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204화 (204/262)

제3장. Ji가 얼마나 위대한 선수인지를. (1)

무실점 경기와 연달아 이어지는 승리로 유니온 시티 선수들 간의 믿음과 신뢰는 영국의 가을이 짙어지는 것처럼 단단하게 굳어지고 있었다.

물론 선수, 스태프, 관중들이 가장 먼저 손꼽는 가장 큰 원동력은 당연하게 정지우였다.

그러나 그 외에도 정지우가 뛰지 못한 두 경기에서 얀센이 보여 준 팀에 대한 헌신, 데이빗이 자존심을 내던지고 도움을 청한 최선을 다한 모습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었다.

데이빗과의 훈련을 지켜본 마틴은 다음 날, 정지우를 그의 사무실로 불렀다.

“자리에 앉아.”

그는 늘 하던 대로 정지우에게 책상 앞의 의자를 가리켰다.

“나를 비롯한 스태프들은 전술을 구상하면서 항상 선수들이 충분히 이해하고 수행해 줄 것이라 기대하지. 그런 면에서 어제 자네가 보여 준 훈련은 나와 스태프들이 무엇을 놓치고 있는지를 깨닫게 해 준 좋은 교육이었다.”

“그렇게까지 엄청난 목적은 아니었습니다.”

픽 하고 웃은 마틴이 책상에 두 손을 올리고 깍지를 끼웠다.

“자네는 물론 그랬을 테지. 그건 그렇고, 금요일에 있을 웨스트햄과의 캐피털 원 컵에는 얀센이나 기예르모, 둘 중 한 사람을 내보낼 생각이다.”

정지우의 얼굴을 들여다본 마틴이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오해해서는 곤란해. 우리는 캐피털 원 컵까지 집중할 여력이 없고, 또 이런 기회를 이용해 서브 선수들에게 기회를 주겠다는 의미이니까. 그들도 자네처럼 빛을 발할 기회가 있어야 하지 않나?”

정지우가 먼저 웃었고, 마틴이 따라 웃었다.

“다음 화요일 우리의 상대가 아스널이다. 경기가 진행될수록 우리를 분석한 전술들이 나오고 있어. 필드 선수들에게도 휴식이 필요한 상황이다.”

“충분히 이해합니다. 그렇다면 그날은 관중석에 있어도 되겠군요?”

정지우의 농담에 마틴이 재미있다는 것처럼 웃었다.

“얀센과 기예르모에게 맡겨 주자고.”

마틴이 넉넉한 표정으로 정지우에게 말을 건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쥬피터 회장이 요즘 나에게 새로운 애정을 느끼는 모양이다. 면담 요청이 굉장히 잦거든. 전에는 불쑥불쑥 잘도 찾아오던 양반인데.”

정지우가 일어서는 동안, 마틴은 옷걸이에 걸어 두었던 재킷을 집어 들었다.

“그곳으로 부를 때마다 가슴이 조마조마해. 이 양반이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그러나 싶어서.”

가슴에 손을 얹고 과장된 표정을 짓는 마틴을 보며 이번엔 정지우가 웃음을 터트렸다.

“이봐, Ji. 다른 선수들에게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조언인데 가끔은 밖을 좀 돌아봐. 하루쯤 도시락 들고 공원에도 가 보고.”

“그렇게 해 보죠.”

사무실을 나선 뒤에 정지우는 라커룸으로 향했고, 마틴은 주차장으로 움직였다.

***

마틴이 아는 쥬피터는 ‘야비한 구석은 있지만, 악한 사람은 아니다.’ 정도였다.

그는 단지 보통 사람보다 돈에 좀 더 집착하는 편이었는데, 솔직히 마틴은 그런 그를 이해하는 쪽이었다.

구단주란 원래 늘 돈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자리이고, 특히 오래도록 2부 리그에서 팀을 꾸려 온 쥬피터라면 당연히 그럴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도 했다.

아무튼, 2부 리그에서 오래도록 팀을 꾸리면서 당연히 돈에 집착하게 된 구단주 쥬피터가 마틴을 맞았다.

“이리 앉게, 마틴.”

그는 항상 하던 것처럼 홍차를 마틴의 앞에 놓아 주었다.

“그렇지 않아도 드릴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래? 그게 뭔가?”

마틴은 고개를 기울이며 쥬피터를 보았다.

대화에 집중하지 못하는 그를 보는 것이 얼마 만인지 모른다.

“무슨 일입니까?”

“이보게, 마틴.”

게다가 쥬피터는 마틴이 던진 미끼를 냅다 무는, 평소라면 전혀 보이지 않을 배고픈 물고기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의논할 것이 있네. 그전에 내가 지금부터 하는 말을 자네 판단만으로 외부에 알리지 않았으면 싶네. 그 부탁을 들어줄 수 있겠나?”

마틴은 잠시 고민했다.

사람을 불러 놓고 들은 말을 외부에 알리지 말라는 청을 먼저 한다는 건 이야기가 불법적이거나, 혹은 다른 이의 치부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그런 말을 하는 사람이 쥬피터라면…….

“이보게, 마틴.”

오랜 세월 손발을 맞춰 온 변호사까지 있는 쥬피터가 마틴을 불렀다. 간절함이 땀처럼 송골송골 올라온 얼굴이었다.

“그렇게 하지요. 무슨 일입니까?”

“후우.”

고해성사를 하는 듯한 표정으로 쥬피터가 입을 열었다.

분명 무릎을 꿇고도 자신이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우길 사람이 말이다.

“얼마 전부터 투자를 논의한다고 하지 않았나?”

늙은 구단주의 고해성사가 시작되었다.

“사실 이미 부분 투자를 받은 상태였네. 오해하지 말게. 그 돈은 대부분 Sang을 비롯한 다른 선수들의 연봉 계약에 사용했고, 개인적으로 사용했다거나 부정하게 사용하지는 않았으니까.”

역시나 돈 문제였구나 싶었지만, 마틴은 잠자코 본론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본 계약만 남았지. 그 계약이 성사된다면 우리 유니온 시티는 새롭게 단장한 레드 블레이트에서 경기를 가질 수 있고, 또 그동안 바라보지 못했던 선수들을 영입할 수 있는 데다, 나아가서…….”

“회장님.”

“흠, 미안하네. 내가 좀 흥분했어. 그러니까 본 계약을 앞두고 그들이 좀 불편한 제안을 해 온 것이 문제가 됐네. 먼저 우리에게 투자한 곳이…….”

쥬피터가 커다랗게 숨을 들이마신 후에 뱉듯이 말을 이었다.

“MENI일세.”

마틴은 기가 막힌 나머지 바람 빠지는 것처럼 웃고 말았다.

회사 이름을 듣는 순간, 뒷이야기는 아예 들을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그들의 타깃이 Ji입니까?”

“그러네.”

“이적을 시키겠다던가요?”

쥬피터는 입을 다문 채 마틴의 눈치를 살폈다.

“그들의 조건이 주로 그런 것 아니었습니까? 2년에 한 번씩 무조건 그들이 지정하는 팀으로 이적하는 조건, 그런데 Ji의 경우는 그들과 계약 자체를 한 적이 없는데요?”

“그게 말일세.”

“간단하고 명료하게 말해 주십시오. 시간이 흐를수록 뒷말을 듣기 싫어서라도 이 방을 나서고 싶으니까요.”

“흠.”

쥬피터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그들이 두 명의 골키퍼를 키웠다고 하더군. 그동안 엄청나게 공을 들여 몸값을 높여 놓은 참에 Ji가 문제를 일으켰다고.”

마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자 쥬피터의 말이 좀 더 빠르게 튀어나왔다.

“자신들이 준비하는 경기에 Ji를 연달아 내보내 달라고 했어. 조건은 그게 전부네.”

“거절하면 어떻게 됩니까?”

“받았던 돈의 두 배를 토해 내야 하지.”

“그럼 그렇게 하는 게 좋겠습니다.”

“선수들에게 연봉을 원래대로 돌리고, 지급한 돈을 돌려달라고 하란 말인가?”

“그 정도는 구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우리 팀 성적이라면 단기 차입도 가능할 것 같구요?”

“이보게, 마틴.”

어깨를 축 늘어트린 쥬피터가 혼잣말처럼 말을 꺼냈다.

“투자가 무산되면 영국축구협회의 재정 규정을 어긴 꼴이 돼서 우리는 승점을 빼앗기게 돼.”

“투자가 무산되는 것은 그에 해당되지 않는 것으로 압니다.”

“흐음! 그게 말이지, 투자가 무산되면 앞에서 받았던 금액이 부채로 회계에 잡히게 되어 있다네. 바로 빚이 되지.”

치미는 화를 가라앉히느라 마틴은 잠시 시간을 끌었다.

“그들이 진정으로 원하는 게 뭡니까? 돌리지 말고, 바로 말씀하셨으면 싶습니다.”

“유럽 골키퍼가 지켜 낸 경기에서 동양인 골키퍼가 실점하는 것이지.”

마틴의 볼이 씰룩했는데 쥬피터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이적을 준비했던 참인데, Ji가 모든 것을 망쳤다고 하더군.”

“그래서 우리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했던 건가요? Ji의 성적을 보면서 이런 더러운 계획을 실행하려고?”

마틴의 매서운 눈빛을 피하는 것처럼 쥬피터가 마른침을 삼켰다.

“레알 마드리드의 케일러 나바스를 봐. 그 역시 실점률이 0.29밖에 안 되지만, 회장단과 광고주들은 그를 데 헤아로 바꾸려 애쓰지 않나?”

“더러운 인종차별주의자 같은 말씀을 아직도 할 줄 몰랐습니다.”

“돈을 말하는 걸세! 돈! 돈!”

“Ji는 만년 2부 리그에서 맴돌던 우리를 프리미어리그로 이끌었고, 전 세계가 지켜보는 이 리그의 선두에 우리를 올려놓았습니다! 레드 블레이트에서 보셨을 거 아닙니까?”

마틴이 검지로 허공을 콕콕 찔러 가며 으르렁댔다.

“스태프, 선수들, 그리고 관중들 모두 Ji가 얼마나 위대한 선수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상한 계약 때문에 그를 무너트리자구요?”

울분을 삼키는 것처럼 침을 삼킨 마틴이 쥬피터의 앞으로 고개를 디밀었다.

“헌신과 봉사에 대한 대가는 존경과 대우로 갚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유니온 시티를 지금껏 유지해 온 것이 회장님의 능력만으로 가능했다고 생각하십니까?”

쥬피터는 억울함, 부끄러움을 잘 버무려 담은 눈빛으로 마틴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돈을 원하는 거라면, 축구팀이 아니라 사업체를 찾아보십시오. 오늘 대화는 없었던 것으로 하겠습니다.”

마틴의 말이 떨어지고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자네도 할 말이 있었다고 하지 않았나?”

침묵을 깬 것은 쥬피터였다.

그는 대화 초반에 마틴이 했던 말을 꺼내 들고서 마틴의 관심을 붙잡으려 애썼다.

“무슨 일인가?”

뻔뻔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한 쥬피터의 얼굴을 보며 마틴은 잠시 말이 없었다.

“이보게, 마틴.”

“웨스트햄의 경기에 기예르모를 선발로 내세울 생각입니다.”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말게.”

“리그에 집중할 생각이었는데, 지금 보니 제 결정이 확실히 옳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경고합니다. 만약 Ji에 대해 그 어떤 불리한 처우가 생길 경우, 나는 언제고 회장님의 적이 될 수 있습니다.”

“후우.”

쥬피터가 커다랗게 한숨을 토해 냈다. 마틴의 말에 어지간히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

웨스트햄과의 캐피털 원 컵 예선은 1 대 2 패배로 끝났다.

선발 골키퍼는 기예르모였다.

최선을 다한 경기였다.

그러나 서브 선수들로 구성된 수비진의 실수가 잦았고, 그 역시 한 차례 결정적인 판단 미스가 있었다.

비록 패배했지만, 관중들이 열심히 뛰어 준 선수들을 기립박수로 격려했다.

그들 역시 알고 있어서였다. 지금은 리그 경기에 집중할 때라는 것을 말이다.

데이지와 유니온 시티 근교의 공원에 다녀온 하루를 제외하면 정지우는 내내 훈련에 매달렸다.

표정이 어두워진 마틴이 오후에 자리를 비우는 것을 제외하면 유니온 시티 팀 분위기는 여전히 나쁘지 않았다.

일요일 저녁을 먹은 뒤에 신준석이 찾아왔다.

“야! 형이 오면 좀……! 안녕하세요? 감독님! 사모님? 저 왔습니다.”

들어서던 녀석의 태도가 어찌나 빠르게 바뀌는지 전은주마저 실없이 웃고 말았다.

“너희 또 나만 빼고 영상 보는 거지? 기다리라니까.”

“얼른 와.”

박상민이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두드렸다.

“준석아, 나 처음 축구할 때 늘 맨유, 첼시, 아스널, 뭐 이런 팀을 떠올렸잖냐. 그런데 내일모레 아스널과 경기를 뛴다고 생각하니까 가슴이 막 두근거린다.”

“너라면 그럴 만도 하지. 어디 경기를 한번 봐줄까나?”

신준석의 넉살이 또 한 번 실없는 웃음을 만들어 냈다.

FA컵 유니온 시티와의 경기였다.

정지우가 처음으로 두각을 나타낸 경기.

박상민은 물론이고, 웃고 떠들던 신준석까지 막상 영상을 보기 시작하면서 입을 열지 못했다.

전반과 후반 경기가 모두 끝났다.

“어후.”

그리고 신준석이 토해 낸 첫마디는 탄식 같은 감탄이었다.

“우리 팀이 지금보다 확실히 좀 어설펐구나. 후우! 정말 저 경기에서 이겼다는 게 보고 나서도 믿기지 않는다. 아스널이 칼을 많이 갈았겠는데?”

“난 중앙 쪽 패스에 질린다. 저렇게 짧고 빠르게 패스하는 팀은 어디를 잘라 들어가야 할지도 모르겠어.”

박용근이 있는 자리였다.

그러나 이렇게 정지우와 동기들이 느낀 점을 먼저 털어놓고 그에 대해 함께 의논했던 터라, 신준석과 박상민의 말이 나쁘게 들리지 않았다.

“감독님, 저런 팀을 상대로도 스웰던이나 준석이가 위로 치고 올라와도 될까요? 뚫리면 답이 없겠는데요?”

박상민이 탁자에 놓아둔 전술 용지에 4-2-3-1의 포메이션을 그리고 연필로 선을 쭉쭉 이었다.

“그렇다고 맥슨이 내려와도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구요. 이 부분에서 패스 줄기를 차단하지 않으면 경기가 내내 어려울 것 같은데요?”

박상민이 그리는 그림을 박용근이 멍하니 바라보았다.

‘왜 이러시지?’

이유는 몰라도 지금의 모습이 무얼 의미하는지 정지우는 알았다. 박용근은 분명 무언가 다른 생각에 빠져서 박상민의 질문에 집중하지 못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