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라운드의 지배자-197화 (197/262)

제9장. 정지우를 믿었다. (1)

호프집은 모처럼 여유로운 분위기에서 시원한 맥주와 축구를 즐기려는 손님들로 가득했다.

정지우가 명단에조차 없는 경기라 ‘정지우 타임’ 역시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들러 준 손님들이다.

한마디로 단골들만 모인 거다. 이제는 안면이 있어서 가볍게 눈인사를 하는 손님들이 많았다.

『오늘 정지우 선수는 선발 명단에서 제외되었고, 박상민 선수는 벤치에서 경기를 시작합니다. 우리 선수 중에는 신준석 선수가 유일하게 선발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부상이 심각한 건 아니라는 발표가 있었구요, 아무래도 선수 보호 차원에서 열흘간 휴식을 준 것이라고 보는 게 맞을 겁니다.』

『유니온 시티는 4-2-3-1의 포메이션을 선택했습니다. 선발 명단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최전방 공격수에 레믹.』

캐스터가 포지션과 이름을 알려 주는 순간에 레믹이 뒷짐을 진 자세로 화면 가득 잡혔다.

이어서 꼼빠니부터 수비수 신준석까지 소개가 끝난 다음이었다.

『선발 골키퍼는 얀센입니다.』

역시나 캐스터의 소개와 동시에 골키퍼 장갑을 낀 얀센의 모습이 화면에 가득 담겼다.

다음은 애스턴 빌라의 차례였다.

『애스턴 빌라는 4-5-1의 포메이션을 선택했습니다.』

전술판에 포메이션이 떠올랐고, 캐스터가 선수를 소개할 때마다 선수들 모습이 나타나 뒷짐을 진 채 화면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정지우가 안 나오니까 맥은 좀 빠지네.”

“그러게. 박상민이라도 좀 나와 주면 싶은데.”

평소와 다르게 손님들은 여유 있는 태도로 땅콩을 입에 넣고 있었다.

짝짝짝짝짝짝짝짝!

“우와아-!”

양 팀 선수들이 통로에서 나오자 관중들이 일제히 함성과 박수로 기대에 찬 응원을 보내 주었다.

정지우는 그라운드에 선 동료들을 보며 나직하게 숨을 털어 냈다.

서브로 벤치에 있는 것과는 또 달랐다.

차라리 부상이고 뭐고 경기에 뛰고 말지, 지켜보고 있으려니까 몸 안에 있는 물기가 바짝바짝 마르는 느낌이었다.

데이빗을 시작으로 동료들이 순서대로 서 있었고, 얀센은 신준석 다음으로 있었다.

동전을 던진 데이빗이 얀센에게 시선을 주었다.

얀센은 정지우가 보기에 오른편 골대를 선택했다.

“와아아아-!”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들어서자 승리를 바라는 관중들의 함성이 커다랗게 터져 나왔다.

그가 골대를 향해 빠르게 달렸다.

‘몸을 풀어. 골대 좌우도 확인하고. 애스턴 빌라에게 오늘 컨디션이 최고라는 것을 보여 줘.’

얀센은 양팔을 높이 들고 크로스바를 건드렸다. 그러고는 몇 차례 점프하며 몸을 풀었다.

주심이 휘슬을 입에 물고 좌우를 살핀 직후였다.

얀센이 힐끔 정지우가 있는 곳을 향해 시선을 주었고,

삐이이익!

바로 경기가 시작되었다.

『애스턴 빌라의 선축으로 경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애스턴 빌라의 아그본라허, 공을 밀어 줍니다. 공을 받은 산체스 모레노, 웨스트우드에게.』

『최근 애스턴 빌라는 미드필더들을 중심으로 점유율을 높이는 축구를 구사하거든요. 그 덕분에 공격 루트가 좀 더 다양해졌어요.』

『웨스트우드, 다시 공을 뒤로 돌립니다.』

레믹이 공을 가로채기 위해 뛰어나갔다가 바로 돌아왔다.

벤치에서 가능한 한 4-2-3-1의 포메이션을 유지하라는 지시가 내려온 것이 분명했다.

정지우는 레믹에게서 시선을 돌려 얀센을 바라보았다.

중앙선 부근에서 공이 움직이는 순간에 골키퍼가 멀뚱히 서 있으리라고 생각하면 커다란 오산이다.

좌우로 옮겨 다니는 공을 따라 위치를 바꿔야 하고, 상대 선수의 움직임과 동선도 파악해야 한다.

얀센은 기본에 충실한 움직임으로 경기에 집중하고 있었다.

10분 정도가 흐르는 동안 양 팀 선수들이 중앙선을 중심으로 밀고 밀리며 팽팽하게 맞섰다.

“헤이!”

오늘따라 몸이 가벼워 보이는 레믹이 자꾸 공을 달라고 손을 들었는데, 아직 결정적인 장면은 나오지 않았다.

퍼엉!

애스턴 빌라의 23번 아마비가 길게 내지른 공이 데니의 발에 맞고 터치라인 바깥으로 높다랗게 날아갔다.

『애스턴 빌라의 스로인입니다.』

『중앙선 부근에 양 팀 선수들이 빽빽하게 서 있어요. 저럴 때 단숨에 찔러 들어오는 패스를 조심해야 합니다.』

애스턴 빌라의 아마비가 달려와 사이드라인에서 공을 높다랗게 들고 주춤거렸다.

중앙선에서 유니온 시티 진영으로 살짝 넘어온 지점이어서 딱히 위험 지역은 아니었다.

슬금슬금 유니온 시티의 진영으로 움직이던 아마비가 공을 힘껏 앞으로 던졌다.

휘이익!

2명의 선수가 동시에 몸을 띄웠고,

터엉!

공은 15번 웨스트우드의 머리에 맞고 뒤로 흘렀다.

꼼빠니가 오른쪽으로 쏠려 있는 바람에 생긴 틈으로 애스턴 빌라의 카를레스가 곧바로 달려들었다.

투욱!

그리고 그는 유니온 시티의 페널티 에어리어를 향해 공을 찔러 넣었다.

“우와아- 아!”

『카를레스! 한 번의 패스로 유니온 시티의 왼쪽을 뚫어 냅니다!』

고작 세 번의 터치 만에 공이 유니온 시티의 페널티 에어리어 앞쪽까지 날아온 거였다.

『우선 나와야죠! 붙어 줘야 돼요!』

놀란 스웰던이 급하게 달려들었고, 라파엘이 공을 향해 몸을 날렸다.

정지우가 보기에 아그본라허가 분명 늦었다.

콰아악! 콰다당!

라파엘의 태클은 깔끔했다. 그래서 공이 빠져나간 다음에야 아그본라허가 쓰러졌다.

삐이이익!

뭐야?

정지우가 고개를 불쑥 내밀었을 때였다.

휘슬을 분 주심이 달려와 손으로 유니온 시티 진영을 가리켰다.

“우와아-!”

애스턴 빌라의 원정 관중석에서 기대에 찬 함성이 터져 나왔다.

『애스턴 빌라! 좋은 자리에서 파울을 얻어 냅니다.』

벌떡 일어난 라파엘이 양손을 둥그렇게 움직이며 공을 먼저 건드렸다고 어필했고,

『라파엘이 분명 공을 먼저 건드렸고, 발바닥을 든 것도 아닌 것 같은데요. 유니온 시티 입장에서는 억울할 만한 판정이네요.』

애스턴 빌라 선수들은 페널티 에어리어 안쪽이었으니까 페널티킥이 아니냐고 따졌다.

“우- 오- 아! 우- 오- 아!”

애스턴 빌라의 원정 응원단이 함성처럼 들리는 특유의 고함을 지르는 동안, 주심은 유니온 수비수들을 뒤로 밀어냈다.

『프리킥을 준비하는 애스턴 빌라.』

『저 위치라면 아그본라허, 산체스 모레노, 웨스트우드, 누구라도 킥을 할 수 있겠네요.』

‘침착해, 얀센. 평소처럼.’

얀센이 데이빗을 향해 네 손가락을 활짝 편 오른손을 치켜들었다.

4명이 벽을 쌓으란 의미였다.

레믹, 맥슨, 데니를 옆에 세운 데이빗이 뒤를 돌아보자, 얀센은 왼손 엄지를 오른쪽으로 조금씩 움직이며 수비벽의 위치를 잡았다.

그때 방송 카메라가 정지우의 모습을 화면 가득 잡았다.

푸르스름한 멍이 든 얼굴을 하고서도 정지우는 경기에 나선 것 이상으로 눈빛을 빛내고 있었다.

『방송 카메라도 정지우 선수를 그리워하는 모양입니다!』

『유니온 시티 관중들의 심정이 정지우를 그리워하지 않겠냐는 의미처럼 보이네요.』

『정지우 선수가 하는 저 손짓에 의미가 있을까요?』

『수비 위치를 조언해 주는 건가요?』

실제로 화면에는 정지우가 손바닥을 세워서 조금씩 움직이는 모습이 나왔다.

“우- 오- 아! 우- 오- 아!”

『애스턴 빌라의 프리킥! 아그본라허가 공 앞의 잔디를 밟고 있습니다!』

뒤로 물러난 아그본라허가 손으로 입을 가리고 산체스 모레노에게 무언가 말을 건넸다.

그 직후에,

삐이이익!

주심의 휘슬이 날카롭게 울었다.

와락!

가장 먼저 달려든 것은 아그본라허였다.

투욱!

슛을 날릴 것처럼 달려든 그는 공을 옆으로 밀어 주고 골대를 향해 뛰어들었다.

와락! 와라락!

카알과 라파엘이 공 앞으로 달려들었을 때,

퍼어어엉!

기다리고 있던 산체스 모레노가 완벽한 동작으로 슈팅을 날렸다.

벽을 세웠고, 라파엘과 무둔바의 위치를 정해 준 다음이었다.

얀센은 숨을 토해 내며 벤치로 시선을 돌렸다.

가족들이 지켜보고 있을 자리였다.

“내가 선발이야.”

놀란 얼굴로 다가온 아내가 그의 목을 안아 주었고, 뒤따라 뛰어온 딸이 품을 파고들었다.

프리미어리그 선발 골키퍼다.

챔피언십을 그렇게 돌고 돌아 유니온 시티가 프리미어리그 진출이 확정되었을 때 얀센은 이적을 각오했었다.

프리미어리그다.

전 세계에 많은 골키퍼가 있지만, 프리미어리그 선발 골키퍼의 자리는 고작 20개밖에 되지 않는다.

영국 리그에 진출하면서 지녔던 꿈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아내는 그 꿈을 잘 알고 있었고, 그래서 얀센만큼이나 간절하게 선발 경기에 나가기를 바랐다.

“여보! 당신은 잘해 낼 거야!”

“최선을 다할게.”

“지금까지도 최선을 다했다는 거 나는 알아. 당신은 언제나 내게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골키퍼야.”

막고 싶다.

정지우처럼 멋지게 막아 내지는 못하더라도, 그라운드를 구르고, 공에 맞아서 코뼈가 주저앉더라도, 이 경기만큼은 무실점으로 막아 내서 유니온 시티의 기록을 지켜 주고 싶다.

“우- 오- 아! 우- 오- 아!”

애스턴 빌라의 함성 속에서 정지우가 손바닥을 가로로 세우는 것이 보였다.

얀센의 위치를 왼쪽으로 옮기라는 것처럼 보였다.

왼쪽이라는 건가?

각도나 키커들로 봐서는 오른쪽을 노리는 것 같은데?

‘혹시 내가 방향을 못 잡으면 전에 기예르모를 도와줬던 것처럼 나를 도와줄 수 있나?’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 대신 내 판단이 틀렸다고 원망하지 않는다는 약속쯤은 해 줘야 해.’

정지우가 어떤 선수인지는 알고도 남는다.

계약서에 기존의 선수들과 함께 프리미어리그로 가는 조항을 넣을 정도로 미련한 선수, 돈을 더 받기보다 동료들을 지켜 내고 싶어 하는 선수다.

얀센은 정지우의 판단을 믿었다.

그래서 그가 지시하는 대로 왼쪽으로 움직였다.

고작 옆으로 작게 한 걸음? 정말 이걸 원한 거야?

얀센의 시선 속에서 정지우가 주먹을 꽉 쥐어 보였다.

30센티미터를 왼쪽으로 움직인 것이 과연 효과가 있을까?

삐이이익!

그때 주심이 휘슬을 커다랗게 불었다.

아그본라허가 달려드는 것을 본 얀센은 허리를 바싹 낮췄다.

오른쪽이다!

그는 계속해서 오른쪽으로 공이 날아올 거란 생각을 버리지 못했다.

얀센이 오른쪽을 향해 뛰려는 순간이었다.

투욱!

아그본라허가 공을 밀어 주며 골대를 향해 뛰어들었다.

‘왼쪽이구나!’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순간,

퍼어어엉!

공이 날아왔고,

화아아악!

얀센은 있는 힘껏 몸을 띄웠다.

“여보! 당신이 최고라는 거 알지?”

아침에 아내가 해 준 말이었다.

“혹시 오늘 스코어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난 당신이 당당하게 그라운드를 걸어 나왔으면 좋겠어.”

아내는 멀쩡한 얀센의 어깨를 털어 주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미소를 보여 주었다.

“내게는 미스터 얀센이 세상에서 가장 멋있고 환상적인 골키퍼라는 거, 그것만 기억해. 당신이 내 남편이라는 게 자랑스러워.”

공은 눈 깜짝할 사이에 얀센의 손 앞에 있었다.

반사 신경이 조금만 더 빠른 몸으로 태어났다면!

정지우의 반만큼이라도 동물적인 감각을 타고 태어났더라면!

얀센은 허리와 어깨를 있는 대로 비틀었다.

터어억!

그 순간 손가락에 공이 걸렸다.

손가락이 뒤로 거의 뒤집혔는데도 공에 담긴 힘은 빠지지 않았다.

‘이이익!’

털썩!

얀센이 그라운드에 떨어져 고개를 드는 순간이었다.

“이예에에에에-!”

정신이 아득할 정도의 함성이 귀를 파고들었고, 그다음에야 골대 바깥을 굴러가는 공이 보였다.

『슈퍼세이브! 얀센!』

『이건! 유니온 시티는 골키퍼들이 만들어 낸 승점만 가지고도 중위권에 들겠는데요?』

“오- 오오! 오- 오오!”

이번엔 유니온 시티의 홈 관중들이 제자리에서 뛰며 엄청난 함성을 질러 주고 있었다.

“괴물이 또 한 명 추가됐는데!”

라파엘과 무둔바, 카알이 달려와서 얀센과 손바닥을 마주쳤고,

타악!

스웰던이 아플 정도로 뒤통수를 때리고 앞쪽으로 달려갔다.

막았다! 막아 낸 거다!

전 같으면 분명 놓쳤을 것 같은 엄청난 슈팅을 말이다.

“무둔바!”

얀센은 오른쪽에 있는 무둔바에게 골키퍼 에어리어 앞쪽을 부탁했다.

“Jun! 헤이! Jun!”

그리고 신준석에게는 반대편 코너에서 서성대는 싱클레어를 가리켰다.

얀센이 양손 손가락을 마주 끼우고 자세를 잡은 다음이었다.

삐이이익!

주심이 휘슬을 불었고,

퍼어어어엉!

카를레스가 코너에서 달려들어 빠르고 강하게 공을 날렸다.

와락!

얀센이 공이 날아오는 방향으로 달려 나갔다.

‘급해!’

정지우는 날카롭게 눈빛을 빛내며 골대를 바라보았다.

수비수들과 공격수들이 뒤엉켜 솟구친 곳을 향해 얀센이 높다랗게 뛰어오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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