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98화 (198/262)

제9장. 정지우를 믿었다. (2)

왼발을 구부린 자세로 솟구친 얀센은 염려했던 대로 그릴리쉬와 제대로 부딪쳤다.

“우-!”

관중들이 놀란 소리를 토해 냈다.

그가 그라운드에 처박히는 것처럼 머리부터 떨어졌기 때문이었다. 바닥에 쓰러진 상태에서도 얀센은 공을 끌어안고 있었다.

삑! 삑!

주심이 유니온 시티의 벤치로 손짓을 했고, 팀 닥터와 스태프가 가방을 들고서 뛰어들었다.

너무 급했다.

이런 코너킥은 수비수에게 맡기고 얀센은 상대 팀 공격수의 동선을 살피는 게 더 좋았다.

그래도, 그렇더라도 마지막까지 공을 놓치지 않은 얀센의 모습이 정지우의 피를 끓게 하고 있었다.

짝짝짝짝짝짝짝짝!

잠시 후 얀센이 천천히 일어섰고, 관중들이 일제히 그에게 박수를 보내 주었다.

데이지는 축구만큼이나 흥미롭게 정지우를 살폈다.

한눈에 보기에도 정지우는 지금 옆에 누가 앉았는지조차 생각 못하는 모습이었다.

서운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오히려 눈에 뭐가 씌웠는지 경기에 집중하는 정지우의 모습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이 남자에게 축구는 인생의 전부고, 삶이다.

그에게 축구와 데이지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는 건, 데이지에게 의사와 정지우 중 하나를 택하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 요구인 거다.

축구 하는 남자가 좋아진 거지, 좋아하던 남자가 축구를 시작한 건 아니니까.

그라운드를 향해 빛나는 눈, 결정적인 장면이면 움찔거리는 상체와 어깨, 그리고 골대로 공이 날아갈 때마다 이를 악물어서 씰룩이는 볼.

언제고 어금니가 깨진 건 아닌지 검사를 받게 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데이지는 혼자서 생긋 웃었다.

야구 선수 중에 투수들은 실제로 어금니가 가로로 부서진다. 공을 던질 때 워낙 악물기 때문이다.

그런데 경기를 지켜보는 골키퍼의 이를 걱정할 정도면 실제로 경기에 나섰을 때는, 그것도 엄청나게 중요한 경기에서는 오죽하겠나.

데이지가 혼자 웃으며 고개를 돌릴 때였다.

사람이 옆에서 누군가 바라보면 시선을 느낀다.

그래서 슬쩍 돌아보았다가 전은주와 시선이 마주쳤다.

“지우 때문에 서운했다면 내가 대신 사과할게요.”

한국말은 모른다.

그러나 눈짓으로 정지우를 가리키며 지어 낸 표정에서 그녀의 말뜻을 알 수 있었다.

데이지는 활짝 웃어 주었다.

정지우가 어머니라고 여기는 분이다. 기사에 짧게 나왔지만, 정지우가 일본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곤란해졌음에도 흔들림 없이 그를 믿고 지켜 준 사람이었다.

비슷한 느낌으로 미소 지은 전은주가 그라운드로 시선을 돌렸다.

참 괜찮다, 이 사람들.

데이지가 바라본 그라운드에서 얀센이 공을 차고 있었다.

유니온 시티는 이상하게 경기가 풀리지 않았다.

될 듯 될 듯한데, 어쩐지 나사 하나가 달아난 톱니바퀴처럼 중간쯤이 헛돌았다.

레믹이 평소보다 열심히 뛰었고, 동료들 전체가 그의 리듬에 맞춰 주고 있는데도 그랬다.

정지우는 팔짱을 낀 자세에서 오른손을 세워 입술 주변을 만졌다.

뭐가 문제지?

단순하게 애스턴 빌라가 잘하고 있어서인가?

그렇다면 애스턴 빌라보다 실력이 뛰어난 팀을 만나면 이거보다 더 삐꺽거리게 된다는 말인데?

한정된 선수가 전부인 유니온 시티는 다른 팀이 분석해서 대책을 세우기 좋았다.

정지우는 마틴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박상민을 고립시키는 팀에 대비해야 한다는 조언 말이다.

공은 중앙선을 넘나들며 삽시간에 양쪽 골대를 오갔다.

퍼어엉!

“우-!”

결정적인 기회가 어렵자 레믹이 골대를 높다랗게 넘어가는 중거리 슛을 날렸다. 그럴 정도로 경기가 풀리지 않는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애스턴 빌라도 비슷한 느낌이었다.

여기에서 리듬을 먼저 찾는 팀이, 그래서 상대 팀의 템포를 뺏어 오는 팀이 결정적인 기회를 잡는다.

무엇보다 이런 경기에서 리듬을 찾을 방법이 필요했다.

『애스턴 빌라가 중앙에서 다시 공을 돌리고 있습니다!』

『급하게 치고받기보다는 다시 점유율을 바탕으로 공격을 전개할 모양이네요. 괜찮아요. 너무 급하게 오갔기 때문에 전열을 가다듬을 필요도 있어요.』

『어떻습니까? 초반에 결정적인 장면을 놓친 것 말고는 양 팀 모두 제대로 된 기회를 못 만들고 있는데요. 벤치에서도 교체라든가, 무언가 방법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요?』

경기가 막 시작되었을 때처럼 애스턴 빌라가 공을 돌렸고, 레믹과 맥슨, 데니가 달려들었다가 물러나곤 했다.

『유니온 시티는 공을 뿌려 줄 선수가 필요해 보이네요. 데이빗과 카알이 좀 더 공격적인 모습을 보일 필요도 있어요.』

『이럴 때 박상민 선수를 투입하는 건 어떨까요?』

『그렇죠. 박상민 선수라면 그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것 같은데요.』

정지우는 맥슨의 움직임을 유심히 보았다.

최전방 공격수 레믹의 바로 뒤가 맥슨이다. 그리고 맥슨의 뒤에는 데이빗과 카알이 있는 거다.

이 셋이 삼각형을 제대로 그리며 유기적으로 움직여 줘야 하는데 오늘 경기는 그렇지 못했다.

데이빗과 카알이 올라갈 때도 그렇다.

맥슨이 아래로 내려와서 역삼각형을 그려 줘야 하는데 지금은 셋이 일자로 서 있는 꼴이었다.

‘이거였구나. 상민이가 없을 때를 대비해야 한다는 거. 강팀이 상민이를 꽁꽁 에워싸면 꼭 이렇겠지?’

정답을 알아낸 것 같았다.

여유가 생기자 그제야 옆에 데이지가 있다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정지우는 슬쩍 시선을 돌렸다.

“뭔가 알아냈어요?”

“예?”

“무섭게 노려보다가 지금은 뭔가 알 것 같다는 얼굴이잖아요. 뭐예요?”

혼자 던져 둔 게 미안해서 정지우는 조금 전 느꼈던 것을 검지로 가리켜 가며 설명해 주었다.

“보세요. 지금 데이빗이 올라가면서 삼각형이 틀어졌죠? 맥슨과 카알이 포지션을 옮겨서 공을 받아 줄 자리로 움직였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거죠.”

“저런 것까지 생각하면서 하는 거였어요?”

데이지가 질문 같은 감탄사를 건넸을 때 ‘와아아-!’ 하는 함성이 느닷없이 터져 나왔다.

『데니! 애스턴 빌라의 오른쪽을 파고듭니다! 주춤거리는 데니! 카알에게!』

애스턴 빌라의 오른쪽까지 깊숙하게 들어갔던 데니가 뒤를 받쳐 주던 카알에게 공을 빼 주었다.

퍼어어엉!

카알은 그 공을 그대로 애스턴 빌라의 골대를 향해 넘겼다.

레믹과 맥슨, 꼼빠니가 수비수들과 뒤엉킨 채로 몸을 띄웠다.

터어엉!

공은 꼼빠니의 머리에 맞았다.

“우-!”

그리고 왼쪽 골포스트를 아슬아슬하게 빗겨서 밖으로 나갔다.

관중들이 탄식을 쏟아 내며 머리를 감싸 쥐었고, 꼼빠니는 애꿎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쁘지 않은 공격이었다.

덕분에 또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박상민을 묶으려는 팀에게는 지금처럼 빠른 공격이 가장 효율적이라는 거였다.

이어서 애스턴 빌라의 두 번에 걸친 공격이 있었다.

한 번은 골대에서 멀찍이 벗어난 자리에서 공이 밖으로 나갔고, 두 번째는 얀센이 편안하게 잡으며 막아 냈다.

삑! 삐이익!

전반이 그렇게 끝났다.

땀을 흘리는 동료들이 통로를 향해 걸었고, 서브 선수들이 몸을 풀기 위해 그라운드로 나섰다.

얀센은 가장 뒤에서 걸어왔다.

그는 분명하게 정지우를 향해 눈짓을 건넨 후에 통로로 들어섰다.

“어떤 의미예요?”

정지우에게서 동선을 설명받은 데이지는 점점 더 축구에 깊숙이 빠져드는 모양이었다.

“아까 애스턴 빌라의 프리킥이 있었잖아요. 이렇게 네 명이 벽을 만들었으니까.”

정지우는 그때 상황에서 왜 오른쪽보다 왼쪽을 택했는지에 대해 손가락을 거꾸로 세워 가며 설명해 주었다.

“오른발로 벽을 넘기기는 어려우니까 왼쪽을 노리거나, 아니면 아까처럼 옆으로 공을 빼 줄 확률이 높았던 거지요.”

“그 짧은 순간에 그 모든 걸 계산하는 거예요?”

“난 그거보다 수술실에서 움직이는 당신이 더 놀랍던데요? 갑자기 생기는 상황에 모두 대처했잖아요. 나라면 아마 아무것도 못했을 거예요.”

데이지가 기분 좋은 미소를 보여 주었다.

“그럼 이렇게 경기가 안 풀릴 땐 어떻게 해요? 후반에 선수를 교체하나요?”

“글쎄요. 그게 가장 효과적이고 확실한 방법이긴 한데, 교체 선수의 컨디션이나 교체에 따른 팀 전체의 리듬도 생각해야 하니까 지금은 쉽지 않겠는데요.”

데이지가 심오한 표정으로 정지우를 바라볼 때였다.

통로에서 클락이 나오더니 일회용 종이컵에 담긴 음료수와 간단한 간식 종류를 건네주었다.

“어머니!”

“나는 괜찮아. 둘이서 먹어.”

“전 원래 과자 잘 안 먹잖아요.”

이리저리 권하다 결국 데이지의 앞에 상자를 두게 되었다.

“얼른 좀 들어요.”

“감사합니다.”

한국말로 권했고, 영어로 답했다.

이 정도는 굳이 통역이 필요 없는 상황이었다.

몸을 풀던 박상민이 벤치로 돌아왔다.

벤치의 가장 뒷자리에서 몸을 돌려 서면 바로 정지우가 앉은 자리다.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세요?”

박상민이 그동안 배웠던 영어를 총동원해서 어색하게 말을 걸었다.

데이지가 빠르게 정지우를 바라보았다.

“전에 릴리 병실에서 봤을 거예요. 기억나요?”

“미안해서 어쩌죠?”

“그냥 아는 척해 주면 돼요.”

데이지가 어색하게 웃고는 손을 뻗어 박상민과 악수를 나눴다.

무언가를 말하려던 박상민이 입을 다물고는 자리에 앉았다.

녀석 역시 경기가 답답했던 모양인데, 선수들끼리 그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현명한 일은 아닌 거다.

그치지 않는 응원가를 배경으로 하프 타임이 지나갔고, 선수들이 통로에서 나왔다.

『전반은 애스턴 빌라의 프리킥과 꼼빠니의 헤더를 제외하면 양 팀 모두 이렇다 할 기회를 만들어 내지 못했습니다.』

『애스턴 빌라가 유니온 시티를 단단히 연구하고 나온 것 같네요. 미드필더 다섯 명을 두어서 앞에서부터 빠른 공격을 완벽하게 차단했구요. 전반적으로 공수가 빨라질 만하면 바로 속도를 조절하고 있거든요.』

『후반에 양 팀 벤치가 어떤 대책을 보일지 기대됩니다.』

중앙선을 중심으로 양 팀 선수들이 선 상태에서 주심이 휘슬을 길게 불었다.

『유니온 시티의 공격입니다. 레믹! 맥슨에게! 맥슨! 데니에게 패스합니다!』

『전반과 달라진 건 없어 보이네요. 아무래도 70분쯤에 양 팀 벤치가 승부를 걸지 않을까 싶어요.』

데니를 향해 애스턴 빌라의 선수들이 몰려들어서 공은 다시 뒤로 움직였다.

『공을 받은 카알! 신준석에게 공을 넘깁니다!』

신준석이 공을 향해 움직이는 동안, 애스턴 빌라 선수들은 달려들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다시 카알을 통해 공이 움직일 타이밍이었다.

퍼어어어엉!

그런데 신준석이 느닷없이 공을 세게 질렀다.

“우와아-!”

애스턴 빌라의 미드필더 5명을 훌쩍 넘어간 공이 상대 진영 페널티 에어리어 왼쪽에 떨어졌다.

『유니온 시티의 기습입니다! 꼼빠니! 수비수가 없는 자리를 파고드는 꼼빠니!』

『기가 막힌 패스예요! 바로 넘겨야죠! 맥슨과 레믹이 손을 들고 있어요!』

퍼어어엉!

『꼼빠니! 골대 앞으로!』

꼼빠니가 달리는 동작에서 몸을 확 비틀며 골대를 향해 공을 날렸다.

애스턴 빌라의 리차즈가 맥슨을 끌어안다시피 붙들었고, 16번 레스콧이 레믹을 따라붙었다.

그 순간이었다.

앞으로 밀려 나간 레믹이 억지로 버티려다가,

철퍼덕!

앞으로 커다랗게 엎어졌다.

삐이익!

주심이 휘슬을 불었고, 그를 따랐던 수비수 레스콧이 양손을 머리 높이로 들고 건드리지 않았다는 제스처를 취했다.

“우와아-!”

“우-!”

『뭔가요? 주심이 선심에게 걸어가고 있습니다. 레스콧의 파울이라면 유니온 시티는 페널티킥을 얻어 냅니다.』

그때 화면에 느린 그림이 나왔다.

레스콧이 가슴으로 레믹의 등을 분명하게 밀었다.

『레믹은 공을 향해 있었거든요. 그걸 뒤에서 밀었기 때문에 파울이긴 한데, 주심과 선심이 어떤 결론을 내릴지…….』

선심에게 귀를 기울이고 있던 주심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페널티 에어리어로 걸었다.

애스턴 빌라의 레스콧이 억울하다고 양손을 벌려 가며 항변했고, 유니온 시티의 데이빗이 파울이라고 손으로 레믹을 가리켰다.

“우-!”

페널티 에어리어까지 걸어온 주심은 느닷없이 옐로카드를 꺼내서 레믹 앞에 높다랗게 들었다.

거칠게 항의하는 레믹을 데이빗과 맥슨이 끌어안았다.

승격 팀에 대한 견제야 이미 있었던 일이다.

정지우는 픽 웃으며 유니온 시티 진영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상하게 이렇게 결정적인 기회를 놓치면 반드시 그보다 더 아찔한 위기가 닥치곤 했다.

그러니 이제는 역습을 조심해야 할 때였다.

고개를 돌려 골대를 보았던 정지우가 상체를 쭉 세웠다.

저건 얀센이 실수하는 거다.

애스턴 빌라가 지금까지 미드필더를 거쳐 공격했다고 항상 그렇게 하란 법은 없는 거다.

아그본라허가 수비 라인과 동일 선상에서 눈치를 살피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더!

‘준석아! 야! 야!’

소리를 지를 수 없고, 그렇다고 관중석에서 주유소 풍선처럼 팔을 휘두를 수도 없는 거다.

‘내려가! 라인! 라인을 내리라고!’

정지우가 어떡해서든 시선을 끌기 위해 상체를 움직일 때였다.

퍼어어어엉!

애스턴 빌라의 골키퍼 구잔이 기다랗게 공을 찼다.

터엉!

중앙선을 훌쩍 넘은 공을 그릴리쉬가 머리로 받아넘겼고,

“예에에-!”

그 공이 수비 라인을 단박에 뚫고 페널티 에어리어 안쪽에 떨어졌다.

얀센이 다급한 얼굴로 허리를 낮출 때, 라파엘과 무둔바가 급하게 뛰어들고 있었다.

“우와- 아!”

아그본라허가 툭 공을 차서 라파엘을 완전히 제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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