”

홈 관중들이 머리를 감싸 쥐며 탄성을 터트렸을 때, 정지우는 그라운드에서 몸을 일으켰다.

골대 앞을 지켜야 할 두 수비수가 없었고, 무엇보다 공을 바깥으로 쳐 내지 못한 것이 가장 아팠다.

왼쪽이고 오른쪽이고 골대 기둥과 공간이 너무 많아서 걷어 낼 수밖에 없었고, 다음으로 아스널의 슈팅이 바닥에 스치듯 깔려 와서 밖으로 내보내기가 까다로웠다.

숨이 턱턱 막히는 느낌이었는데, 정지우는 카알에게 다가갔다. 그는 참담한 표정으로 그라운드를 바라보고 있었다.

“헤이! 카알!”

정지우는 팔을 뻗어 카알의 목을 감았다.

“설마 이런 거로 기죽거나 하는 거 아니지?”

기가 죽은 게 아니라 아예 세상을 잃은 얼굴이었다.

“진 건 아니잖아. 얼른 뛰자! 한 골이라도 넣어서 이겨 줘야지.”

카알이 전혀 풀지 못한 얼굴로 정지우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피식.

정지우는 카알을 감쌌던 손을 풀고 그의 뒤통수를 툭 때려 주었다.

『아! 유니온 시티와 정지우 선수의 리그 무실점 기록이 깨졌습니다. 카알이 오른쪽 골포스트를 지키기 위해서였던 것 같은데, 너무 중앙 쪽, 그러니까 정지우 쪽으로 들어간 것으로 보입니다.』

『정지우 선수가 오히려 카알 선수를 다독이고 있는 모양인데요. 엄청난 선방 뒤에 골이 나와서 많이 아쉽네요. 팀 전체의 사기가 꺾이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정지우는 오히려 덤덤하게 행동하고 있는데 동료들의 표정이 풀리지 않고 있었다.

장진모는 세수하는 것처럼 얼굴을 쓸었다.

쓰러진 상태에서도 공을 걷어 낸 정지우다. 그런 상태에서 동료의 가슴에 맞고 공이 들어갔으니 저 속이 오죽할까.

어쩌면 수비수가 아니어서 저런 실수가 있었을 거란 생각도 들었다.

“저런 건 세상 누가 와도 못 막는다는 거 알지? 기운 내!”

혼잣말을 뱉은 장진모가 인상을 찌푸리며 시계를 보았다.

조금 있으면 해가 뜰 시간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정지우 선수를 위로해 주고 싶습니다. 사실 동료 선수의 가슴에 맞고 들어가는 공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죠! 정지우 선수! 지금까지도 정말 잘했습니다! 그리고 프리미어리그는 아직 서른 게임 이상 남았거든요! 남은 경기! 또 막아 주면 됩니다!』

TV에서 캐스터와 해설자가 떠드는 소리를 들으며 장진모는 입술에 힘을 꾹 주었다.

무언가 핑계가 필요했다. 영국에 가서 정지우와 박용근을 만날 수 있는 핑계 말이다.

마틴은 팔짱을 낀 자세에서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카알을 교체해야 하는가를 묻고 싶었다.

박용근은 덤덤한 얼굴이었다.

‘그래. 저런 실수를 했다고 선수를 당장 교체하는 것도 잔인한 일이다.’

마틴은 어쩐지 가지고 있던 멋진 도자기 주전자에 금이 쫙 가 버린 느낌이었다.

아쉬웠다. 그러나 솔직히 언제까지 무실점이 이어지리라고 기대할 수만은 없는 거였다.

고맙다. 이런 경기를 보여 주는 팀의 감독이라는 것이.

감사한다. 정지우라는 선수가 팀의 골키퍼라는 것을.

이제는 마틴이 감독으로서 선수들에게 힘을 실어 줘야 할 타이밍이었다.

“아스너- 얼! 아스너- 얼!”

우렁찬 아스널 원정 팬들의 함성을 온몸으로 견디며 마틴은 선수들을 돌아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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